추운 겨울이 지나고 운동장가 여기저기 풀꽃들이 참 많이도 피어납니다. 땅바닥이 파릇파릇해서 가만히 쭈그려 앉아 들여다보면 모든 풀들이 다 꽃을 피워냅니다. 교실 처마밑에 피어 있는 코딱지같은 작은 봄맞이꽃이며 광대살이꽃이며, 참말로 예쁜 시루나물꽃이며, 봄꽃 들은 모두 작아서 더 눈부십니다. 꽁꽁 언 작은 몸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서겠지요. 곧 산에 언덕에 피어날 진달래꽃이며 산벚꽃이며 산복숭아꽃을 생각하며 나는 설렙니다.
피어나는 꽃들 앞에 서서 나는 당신을 생각한답니다. 어디를 가다가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들을 보면 나는 늘 당신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 저 꽃을 당신이랑 보면 더 아름다울텐데. 야, 이 맛있는 음식을 당신이랑 꼭 한번 와서 먹어야지 하는 생각들이 앞서곤 한답니다. 시를 읽다가도 좋은 구절이 나오면 나는 늘 당신에게 먼저 시를 보여주곤 했지요.
내 삶의 제일 앞에 서 있는 당신.
실날 같은 봄비가 곱게도 내린 그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게 쓴 시를 전화로 읽어주었지요.
어제는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 하나 없는,
내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가볍고 하얀 맨발로
하루 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그대 맨살같이 고운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그날 집에 갔을 때 당신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가,
저녁밥을 먹은 후에야 그 글을 듣고 나서 엉엉 울었다며 또 고개 숙여 울었지요.
그리고 이틀 후에 나는 놀랍게도 당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께
당신이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게
오늘 더 행복합니다
나도 어제, 내리는 봄비를 보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늘 당신의 눈길이 머무는 강이며, 운동장이며, 풀꽃들이며
몇 안 되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저녁에 돌아와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
따뜻한 숙직실에 초이, 소희, 창우, 다희, 귀봉이 순서로
나란히 이불 속에 뉘어 한숨 재웠다는 당신,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당신의 노래보다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걸 나는 압니다
오월이 오면 우리 만난 지 십오년이 됩니다
십오년을 하루처럼 내게 다정한 당신이지만
오늘 당신이 내게 불러준 사랑 노래는
이 봄,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당신이 나를 너무도 소중하게 여겨
나는 이 세상에 귀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당신의 아내
어느 날 내가 왜 나랑 살기로 했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간단하게 말했지요.
"그냥"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냥 좋은 게 사랑이지요.
늘 그렇습니다만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현실입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라기보다도 사람으로 늘 좋아하고 믿고 존경하고 사랑한답니다.
당신이 어느 날 내게 말했지요.
존경하지 안흔 사람하고 어떻게 사냐고요.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면 다 당신의 덕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정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저 풀꽃 앞과 뒤에 서 있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