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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세계대전, 이집트와 싸운 카데시 전투의 진실과 히타이트!
“카데시 전투” 는 기원전 1274년 5월 12일 “시리아의 카데시Qadesh” 에서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2세” 간에 벌어졌는데... 이집트에는 룩소르(테베)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의 부조와 라메세움 장제전 및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 입구
홀 벽에 새겨진 부조에 전투 장면이 등장하니.... 옛날에는 “이집트의 승리” 로 알려져 왔습니다.
“시리아” 를 차지하기 위한 카데시 전투는 “BC 1274년” 에 벌어졌고 이집트군이 2만 5천이고
히타이트군은 4만 5천이니 “합계 7만명 대군” 이 동원되었는데..... 미케네등 그리스 도시
연합군이 “트로이” 를 공격한 것은 그 80년 후인 “BC 1194년” 이고 병력도 양측 모두 1만
내외로 “합계 2만” 정도로 추측되니..... “카데시 전투는 최초의 세계대전” 으로 불릴만 합니다!
넷플릭스 영화 "트로이왕국의 몰락" 에 보면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가 그리스 스타르타 왕비 헬레네를
납치해온 사건으로 메넬리오스의 형인 미케네의 아가멤논이 전 그리스 병사들을 소집해 트로이로
쳐들어 옵니다. 전쟁을 앞둔 트로이의 프리아모스왕은 헤카베 왕비에게 "당신을 처음 만나건 하투샤
춘계 행사였었지" 라고 옛날일을 회상하는데 여기서 "하투샤" 란 바로 "히타이트의 수도" 입니다!
그러니까 프리아모스왕의 트로이나 헤케네 왕비의 프리기아는 히타이트의 동맹국이거나 속국이라?
세계 4대 문명은 1900년에 청나라 양계초가 처음 한 말로 유럽인들은 안데스와 메소아메리카를 합쳐 6개
문명을 문명의 요람이라 부르는데, 중국의 하나라는 BC 2100년경이라지만 실체가 불분명하며... 인더스
문명은 BC 2600년이고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와 우루크가 BC 3700년인데... 이집트는 메네스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게 BC 3150년이니 BC 1274년에 가장 오래된 문명끼리 세계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네요?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에는 최초의 세계대전인 카데시전투 후에 이집트와 평화 협정
을 담은 점토판 문서가 있으니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 를 사용한 "히타이트제국" 은 1834년
에 그 유적 “핫튜사” (앙카라 동부 보아즈칼레) 가 발견된 이래 1906년 독일 고고학자가
카데시 전투 후에 만들어진 "평화협정 점토판" 을 발굴해 독해하면서 제국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보아즈칼레(Hattusa 핫투샤)”에서 발견된 동일한 문서에는 이집트가 아니라 “히타이트가
승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집트의 저 부조들은 람세스 2세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자국 백성들에게 홍보” 하기 위한 것이니....... 좀 “과장된” 것이라고 본다면
히타이트의 문서는 내부용인지라 그럼 “히타이트의 기록이 더 믿을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집트 신왕국시대에 “가나안과 시리아” 는 “이집트군의 세력” 범위이자 분쟁지역으로 “투트모세”
는 수도를 테베에서 멤피스로 옮긴후 메기도 전투에서 카데시를 복종시켜 가나안과 시리아를
장악했지만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톤)와 투탕카멘의 치세를 거치면서 영역은 줄어드니 “호렘헤브
는 재 원정” 을 결행하는데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아무르인, 가나안인 및 히브리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이후 신왕국 19왕조의 “세티 1세는 북진해 카데시를 다시 점령하고 아무루(아모리)를 복속”
시키는데 성공하니 이 원정에는 아들인 람세스 2세도 참가했다지만... 람세스 2세가 즉위
했을 때 “카데시는 히타이트의 점령지” 였으며 아무루는 히타이트의 동맹국이었는데
그후 아무루가 히타이트에서 벗어나서.... 다시 “이집트와 동맹” 을 맺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아무루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준비했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역시 히타이트를 격파할 기회로 여기고 출병했으니 히타이트군은 3만에 가까운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에 11,000명의 용병이며, 이집트군은 1만 6천 명의 보병과 2,000여대
의 전차에 5천명의 용병으로 이루어졌으니..... “히타이트 군이 2배” 가량의 전력을 동원합니다.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동맹국의 군대를 총동원” 했다는데 “트로이의 이름인 윌루사” 와 호메로스
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가 포함됐고.....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은
“아문, 라, 세트, 프타”의 4개 부대로, 이집트군은 두명의 '바다의 사람들' 을 발견했는데
히타이트군이 람세스 2세의 진격을 두려워해 “카데시를 빠져나가 북쪽으로 도망” 친다고 말합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 군을 추격하기 위해 “부대 이동속도를 높이니” 부대 사이의간격이 크게
벌어지는데 그는 선두에서 급히 진격했고 그 뒤를 아문 부대와 라 부대, 세트 부대, 프타
부대가 간격이 크게 벌어진 채로 따라오니“부대 사이 간격이 너무 벌어져 서로의 상황” 을
알수 없을 정도였으니“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 는 전투가 끝날 때 까지도 도착하지 못합니다!
이때 이집트 척후병이 히타이트군 몇명을 잡았는데 '람세스 2세는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해' 이 척후병들이 히타이트군의 공작원임을 눈치챘고 이들을 고문해 “히타이트 군이
카데시 주변에서 매복”하고 이집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는데..... 이집트군은 “히타이트의 거짓 정보” 에 넘어가서 완벽하게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히타이트군은 카데시 성채의 북쪽에 군대를 매복시켰으니 람세스 2세로서는 “성채에
가려져 히타이트군의 존재”를 알기 힘들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때 아문 부대는
오론테스 강을 건너 카데시 요새를 향하고 있었고 두 번째 라 부대는 오론테스
강을 막 건너고 있었으며.....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남쪽 멀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 앞에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대로 돌격해
“라 부대를 급습”하니 이집트군은 4개 부대 간에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다가
전력도 히타이트 군에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라 부대는 방심한 상태로 그것도 강을 건너는
도중에 습격을 당했기 때문에....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궤멸” 되었습니다.
히타이트군은 이어서 선두의“아문 부대 후미를 공격”했으며, 아문 부대 역시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고 도주하는데..... 이러한 전개 과정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이집트의 부조에는 아문 부대의 모습과 이후 아문 부대가 히타이트 전차 부대의 공격
으로 무너지는 모습 등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이 점에서는 “솔직” 하긴 합니다?
이때 일부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으니 여기까지는 이집트 기록도 명확
하며 히타이트의 기록과도 일치하지만 이후 “이집트의 기록은 서로 모순” 되기 시작하며
“히타이트의 기록” 과도 맞지 않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군에게 잡히지 않은” 것과 “카데시 요새” 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이집트의 기록에 람세스 2세는 이 시점에“신(神 ?)”으로 변했으니 람세스 2세 곁에는 오직
마부 한명 밖에 남지 않았고 다른 이집트군은 모두 달아났으며 마부 역시 겁에
질려있었지만 람세스 2세는 마부를 독려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당나귀 턱뼈를
집어들고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 ”한후 유유히 이집트 군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 전차부대는 히타이트를 제외한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활이 주 무기” 였으므로
아무리 본인이 신으로 변했다고 해도..... 자기가 가진 “화살 숫자” 보다 많은 적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게다가 중세시대처럼 온몸을 갑옷으로 두른 기사도 아니고 “발목이나
팔꿈치는 노출된 복식” 인데 난전에서 그런 옷으로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는다는건 불가능 합니다?
이집트의 기록이 이것으로 끝이면 “람세스는 혼자 간신히 달아났으며 히타이트의 승리” 로
끝났다고 결론을 내릴수 있겠지만 이집트의 부조에서도 분명히 람세스는 혼자 맹열히
싸우지만 부조 한쪽 구석에는“정체를 알수 없는 이집트측의 부대”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설명에는 람세스 혼자 이긴 것으로 나오니 이 부대의 “정체에 대한 단서” 가 없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파라오의 근위대(메자이) 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가나안인 용병대”
라고 하기도 하며 아무루의 원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수 없지만...... 이 부대는 뭔가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니 그 “역할” 이란게 대체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이집트가 승리 했다고 보는 쪽은 이 정체 불명의 부대가 “적절한 시점에 히타이트 군에 공격” 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데, 히타이트군은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해 군기가 느슨해져
이집트 군이 남기고 간“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그 정체불명의 이집트군 부대가 나타
나서 되돌아온 “아문 부대 및 람세스와 함께 히타이트군을 기습” 해서 격파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히타이트의 승리라고 생각하는 측은 “이집트군은 그냥 패배” 했으며 이 정체불명의 부대
는 단순히 “람세스나 람세스의 아들 등을 구출해서 호위” 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며.....
람세스의 홀로 용감무쌍한 전투는 단순히 “달아나기 위해 혈로를 뚫은 것” 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2010년 이집트 전국일주 여행에서 “룩소르(테베)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 부조에 라메세움 장제전”
및 “아스완 아부심벨 신전 ”을 모두 보았기에 2016년에는 “앙카라 박물관에서 부조들”
을 구경했는데... 히타이트 “유적지” 는 앙카라에서 08시 50분 Metro Bus Osmancik 행을 타고 12시
에 순구룰루 Sungurlu 에 내려서 미니 Bus 를 환승해 30분후에 “보아즈칼레” Bogazklale 에 도착합니다.
핫투사슈 & 바이칼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20분 가량 언덕길을 걸어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인 “핫투샤 Hattusa 유적지” 에 도착하는데 입장료 7리라는 야즐르카야와 공통이고......
보아즈칼레 유적에는 사자와 황금독수리 조각상이 있으며 유적지가 넓게 펼쳐지는데 시간만
충분하면 택시를 대절해 “야즐르카야 Yazilikaya 와 알라자효육 Alacahoyuk” 을 볼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윗왕이 우리야” 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한 후에 그 “아내 바셰바” 를 취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우리야가 히타이트인” 이니.... 5천년전에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과 나일강 룩소르
에서 인류 문명이 발생한 이래 아나톨리아 에는 “하티(Hatti)” 라 불리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었으나 문자는 없었지만 무역을 했다는데 BC 2000년에 “히타이트인이
이주해 하티를 정복” 하고 소국을 세웠으며 BC 19세기 쿠샤라의왕 아니타시는 카파도키아
를 지배하였고 BC 17세기 후반에 하투실리스가 북시리아에 군대를 진격시켜 통일
왕국의 “수도를 하투샤(보아즈칼레)” 에 두고 “무르실리스 1세는 바빌론 왕국을 멸망” 시킵니다!
“미탄니를 물리친 투드할리야” 는 BC 15세기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신제국(新帝國) 을 건설
했으며 4대 수필룰리우마스는 미탄니와 시리아에 있던 소국들을 멸망시키고는 수도에 성벽을
쌓는등 “히타이트 를 세계적인 제국” 으로 발전시키는데 히타이트인의 용감한 기질에다가
“철제무기” 와 말과 경쾌한 “2륜전차”(二輪戰車) 에 의한“ 새 전술의 도입”이 큰 몫을 했습니다.
무와탈리스 2세는 시리아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오론테스강변 카데시에서
세계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을 벌이는데.... 람세스 2세는 BC 1274년에 아몬, 라, 프타 및
세트 등“ 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4개 사단 2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가나안의 항구” 를
확보하니 히타이트왕 무와탈리시는 노련한 군주로 라 사단 5천의 부대 를 기습으로 전멸 시킵니다.
그런후 히타이트왕은 강을 건너 2,500대의 전차를 몰아 이집트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이집트
군은 대혼란에 빠져 아문사단이 도망치니 중과부적으로 포위망 속에 “전멸할 위기”
에 처햇지만 람세스 2세 는 기가 죽기는 커녕 “오히려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니
훗날 알렉산더 대왕 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런 용사를 누가 막을 수 있으리요?
그때 “가나안인으로 구성된 보조부대 나아란군” 이 시의적절하게 도착해 “히타이트군의
후미” 를 치고 아문부대 잔여병력이 되돌아오니 천신만고 끝에 겨우 전세를 역전하는
데.....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왕은 예비부대 2만명을 투입해 “전세를 재역전”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만 “군사를 물려서 화평” 을 도모한 것이 실제 사실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히타이트로서는 시간을 끌면 “이집트 3진 프타사단 과 4진 세트사단” 이 도착할 것이고
이집트군과 맞장을 떠서 설사 승리한다고 하여도 “히타이트군도 엄청난 병력손실”
을 보아야 할 것이며.... 더욱 시리아에서 “머나먼 땅인 이집트 본토” 까지 행군
해서 설사 점령한다손 쳐도 이집트를 다스리자면 “대군을 장기간 파견” 해야 합니다.
히타이트는 소아시아에서 일어선후 “바빌로니아와 미탄니” 등 여러 나라를 정복하기는
했으나 그 땅에서 다시 미탄니의 속국이던 “아시리아” 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
에서 군사가 많이 상하고 대군이 시리아를 빠져나가면...... 지금까지 “복속중인
제 부족들이 반란” 을 일으킬 것이니.... 그 “뒷감당을 할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BC 1270년에 작성된 “평화 조약문” 내용에 보면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기로” 하고 “히타이트에 적”
이 쳐들어 왔을때 “이집트가 군사원조” 를 하기로 한 내용인데 이집트로서는 누비아인을 정복했으니
서쪽 사막너머 부족 외에 달리 이집트를 침략할 만한 “적대적인 큰 세력” 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3,200년간 이어진 “람세스의 승전 주장” 은 1906년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터키 앙카라 동쪽 “보아즈칼레
에서 점토판” 이 발굴되어 전투의 상세한 “전적 보고서” 가 출토 됨으로써 “과장된 것” 으로 밝혀졌는
데, 그러니 역사에서는 어느 “한나라 일방의 기록” 만으로는 사실을 정확히 평가할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이집트군은 청동제 무기” 를 사용한데 비해 히타이트군은 세계 최초로 청동무기 보다 훨씬 날카로운 “철제
무기” 를 가졌으며... “이집트군의 전차가 2명이 타는 소형” 이었음에 비해 “히타이트 전차는 마부, 궁수와
전투병 등 3명” 이나 타는 대형 이었으니 속력은 이집트 전차 보다 느렸겠지만 무장은 더 강력했다고 봅니다.
병사도 “이집트 2만 5천” 대 “히타이트 4만 5천”으로 중과부적인 데다가 무와탈리시왕의 “교란과 포위작전
에 말려 이집트군은 분리” 되고 “강을 건너는중 기습을 받아 각개격파” 된 상황이었으니 히타이트가 유리
했습니다.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우호조약을 체결한후인 BC 1269년에 “공주를 람세스 2세에 출가” 시킵니다.
이후 히타이트는 “아시리아 성장으로 쇠퇴” 하는데 84년 후인 BC 1190년경 서방에서 침입해온 “바다 민족
에 의해 붕괴” 되는데.... 이는 트로이 전쟁과 동시대로 일부는 시리아로 피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하며 550년 후인 BC 717년 “아시리아 사르곤 2세가 카르케미시를 점령” 함으로써 800여년만에 멸망합니다.
구약성서의 “헤레인족이 힛타이트 제국” 을 건설한 것은 빙클러가 보아즈칼레(핫튜사) 유적
왕궁에서 “점토판 문서”를 발견해 알려졌는데, 사자와 황금 독수리상이 있으며 둘레 6km
핫투샤 Hattusa 는 2시간 반이면 보니“대신전” Buyuk Mabet 에는“폭풍의 신과 태양의
여신 신전” 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200개가 넘는 방에 곡물 저장용 큰 항아리 가 있습니다.
“폭풍의 신 Teshub 와 부인 Hepatu” 를 모시는 신전에서 발견된 “협정문” 은 고고학 박물관에
있으며 신 성채터에“아슬란카프(사자문)”가 나오는데 2개의 사자상이 있고 스핑크스문은
암석 토대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아나톨리아 고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래쪽
제방에 70미터 아치를 가진 대지 문이 있으며 왕의 문 kral Kapisi 은 왕성의 주요 문입니다.
나산테페 성채 동쪽에 길이 9m, 10행에 걸쳐 기록한 문서를 히에로글리프 라는데 “왕인 스피르리우마
”가 기록했으며 제사장은 아치형 사당으로 히에로글리프가 있던 방을 말하니 대성채에는
왕도의 아크로폴리스로 공식 문서 점토판이 대량으로 발굴되었으며 아슬란카프 Aslani Kapi 는
3천년전 석축 요새고 “규네에칼레 Guney Kale 벽에 상형 문자” 는 수필울리우마 2세왕 때 것입니다.
“야즐르카야” Yazilikaya 는 핫투샤에서 3km 떨어진 제사터로..... 문자가 있는 바위를 의미하는
“히타이트의 성지” 니 바위 사이 골짜기를 갤러리라 부르는데 “천이 넘는 신(神)” 이
있으며 BC 13세기 신전을 지나 바위 골짜기에서 “종교의식” 을 거행했는데 암벽에는 “주신
인 날씨의신 테숩” 과 “아내인 태양신 헤피투” 가 많은 신들을 거느리고 만나는 부조가 있습니다.
소갤러리 입구는 날개 달린 사자가 지키고 있으며 내부는 투트하리야 4세를 모시는 “성소로 왕의 모습”
이 있으며 전쟁의 신을 연상시킨다는데...... 12신의 보존상태도 좋고 주신의 아들 Sarruma 와
딸을 표범과 쌍두 독수리 가 보호하고 있으며 움푹한 곳이 제단인데 그 반대편에는 왕을 조각했습니다.
“알라자효육” Alacahoyuk 은 보아즈칼레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알라자 마을 에서는 16km
거리인데 입장료는 별도니 5리라로... BC 5,000년경 석기시대부터 존재한 오래된 유적이니
입구에 장중한 “스핑크스문은 히타이트 제국” 시대의 것으로........ 안쪽에 “청동기 시대
왕족의 무덤” 과 히타이트 시대 석조 터널이 있고 박물관에는 역사와 도기등을 볼수 있습니다.
BC 3천년경의 “황금장식이 있는 철제단검”이 발견되었으며 “바빌론을 점령하고 이집트
와의 전쟁에서도 승리” 했으며..... “금석문과 풍요로운 문화, 고유의 법전”
까지 갖추고 있었던 대 제국이었던 “히타이트 는 그후 인류 역사에서 잊혀” 졌습니다.
“핫투샤” 보다도 규모가 훨씬 작은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덕분에 서양 문화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
했건만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핫투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는데... 핫투샤 는 앙카라 동쪽
150km, 1000m 고원지대 정상과 기복이 심한 “비탈면에 8km 이중 성벽” 으로 둘러싸여 건설되었습니다.
히타이트 제국은 “에게해에서 코카서스까지, 흑해에서 시리아를 지나 레바논” 끝까지 뻗어나간 영토
임에도“산중에 수도” 가 건설됐으니, 1834년 “프랑스인 샤를 텍시에” 는 보아즈칼레에서 수레
바퀴자국을 따라 올라가 거대한 돌들이 열을 지어 있는 것을 보는데 고대 로마시대 켈트족
이 살았다는 소아시아의 “타비움(Tavium)” 이라는 도시를 찾고 있었던지라 타비움이라 추측합니다.
하지만 유적은 “전성기 아테네 만큼이나 큰 거대한 도시” 로 사람이 조각된 거대한 두개의 성문과
양쪽에 사자가 조각되어 있는 또 다른 성문을 스케치 했으니 보아즈칼레 성벽의 문에 조각된
사자는 외부의 적을 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 폐허를 스트라보가 언급했던 성소인 주피터
신전으로 여겼지만 로마시대 어떤 건축물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형식에 당황” 합니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의 안내로 유적의 맞은편에 있는 고원지대에 도착해서 “야질리카야” (Yazılıkaya, 글자
가 새겨진 암벽) 라고 불리는 유적지를 보는데.... 뾰족한 모자를 쓴 엄숙한 행렬의 사람들을 따라
가자 “삼중관 을 쓴 조각” 들이 나타났고 “날개 달린 인물” 둘과 무언가를 거머쥔 사람의 조각도 보였습니다.
뾰족 모자와 언월도 같은 것을 둘러멘 “12명의 신들이 일렬종대” 로 진군하는 조각과 마주쳤고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하늘을 찌를 듯한 산봉우리 천혜의 암벽 위에
거대한 바위들을 쌓아 만든 “수수께끼 성벽을 건축한 도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1839년 그는 파리에서 “소아시아 소묘” 라는 여행기를 발간했는데 삽화와 내용은 19세기 “유럽
역사가들을 혼란” 에 빠트렸으니,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유적의 발굴에 집중한지라
파라오 시대 이집트 문명과 아시리아 문명을 발굴하던 시기로 “보아즈칼레는 수수께끼” 였습니다.
“열왕기 하” 7장 6절에 보면 “주께서 시리아군에게 대군이 쳐들어오는 소리를, 병거대가 밀려오고 기마대가
달려오는 소리” 를 들려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큰일났다. ”이스라엘왕이 헷의 왕들과
이집트 왕“ 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다가 우리를 치는구나! 여기에서 "헷이 바로 히타이트" 민족 입니다.
“보아즈칼레의 정체” 를 밝히지 못하는 가운데... 1872년 아일랜드 학자인 윌리엄 라이트는
시리아의 오론테스강 하마트라 에서 상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비문 을 발견했으며
이무렵 영국 박물관의 학자들이 “유프라테스강 자라불루스에서 폐허”를 발견합니다.
조사 끝에 아시리아 사료에 명시된 “카르케미시(Karkemish)” 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들은 발굴 과정에서 사람의 머리, 손, 다리, 동물 모양을 한 매혹적인 기호 들과 초승달,
갈고리, 오벨리스크 같은 기호들로 둘러싸인 유물을 발견했으니.... 그들은 이것이
"문자 체계" 임을 확신했는데 놀랄만한건 “비슷한 유물이 시리아 뿐만 아니라
타우루스의 기념물 과 터키 스미르나” 근처에서도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샤를 텍시에 가 발견한 “야질리카야의 문자” 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
기호들이 “동일한 문자” 라면 “에게해에서 부터 아나톨리아를 거쳐 시리아 내륙” 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뜻이라? 1879년 영국인 아치볼드 헨리 세이스는 그전 수십년간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발견된 불가사의한 기념물과 금석문이 “히타이트 민족” 이라 확신합니다.
다윗왕 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신의 벌을 받았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에서 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야곱의 형“에사우가 아내로 맞이한 여인이 히타이트인”이니
당시에는 소수민족으로 여겼는데 해석을 달리하면 열왕기하에서 고대 최강의 군주였던
이집트의 파라오 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 바로 함의 후손 인 “헷(히타이트) 의 왕” 이라......
헨리 세이스 는 아나톨리아 유적의 주인이 “3천년전의 히타이트” 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들은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강국” 이었다고 주장해 학계에서는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지만
증거가 빈약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으니.... 결국 독일의 “호르즈니가
이집트와의 조약문 점토판을 해석”함으로써 "히타이트제국의 실체" 가 밝혀진 것입니다.
참고문헌 1. 람세스 제3권 카데슈 전투, 크리스티앙 자크
2. 세계사 1, 클라이브 폰팅 (7장 상호작용 7.4 제국의 경쟁 7.4.1 히타이트)
3.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커스 휘틀럼 (2.팔레스타인 역사의시간과 공간)
4.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 조철수
5. 세계를 간다 이집트, 2. 나일 중류, 룩소르, 랜덤하우스
6. 터키, 3.중부 아나톨리아, 하투샤, 백종원
7. 앙카라 문명 박물관의 자료
8. 위키백과와 나무 위키 및 그밖의 많은 카데시 전투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