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진실로 술작(述作)이 온전히 갖추어져 각기 일가의 말을 이룬다면 비록 성재(誠齋)와 동산(東山) 부자처럼 대대로 미덕을 이루고 신여(神與)와 중묵(仲默)처럼 조손(祖孫)이 아름다운 명성을 전하는 것도 일세에 일편이면 가하다.
혹시 이목에 증거가 없이 조각만 겨우 전해지고, 서책으로 출판할 겨를이 없고 편장이 풍부하지 않으면, 세고(世稿)로 엮어진 책이 왕왕 근세에 사족(士族)의 집안에서 나와 족히 조상을 사모하는 정을 펴고 가르침을 받드는 의리를 잃지 않은 것도 참으로 귀한 일이다.
최씨로 전주를 관향으로 하는 자는 고려조에 대를 이었으니 이것은 논할 것 없다. 소윤공(少尹公)은 우리 영릉(英陵 세종)의 태평시대를 만나 네 분의 석덕이 나란히 유아(儒雅)한 선비로 진출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문채가 후세에 대략 나타나지 못하였다.
4세를 지나 덕촌공(德村公)에 이르러 무관으로 벼슬하였다. 반정원(班定遠)이 어찌 문재(文才)가 부족한 강관(絳灌)과 같았겠는가. 선비는 각기 뜻이 있는 것이다. 몇 수의 근체시가 집에 전해진다. 다시 4세 뒤에 대국헌(對菊軒)이 났고, 또 1세 뒤에 원모(遠慕)와 농은(農隱)이 났다. 혹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크게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고, 혹은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즐겨 나서지 않았고, 혹은 등과(登科)하였으나 낮은 관직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그 유묵은 다수 기술할 만하니 이 책을 한번 펼쳐 보면 최씨 세대의 미덕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세고를 존경하는 바는 대개 언어와 문자의 밖에 있으니 옛말에 “그 사람을 알지 못하겠거든 그 벗을 보라.”라고 하였다. 벗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스승이라면 더욱 알 만하다.
덕촌공이 의지처로 했던 사람은 누구이며 대국공이 교유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농은공이 훌륭한 인재가 사라진 것에 대하여 애통해 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를 보건대 족히 최씨 제공을 알 수가 있다. 본령(本領)이 정당하면 공업(功業)도 차례로 따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북문(北門)의 뛰어난 공적이 족히 덕촌공의 경중(輕重)이 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난대(蘭臺)나 동관(東觀)의 일은 이 책의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상세히 기술하지 않는다. 나에게 서문을 부탁한 사람은 최씨 사문 용성(龍性)과 영학(永鶴) 씨이다. 임술년(1862, 철종13) 10월에 쓰다.
[ 註解]
[주01] 술작(述作) : 술은 전승(傳承)한다는 뜻이고, 작은 창신(創新)한다는 말이다. 《禮記 樂記》
[주02] 성재(誠齋)와 동산(東山) : 양만리(楊萬里, 1127~1206)와 양장유(楊長孺) 부자를 말한다. 성재는 양만리의 호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 스스로 성재체(誠齋體)를 이루었고, 우부(尤袤), 범성대(范成大), 육유(陸游)와 함께 남송사대가로 불린다. 동산은 양장
유의 호이다. 복건안무사(福建安撫使)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주03] 대대로 미덕을 이루고 : 원문의 ‘제미(濟美)’는 이전의 기초 위에 아름다운 것을 발양하여 크게 빛낸다는 말로, 후세가 앞 세대의 아
름다움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주04] 신여(神與)와 중묵(仲默) : 송(宋)나라 채발(蔡發, 1089~1152)과 그의 손자 채침(蔡沈, 1167~1230)이다. 신여는 채발의 자이
고, 중묵은 채침의 자이다.
[주05] 가르침을 받드는 의리 : 원문의 ‘회간지의(懷簡之義)’는 선친의 유지를 잘 받듦을 이르는 말이다. 조 간자(趙簡子)가 두 아들에
게 훈계의 말을 쪽지에 적어 주고 잘 기억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3년 뒤에 물어 보니 형인 백로(伯魯)는 대답을 못하였는데 아우인
무휼(無恤)은 그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쪽지를 꺼내라고 하자 즉시 품속에서 꺼내어 아버지께 올렸다는 고사가 있다. 《十八史略
春秋戰國 趙》
[주06] 덕촌공(德村公) : 최희정(崔希汀)으로,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지(汀之), 호는 덕촌이다. 직제학 담(霮)
의 후손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병조 참판에 증직되고, 고부(古阜)의 서산사(書山祠)에 제향 되었다.
[주07] 반정원(班定遠) : 동한(東漢)의 반초(班超, 33~102)를 말한다. 서역에서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는데 이후 반정원(班
定遠)이라 칭해졌다. 반초는 집이 가난하여 오랫동안 관청(官廳)에서 글을 써서 생활을 영위하다가, 한 번은 붓을 던지면서 탄식하
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으면 의당 이역에 나가 공을 세워서 봉후(封侯)라도 취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서역(西域)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정원후에 봉해졌다. 《後漢書 班超傳》
[주08] 강관(絳灌) : 한 고조(漢高祖) 때의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병칭이다. 한 고조의 천하 평정을 도와
공을 세워 왕에 봉해졌다. 두 사람은 포의(布衣)로 일어나서 비박(鄙朴)하고 문재(文才)가 없었다한다.
[주09] 북문(北門)의 …… 못하는데 : 북문은 우리나라의 북쪽 관문인 함경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덕촌공이 종성판관으로 여진족을 토벌한
공을 세웠는데, 그 공으로 품계가 올랐고 조정에서 민전(民田)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주10] 난대(蘭臺)나 동관(東觀) : 난대는 한대(漢代) 궁중의 장서실 또는 당대(唐代)의 비서성(秘書省)을 이른다. 후한(後漢)의 반고(班
固)가 난대영사(蘭臺令史)로 있을 때 광무본기(光武本紀)를 지은 데에서 사관을 이르는 말로도 썼다. 동관은 후한(後漢) 때 낙양
의 남궁(南宮)에 있던 누각 이름이다.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곳의 별칭으로 쓰였고, 궁중의 서고를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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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全州崔氏世稿序
苟述作全備。各成一家言者。雖誠齋,東山父子濟美。神與,仲默祖孫傳芳。一世一編可也。其或耳目無徵而零隻僅傳。鉛槧不遑而篇章未富。則世稿之編。𨓏𨓏出於近世士族之家。足伸見墻之慕。不失懷簡之義。可貴哉。崔氏貫全州者。勝朝奕葉。姑無論已。少尹公値我英陵盛際。四碩聯枝。幷以儒雅進。惜其文彩不槩見於後。四世而至德村公。則通籍乃以韎韋。班定遠豈少文絳灌耶。士各有志焉。有幾首近體傳於家。又四世而對菊軒。又一世而遠慕農隱。或上庠而未大闡。或筮仕而不屑就。或登科而沉庶僚。然其遺墨斑斑可述。一開此卷。而崔氏世美盡在矣。抑吾之所敬於此稿者。蓋有在於言語文字之外。古語有云不知其人。見其友。友猶云爾。則師又可知也。德村公之所依歸者何人。對菊公之所交遊者何人。農隱公之所痛惜於殄瘁者又何人。觀於此。足以知崔氏諸公矣。本領正當則功業乃次第事。然則北門壯勣。不足爲德村公輕重。况蘭臺東觀之事。非此卷之第一義。故此不詳述云。命余以序者。崔氏斯文龍性永鶴氏。壬戌陽月。<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