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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5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움켜 쥔 것을 놓아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feat.부자청년)
본문 : 전도서 4장 6절
그러므로 두 손 가득 움켜쥐려고 애쓰고 번민하다가 결국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 같은 허망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한 손 가득한 것으로 만족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더 낫다. <쉬운말성경>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법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언뜻 생각하면 원숭이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사실 원숭이를 잡는 일은 너무 쉬운 일이라고 합니다. 먼저 원숭이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코코넛이나 야자열매의 속을 팝니다. 그리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인 바나나, 귤 등을 넣어 둡니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원숭이가 야자열매 안의 과일을 움켜쥐면, 꽹과리 같은 것을 시끄럽게 두드려 놀라게 하고 단숨에 달려가 원숭이를 잡습니다. 그 때 움켜쥔 손을 펴고, 잡은 과일을 놓아 버리고 도망치면 원숭이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일을 움켜쥔 원숭이의 십중 팔구는 움켜쥔 채로 도망가지 못해 사람들에게 잡히고 만다고 합니다.
움켜 쥔 손을 펴고 도망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굳이 ‘욕심’이라는 이름까지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움켜 쥔 손은 내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욕심이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내 제 3자가 되어보면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움켜 쥔 손 때문에 더 많고 넓고 좋은 것들을 붙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희 집 첫째는 변신로봇 장난감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그 로봇을 가지고 다니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신로봇을 들고, 또 좋아하는 피카추 돈까스 꼬치를 들면 아빠나 엄마의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구입한 자리에 서서 돈까스를 다 먹고 움직이면 상관이 없지만 걸어가야 할 때는 여간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신로봇을 내려놓자니 변신로봇을 배신하는 것 같고, 피카추 돈까스를 내려놓고 싶지는 않고 그냥 아빠나 엄마 손을 잡지 않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곧 알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말입니다. 조금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변신로봇도 피카추 돈까스도 모두 땅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제대로 걸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말씀을 붙들고 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성경책을 한 손에 들고 다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거나 다른 것을 붙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을 잡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때론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이 손보다 더 좋은 이정표는 없습니다. 망망한 대해를 표류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손은 결국 우리를 안전한 항구로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가 되면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없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 우리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평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샬롬’입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한복음 14장 27절, 새번역>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어가면서 하나님을 잡고 있는 손이 조금씩 불편해 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한 손이 세상을 붙잡게 되면서부터입니다. 한 쪽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지만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세상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있으면 세상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오지만, 세상을 붙잡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면 하나님을 잡은 손은 이내 떨어지고 맙니다. 마치 하나님은 산 같아서 아무리 세상 쪽으로 가자고 잡아 당겨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일찍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면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을 향해 가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감히 세상을 향하는 손에 힘을 풀거나 그 손을 놓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말이 쉽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손을 놓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고,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슬쩍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가 많으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시니 지금 이 손을 놓더라도 다음에 다시 와서 잡으면 다시 잡아 주실거야. 그러니 지금은 하나님의 손을 놓고 세상의 손을 잡자. 다시 오면 되는거야! 다시 분명히 기회가 올거야!’ 그리고 이 생각을 품은 이들은 곧 알게 됩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스스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새번역>
그러다 하나님을 잡은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자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과 하나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에 나와 보니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놓으면 엄청난 문제를 만날 것 같았는데 사실 별 다른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에덴동산 밖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고, 여기서의 삶도 나름대로 재미지고 행복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세상을 더 움켜쥐게 됩니다.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우리의 눈은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를 멋진 곳이라 착각하며 바라봅니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창세기 13장 10절, 새번역>
세상은 참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열매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는 진짜 ‘독립적인 인간’이 된 거 같아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자꾸만 스스로 무엇인가 놓치고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왜 영적인 존재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담고 담아도,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가지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바로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세상을 움켜쥘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욕망’과 탐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욕망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세상을 움켜쥐었다는 것은 예수께 속한 사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은 바로 ‘욕망과 탐심’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손에 움켜 쥔 것을 놓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시작점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탐심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새번역>
마가복음 10장에는 오늘 설교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을 찾아 헤매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에 이 사람을 젊은이라고 표현하고 있기에 흔히들 이 청년을 ‘부자청년’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식민지 시대였던 그 당시에 부자로 살기도 어려웠지만 청년 중에서 부자는 더욱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이면서 청년인 한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고 다시금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 10장 17절B, 새번역>
당시 사람들은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고 관심 없던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기특히 여기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질문을 좀 더 쉬운 질문으로 바꾸어주며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마가복음 10장 18절, 새번역>
그리고 이어서 십계명 중 5~10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왜 하필 1~4계명은 다 빼고, 5~10계명만 이야기하셨을까요? 분명 예수님은 그 사람을 향해 전달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0절, 새번역>
그 사람은 살인도 하지 않았고, 간음도 하지 않았고, 도둑질도 하지 않았으며, 거짓으로 증언하지 않았고, 속여서 빼앗지 않았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주변 사람으로부터도 동일한 평가를 받던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그 사람을 눈 여겨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도 대견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한 가지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은 진정한 ‘이웃 사랑’을 위해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저 지켜야 할 계명이기에 지켜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21절A, 새번역>
몇 가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만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이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 지켰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으로 부족을 이야기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십계명에 나오지 않습니다.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닌데 왜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그저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팔아 나누어주면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에 더 마음이 상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보이지도 않고,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르는 하늘의 보화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점점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라는 타이틀을 너무도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10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작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에는 반응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장 21절B, 새번역>
예수님은 이 사람을 제자의 삶으로 초청하셨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이지만 이미 닫혀버린 마음과 귀는 예수님의 이 말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오히려 점점 화가 나다가 울상으로 변해 버린 청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 22절, 새번역>
호기롭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던 사랑스런 청년의 뒷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을 포기한 채 다시 ‘욕망과 탐심’을 붙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그 움켜쥔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절대 ‘부자’로 사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것들을 양손으로 꼭 붙잡느라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갔으면 어떠했을까요? 부자라고 하는 환경, 그 환경에 대한 욕망과 탐심의 손을 끊고 하나님의 손을 잡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분명하게 그는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0장 23절, 공동번역>
왜 어려운 일일까요? 재물을 많이 가진 그 손을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재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과 탐심’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 쪽의 손을 더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마음 그보다 더 재물을 위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울상을 지으면서 근심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왜 꼭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5~10계명은 계명으로 알고 지켜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잘 지켰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환경에서 살지 않았기에 어기지 않았을 뿐, 진심을 다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해 나눈 실천은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진짜 5~10계명을 잘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도 괜찮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이웃사랑’을 실천한 이들이야말로 1~4계명인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한 접근이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새번역>
진짜 그 청년이 어렸을 적부터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다면 이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일서 3장 17~18절, 새번역>
부자청년은 ‘욕망과 탐심’을 손에 꼭 쥐고, 하나님도 덤으로 얻고 싶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생각이야말로 진짜 ‘욕망과 탐심’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다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무서운 ‘욕망과 탐심’입니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가능합니다. ‘축적’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축적’이 불가능합니다.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욕망과 탐심을 선택할 것인지, 무엇을 손에 움켜쥐고 있어야 하고, 움켜 쥔 손을 놓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선택을 해야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어떠한 ‘욕망과 탐심’이 있으십니까? 여전히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는 ‘하나님’과 동시에 소유할 수 없는 ‘욕망과 탐심’이 있으십니까? 여전히 신앙생활 속에서 이 선택 앞에서 울상을 짓고 근심을 하며 자주 하나님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곤 하십니까? 여전히 고민 중이십니까?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손에 움켜 쥔 그 욕망과 탐심을 놓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손을 펴야 놓을 수 있습니다. 손을 펴면 절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펴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손 가득 움켜쥐려고 애쓰고 번민하다가 결국 바람을 붙잡으려는 것 같은 허망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한 손 가득한 것으로 만족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더 낫다. <전도서 4장 6절, 쉬운말성경>
이제는 한 손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이웃에게 내어줄 수 있는 손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의 보화를 향한 손을 뿌리치고, 하늘의 보화를 붙잡을 때입니다. 욕망과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움켜 쥔 손을 펴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내민 손을 잡아야 할 순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림 묵상 한 편을 나누고 함께 찬양하며 결단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결단찬양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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