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객사 중수기
허백정 홍귀달(虛白亭 洪貴達) 지음.
대체로 산이 높고 험하며 물이 깊고 넓으면, 그 사이에 있는 고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누대(樓臺)와 널따란 관우(館宇)가 있어야 어울리는 것이며, 땅이 광대하며 사람과 물화(物貨)가 번화하면, 그 고을에 관리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백성을 지도하는 아량과 백성을 너그러이 용납 하는 어짊이 있어야 좋다고 할 것이다.
내가 전에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 이른바 일선(一善)의 뛰어난 경치를 보았다. 낙동강에는 여차(餘次)나루가 있는데, 곧 이매연(鯉埋淵)의 하류다.
거기에 월파정(月波亭)이 있는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선생이 기문(記文)을 지어서, 그 글씨가 지금까지도 벽에 걸려있다. 고을에 우뚝한 산으로는 금오산(金烏山)이 있으니, 고려의 절개 있는 선비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은둔한 곳이요, 또한 태조산(太祖山)은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 할 때에 제왕(帝王)의 수레 멈춘 곳이다.
어찌 평범한 산수가 그저 높고 깊기만 한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넓고 웅장하며,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어 사방의 손님을 받아들이어, 노래와 춤추는 자를 모아놓고 문물을 간직한 뒤에 라야, 산수의 훌륭한 구경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고을본부에 남관(南館)과 북관(北館)이 있는데 북관은 좁고 누추하다. 오직 남관이 넓고 시원하므로 그 고장에 가는 이는 모두 남관에 들리려 하고 북관에는 가지 않는다. 혹 사신들이 겹쳐서 한꺼번에 왔을 때, 지위가 같고 높은 것이 같다면 접대하기에 참으로 힘이 든다. 하물며, 바다를 건너온 사신(使臣)이 끊임없는데 여기가 그 오고가는 요충지임이라. 어찌 새로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던 터에, 홍치(弘治) 5년에 송(宋)공이 부사(府使)가 되었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이야말로 적임이다. 공(公)의 어짊은 그 백성들에게 혜택을 내림에 족할 것이요, 그 도량은 백성을 용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고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누대(樓臺), 넓은 관우(館宇)가 있어야
이만하면 이 고을의 어른이 되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할 것인가.’ 하였는데, 과연 다스린 지가 3년에 치도(治道)가 잘 되어 사람들은 화목하고, 병폐는 개혁되고 이(利)는 일어나, 관청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아도 백성들에게는 남은 힘이 있게 되었으므로 이에 여러 향(鄕)의 부로(父老) 및 아전들에게 묻기를, ‘북관을 새로 짓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모두 ‘좋습니다. 이것은 온 고을사람의 마음입니다.’ 하였다.
이에 그 옛터를 넓히고 그 규모는 크고 새롭게 하여, 무릇 집 짓는 구조와 위치 등을 모두 마음속에서 계획하여,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는 일에 모두 노는 사람들을 썼으며, 술과 음식은 관청의 비용으로 대었으므로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서 한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약간의 방이 있는데, 단청도 이미 끝났으므로 공(公)이 글월을 서울로 보내어 나에게 말하기를, ‘일이 있으면 해를 기록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니, 원컨대 공의 붓을 얻어 연월을 기록 하 고자 합니다.’ 하였다.
술과 음식은 관청이 부담(負擔), 백성에게 거두거나 괴롭히지 않고
살펴보건대 일선(一善)은 본래 신라의 군(郡)이었는데, 주(州)로 승격 되었다가 다시 군(郡)으로 되고, 또 다시 현(縣)으로 강등되는 등 무릇 4∼5차례 바뀌었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태종 공정대왕(恭定大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그 동안에 연대가 얼마쯤인지, 전후에 온 고을을 맡아 인(印)을 쥐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크게 일으킨 업적은 반드시 공(公)에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물건의 잘되고[修]못되는 것[廢]은 운수인가,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내가 공(公)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덕(德)이 높은 치도(治道)를 한 것을 알고 있다.
상주(尙州)와 선주(善州)는 이웃고을이다. 선주사람들은 공(公)의 은택을 입고 있는 상주 백성들을 익히 보았는지라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 아마도 그 사람을 기다려야 되는 모양이다. 남의 장점을 즐겨 말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래서 이를 기록한다. 송후(宋侯)의 이름은 요년(遙年)이요, 은진(恩津)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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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善山客舍重修記
虛白亭 洪貴達
夫山之高峻。水之深廣。而邑于其間者。必有樓臺之勝。館字之敞。然後稱也。土地之廣大。人物之繁華。而吏于其邑者。必有畜象之量。寬民之仁。然後謂之宜。余嘗浮于洛。從流而下。見所謂一善之勝 。水有餘次。津卽鯉魚。淵之下流。又有月波亭云者。陽村先生之所記也。其遺墨至今在壁間。山有金鳥。乃高麗節士吉再之所棲遯也。又有云太祖山者。麗祖征百濟時駐 之所也。豈比夫凡山水之但高深而已者哉。宜有宏壯巨麗之構。有以受四方之賓客。貯歌舞。藏文物。然後爲不孤山水之勝賞者矣。府有南,北館。北館隘以陋。唯南館頗關豁。故人之之焉者。皆欲南而不於北。其或使命沓至。位鈞而尊敵。則館待之實難。況航海客使之聯絡。此其往來之衝乎。而無有作而新之者。余未嘗不慨然也。弘治五年。宋侯出而爲府使。君子曰。是所謂稱也。侯之仁足以澤其民。其量足以容其象。持是而爲邑長於斯。夫何事之不濟。旣三年。政通人和。病革利興。見官府無所事事。而民有餘力。則乃詢諸鄕之父老及其吏卒曰。新北館何如。咸曰。 。是邑人之心也。乃廓其舊址。增其新規。凡堂構位置。皆由心匠。鳩村陶瓦。皆役游手。酒食供給。皆用官儲。不浚民。不勞民。不期月而功成。摠若干楹。旣舟畢。侯馳書抵京師。謂余曰。事而紀年。古也。願得公之筆記歲月。按一善本新羅之郡。後陞爲州。復爲郡。又降爲縣。凡四五轉。而入本朝。我太宗恭定大王改今名。其間年紀幾許。前後專城之印者。又不知幾人。而其興作之盛。必在於侯。不在於他。夫物之修廢。其有數歟。抑必待其人歟。吾見侯嘗牧于尙。有德政。尙與善爲隣邑。善之人。其必習見尙民沐公之休澤。佇見今日。久矣。意者其待人。夫樂道人之善。垂不朽者吾志也。故爲之記。宋侯。遙年其名。恩津人。<끝>
虛白亭文集卷之二 /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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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인 프로필]
■ 홍귀달『洪貴達, 1438년(세종 20)~1504년(연산군 10)』
조선전기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 부계(缶溪), 자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60년(세조 6)강릉별시(江陵別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64년 겸예문(兼藝文)·예문관 봉교(奉敎), 1466년 세자시강원 설서·선전관이 되었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오르고, 1469년(예종 1) 장령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직제학·동부승지를 지내고,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고, 충청도관찰사,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그 후 경주부윤(慶州府尹) · 대사성 · 중추부지사 겸 대제학·호조판서를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언(諫言)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0년(연산 6)에는 왕명으로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을 편찬하였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04년(연산 10)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당 하였다. 중종반정 후 복관되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며, 숙종 때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산도호부 고지도 점선안은 ‘객사’ 구지(舊址)
동여도(東輿圖)의 영남도(嶺南道) ⓒ이택용(2008-02-22)
▲선산객사 ㅣ 소재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