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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丁克仁)
1401년(태종 1) - 1481년(성종 12)
조선전기의 문인, 학자인 정극인(丁克仁,1401~1481)으로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 다각(茶角)이다. 전북 태인(泰仁) 출생으로 1429년(세종 11) 생원에 합격하고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했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작품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고 문집으로 불우헌집(不憂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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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9권 / 묘갈명(墓碣銘)
조산대부 사간원 헌납으로 치사한 정공의 묘갈명 서문을 아우르다[朝散大夫司諫院獻納致仕丁公墓碣銘 幷序]
세종(世宗) 19년(1437)에 흥천사(興天寺)를 중건(重建)하여 금군(禁軍)으로 하여금 절문을 엄히 지키게 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차단시키고, 내탕고(內帑庫)의 금은(金銀)과 주옥(珠玉)을 내어 가사(袈裟)를 지어서 하사함이 매우 많았다. 이 때 요승이 주지가 되어 방자한 행동이 거리낌이 없었다.
위로는 귀척(貴戚)으로부터 아래로는 여항에 이르기까지 제자라고 일컫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며, 한 해 동안에 삭발하고 승려가 된 자가 수만 명이었다. 무령(武靈) 정공(丁公)이 태학(太學)에 있었는데, 이에 유생들을 거느리고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불교의 폐해는 참으로 한 부분만이 아니며 그 가르침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반드시 그들을 물리친 후에야 인의(仁義)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나는 인심(人心)을 바로잡아 사설(邪說)을 종식시키고자 한다.’ 했습니다.
진실로 인심이 바루어지면 이륜(彛倫)이 펴지고 천하가 다스려지지만, 사설이 흥하면 이륜이 패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집니다. 불교의 도가 세상에서 크게 행하니 비록 요순(堯舜)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임금은 만백성의 표상이요, 서울은 사방의 근본입니다.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만백성이 사모하고 서울에서 숭상하는 바를 사방에서 본받으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어져서 기근이 날로 심해지는데, 전하께서 흥천사를 중창하시니 그 비용은 반드시 장차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쥐어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 경대부가 간할 것 같으면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이 창건하신 것이기 때문에 차마 그 무너짐을 좌시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승도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현혹시키며 대도(大道)에서 법회를 설하여 귀천을 막론하고 휩쓸려 따르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국조(國祖)이신 강헌왕(康獻王 태조(太祖))께서 승도를 엄히 금하였고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사찰을 혁거(革去)하시되 열에 한둘을 남겨 두었으니, 그 이단을 물리친 것은 지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두 성인의 왕통을 계승하시어 사문(沙門)을 폐하고 승려로 하여금 성시(城市)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승려들이 모두 자취를 거두고 머리를 움츠려 감히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밝으신 성인의 시대에 이단이 다시 일어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한 금과 은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 금은의 공납(貢納)을 면하기를 청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 상국(上國)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장차 전하께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한나라 이래로부터 부처를 섬기는 자는 이미 많았으나 여래(如來)의 힘으로 나라를 장구하게 존속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초왕(楚王) 영(英)이 불교를 신봉했으나 끝내는 사형을 당하였고 양 무제(梁武帝)가 불교를 받들었으나 대성(臺城)의 기아를 면하지 못했으니, 불교는 나라에 이로움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부디 원하옵나니 전하께서는 해당 관청에 영을 내리시어, 주지 한 승려의 머리를 베어 삿된 망녕의 근원을 영원히 끊어버린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공이 제생과 더불어 약속하고 권당(捲堂)을 하자, 왕이 불러서 보고 관(館)을 비운 것을 꾸짖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불교를 숭상하시니 유생들은 돌아가서 중이 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소(疏)를 올려 극력 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왕이 진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영의정 황 익성공(黃翼成公)이 왕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간쟁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정생(丁生)을 죽이신다면 사책(史冊)에서 무엇이라고 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깨달아 중지하고 북방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안 되어 사면하였고, 요승을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이교(異敎)가 비로소 깨끗이 제거되었으니, 공의 공로인 것이다.
공의 휘는 극인(克仁)이고, 자는 가택(可宅)이며, 호는 불우헌(不憂軒)으로, 영광(靈光) 사람이다. 증조 휘 찬(贊)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고 조부 휘 광기(光起)는 판전농사사(判典農司事)를 지냈으며, 부친 휘 곤(坤)은 젊어서 진사에 합격하였다. 모친 안씨(安氏)는 개성 소윤(開城少尹) 휘 정(挺)의 딸이다.
선덕(宣德) 4년(1429)에 공이 진사가 되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였는데 여러 군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시골로 퇴거하여서는 힘써 농사를 지으며,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었다. 공순왕(恭順王 문종(文宗)) 때 일민(逸民)으로 천거되어 임금이 불러서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을 제수하였다.
공의(恭懿 단종(端宗)) 원년(145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교수(全州敎授)에 보임되었고, 10년 지나 성균관으로 옮겼다. 양도(襄悼 예종(睿宗)) 원년(1469)에 특별히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가 정언으로 개임되었다. 강정(康靖 성종(成宗)) 원년(1470)에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이 예조 판서 이승소(李承召)에게 명하여 도성문 밖에 장막을 치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전송하게 하였다. 왕이 유시하기를, “내가 듣건대 그대는 청렴강직하고 지조(志操)를 지키며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고,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그러나 연로하여 일을 맡기에는 어려우므로 특별히 3품 산관(散官)을 가자하노라.” 하고, 또 본도(本道)에 영을 내려 음식물을 하사하게 하였다. 신묘 8월 16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81년이었다. 필수(泌水) 남쪽 죽동(竹洞)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부인 구고 임씨(九臯林氏)는 이성 현감(尼城縣監) 은(殷)의 딸로 아들 2명이 있었으니 장남 삼준(三俊)은 생원이었고, 차남 칠현(七賢)은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지냈다. 딸은 5명으로 장녀는 조보영(趙甫榮)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노이현(盧以顯)에게, 3녀는 유길회(柳吉淮)에게, 4녀는 김윤손(金潤孫)에게, 5녀는 직장(直長) 김화우(金和雨)에게 시집갔다.
처음 공의 묘에는 갈석(碣石)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벗겨지고 떨어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금년 4월에 공의 후손인 생원 효목(孝穆)이 그 아들을 시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내가 이미 공의 아름다운 덕을 사모하였고 또한 선조 익성공(翼成公)이 힘써 간한 의리에 감동하여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정공께서는 / 於戱丁公
곧은 말로 불교를 비판하다 / 危言觝佛
북방으로 귀양을 가셨으니 / 遂投北方
명성이 사방에 자자하였도다 / 令名四溢
바르디 바르시고 / 殖殖其正
엄하디 엄하셨네 / 斬斬其嚴
우리에게 큰 길을 넓혀 주셨으니 / 弘我周行
길이길이 광명이 있으리로다 / 永有光爓
<끝>
[註解]
[주01] 정공 : 조선 전기의 문인ㆍ학자인 정극인(丁克仁, 1401~1481)으로,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다각(茶角)이다. 전북 태인(泰仁) 출생으로, 1429년 생원에 합격하고 1453년 문과에 급제했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 〈상춘곡(賞春曲)〉을 지었
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고, 문집에 《불우헌집》이 있다.
[주02] 흥천사(興天寺) : 태조가 계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願刹)이다. 원래 서울의 정동에 있었던 신덕왕후(神德王
后)의 능인 정릉(貞陵) 부근에 170여 칸의 대사찰을 1398년에 완공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서 세종 17년(1435)에 사리각을 중수하
였고, 1437년에 왕명으로 이 절을 중수하였으며, 1440년 9월에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세종 23년(1441) 3월에 이 절의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하였다. 《세종실록》 19년 7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왕이 교서하기를, “태조가 세운 흥천사와 흥덕사(興德寺)를 수리하는 것을 영구히 법식으로 하고, 이 두 절 안에는 모든 도
감의 각색과 각 관청에서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하였고, 동월 27일에 “승려들을 시켜서 흥덕사와 흥천사 두 절을 수리하
게 하고, 관가에서 먹을 식량을 주게 하였다.” 하였다.
[주03] 내탕고(內帑庫) : 조선 시대, 임금의 사재(私財)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이곳의 재물을 가지고 나라에 천재지변이나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하고, 관료들에게 특별포상을 실시하기도 했다.
[주04] 요승이 주지가 되어 : 천태승 행호(行乎)를 가리킨다. 본관은 해주(海州), 속성은 최(崔)씨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고, 효령대군
(孝寧大君)의 귀의를 받아 궁중에 불교를 보급했다. 태종이 세운 치악산(雉岳山) 각림사(覺林寺)의 낙성식을 주재하고 장령산(長
嶺山) 대자암(大慈庵)의 주지가 되었다.
세종 즉위 초에 천태종의 영수인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가 되었으나, 유생들의 큰 반발을 받아 지리산으로 들어가 금대사(金臺
寺)ㆍ안국사(安國寺)를 중수했고, 천관산(天冠山)의 수정사(修淨寺)와 강진(康津)의 백련사(白蓮寺)를 중수했다. 세종 29년
(1447) 무렵 제주도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련사에 사적비가 있다.
[주05] 무령(武靈) 정공(丁公) : 정극인을 말한다. 무령은 정극인의 본관인 전라남도 영광(靈光)의 옛 이름이다.
[주06] 나는 …… 한다 : 《맹자》 〈등문공 하〉 제9장에서, “내가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학설을 종식시키며, 편벽된 행실을 막으며,
음탕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려고 하는 것이니,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이다. 능히 양자와 묵자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
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세 성인은 우(禹)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를 말한다.
[주07] 근래에 …… 심해지는데 : 《세종실록》 17년(1435) 5월에 선교(禪敎)의 승도를 모아 흥천사에서 비오기를 빌었으며, 6월에는 가
뭄을 당하여 비용을 덜기 위해 흥천사의 공사를 중단시켰다. 21년(1439) 4월 19일 기사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의 상
소문이 실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천재가 잇따라 일어나고 기근이 겹쳐 들어 백성들이 원망하며 풍속이 어지러워진 상황을 말하고,
흥천사의 공사와 안거회를 폐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08] 경대부가 …… 하십니다 : 《세종실록》 18년 6월의 기사에는 흥천사의 수리 및 불교 신봉에 대하여 대신들의 반대가 잇따르고 있
다. 10일에는 흥천사의 탑전(塔殿) 수리에 대하여 집현전 부제학 안지(安支) 등이 반대하여 상서하였고, 18일에는 사헌부 대사헌
이숙치(李叔畤) 등이 시국의 폐단으로서 불교를 들어 상서하였다.
윤6월에는 사헌부에서 선교양종을 일종(一宗)으로 하여 성 밖으로 내쫒을 것 등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흥천사는 태조께서 창건하
신 것이므로 훼철(毁撤)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종 19년에 중수 공사를 시작한 이후로도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신하들의 상소
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주09] 금과 …… 되었습니다 : 선초의 문신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춘정집(春亭集)》 제9권에는 〈금은의 조공을 면제해 줄 것
을 요청하는 표[請免金銀表]〉와 〈금은의 조공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請免金銀箋]〉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우리나라는
토질이 척박하여 금은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금은의 조공을 면제하는 대신 토산물을 바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세종실록》 11년(1429) 7월 18일 기사에는, 좌의정 황희(黃喜)ㆍ우의정 맹사성(孟思誠)ㆍ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ㆍ허
조(許稠) 등의 대신들이 흥덕사에 모여 명나라 조정에 대하여 금은 세공(歲貢)의 면제를 청하는 일을 의논하였다고 하였다. 이후에
은은 조공 면제를 받았다.
[주10] 상국(上國) : 명나라를 말한다.
[주11] 초왕(楚王) 영(英) : 유영(劉英)으로, 후한(後漢) 광무제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초왕에 봉해졌다. 명제(明帝)의 아우로서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는데, 연광(燕廣)이란 자가 투서하기를, 초왕 유영이 왕평(王平)ㆍ안충(顔忠) 등과 함께 불교를 신봉한다는 명
목으로 도서(圖書)를 조작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하였다.
명제는 유영의 봉작(封爵)을 박탈하고 단양(丹陽)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유영은 단양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명제는 이 사건을 혹독
하게 다스려 수천 명이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옥사가 만들어졌다. 《後漢書 卷42 楚王英列傳》
[주12] 대성(臺城)의 기아 : 양(梁)나라의 무제가 처음에는 유학을 중히 여겼으나 뒤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대성 안에 동태사(同泰寺)를 짓
고 대불각(大佛閣) 7층을 만들어 이곳에서 세 번이나 사신(捨身)을 하였으며, 모든 제사에 희생(犧牲)을 없애고 밀가루로 빚어 대
신하게 하였다. 후에 후경(後景)이 반란을 일으켜 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그곳에서 굶어 죽었다. 대성(臺城)은 남북조 시대
천자의 어소(御所)를 말한다.
[주13] 불교의 …… 것입니다 : 이 상소문은 《불우헌집》 제2권에 실려 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상소문이 《세종실록》 21년(1439) 4월
18일 기사에는 성균 생원 이영산(李永山) 등 648명이 상소한 것으로 되어있다.
[주14] 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 방법으로서 일종의 동맹휴학이다. 종을 쳐도 식당에 가지 않는 식사거부에서부터, 수업을 거부
하거나 다 같이 관(館)을 나가버리는 행위까지 하였다.
[주15] 영의정 황 익성공(黃翼成公) : 여말선초의 문신인 황희(黃喜, 1363~1452)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
村)이며, 초명은 수로(壽老),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개성(開城) 출생으로 1389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성계의 간청으로 관직에 나와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겨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이 있
다.
[주16]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 고려 시대, 밀직사(密直司)에 속한 종2품 벼슬이다. 밀직사는 고려 시대에 왕명의 출납과 궁궐 호위, 군
사관계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주17] 판전농사사(判典農司事) : 전농사(典農司)의 으뜸벼슬이다. 전농사는 고려 말기에 나라의 제사에 쓸 곡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주18] 선덕(宣德) : 명나라 제5대 선종(宣宗)의 연호로 기간은 1426~1435년이다.
[주19] 일민(逸民) : 학문과 덕행이 있으나 세상에 나와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를 말한다.
[주20]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 : 광흥창(廣興倉)은 고려, 조선 시대에 관리들의 녹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부승(副丞)은 정
8품 관직이다.
[주21] 산관(散官) :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로서, 품계만 있고 직무는 없다.
[주22] 필수(泌水) : 정극인이 물러나 살았던 전라북도 태인(泰仁)의 집 불우헌(不憂軒) 앞에 흐르는 냇물이다.
[주23] 갈석(碣石) : 갈(碣)은 묘 앞에 세우는, 덮개 없는 돌을 말한다. 덮개 돌이 있는 것은 비(碑)라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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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朝散大夫司諫院獻納致仕丁公墓碣銘 幷序
莊憲王十有九年。建興天寺。令禁軍嚴守寺門。絶人往還。出內帑金銀珠玉。造袈裟。宣賜甚多。是時。妖僧爲住持。恣行無忌。上自貴戚。下至閭巷。稱弟子。猶恐不及。一歲中。削髮爲僧者。數萬人。武靈丁公在太學。乃率諸生上疏曰。佛氏之害。固非一端。而其敎無父無君。必闢之而後。仁義可興也。孟子曰。我欲正人心息邪說。誠以人心正。則彝倫序而天下治。邪說興。則彝倫斁而天下亂。佛氏之道。大行于世。雖堯舜復起。其將誰與治國家乎。夫人主。萬民之表。京師。四方之本也。人主所好。萬民慕之。京師所尙。四方效之。可不懼哉。近者水旱相因。饑饉日甚。而殿下創興天寺。供億之費。必將浚民之膏血。于斯時也。卿大夫如有諫者。則殿下敎以祖宗所創。不忍坐視其毁也。故僧徒誑惑愚民。大道之中。設梵會。無貴無賤。靡然從風。誰得以遏之乎。恭惟國祖康獻王。嚴禁僧徒。恭定王革去寺刹。什存一二。其所以闢異端者。可謂至矣。今殿下承二聖之統。廢沙門。令僧無得入城市。故僧皆斂跡縮首。莫敢肆行。又孰知明聖之世。異端復興也。且金銀。本非國中之所常有也。故王朝請免金銀之貢已久矣。若使上國。聞此事。則將謂殿下何如也。自漢以來。事佛者。盖已衆矣。未聞以如來之力。享國長久也。楚英信佛。而終致大辟之誅。梁武事佛。而不免臺城之餓。則佛氏無益於國。亦可知也。伏願殿下令攸司。斷住持一僧之首。永絶邪妄之根。國家幸甚。王不從。公與諸生。約捲堂。王召見。詰其空館。公對曰。殿下崇佛。諸生欲歸而爲僧耳。又抗疏極諫不止。王震怒。欲致之死。領議政黃翼成公。牽王之裾爭之曰。殿下若殺丁生。則史冊何以書之。王大悟止。竄北方。尋赦之。乃流妖僧于濟州。由是。異敎始廓淸。公之功也。公諱克仁。字可宅。號不憂軒。靈光人也。曾祖諱贊。知密直司事。祖諱光起。判典農司事。考諱坤。少擧進士。妣安氏。開城少尹挺之女也。宜德四年。公成進士。游大學。爲諸君子所推重。及退居丘園之中。力耕耘。樂而忘憂。恭順王時。擧逸民。召拜廣興倉副丞。恭懿元年。中文科。補全州敎授。旣十年。調成均館。襄悼元年。特拜司諫院獻納。改正言。康靖元年。致仕歸故鄕。王命禮曹判書李承召。供帳祖道都門外以送之。王下諭曰。予聞爾廉介自守。不求聞達。聚子弟。敎誨不倦。予甚嘉之。然年老難於任事。故特加三品散官。又令本道賜食物。辛巳八月十六日。以病。卒于家。享年八十一。葬于泌水之陽竹洞之原。公娶九臯林氏。尼城縣監殷女。有子二人。長三俊。生員。次七賢。司饔院正。女五人。長適趙甫榮。次適盧以顯。次適柳吉淮。次適金潤孫。次適金和雨。直長。始公之墓。有碣石。年久剝落。不可考。今年四月。公後孫生員孝穆。使其子。請銘于余。余旣慕公之德美。又感先祖翼成公力爭之義。乃爲之銘。銘曰。
於戱丁公。危言觝佛。遂投北方。令名四溢。殖殖其正。斬斬其嚴。弘我周行。永有光爓。<끝>
ⓒ한국문집총간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