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도공 이문화 선생 서거 600주기를 맞이하여 학술강연회를 개최하여 공도공의 생애와 업적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공도공 이문화의 성장과정
오천 이문화(1358-1414) 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초기를 살다가신 문인이며 관료 출신이다. 올해 2014년은 돌아가신 지 600주년을 맞는다. 이문화 선생은 자는 백중(伯中)이고 호는 오천(烏川)이다. 인천이씨의 비조(鼻祖)는 이허기(李許奇)이고, 시조는 이허겸(李許謙)이다.이문화는 시조 이허겸의 14대손이고 조부는 중서사인을 지낸 익세(益歲)이다. 부친은 전공판서를 역임하신 심(深)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검교공파 후손이다. 부인은 충주최씨 검교정승인 양정공 최렴의 따님이시며 자녀는 6남2녀를 두셨다.
공도공은 고려 말인 공민왕 7년 1358년에 탄생하였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천품이 온화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벌써 의젓하여 대인의 기상이 넘쳤다. 총예영민하여 글을 배움에 학업이 날로 진취되고 예의로서 몸을 가졌으며 효우가 두터워 부모님 곁에서 온 종일 화순한 얼굴을 분부가 내려지기 이전에 뜻을 받들었다.그리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 상사를 당하여 슬퍼함이 예절에 맞았고 여묘에서도 3년의 상을 마치었다.그는 율정 윤택(栗亭 尹澤)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때로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하에 추종하였으며, 그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양촌 권근 선생과 도은 이숭인, 상촌 김자수 선생과도 서로 벗삼으며 강론하였기에 문장과 경술에 추앙을 받았다.
2. 대과에 장원급제하다
그는 고려말기 우왕 때 1380년이 23살의 나이였는데 진사로서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문학대천(文學大闡)의 기풍을 떨치었다. 한편 목은 이색 선생은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공도공의 자인 백중(伯中)에 대한 자설(字說)을 지어주며 공의 깊은 학식과 기상을 칭송하였다.
3. 빛나는 행적
그의 행적을 세밀하게 살펴보려면 크고 작은 많은 유사 가운데 중요한 사실만 간추려서 수록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태조 때는 좌간의대부를 지냈는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여 조선을 세웠으나 아직 국가의 기틀이 안정적으로 다져지지 않는 과도기라서 고려말의 잔폐와 백성들의 불안한 민심은 좀처럼 숙여지지 않고 뒤숭숭하였다. 이때 공은 경기도안렴사로 나아가 여말의 잔폐와 불안한 민심을 선무하고 민생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나라에 공헌이 있다고 보는 사람, 또는 이미 연로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늙은 신하를 대우하기 위하여 검교정승이라는 높은 명예관직을 만들어 무원칙하게 제수하는 폐습이 있었다. 공은 이와같은 폐습은 국록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관직의 위계질서를 문란케하는 처사라고 규정하고 이의 폐습을 없애도록 간하여 상훈 관리가 개선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태조가 왕위에 오름으로서 그의 부, 조, 증조, 고조 등 4대조를 왕으로 추존하여 함경도 지방 동북면에 위치한 이태조 선대의 네 분에 대한 4계절 제향 행사를 거행하여왔다. 이 행사가 거행됨에 따라 사신들의 왕래가 많고또 제향과 관련한 각종 민폐가 극심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공은 이와같은 민폐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정승 김사형과 함께 과감하게 방법을 논의하여 점차적으로 개선해 갔다. 당시 나라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행을 크게 장려했고, 효행자에 대한 후한 보상과 혜택을 널리 베풀었다. 때문에 많은 효자가 수없이 발굴되기도 했으나 효의 근본을 벗어나 가식적이고 진실성이 없는 맹랑한 그릇된 효행도 많아서 그 진실을 가리는데 혼란도 있었다. 공은 각동의 효렴무재(孝廉茂才)를 접견하고 사실이 아니거나 허황한 자 등 70여 명을 엄격하게 심사하여 추방함으로써 효행에 대한 바른 질서를 잡아 나갔다.
그리고 왕명을 받아서 송태조의 내시에 대한 고사에 의거하여 특별히 유비고(有備庫)를 설치하여 군수물자에 대비하고 납입된 전(錢)과 곡(穀),포(布), 화(貨)를 삼사에서 회계를 맡아 수납에 의해 지출을 하게하고 만약 병란이 있으면 임금께 아뢰어 쓸 수 있도록 완전한 법칙을 마련하여 회계 질서를 마련하였다.
사관은 나라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꾸밈없이 사실대로 기록하여 사기의 초본을 작성한다. 왕이 말한 한 마디까지 그대로 기록되는 것이 사초이다. 그런데 이 사초를 왕이 보고싶어하여 간혹 사관에게 명하여 사초를 가져오게 하여 열람코자 함을 탐지하고 공은 단호히 사초를 열람함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 간하여 사초의 바른 기록이 유지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조 정종 때에는 공이 도승지를 지냈는데 조선초기 왕자들간에 세력다툼이 심각하였고 마침내 왕자의 난은 빈번하였다.
공은 이와같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대의를 좇아 신하로서 처신을 원만히 했다. 1400년 방간의 왕자난 때는 왕명을 받아 방간을 설득시키는데 노력했으나 이루지는 못했어도 더 큰 위험 경지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조선의 선군(船軍)은 그 운영 관리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고폐단도 극심하였다. 즉 선군의 편대와 배치, 그리고 선군의 관리와 운영 문제 등 합리적, 전술적인 체제가 요구되어 조정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공은 그 폐단을 없애고 문제점을 개선키 위해 동북방면 즉 함경도와 강원도의 선군은 혁파하고,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풍해도(황해도) 등의 선군은 삭감하여 민폐도 줄이고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개선안을 마련하였다.그리고 도승지 3년동안 말은 진실한 것만 간하여 왕지를 바르게 하고 백관과의 조화가 이루어져 다스림의 효험을 기약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태종대왕 때는 삼군부사, 예문관 대제학,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대사헌, 개성유후사유후, 참찬 의정부사 등 고관을 역임하였다.
삼군부사로 임명되고나서 조선과 명나라는 이웃나라간 서로 교역하여 우방관계를 맺고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조정에서는 매년 하정사를 보내어 우의를 다져왔다. 하정사로 가는 사람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인품이나 학식, 덕망, 그리고 정치적 수완과 예리한 외교수단이 뛰어나야 하는데 발탁되어 명나라 북경에 가서 공마 30 마리를 선사하고 양국간의 우의를 다지고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으로 1401년부터 1408년까지 3회에 걸쳐 임명되었다.
왕명에 따라 각종 문장을 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문장력은 뛰어낫다. 그리고 문학과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헌사는 우방 관계에 있는 이웃나라에 예물을 선사하러 간 대사인데 고은 1408년 명나라에 갔다가 그이듬해인 1409년에 귀국하였고,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경상도 도관찰 축척사-고려말의 적폐를 빠짐없이 들추어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사습(士習)을 개선함에 왕으로부터 특별 명을 받고 이에 진력, 향민의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
예조판서(2회 임명)-정무를 다루는 여러 관직원들의 직무일과 직무하는 장소에 있어서 영의정부사 등 고위직 관원들의 직무하는 장소에 있어서 영의정부사 등 고위직관원들은 언제나 조례가 있는 날에만 출석하여 관장하는 일도 극히 일부에 한하여 이루어지고 일의 추진과 처리방법도 절도와 질서가 없는 등 즉 직무방법과 자세가 옳지 않을 지적하여 공은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근무토록 하고 품의는 문서화하여 시행되도록 개선해 나갔다.
풍수 재해를 당하여 재상들과 그 대책4을 논의할 때 공의 지략과 의연한 자세는 비범햇으며 왕도 좋게 받아들이고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관직자의 본을 보였다.
좌명 1등공신인 신극례(辛克禮)의 예장에 있어서 왕의 상등예장 지시에 대하여 공은 예장은 직급의 고하로서 상, 중, 하 3등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공신 1, 2 등급에 비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장 질서를 확립하였다.
형조판서- 1405년에 형조판서에 임용되었으며 서울을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작은 민원소송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여 국민의 원성을 잠재웠다.
대사헌-크고 작은 사건에 다하여 옳고 그름을 사심없이 간하여 대의를 좇아 극명하고 바르게 처리하여 기강을 확립해 나갔다.
대사헌 재임시에 국가적인 큰 사건을 소신과 불굴의 의지로 처리하고 난국을 헤쳐나갔다.
개성유후사 유후-대사헌에서 해임되고 개성유후사 유후로 옮겨 공은 전과 같은 의롭고곧은 심정으로 국사에 협조하였다.
왕을 섬기는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대의를 위해 삶을 꾸려 나갓다. 공은 가색도와 분재 그리고 다보생 감초 천엽동백을 임금께 올려 신하로서 순수한 예의를 잃지 않았었다.
참찬 의정부사- 1402년에 이어 또 다시 1414년 참찬 의정부사에 임명되고 6월에 공은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이 57세이다. 공이 돌아가심에 임금도 놀라시고 애도를 금치 못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지하고 후한 부의를 하사하여 관에서 장사를 주관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와 영의정을 증직했으며 현인을 높이고 의를 귀중히 여기며 마음 씀씀이가 의에 맞는다는 두 가지의 시법을 써서 공도(恭度)란믄 시호를 내렸다.
공의 후예들과 향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은 6남3녀를 두었고 6남은 모두 재상급이었고 외손녀는 정희왕후이다. 장남 이효인, 차남 이효의, 3남 이효례, 4남 이효지, 5남 이효신, 6남 이효상을 높은 관직을 받았다. 한편 장녀는 윤번에게 출가하였는데 윤번은 파평부원군이 되었으며 정희왕후의 아버지다. 차녀는 류개동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묘소와 향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묘소는 공이 서거하실 때 경기도 광주 학당동에 예장으로 모셨는데 1495년 성종이 승하하자 그 곳으로 모심으로 인하여 인근 숙동 신좌에 이장하였다. 그로부터 476년 후인 1971년에 서울특별시의 도시확장으로 인하여 다시 천안시 동남구 구성동 구곡산 건좌의 현 위치로 이장, 묘역을 단장하였고 오천재의 본제를 비롯하여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였으며 매년 청명, 한식일을 전후하여 향사일을 정하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공을 주벽으로 향사하는 서원이나 사당은 대구 서계서원, 함안 도천사, 장흥 금계사 등이다.
오천 이문화 선생의 유적지를 일일히 답사하면서 새롭게 발굴되거나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친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에는 오천이라는 마을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주소지로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동인데 안동댐으로 수몰되기전에는 예안면 오천동이었다. 지금 오천동에는 600여 년간 세거한 광산김씨 오천종가가 있다. 여기서 오천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된 것은 까마귀같이 까만 조약돌이 냇가 바닥에 깔려 있어서 흐르는 물 자체가 새까맣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문화의 부친이신 이심 선생이 세거했을 가능성을 추정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에는 예안현지도를 보면 오천촌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오천반석과 오천 승지바위 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둘째, 그의 외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에는안동권씨 검교공 척파 권육의 후손이 세거하는데 공업사를 경영한다.
세째, 그의 처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내동종가인데 그의 장인이신 검교정승 양정공 최렴 선생의 산소 등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네째, 그의 사승관계를 살펴보면 무송윤씨 윤택 선생의 진면목을 학문적 시각에서 살펴보고 그의 유사와 율정 선생의 스승인 익재 이제현 선생의 학문세계도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그의 문집인 <공도공유고>가 실려 전하는 소성세고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굴하였는데 그의 많지 않은 시 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작품들이다. 산일된 자료를 찾는 계기가 되어야한다.
여섯째, 그의 간찰이나 필적이나 고문서 등을 찾아내어 얻은 결과는 장철정사공신록권, 조온정사공신록권 등이다. 전자는 1398년에 작성된 것으로 천안에 사는 장철 선생 후손이 소장하고 있고, 후자는 1399년에 작성된 것으로 성남시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 중이다.한편 내가 2006년 7월 15일 발굴하여 경향신문에 보도된 장철정사공신록권은 1398년 정종 1년 11월에 왕명에 따라 도승지 이문화가 담당하여 장철 공신에게 발급한 공신록권이다. 정종대왕은 즉위 직후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추충협찬정난정사공신으로 녹훈하였다. 그런데 정사공신록권은 현재까지 전하는 것으로 유일본이다. 이 자료는 개인 소장본인데 귀중한 보물급 자료이다.이 녹권에 수록된 일등공신이 12명, 이등공신이 17명이다. 이들에 대한 특전 내용은 개국공신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다. 상급내용 중 전지와 노비만을 살펴보면 일등공신에게는 전 200결, 노비 25구씩, 그리고 2등공신에게는 두 등급으로 나누어 상등급은 전 150결, 노비 15구씩, 하등급은전 100결에 노비 10구씩을 주었다. 장철은 이등공신으로 상등급에 책정되었다.
일곱째, 그의 유적지 가운데 시를 남긴 창작 공간인 의성 후죽동의 문소루는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이다. 그리고 밀양의 영원사 선조루는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여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보인다. 그리고 경주 감포 이견대는 현대식 건물로 복원하여 그모습을 전한다.
여덟째, 그의 맏아들인 이효인의 처가를 방문하였는데 함창김씨의 유래를 확인하고, 경북 상주 함창읍 증촌리에 남아있는 태조왕릉 유적과 경북 봉화군 도촌리의 김석재 옹이 사시는 종가를 방문하였다.김석재 옹은 600년만에 오신 손님이라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아홉째, 그의 이장시 발견된 모습을 증언한 분의 전언을 종합하면 9척 깊이에 관이 2중으로 설치되었고, 그의 체구가 장대하고 황골상로 치아가 가지런한 편이었고, 공주박물관 이한상씨는 고려식 분묘라고 증언하였고,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숱을 사용하여 예장하였다고 한다.(청양 문중 故 이석규 옹 증언)
열째, 그의 별장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동에 있었다는 것을 양촌 권근의 문집 양촌집에 실린 한시가 입증하고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상주목사 권집경과 이웃하며 살면서 친구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술을 즐기며, 풍류남아의 기상을 지닌 인물로 평가한 기록이 나온다.
열한째, 그의 사상과 종교를 지나치게 유교 일변도로 서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상은 불교와 유교가 융합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대 역사가와 연구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그의 단면을 보고 서술하는 예가 많다.
열두째, 그의 서거일은 음력 6월 1일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라야 한다.
열세째, 그의 선고이신 이심 선생의 장지가 보주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건대 보주(甫州)는 현재의 경북 예천이다. 추정하건대 현재 경북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는 옛날에는 경상도 보주 용궁현에 속했다. 지금은 경상북도 도청이 대구광역시에서 옮겨와서 2015년 3월에 개청하는 곳이 바로 안동 풍천과 예천 호명이다.
열네째,현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구성동 산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옮겨왔다.
열다섯째, 이문화 선생을 이야기하는 자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촉구된다. 이규상 편저인 정원실록(초 상, 초 하), 소성세덕(초간 1957년, 번역 1985년), 오천실기(1977), 경상도선생안, 국조보감, 국조방목, 동유학안, 한국인물대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등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이문화, 공도공유고, 소성세고, 1962년
오천실기
허철회, 오천 이문화평전, 생각의 나무, 2010,
허철회, 이문화평전을 위한 초석놓기, 뿌리교육,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이성진, 오천 이문화 유사, 뿌리교육, 2005.6
이애희, 오천 이문화의 생애와 경세사상, 학자들이 평가하는 선조의 얼, 제1권, 인천이씨대종회.
뿌리,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인천이씨세보, 편찬위원회
安秉禧, 密州徵信錄 6권4책, 京城 苑南町 29번지에 거주하는 안병희 님이 간행, 밀양향토지 일제시대 소화11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