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아야 할 각자위심 야고보 1:12-15, 요 13:31-35
2008/10/30 목요기도회
시작하는 말
종교개혁자 Luther는 야고보서를 지프 레기 라고
성서에 포함돼서는 아니 되는 글이라고 했다.
야고보는 luther 와 같은 이론가가 아니라
삶을 직시하고 삶에서 진리를 찾은 분이다.
파울이 믿음으로 구권을 얻는다고 주장한 것에 대비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헛된 것이라는 것을 그는 보았다.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평화롭게 사는
저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야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삶을 직시하면서 삶의 진리를 찾은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라고.
黃金은 黑士心 이란 말도 삶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1. 오늘의 세계. . .
오늘의 세계를 보면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탐욕에 사로잡흰 CEO들에게
시장을 마음대로 요리하라고 한 결과를 보라.
욕심이 잉태하여 간곳마다 빈부격차를 조장하더니
그것이 장성하더니 사망을 낳고 말았다.
CEO 뿐이 아니다.
돈깨나 가진 자들은 다 stock market에 투자하여
치부를 하려고 했더니
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계속된 전쟁이 일어난 것도
“국익”이라는 욕심이 조성한 비극이다.
일전에 7 가지 죄목을 판결이 난
가장 오랫동안 상원의원으로 특권을 누린
Alaska의 Stevens 상원의원을 보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는 가장 실감이 나는 예다.
2. 각 가지 탐욕
“탐욕” 하면 우리는 먼저 재물에 대한 탐욕을 생각한다.
그러나 탐욕은 재물에만 국한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탐욕” 을 논할 때 제일 먼저 문제 삼는 것은
폭력 혹은 권력이다.
힘에 대한 탐욕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서부터 우리는 이것을 본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강한 군대를 이끌고
주변의 여려 족속을 물리치고 통일왕국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것을 높이 찬양해서 스스로를 성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야훼 하느님 까지를 그의 수호신으로 이용했다.
시편 2 편에 수록이 된
왕의 즉위식에 부른 시가 이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려, 그가 기름 부은 자를 거슬려
세상 왕들이 들썩거리고
왕족들을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이 명에를 벗어버리자” 한다마는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려 호통을 치시고
나기 띤 음성으로 호령하신다.
“나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이렇게 시작한 시인은
만방을 그가 세운 왕에게 주신다고 하시면서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저들을 짓 부스라“고 명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들도 모두 권력에 심취해서
형제간에 서로를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이란 하나 같이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나라와 민족을 패망으로 이끌었었다.
“명예욕”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다윗은 궁중 예언자 나단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웅으로 만들고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케 했다.
솔로몬은 자기를 가장 지혜가 있는 왕이라고 선전하게 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이 곳 저 곳에 도성들을 건축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법을 가장 밝히 아는
그리고 이를 지키는 거룩한 자라고 자처했다.
이런 탐욕 가운데 가장 구역기가 나는 것은
거룩한 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다.
탐욕 가운데 “향락욕” 역시
인류를 사로잡는 무서운 욕망이다.
이 욕망의 가장 두드러진 대표자는 솔로몬이다.
그는 주변의 공주 7 백 명을 후궁으로 앉히고
3 백 명의 미녀들을 불려드려 그를 수청 들게 했다.
이렇게 향락을 누린 그의 말년에는
나라가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패망의 길로 치달았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 치고
향락욕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가 없다.
이것을 東學의 창시자 최제우는
各自爲心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각자위심이란
우리 모두를 사로잡는 악의 뿌리라고 하면서
이 각자위심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3. 各自爲心의 뿌리를 뽑는 길
이 各自爲心의 뿌리를 뽑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특히 생존경쟁이 극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명하려고 할 때
자기 앞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각축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각축전이 극심하게 되어
수많은 떠돌이들이 허덕이고 있는 것을 본 최제우는
事人如天의 도를 설파했다.
이웃을 하늘님처럼 받들라는 것이다.
그리면 각자위심의 뿌리를 뽑을 수 있고
저주스런 상원갑을 물리치고
화평한 下元甲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섬긴다는 것이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경쟁을 일삼아온 우리들 마음속에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사랑의 샘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랑의 원천이 막혀있다.
오히려 이웃을 헛듣고 폄하한다.
이웃을 짓밟고 넘어가려고 한다.
어떻게 이 막힌 사랑의 샘구멍을 터뜨릴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사랑의 샘이 솟아오르게 할 것인가?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마가복음서 12 장 31 절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락 말씀하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말씀을 추가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몹시 중요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 사랑을 받지 못하고는
사랑할 수 가 없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의 샘이 솟는다는 것이다.
어려서 부모님들에게 건전한 사랑을 받은 자 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다.
부모님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이들이란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오래전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다
어떤 사형수가 교수대에 오르기 전에
미자막 요청으로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온 어머니를 보더니
그 사형수은 어머니의 코를 물어뜯었다는 것이다.
그렇고 하는 말이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나를 사랑해 주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오.“ 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이 말이다.
그리고 참된 사랑을 받아 봐야
삶의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따라서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릇된 사랑이란
자식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양키 야구팀에서 탈락이 된 한 야구 선수가
실망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야구공을 던지는 아들 쬰을 보자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소원을 이룩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고는 밤낮 쫀에게 정성을 드려
야구하는 기술을 배워주었다.
갑자기 자기를 돌봐주시는 아버지를 만난 쬰은
그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교
있는 노력을 다해서 야구를 하여
그 기술이 나날이 늘어갔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잘하기는 하는데. . ”하고 칭찬을 한 뒤
“그렇나. . .”하고는
채 미치지 못한 점을 꼬집곤 했다.
욕심에 의한 조건부 칭찬이다.
그리자 쬰은 아버지를 만족하게 하려고
있는 정성을 다했다.
그리다가 그가 양키 팀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조건부 칭찬만을 하신다.
하로는 Boston red socks와 대결을 했다.
경기 마지막 라운드 점수는 5 대 4 로
Boston red socks가 앞서고 있었다.
그 마당에
이 아들 쬰이 마지막 타수가 되었다
뻬스에는 만루가 되어 주자가 3 명시이나 되었다.
이 경기의 운명은 쬰에게 달렸다.
“이번에는 기어이 홈런을 쳐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지”
이런 심정을 날아오는 뽈을 걀겼더니 다행히 홈런이 되어
쬰은 신이 나서 첫째 루에서 둘째 루로 달리던 쬰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서
“아버지. 내가 해냈어!” 하고 외치자
그는 정신병 환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자기 사랑의 변형이어서
서로에게 실망만을 주게 된다.
참된 사랑이란 찾아보기 힘든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참된 사랑을 접하여
우리 속에서 참된 사랑의 샘 줄기가 터지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신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가셔서
사랑에 굶주린 자들을 껴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
그에게서 참된 사랑을 맛본 너희들은
나가서 이웃을 자기 몸 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원리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는
사깨오의 예다.
사깨오는 난쟁이다.
그래서 남에게 천대를 받았다.
아무도 그의 쓰라린 심정을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원한에 싸인 그는 세리가 되어서
그들에게서 세금을 긁어냄으로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로마를 등지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치부를 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보람도 기쁨도 없었다.
밤에 혼자 잠자리에 드는 그의 심정은
원한과 쓰라림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리던 그의 심정이
그의 집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대접하면서
완전히 변해지고 말았다.
모두가 천대하고 죄인취급을 하는 그를 찾아오시어
식탁을 같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된 그는 서서 이렇게 말했다.
산다고 해서 별로 클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당당한 새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내 재산이 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4 배나 갚겠습니다.“
참된 사랑에 접한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랑한 것처럼 자기도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사인여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맺는 말
우리도 예수님과 깊이 사귀면서
그의 사랑을 느끼고
그가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참된 사랑을 함으로
이웃의 마음에서도 사랑의 샘이 솟도록 해야 한다.
이 사랑이 누룩처럼 퍼져서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참된 기쁨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해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