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영(尹時英)
남원10세(南原十世). 字는 언좌(彦佐). 贈 좌승지 은(訔)의 장남이며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를 지낸 지득(之得)의 손자이고, 함길도도출척사(咸吉道都黜陟使) 임(臨)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원희(元禧)의 따님이다. 병진사마시(丙辰司馬試/燕山2年1496년)생원으로 갑자식년(甲子式年/燕山10年1504년) 문병과(文丙科三人. 13/31)에 등과하였다.
수원판관(水原判官/從五品),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從五品), 천안군수(天安郡守/從四品),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從三品), 사옹원정(司饔院正/正三品下) 성주목사(星州牧使/正三品下), 선공감정(繕工監正/正三品下), 군자감정(軍資監正/正三品下), 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正三品下), 광주목사(光州牧使/正三品下)를 역임 하고 졸(卒)하시니, 예조참판(禮曹參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증직(贈職) 받으시었다.
생전에 계제직(階梯職/ 堂上으로 오를 수 있는 職任)까지 올랐으나, 심정(沈貞)등의 모함으로 번번이 좌절되고 체직되었으며, 끝내 당상(堂上)으로 오르지 못하고 벼슬을 마쳤다. 이러한 사실을 公의 손자 정헌공(貞憲公) 우신(又新)의 묘갈을 찬술(撰述)한 10대손 행임(行恁)은 “간관(諫官)으로 중종[中廟]을 섬겨 장차 크게 기용되게 되었는데 간신(姦臣) 심정(沈貞)의 비위를 건드려 몰(歿)하니 소종백(少宗伯/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고 찬술 하였다.
公에 대한 모함성 탄핵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니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이 임금(中宗)께 아뢰기를 “근일에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여 전정(前程)을 그르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그들이 마음속으로‘저희들인들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하면서 원망이 날로 깊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원래 서로 모함하는 폐단이 있었는데, 臣은 이 같은 사람들이 또한 서로 모함하기를 꾀할까 두렵습니다. 대간(臺諫)은‘윤시영(尹時英)이 욕심 많고 비루하다.’고 말하지만 臣은 일찍이 함께 북경(北京)에 가면서 윤시영(尹時英)이 욕심 많고 비루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하고 변호하였다.
(朝鮮王朝實錄 / 中宗實錄)
중종 三十年(1535)에는 公이 당상관(堂上官/ 正三品 上)이 되기위한 계제직(階梯職/당상관에 오를 수 있는 직급. 正三品下)인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로 제수되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우통례(右通禮) 윤시영(尹時英)은 본래 물의(物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번 선공감정(繕工監正)으로 있을 때에도 근신하지 않은 일이 많아 논박 받고 체직되었습니다. 그 뒤 도로 본품(本品/본듸의 품급)에 제수된 것만도 과한데 더구나 계제직(階梯職)이겠습니까. 체직(遞職/벼슬을 갈아 냄)시키소서”하니,
전교 하였다.
“윤시영(尹時英)은 전에 이미 정통례(正通禮)를 지냈는데 비록 계제직(階梯職)이라고는 하나 어찌 감당할 수 없겠는가.”하고 물리쳤다.
(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
그러나 끝내 당상관에는 오르지 못하고 사후에 예조참판 홍문관제학을 증직 받으시었다.배위 贈 정부인(貞夫人)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현감(縣監) 유의습(柳義濕)의 따님으로 슬하에 청(淸), 징(澄), 식(湜) 삼남(三男)과 이녀(二女), 장적(長適) 구세안(具世安), 차적(次適) 찰방(察訪) 이 굉(李 竤)을 두었다.
묘는 김포 고촌면 신곡리 영사정에 있는데 아버지 윤 은(尹 訔)의 묘 우측 구릉의 정상부(頂上部)에 있다. 사성(莎城)을 갖춘 쌍분으로 각각의 옛 묘표와 최근에 조성된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우측에는 신비(新碑)가 있다.
묘표(墓表)는 각기 이수(螭首)와 기대(基臺)를 갖추고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지만, 부인의 묘표에는‘경술(庚戌)10월24일 립석(立石)’이라는 간기(刊記)가 보여 1550년(明宗5년)에 묘표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묘표(墓表)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은 어려우나, 약 200년 전에 채탁(採拓)한 추원록(追遠錄/규장각소장)이 발굴되어 그 비문을 완전하게 판독할 수 있다.
(參判公五子登科派의 歷史)
時享日은 매년 陰曆10월10일이다.
첫댓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내용까지 상세히 올려주셔서 목사공 할아버지의 대해 더 자세히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