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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원수필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德田
명의(名醫)
글-德田 이응철(수필가)
계절여왕 오월이 긴 봄날 찬란히 어우러진 연유는 무엇 때문인가?
유난히 서둘러 30도를 오르내리며 봄의 자리를 겁탈하려고 서둘러 찾아온 여름을 막아내려는 단비 때문일까? 무수히 피어나 울타리를 껴안고 딩구는 플로리다 줄장미 때문일까, 아니면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호수에서 방금 불어와 영혼을 적셔주는 한 한줄기 촉촉한 바람 때문일까?
챙 넓은 모자를 쓴 할머니 한분이 봄내 동주 뒷뚜르에서 오월의 초록바람을 한껏 치마폭에 담으며 옷깃을 날린다. 오늘따라 천천히 걷는다. 바람에 옷깃이 날리니 할머니 체취가 봄향기와 함께 마음껏 코끝을 스친다.
도심 한 가운데 마치 스키를 타는 선수처럼, 스틱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보전하시는 할머니-. 방금 하차한 듯 작은 마을인 뒷뚜르에 출몰이다. 그가 출몰하면 초면이던 구면이던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모두 독차지한다. 고동패기에 우뚝 선 아파트를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네? 네!
가장 첫 번째 인사를 건넨다. 할머님은 허리를 길게 펴고 머리 들어 나를 찬찬히 쓸어내린다. 구면이다. 할머니 눈길이 이내 부드러워지면서 시선이 별처럼 반짝거린다.
-시집 보낸 제 딸은 시집살이 잘하고 있나요?
-네? 아!-.그럼요, 잘 있다 마다죠.
할머님은 지난 4월이 끝나갈 무렵 방송국에서 닷새간 개인전을 할 때, 유일하게 작품 한 점을 사 가신 분이시다. 흔히 작품을 줄 때 시집보낸다고 한다. 판매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불편하신 몸으로 전시장을 돌아보시고 한 작품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1인 시위라도 벌이던 할머니 고집 -.
-네, 저는 요즘 그 녀석 때문에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느낌이지요.
-아 그러세요. 영광입니다.
할머님이 구매하신 작품은 사랑이란 시화였다.
하늘엔 별이, 땅에는 꽃이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는 괴테의 시아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마음에 사랑은 언제나 영원하다는 사랑이야기였다.
할머니는 유난히 이 구구절절 사무치다고 검지로 작품 아래 밑줄까지 치신다. 한창바람엔 세상 안 해 본 것 없으시다고 추억을 되새김질 하신다. 대청봉도 두 번씩이나 껴안고, 매일 테니스를 치시며 골프만 빼놓고 다 섭렵하셨다고 맛있던 삶의 추억을 불러오기를 한다. 여행 또한 세계를 수십 번씩 다녀 누구나 여행의 양이 곧 인생의 양이라고 단언하실 정도-. 자식농사 또한 잘 지어 외교관 아들과 캐나다로 해외유학 중 차가 다섯 대나 되는 부호께 출가해 부러움 없이 청정도시 봄내에서 노년을 즐기신다.
당초 멋쟁이 할머님을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가까운 이웃 H 한의원에서였다. 할머니 제일의 취미는 독서라고 귀뜸해 준 의원 사모님 말이 관심을 끌었다. 또 내가 사계절 이곳 한의원 현관 좁은 공간에 수시로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오는 환자 중 가장 관심있는 고객이라고 귀뜸해 누구인지 은근히 뵙고 싶던 차였다.
C 할머님은 우연히 물리치료를 받기위해 한의원에 오시고 나 또한 어깨 통증으로 들렸다가 작가라고 인사를 주선하신 사모님 덕분에 소통이 된 셈이다. 그 후 개인전을 열어 작품을 매입하게 된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인가!.
고희를 넘은 중턱에서 망팔(望八)을 바라보는 연세시다. 생전 아픈 것이 무엇인지 실감조차 못하시고 높은 공직자의 내조를 충실히 하시던 할머님-. 한국 선비 집안의 첫 번째 가업을 지켜오신 종갓집 종부시다. 비록 외모는 두 지팡이에 의지해 보행이 불편한 할머니지만 곱게 세월을 비단처럼 직조하신 격식높은 분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질은 남아 있듯이 할머님은 달처럼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녹아 계시다.
분명 할머님은 거역할 수 없는 불구시다. 장애의 늪에 빠지신 것이다.
한발 한 발을 떼어놓으시는데 온 힘을 쏟으신다. 척추 수술을 할 때 철심을 박지 않아도 되겠다는 담당의의 오판이 인생 후반기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연약한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은 병마로 환자에겐 당장은 꽤나 달콤한 말이다. 건강하시니 철심 없이 운동하시면 속히 쾌유하실 것이라고-.허나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아뿔싸! 당장 생각만 한 것이 막상 발을 뗄 때 허공을 디디는 것 같아 차일피일 호전되기만을 고대하며 세월을 뒤로 밀치우신다.
졸지에 홀로서기를 못하자 해외 자녀들이 불끈 솟아 난리였다. 병원을 상대로 책임 소재로 담당의 소송까지 비화했지만, 결국 재수술은 물 건너가고, 두지팡이에 의지해 하루를 견뎌야만 했다.
가장 중한 다리를 못 쓰니 모든 동작들이 우박처럼 낙하될 수 밖에-. 토끼 길처럼 정오에 수영장버스에 실려 갔다가 물리치료를 받는 한의원에 내려주는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다.
본인 스스로 완전 산 송장이라고 자신을 비하하신다. 계절과 상관없이 지팡이 두 개에 몸을 받들어 잠시 목적지로 행차하는 것이 전부다. 항상 주무기는 콜택시-. 요양보호사처럼 대기상태다.
며칠 후, 계절의 여왕 그 왕관을 내려놓을 무렵, 무덥던 날 할머님을 만났다. 불편한 몸으로 김영희 시인의 가자미란 글을 꼼꼼히 읽으시며 바다를 가리키신다.
-어쩜 바다를 이렇게 실감나게 표현하셨을까?
-네! 동해안 최북단 화진포가 운동장 끝에서 은빛으로 찰랑이던 학교에 근무했지요.
-아! 어쩐지 바다가 살아있네요. 가자미란 글은 읽을수록 정이가지-
막상 써놓고도 끝까지 외우지 못한 내게 일침이라도 가하듯 할머니는 암송이 발동된다.
-지붕들이 나지막한 가진항을 지난다.
-지붕위에 지느러미 말라가는 가자미를 본다.
-노조에서 밀려난 게약직처럼 수족관에서도 퇴출당한
-횟감조차도 될 수 없는 물 간 생선들
-낮은 지붕위에 납작 엎드려 옆 눈으로 하늘이나 흘기며
-해풍에 지느러미나 앙칼지게 세워본다
와--------.대단하시다고 박수를 쳐드리니 그림이 좋아 빨리 암기했다고 내게 공을 돌린다.
유교 집안에서 종갓집 체통 이어받아 천하를 휘두르는 할머님은 참으로 고매하시다. 어떤 물욕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느끼신다. 스스로도 그런 존재임을 자긍하시며 살아가신다. 항상 묵언이시다. 그 품위로 누구보다도 작품에 취하셔 만족하시는 할머니 표정이 작가인 내겐 더욱 흐뭇했다. 최고의 선물이다.
조심스럽게 헤어질 때였다.
-내 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무언지 아시나 작가 양반! 작가님의 책에 올라온 글과 그림을 모두 마시는 거네, 알아요?
밑도 끝도 없이 생뚱맞은 고함이 실상 싫지는 않았다. 혼자서 가까이 두고 읽으며 관절의 아픔을 잠재우며 달콤하게 마신다고 하시며 오늘도 한편의 글을 시화집에서 채취하신다.
-난 이제 다른 취미가 없어요. 보시다시피-.남처럼 뛰어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등산을 다닐 수도 없고-.그야말로 산송장이지. 허나 요즘은 달라요. 울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지난번 선생님 작품을 보며 힘을 얻었지요.
그런 여운을 한 아름 꽃다발처럼 내게 안겨주고, C여사는 천천히 스키 타듯 굽어보는 이웃 3차 아파트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긴다.
소양강에서 때마침 한줄기 서풍이 한껏 물기를 머금고 불어 할머니 등을 민다. 문학 할머니-.
-안녕하세요? 제 딸 잘 있나요?
-그럼요. 어제 새로 주신 작은 시화를 읽고 또 외우기도 하며 힘을 낸다오.
며칠 전에 동네 마트 앞에서 우연히 C여사를 만났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반색을 하신다. 구매한 물건은 묶어 집으로 배달을 하고 야트막하게 가려주는 길목 버스 주차장 의자에 나를 권한다.
소녀처럼 반가워하는 할머니 표정에 생기가 돈다. 순환이 역력하다. 고맙다. 누가 이렇게 깎듯이 작가를 대우해 주는가! 작가 대우를 진심으로 표현 하시는 할머님 C여사가 한없이 고마워 가던 길을 멈추고 앉는다. 싫지 않다.
- 권불십년(權不十年)/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10년은/가지 못한다.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아름다운 꽃도 / 오래 피어있지 못하다.
- 우리네 사랑은 어떤가?/ 나이가 많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 근력(筋力)이 고갈되어도 영원하다/여인은 죽을 때까지 꽃이고
-남자는 그 향기에 쫒는 나비이어라.
얼마 전 할머니께 드린 졸시였다. 마치 선생님 앞에서 레슨을 받는 학생처럼 눈을 내리 감고 작품을 막힘없이 줄줄 외우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무엇보다도 대중의 시선을 외면한 용기 범상치 않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이 광경에 취해 신기한 듯 모여든다. 가소롭게 시선을 멀리 바꾸는 신사와는 달리 대부분 경청하고 박수를 보낸다.
연꽃처럼 떠오른 작가와 모범색 문학소녀인 독자의 만남? 진정 이런 곳이야말로 바로 그 현장이다. 너끈히 다 암송하신 할머님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우시다. 신바람이 나신 듯 두 볼이 소녀처럼 발갛다. 암송이 다 끝나고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나에게 답변을 기다리신다. 마치 어린이가 큰일을 하고 칭찬의 빗물을 고대하는 것처럼 -. 참으로 대견한 노 제자이다.
-잘 하셨네요. 어떻게 긴 문장을 단번에 암기하시다니?
-길기는요. 예전엔 항상 일주일에 한 권씩은 꼭 독서를 했죠.
아름다운 할머님이시다.
항상 피크닉 가시는 듯 리본 달린 모자를 즐겨 쓰신다. 어제와 또 다른 고운 옷을 입으시고 바람에 황혼의 향을 즐겨 날리신다. 따님이 파리에서 선물한 향수를 바르고 스틱 두 개에 의지한 채 콜을 부르시는 게 이젠 하루 삶의 공식처럼 되셨다.
덥석 이것저것 주전부리도 마다하신다. 소식(小食)이시다. 체리와 망고를 들며 도를 닦는 할머님! 무엇을 먹을까보다 어떻게 영혼을 살찌울까를 내심 걱정하신다. 글과 그림을 배불리 마시는 날은 몸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시란다. 그는 취해 있다. 문학이란 생의 양념에 벌써 몇 번을 내게 강조하신다. 문학을 하는 작가들로는 문학공화국 왕이라도 된 기분이니 구겨지지 않고 얼마나 행복한가. 수차 들어도 싫지 않다. 아니 더 듣고 싶다. 작가로 한국 첫 밀리언셀러 타이틀을 거머쥔 1981년 김홍신의 100만부가 팔린 인간시장보다 더 높은 영광이다.
갑자기 오월 스물한 살의 여인이 되신 할머님임을 착각한다. 후미진 애막골에서 간장게장을 주문해 내 차로 번개 배달을 해 드린 적도 있다. 잘 정돈된 아파트를 찾아 노크했다. 입맛에 맞는 찬(饌)을 사다줘 고맙다고 난리시다. 피어나는 인정-.냉장고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곰삭은 어머니 손맛으로 싸주시더니 과외선생님 오셨다고 준비한 듯 정좌를 하고 외우신다.
혼자서도 잘 논다/ 허무와 놀아주고/ 망상과 시시덕대고/무소유와 뒹굴며/죽음과도 손잡고 노니까/심심할 틈이 없다./괴짜로 유유자적하다가 /가리라
지난 가을 만추였다. 뒤늦게 써놓고 서둘러 가신 어느 가신 동화작가의 글을 할머니는 눈이 침침한데 거짓말처럼 단숨에 암기하신 것이다. 시화를 낭송할 때는 그 표정까지 완전 몰입해 낭송 효과가 배가되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영락없는 문학소녀시다. 시 한 줄을 암송하고 마치 어려운 고개를 넘었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나를 훔쳐본다. 한 고개 또 한 고개를 넘은 할머니 C 여사님은 분명 예전 여고 때 제자로 느껴진다. 틀림없다.
이 무슨 인연인가? 비록 나이는 누님 나잇살지만 어찌 그리도 내 그림에 애호가인지 삽화에 빠져있고 컷을 보며 스토리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이신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작가 피천득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모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그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했다.
내 작품 한 점을 할머니 C여사께 시집보낸 인연으로 줄레줄레 막힌 곳이 소통되어 신바람이 나신 게 분명하다. 고맙다. 척추를 두지팡이에 의지해 보행에 어려움으로 와르르 하늘이 무너지시더니 요즘은 아니란다. 더욱 가벼워 지팡이 하나에 종종 하루를 서산에 골인하신다. 인연으로 좋아진 할머니 건강이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 만남은 인연이지만 관계는 노력이라고 한다. 식견과 정연한 논리, 불심에 바탕을 둔 할머님의 취향이 길게 관계를 이어나간다.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花喜雨)란 시를 판넬에 정성껏 써서 드렸다.
요즘 할머님은 한창 외우고 지우고 외우시느라 해가 지고 달이 뜬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린다.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란다.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여기까지 레슨을 받을 셈인가보다 반가운 비, 섬세한 두보의 시를 절반이상 좔좔 암송하는 할머님이 참으로 미쁘시다. 작품을 대하는 날들이 연실 좋은 날이시라고 고백하신다. 쑹덩쑹덩 아픈 곳들을 모두 내동댕이친 모습이라 여간 활기차시지 않다.
-내가 어때서! 다리만 힘을 잃고 보행에 불편하지 다른 그 무엇은 지극히 정상이지요? 지금 행복해요. 작가 선생님!
묻지도 않은 말을 수시로 꺼내 동의를 구한다.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는다.하고 싶은 것을 해라, 인생의 정답은 없다. 오직 명답만이 존재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렴요. 행복은 순간의 만족입니다. 또 행복은 죽는 시간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어요. 고달픈 인생 저마다 행복하게 사는 게 중한데 김 여사는 그중 대표적인 김홍신 작가의 첫 번째 분이시지요. 행복하게 놀다가는 것이 인생이다. 김홍신 작가가 지난번 춘천 아카데미 강연 때 주고 간 메시지가 떠오른다.
삶에 정답은 없다. 사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오직 명답만이 존재한다.
인생의 명답은 행복하게 놀다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재미형 인간과 의지형 인간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 짓는다. 그가 정립한 재미형 인간은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스스로 즐거움을 얻는 인간형을 의마한다,고된 일로 여길 격한 운동이라도 즐기면서 행복과 만족을 찾는 이들이다. 의지형 인간은 무언가를 돌파하는 데 큰 의미를 두고 활발하게 경제활동에 나서는 이들이라고 김 작가는 강조한다. 우리 민족 대다수가 의지형 인간으로 변모한 점을 강조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빠르게 달려온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국민들이 삶의 재미를 잃어버진 것에 대한 아쉬움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김 작가는 이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기쁨을 빼앗긴 민족이라고 단언한다. 배고픔은 해결했지만 배 아픔은 해결하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단 한번 살다 갈 인생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라는 존재는 인류역사상 달랑 하나인 주인인 존재라며 자신의 존엄함을 깨닫게 된다면 타인들이 존엄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발밑에 지구 중심이라고 강조하는 김 작가는 내가 움직이면 지구의 중심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 자신이므로 오늘부터 신나게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변한다. 진정한 인생견문록이 아닌가!
c할머니의 여과없는 문학 편승과 선호로 인한 열정을 대할 때면 늘 나는 어느 지차체의 정책이 문득 떠오른다. 강원 Y지자체는 전례없이 결혼정착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대문짝만하게 기사화된 것을 읽었다.
한해 4만 명 선이 붕괴되어 급기야 처방으로 이 지역에서 3년 이상 된 주민에게 초혼자의 경우 300만원의 정착금을 지원한다고 한다. 사회교육이 고령화 사회로 치달으면서 c 할머니처럼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암기하며 독서에 앞장서시는 분에게 지원금을 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H동네 한의원에서 모처럼 만나 원장님과 함께 차를 마실 때였다. 황혼이 창문에 어리는 저녁이었다. 한약 내음이 진하게 배어 풋풋한 맛을 더하는 한의원에 들렸더니 때마침 C할머님이 한참 너스레를 떨고 계셨다.
-선생님! 지난번 지어주신 한약을 몇 첩 먹으니 소화도 잘되고, 야속하던 불면증도 사라졌어요. 진정 명의(名醫)시네요.
-아! 그러세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명의는 제가 아니고 바로 저분이신 것 같은데-.
뜬금없이 원장님은 겸허한 마음으로 갑자기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는게 아닌가!
-네? 아닙니다. 원장님이시지요. 나는 막무가내로 손사레를 쳤다.
아-! 하고 둘러선 모든 분들이 막 문을 열고 뒤늦게 들어온 나에게 시선이화살처럼 쏠린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엉겁결이다. 아니 쑥스럽다.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지만 작가로써 엄청난 환대가 아닌가!
-맞아요. 명의가 틀림없어요. 요즘 시화를 대하면서 삶을 다시 청춘으로 되돌렸어요. 문학소녀가 된 기분이야요. 빨리 외워 작가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순간은 행복해요. 나도 모르게 힘이-.
-네, 춘희 여사님! 지어지선(至於至善)이십니다.
-작가 양반! 이제 우리가 살아야 얼마나 사나!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지만 요즘 시를 중얼중얼 외우니 문학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야-.새벽이면 깨었다고 기뻐 기도하고 했는데, 이젠 당연히 새벽이 돌아와야 난 외운 시를 레슨 받는다는 기분이니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사전에서 도망갔네-.
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가 만번 구부러져도 동쪽으로 흐르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할머님이야말로 인생 후반기 시 암송으로 억겹의 고달픈 생을 밀치고 오직 시와 가까이 하는 기개에 감동이 밀려온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할머니 C여사님 손을 덥석 잡았다. 감동이다. 현관에 기대어선 한 개만의 지팡이가 증인이라도 된 듯 환히 웃고 있었다.
-회춘(回春), 이것이야말로 진짜 회춘이시네요, 작가님은 그림과 시로 거뜬히 영혼을 치료하신 명의(名醫)십니다. 축하합니다.
때 아니게 30도를 오르며 짜증스러웠던 5월 넷째 주가 熱血팬 덕분에 적당한 기온으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마음은 들뜨지만 몸이 무거워 자꾸 늘어지기 쉬운 나이에 힘이 불끈 솟는다. 초록바람이 부는 후석로 도원경내는 어느 골프장처럼 드넓은 여유와 행복 그리고 문학으로 더욱 싱그러웠다.(끝)4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