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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길예송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완수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화론
이진락 박사(목동반석교회)
가. 1. 서론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다. 부흥 운동가들은 대체로 갑작스러운 회심과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서 회심의 체험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회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화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19~20세에 쓴 결심문은 에드워즈가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1) 19~22세에 쓴 일기와 35세 경에 쓴 자서전을 보면, 에드워즈가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복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했고, 더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으며,2) 죄죽임과 자기 부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3) 1734년 말부터 시작되어 1736년 초까지 지속되었던 노스햄턴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기록한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다. …… 그러나 전반적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크고 놀라운 회심과 성화의 역사가 있었다.”4) 회심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난 역사를 ‘회심과 성화의 역사’라고 말한다. 1740년부터 시작되어 미국 전역을 달구었던 부흥의 열기가 사그라진 후, 부흥을 반추하면서 쓴 책인 「신앙적 감정」에서도 성화의 주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에드워즈의 사상에서 성화라는 주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별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물론 에드워즈의 윤리 사상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어왔지만, 성화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별로 없었다. 본고는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성화의 주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에 서서 에드워즈의 성화론의 원리와 내용을 검토하려고 한다. 에드워즈에 있어서 성화의 원리는 경향성(habit), 전체성, 진정성, 및 지속성이다. 그리고 성화의 내용은 참된 덕,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본성의 변화(겸손, 온유, 용서, 자비, 및 부드러운 마음)이다.
나. 2. 성화의 원리
1. (1) 경향성(habit)
경향성(습성)이라는 말을 철학적 의미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범주를 10개로 분류했다: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자세, 상태/습성, 능동, 그리고 수동.5) 이 중 상태/습성(헬라어로는 ἕξις, 라틴어로는 habitus)에 해당하는 말이 경향성(habit)이다.6)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경향성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소유하고 있는 우유성(偶有性)이다. 즉, 실체의 반복적인 행동을 통하여 습관화됨으로써 지속성의 상태를 가지는 것이지 경향성 그 자체가 실체와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이러한 경향성(습성) 개념을 주로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중세 신학자들 사이에서 은혜를 둘러싼 논쟁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지만, 경향성 개념과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되지 않은 은혜(gratia increata)와 창조된 은혜(gratia creata)이다.7)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면, 창조되지 않은 은혜란 성령을 말하고, 창조된 은혜란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을 가리킨다.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은 주로 영혼 안에 창조된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일종의 실체다. 주입된 경향성을 실체로 볼 경우, 우리 안에 있는 의는 본래적인 의(우리 자신의 것인 내재적인 의)로 간주되고, 루터가 말하는 낯선 의(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적인 의)가 설 자리는 없게 된다.
에드워즈의 선배 청교도들도 가끔씩 경향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들은 주로 중생과 은혜와 덕에 대해서 논의할 때 경향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8) 다시 말해서 철학적인 영역이 아닌 신학적인 영역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오웬(John Owen)에 따르면, 중생자의 새로운 본성은 “선행하는 거룩의 행위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뿌리이다. 여러 번에 걸친 행위에 의해서 획득된 경향성(habits)은 …… 새로운 본성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은 “계속 습관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으로써 행동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러나 거룩은 “은혜롭고 초자연적인 경향성이다.”9) 존 플레이블(John Flavel)에 의하면, 경향성은 능동적이고 활력 있는 힘이다. 연못이나 샘들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과 강물의 관계는 능동적인 힘과 거기에서 솟아나오는 행동들의 관계와 같다.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는 은혜의 경향성이 중생한 사람에게 새롭게 은혜로 받은 능력과 그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지향성을 준다고 했으며, 성격의 상태, 영속하는 실재의 원리, 혹은 제2의 본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0) 이러한 청교도들의 경향성은 실체가 아니라 성도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은혜의 속성 내지 은혜의 힘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선배 청교도들의 경향성 이해를 거의 물려받는다.
에드워즈의 지성적 배경을 깊이 연구한 노만 파이어링(Norman Fiering)은 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경향성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경향성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다. “외적 행동의 단순한 반복이 어떻게 내적 성향의 확립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경향성은 [성격을] 형성하게 해주는 행동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행동의 축적, 즉 단순한 양적인 사실일 뿐인가?”11) 이 질문에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서구 도덕 사상에서 경향성의 이론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어떤 개념과 섞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경향성이 행동의 반복을 통해서 획득되어졌다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주입된 것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 이후 인간의 내적 부패는 도덕적 경향성의 관점에서 생각되었으며, 구원받은 자의 갱신된 상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것은 행동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은 은혜에 의해서 수여된 거룩과 덕의 지울 수 없는 경향성에 의거한 것이다.”12) 파이어링은 경향성은 행동의 축적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임에도 불구하고-행동에 의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개념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파이어링은 경향성을 성화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로 보고자 하는 우리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경향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중요하게 취급한 학자는 이상현이다. 그는 에드워즈가 경향성(habit) 혹은 성향(disposition)을 자기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삼고 성향적 존재론(dispotional ontology)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13) 그에 따르면, 경향성은 단순히 하나의 관습이나 정규적인 형태로써의 지속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유형의 사건과 행동을 지배하고 일으키는 능동적 경향이며, 목적성을 가지는 힘이다.14) 뿐만 아니라 경향성은 사건과 행동을 지배하는 힘이 가지고 있는 법칙이며, 더 나아가서 실재성의 양태로서 독특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5)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빌려서 말한다면, 에드워즈의 경향성은 순전한 잠재태와 충분한 현실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모종의 실질적인 원리로서 사건들과 행동들을 지배하고 일으키며,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며 지속하는 원리이다. 이상현은 이러한 경향성의 원리를 온 세계와 사물과 인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도 경향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분한 현실태인 동시에 경향성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재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티븐 홈즈(Stephen Holmes)는 이상현의 이러한 에드워즈 해석을 정면으로 논박하며 에드워즈는 성향적 존재론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홈즈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리에는 존재론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에드워즈가 배운 개혁주의 전통은 경향성의 개념에 관심이 없었고 신학적 보수주의를 견지했다. 그런데 이상현의 에드워즈 신학 설명에는 과정신학의 주장들과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그러므로 만약 이상현의 말대로 에드워즈가 성향적 존재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으로 재개념화했다면,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떠난 것이라고 단언한다.16) 에드워즈의 사상에는 존재론적 사고가 나타나기 때문에 스티븐 홈즈의 이상현 비판은 약간 과도한 면이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을 존재론으로 확장시켰을 때, 역사적 개혁신학의 전통들과 여러 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앙리 모리모토(Anri Morimoto)는 자신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와 구원의 가톨릭적 비젼」(Jonathan Edwards and the Catholic Vision of Salvation)에서 성향적 존재론에 입각한 구원론을 전개하면서, 에드워즈의 구원론은 본질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17) 이상현의 에드워즈 해석은 분명히 탁월하지만, 경향성을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 에드워즈 신학의 모든 부분에 적용한다면,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과 멀어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에 대한 이상현의 해석 전체에 대해서 논쟁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것은 현재의 연구 범위를 벗어난 매우 어렵고 복잡한 주제이다. 다만 우리는 에드워즈가 경향성 개념을 성화의 원리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경향성을 말할 때, 그것은 성도의 인격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원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드워즈의 말을 살펴보기로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신앙적 감정은 경향성적(성향적)이다. “신앙의 정도는 현재 감정이 작용하는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속에서 작용하는 경향성의 힘과 고정성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감정은 경향성적이기(habitual) 때문이다. 그리고 경향성의 힘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현상, 혹은 마음의 생각이 갑자기 급하게 변해서 생기는 내부적인 결과에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18) 그러므로 현재 감정이 얼마나 고양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감정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향성의 힘과 고정성이 더 중요하다. 경향성의 힘은 감정나 행동이 외부로 얼마나 드러나는가 하는 것과 비례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성도의 영혼의 내부에서 은혜의 기초가 얼마나 견고하게 터를 잡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일시적으로 외부로 드러나는 감정적이고 행동적인 표현들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경향성과 원리는 실제로 작용해야 하고 외적인 열매가 산출되어야만, 그것이 올바른 경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에드워즈의 경향성은 본성의 원리 혹은 행동을 위한 토대이다. 그리고 은혜의 경향(tendency)은 은혜의 본성이자 거룩한 실천의 원리이다. 경향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에드워즈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자.
이 새로운 영적 감각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새로운 성향(dispositions)은 새로운 기능이 아니라 본성의 새로운 원리이다. 더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나는 ‘원리들’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본성의 원리라는 말은 본성 안에 있는 토대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옛 본성이든 새 본성이든 간에 영혼의 기능을 작동시키는 특별한 방법이나 종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성의 원리는 본성적 경향성이나 행동을 위한 토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작용으로 [영혼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과 성향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19)
이 인용문을 자세히 보면, 새로운 영적 감각, 본성의 새로운 원리, 본성 안에 있는 토대, 영혼의 기능을 작동시키는 것, 그리고 행동을 위한 토대, 이런 말들이 모두 거의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이 경향성이다. 그렇다면 경향성은 성도의 영혼 속에 주입되는 영적이고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20)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21)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은 거의 대부분 성령의 내주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한 주입 혹은 조명이 성도의 영혼 안에 본성의 새로운 원리나 토대로 혹은 경향성으로 자리를 잡으면 영혼의 기능을 작동시켜서 실천하게 한다. 특별히 여기서 경향성은 지속적으로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고 은혜가 실천적으로 발휘되게 하는 힘과 관련이 있다. 계속해서 에드워즈의 다음 진술을 살펴보자.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경향(tendency)은 실천을 지향한다. 은혜와 실천의 연결은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참된 은혜는 비활동적인 것이 아니다. 천지에 이보다 더 활동적인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 그 자체이며 가장 활동적인 종류의 생명이며 더 나아가서 영적이고 신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열매 없는 메마른 것이 아니다. 본성상 은혜보다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경향(tendency)이 더 큰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없다. 마음속에 있는 경건은 실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것은 샘이 물줄기와 관계있는 것과 같고, 태양빛의 본성이 비춰진 광선들과 관계있는 것과 같고, 생명이 호흡이나 맥박과 관계있는 것과 같고, 경향성(habit)이나 행동의 원리가 행동과 관계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은혜의 본성이자 개념이고, 그것이 거룩한 행동이나 실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22)
경향성은 궁극적으로 실천을 지향한다. 경향성 속에는 실천의 원리가 들어있다. 어떤 면에서는 경향성 자체가 실천의 원리이다. 은혜는 생명이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생명의 운동을 한다. 생명의 운동은 열매를 맺는다. 은혜가 실천 혹은 열매와 연결되는 것은 샘이 물줄기로 흘러나가는 것이나 태양빛이 광선으로 비추어지는 것과 같다. 행동의 원리인 경향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과도 같다. 경향성은 행동의 원리로서 지속적으로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서 열매를 맺는다.
2. (2) 실천의 전체성, 진정성, 그리고 지속성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12가지 확실한 표지들 중 12번째 표지인 실천에 대해서 진술한 직후에 성도의 영적인 실천의 원리 3가지를 제시한다. 일단 에드워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1)이 세상에서 성도의 행동이나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universally)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를 따라야 한다. (2) …… 성도는 최고의 진지함과 부지런함으로 거룩한 실천의 과업을 주된 일로 삼고 헌신하고 추구해야 한다. …… (3)성도는 삶이 끝날 때까지 실천의 과업을 지속해야 한다. ……”23) 이 세 가지 영적인 실천의 원리는 전체성, 진정성(혹은 신실함과 열정), 그리고 지속성이다. 이 세 가지 영적 실천의 원리들-전체성과 진정성과 지속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삶 전체로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살아간다.
참된 성도는 전체적인 신앙의 모습에서 조화와 균형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웃들에게는 큰 사랑을 보여주지만 자기 아내나 가까운 친척들을 싫어하는 경우, 남쪽 땅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사랑하지만 북쪽 땅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무관심한 경우, 어떤 사람의 영혼을 많이 사랑하는 척하지만 그의 몸에 대해서는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경우, 그리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경우 등은24)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깨진 경우들이다.
참된 성도는 신앙적 감정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결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혜를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했을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부족할 경우, 본성적인 기질상의 결점이 드러날 경우, 그리고 다른 많은 약점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깨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참된 신앙과 은혜로운 감정들이 터무니없는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는 없다.25) 물론 참된 성도라도 항상 동일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며 최고의 성도라도 가끔씩은 지속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결코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어린 양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나 따라가는 참된 신부들의 마음에는 결코 [심하게 흔들리는] 불안정성과 변덕스러움은 없다. 그런 불안정성과 변덕스러움은 거짓된 마음을 가진 신앙고백자에게나 있는 것이다.”26) 참된 성도라도 어느 정도 퇴보하거나 특별한 어떤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신앙생활에 싫증을 내고 지속적으로(habitually) 싫어하고 무시하는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27)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새로운 피조물로서 영과 혼과 몸이 전체적으로 거룩해졌기 때문에, 회심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뚜렷한 차이가 없을 만큼 타락할 수 없다.28) 참된 성도라면 받은 은혜에 대하여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속성은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의 여러 관련 진술들을 보면 참된 성도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속성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좀 더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성화의 과정에서 죄가 성도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점도 역시 분명하다.
한편, 에드워즈에 따르면, 참된 성도는 일정한 영적인 성취를 얻은 이후에도 영혼의 욕구와 갈망이 지속적으로 더욱 커진다.29) 이제 이만하면 충분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님 앞으로 지금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영적인 일들을 추구한다. 참된 성도는 영적인 감정이 커질수록 영적인 미각이 탁월성과 거룩의 달콤함을 더 많이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더 많이 보게 되고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30) 그래서 끊임없이 간절하게 은혜를 갈망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한두 번 받은 큰 은혜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거기에 머무른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를 받았고 자기가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자기한테 필요한 목적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더 이상의 은혜가 필요 없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혼 속에 심겨진 거룩한 원리에 따라서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하며 거룩을 추구한다. “참된 성도는 거룩을 추구하는 내적으로 불타는 갈망이 있는데, 이것은 생명체에 필요한 열기가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된 성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거룩을 더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찾는 영혼의 거친 호흡이 있는데, 이것은 생명체에 호흡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성도의 거룩한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이다.”31) 참된 성도는 끊임없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거룩을 갈망하고 거룩을 추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전체성과 진정성과 지속성이라는 세 가지 원리를 말했다. 이것들 중에서 에드워즈는 지속성에 대해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다. “성경에서 참된 은혜의 특별한 특징으로 주로 강조하는 것은 신앙고백자가 의무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과 다양한 시련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꾸준히 영위해나가는 것이다.”32)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들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혜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인상적인 비유를 한다. 그것은 별과 유성의 비유이다.
위선자들은 잠시 동안 강력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움직임이 지속성이 없고 불규칙적인 유성과 같다. 그 불꽃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불린다. 유다서 13절.) 그런 유성들은 오랜 기간을 사이에 두고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난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항성(fixed stars)과 같다. 그 별들은 뜨고 지며 종종 구름에 가리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궤도 안에 있으며 지속적으로 빛을 발한다.33)
유성은 멋진 쇼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일시적인 순간이 지나면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별은 유성과 같이 화려하고 열정적인 모습은 부족하지만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다.34) 참된 성도의 신앙과 신앙적 감정은 일평생 동안 지속된다. 일평생 동안 만나게 되는 많은 유혹과 시련과 고난으로 인해서 굴곡을 겪게 되지만 참된 신앙의 빛이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결코 없다. 에드워즈는 유성과 별의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도 말하면서, 성도의 은혜의 지속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싶어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위선자들은]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잠시 동안 시냇물처럼 흘러서 넘치지만 곧 말라버리는 물과 같지만, 참 성도는 살아있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다. 그 물줄기는 소나기가 오면 증가하고 가뭄이 오면 감소하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흐른다.”35) 위선적인 감정은 바람에 불려가는 구름처럼 불규칙하고 격렬하지만, 은혜로운 감정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강물은 구불구불 흐르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바다에 이를 때까지 같은 방향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흘러간다.36)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참된 성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똑같은 고난을 당할 때 선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반면에, 악인들은 하나님을 증오하며 모독한다. 이로 보아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의 본성이 중요하지 고난의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정물통을 흔들어보아라. 그러면 더러운 악취가 풍길 것이다. 이제 향료를 흔들어보아라. 똑같은 동작이지만, 이때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솟아오를 것이다.”37)
가. 2. 성화의 내용
3. (1) 덕,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은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거의 같은 말이다.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삶 가운데서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성취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다.
에드워즈는 「참된 덕의 본질」의 첫 부분에서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정의한다. 덕(virtue)은 도덕적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덕은 칭찬이나 비난받을 만한 도덕적 본성에 해당되는 정신의 자질과 행동의 아름다움이다.” 덕은 “단지 이론적 사색(speculation)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향과 의지에 속한 것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적인 말을 사용한다면, [덕은] 마음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덕은 “마음의 경향성, 성향, 혹은 작용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38)
그런데 덕에는 참된 덕과 참된 덕이 아닌 것(사물에 대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관점과 관련한 덕)이 있다. 참된 덕은 “지성적인 존재에 속하는 것이고, 일반적인 아름다움(general beauty)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그 자체로서든지 그 자체와 연결된 모든 것들과 관련해서든지 간에 포괄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참된 덕에 대한 더 분명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참된 덕은 대체로 본질적으로 존재 일반에 대한 호의/사랑(benevolence to Being in general)39)에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 일반에 대한 마음의 동의(consent), 경향(propensity), 그리고 연합(union)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선의(good will) 속에서 즉각적으로 행사된다.” 에드워즈는 분명하게 “[덕은] 대체로 호의의 사랑(love of benevolence)이나 자비로운 감정(kind affection)에 있다.” 혹은 “참된 덕은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love to Being in general)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참된 덕의 본질은 존재 일반을 향한 사랑의 성향(disposition to benevolence toward Being in general)에 있다.”40)
에드워즈는 참된 덕과 참된 덕이 아닌 것만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과 사랑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특수한 아름다움, 그리고 호의의 사랑과 만족의 사랑이다. 한편에는 참된 덕과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호의의 사랑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된 덕이 아닌 것과 특수한 아름다움과 만족의 사랑이 있다. 전자는 대체로 존재 일반이나 세계 전체, 하나님, 그리고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특정한 존재, 세계의 한 부분, 그리고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후자를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전자의 토대 위에 있다면 후자는 참으로 덕스럽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참된 덕이 아닌 것일지라도 그것이 참된 덕의 토대 위에 있다면 참으로 덕스럽지만, 참된 덕의 토대를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결코 덕스럽지 않다. 아름다움과 사랑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제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에드워즈의 구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아름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은 서로 너무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거의 같은 의미라고도 말할 수 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논의는 뒤섞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름다움에서부터 시작하자. 에드워즈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아름다움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특수한 아름다움41), 또는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이차적이고 하위적인 아름다움.42) 어떨 때는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참되고 영적이고 원형적인 아름다움, 혹은 영적이고 덕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부르고,43) 이차적이고 하위의 아름다움을 외적인 아름다움, 혹은 본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부르기도 한다.44)
한편, 에드워즈는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두 종류의 동의(agreement)와 일치(consent)를 구분한다: (1)정신과 마음의 화합과 연합에 존재하는 진심의 동의(cordial agreement). 이것은 참된 덕이고, 원형적이고 일차적인 아름다움이고, 유일하게 참된 도덕적 아름다움이다. (2)본성적 연합(natural union) 혹은 동의. 이것은 일차적 아름다움의 모형(image)이다. 이것은 본성과 형식과 양 등의 통일성과 일치에만 존재하는 이차적 아름다움(혹은 본성적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 성향, 혹은 감정은 이것과 관계가 없다.45) 에드워즈의 다양한 설명들의 미세한 차이를 세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겠지만, 보다 큰 틀에서 볼 때는 단순화시키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편의상 우리는 일차적 아름다움과 이차적 아름다움이라는 구분법을 주로 사용할 것이다.46)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일차적 아름다움(일반적 아름다움)은, 그것의 모든 성향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가장 완전하고 포괄적이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이다.”47) 아름다움은 본질상 관계적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관계들의 유사성이나 동일성에 있다.”48) 더 나아가서 존재도 관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49)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존재는 비례(proportion)이다.”50) 에드워즈는 아름다움과 존재를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이해한다. 아름다움은 존재의 내부에 녹아 있는 동시에 존재의 외부로 드러난 모습이다.51) 에드워즈는 참된 아름다움은 사물과 인간과 세계와 우주와 그 너머까지 다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탁월함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홀로 떨어져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더욱 확장된 것의 일부로서는 흉한 것, 혹은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는 아름답지만 사물 전체(all things)를 포괄하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거짓된 아름다움이고 제한적인 아름다움이다. 사물 전체(university of things)와의 관계에서 아름다운 것은 일반적으로 확장된 탁월함이요, 참된 아름다움이다. 사물의 체계가 더욱 확장되거나 더욱 제한될수록, 그 아름다움은 더욱 제한되거나 더욱 확장된다.”52)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특수한 불균형(disproportion)이 때때로 일반적 아름다움에 더해져서 더욱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더욱 아름답게 된다.”53)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참된 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다른 존재들보다 무한하게 크시고 훨씬 탁월하실 뿐만 아니라 존재의 전체 체계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모든 존재와 모든 아름다움의 기초요 원천이시다.” “그분의 존재와 아름다움은 말하자면 모든 존재와 탁월함의 총합이요 포괄이다.”54) 이러한 말들은 다 전체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다. 일차적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존재 전체와 관계되는 것이다. 사물과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 모두를 포괄하지 않고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그것은 아무리 커도 전체에 비하면 부분이 된다. 전체가 아닌 부분과 관계된다면, 그것은 덕이든 아름다움이든 사랑이든 간에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이차적인 것이다.55)
에드워즈에게는 전체가 중요하다. 부분도 전체의 맥락 안에서만 참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전체의 맥락 속에 존재하지 않는 부분적인 것 혹은 이차적인 것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기 위해서 사적인 감정(private affection)를 언급한다. 사적인 감정은 일반적인 사랑과 분리되어있을 경우에는 일반적인 사랑(general benevolence)에 반대하는 경향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일반적인 존재(general existence)에 반대하게 만들기도 한다.56)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기 가족보다 자기가 속한 도시와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더 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국가보다 지구를, 지구보다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 더 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57)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모든 존재와 아름다움의 기초와 원천이신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랑은 부분적인 사랑일 뿐이며, 사적인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사적인 감정은 존재의 특정 부분에 대한 반응이다. 만약 존재 전체와의 일치와 연합 속에서 존재의 특정 부분을 알고 느끼고 반응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덕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존재 전체와는 분리되어서 존재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적인 감정은 존재 일반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존재 일반에 의존하지 않고 종속되지 않는 사적인 체계에 제한된 감정은 참된 덕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 피조물이나 피조계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지고하고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성향과 연합에 의존하지 않고 종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덕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58)
하지만 부분적인 것이나 이차적인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부정적인 태도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존재 일반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차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의 도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와 관련해서 덕스러운 호의(virtuous benevolence)의 첫 번째 대상과 마음의 덕스러운 성향의 두 번째 대상의 구분에 대한 에드워즈의 설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59) 덕스러운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은 존재 일반[즉, 하나님]이고, 두 번째 대상은 사랑을 가진 존재(benevolent being)이다. 여기서 덕스러운 사랑의 두 번째 대상이 사랑을 가진 존재인 이유는, 사랑을 가진 존재의 마음속에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순수한 사랑의 이차적 기초는 대상 속에 있는 덕스러운 사랑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60) 아마도 신학적인 언어로 풀어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참으로 덕스러운 사랑을 가진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즉, 존재 일반]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덕스러운 사랑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성향을 어디에서 발견하든지 그러한 사랑을 가진 존재를 참으로 덕스러운 사랑으로 사랑한다. 다시 철학적인 언어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존재 일반[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사적인 감정에 제한시킨 것이 아니라 존재 일반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다.61)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토대 위에서의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분리된 이웃 사랑은 사적인 감정일 뿐이다. 그것은 참된 덕도, 참되 아름다움도 아니다. 참된 덕은 모든 곳에서 전체적으로 존재 일반(하나님)과 연합하고 일치되어 있다. 참된 덕은 이웃의 존재에 대한 사랑에 제한되지 않고, 이웃의 존재 안에 있는 존재 일반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에드워즈는 「참된 덕의 본질」에서 참된 덕과 참된 덕이 아닌 것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참된 덕이 아닌 것을 총 4장에 걸쳐서 다룬다: 제3장 이차적 아름다움, 제4장 자기 사랑, 제5장 양심, 그리고 제6장 본능적인 사랑과 동정심. 물론 이런 것들은 존재 일반과 일치되고 연합되어 있다면, 참으로 덕스럽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분적인 것에만 제한된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코 참된 덕이 아니다. 존 스미스는 이를 은혜의 도덕(morality of grace)과 본성의 도덕(morality of nature)으로 구분한다.62)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은혜의 도덕과 본성의 도덕을 구별하는 기준이다. 은혜의 도덕은 성도의 도덕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결코 성취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본성의 도덕(이차적 아름다움, 자기 사랑, 양심, 및 본능적인 사랑과 동정심)이 왜 은혜의 도덕이 될 수 없는가를 논증한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설명 속에는 자연인들의 본성의 도덕에 대한 무언의 긍정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연인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관계들과 질서들은 결코 참된 덕과 참으로 영적인 아름다움의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자기들 나름대로의 관계들과 질서들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일반 은총 혹은 보존 은총의 개념과 어느 정도 유사해 보인다.63)
우리는 에드워즈가 제시한 4가지 본성의 도덕들 중에서 이차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이차적 아름다움은 “일차적 아름다움의 모형(image)이다. 그것은 영적인 존재들에만 특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에도 있다. 그것은 형태, 방법, 양, 가시적 목적이나 계획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상호 일치와 동의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규칙성, 질서, 통일성, 균형, 비례, 조화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64) 이차적 아름다움은 일차적 아름다움(영적인 아름다움)의 균형과 비례와 조화를 반영한다. 일차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영적인 감각65)을 가진 사람들은 이차적 아름다움의 균형과 조화를 통하여 일차적 아름다움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차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일차적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모른다.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차적 아름다움은 자체 내에서의 관계적인 구조와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와 조화는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들-지혜, 정의, 및 의무 등-에도 있다. 지혜와 정의와 의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회는 질서가 유지되고 아름답게 된다. 존 스미스에 따르면, “이차적 아름다움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일반 도덕(common morality)의 주요 원천이다.”67) 이차적 아름다움 이외의 본성의 도덕인 자기 사랑, 양심, 및 동정심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이것들은 분명히 영적인 아름다움이나 신적인 사랑이나 참된 덕이 아니지만, 제한된 한계 안에서 자기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자. 에드워즈는 사랑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호의의 사랑(love of benevolence)과 만족의 사랑(love of complacence).68) 만족의 사랑은 대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호의의 사랑은 대상에 대한 마음의 감정과 성향이 대상의 유익과 열망의 성취를 바라고 대상의 행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무한 소급 논리 혹은 순환 논리에 대한 복잡하고 정교한 설명을 논외로 치고 단순하게 결론을 말한다면, “덕스러운 사랑의 일차적인 대상은 존재 자체다. 참된 덕은 일차적으로……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성향과 연합에-더욱 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존재 일반에 대한 절대적 사랑(absolute Benevolence)에 존재한다.”69) 한마디로 말해서, 참된 덕과 참된 사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에드워즈의 사상에서, 사랑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에드워즈는 「사랑과 그 열매」의 첫 번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며,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모든 덕은 기독교적 사랑 혹은 신적인 사랑으로 요약된다.”70) 에드워즈가 「신앙적 감정」에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적이고 신앙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적 감정이 있는 사람이며, 신앙적 감정이 있는 사람은 참된 덕인 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성령은 …… 강력하고 거룩한 감정의 영”71)이시며 “성령의 본질은 사랑이시다.”72) 그래서 에드워즈는 감정들 중에서 최고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모든 감정의 최고봉이며, 모든 다른 감정들의 원천이다.”73) “사랑은 여러 감정들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들 중의 으뜸이요 원천이다.”74)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거룩한 감정에 존재”하지만, 이와 동시에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75) 성도가 실천해야 할 이 거룩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모세의 계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이다.”76) 성령께서 성도의 영혼 속에 내주하시면서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전달하심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해지면77), 성도의 영적이고 거룩한 신앙적 감정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표현된다. 어떻게 표현되는가? 사랑으로 표현된다. “천국이 사랑의 나라인 것처럼, 천국으로 가는 길도 사랑의 길이다.”78)
만약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참된 덕은 존재와 아름다움의 기초와 원천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이 참된 덕이시고, 사랑이시며, 신성의 아름다움이시라고 말했다: “성령 자신이 참된 덕의 유일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덕스러운 것은 영적인 것과 같다.”79) “성령의 본질은 사랑이시다.”80) “성령은 신성(Diety)의 조화와 탁월함과 아름다움이다.”81)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로 중생한 성도는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성화의 원리와 내용으로 삼아서, 전체적이고 열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4. (2) 성품의 변화
「신앙적 감정」 제3부에 나오는 확실한 12가지 표지들 중에서 6번째부터 9번째 표지까지가 성도의 성품의 변화를 다룬다. 6번째 표지는 겸손, 7번째 표지는 본성의 변화, 8번째 표지는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성품(사랑, 온유, 평온, 용서, 자비), 그리고 9번째 표지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7번째 표지의 위치가 좀 이상하다.82) 본성의 변화가 6번째 표지가 되고 겸손이 7번째 표지가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추측컨대 에드워즈는 본성의 변화 중에서 겸손을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 덕목으로 보고 특별하게 다루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분량 면에서 보더라도 6번째 표지인 겸손에 대한 내용이 7번째부터 9번째 표지까지의 내용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성의 변화에 관련된 논제들을 간략하게 다루고, 다음으로 성품의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논의의 전개상 좋을 것 같다.
우선 본성의 변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진술에서부터 시작하자.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은혜로운 감정이 먼저 가고 본성의 변화가 그 뒤를 따른다. 본성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거기에서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감정은 깜쩡과 지성과 의지가 통합된 인격의 중심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마음이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알고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지면 즉시 의지가 움직인다. 은혜가 성도의 영혼 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은혜에 반응하여 은혜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즉시 은혜로운 감정이 작동한다. 그러고 나서 성도의 성품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들이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다.
에드워즈는 7번째 표지에서 본성의 변화를 다루기는 하지만, 본성의 변화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다루기보다는 회심은 반드시 본성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경이 회심을 묘사할 때 본성의 변화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회심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사람에게 크고 뚜렷하고 지속적인 변화가 없다면, 얼마나 강하게 감동을 받았든지 간에, 그들의 모든 상상과 겉치레는 다 헛된 것이다.”83) 회심 때 일어나는 변화는 전반적인 변화이다. 은혜는 사람 안에 있는 죄악된 것들을 변화시킨다. 회심이 사람의 악한 본성적인 기질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않지만, 은혜의 능력으로 그런 기질을 고칠 수 있다. 물론 회심 이후에도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적 기질 때문에 유혹에 빠지거나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회심한 사람은 죄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죄가 자기 인격의 주된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성도의 영혼의 기능과 연합되게 하시고 본성의 원리의 방법을 따라서 거기에 내주하시면서, 성도의 영혼에 은혜를 베풀고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84) 성도의 영혼은 의의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 본성이 변화되고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된다. 태양이 성도 안에 빛을 비췰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역시 작은 태양이 되어서 빛의 근원의 본성에 참여한다. 이 점에서 성도들이 빛을 받는 방식은 유리가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보다 성막의 등불과 비슷하다. 성막의 등불은 하늘에서 온 불로 붙여졌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불타고 빛을 내게 된다.85) 이와 같이 회심한 성도는 기본적으로 크고 전반적이고 중대한 성품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다.
이제 성품의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자. 성도의 영혼 속에서 성령이 내주하시면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기고 본성의 새로운 영적 원리가 작동하게 되면 영적인 지식이 생기고 의향과 의지가 새로운 원리에 따라서 마음을 변화시킨다. 성도의 전 인격에 걸쳐서 전반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성품들 중에서 특별히 다섯 가지를 강조한다. 마음의 거룩에 속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본질에 더욱 일치하는 기질이나 성품이나 덕이 있다. 에드워즈는 그런 덕을 “겸손, 온유, 사랑, 용서, 자비와 같은 것들”86)이라고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덕은 6번째 표지에서 9번째 표지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거의 일치한다. 6번째 표지는 겸손(humility), 8번째 표지는 온유(meekness), 사랑(love), 용서(forgiveness), 자비(mercy), 그리고 9번째 표지는 부드러운 마음(tenderness of spirit)이다. 9번째 표지인 부드러운 마음은 주로 죄에 민감한 마음을 가리키지만 온유한 마음과도 관련이 있다. 성품의 변화와 관련된 이 다섯 가지 덕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윤리를 다루는 학자들은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에드워즈의 해당 본문을 충분하게 살펴보고 주의 깊게 연구하여 충실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첫째, 겸손이다.87) 두 종류의 겸손이 있다. 율법적인 겸손과 복음적인 겸손이다.88) 율법적인 겸손은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성적 완전성-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위대하심, 그리고 두려운 위엄 등-과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성을 알 때 생긴다. 율법적인 겸손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책과 죄성을 알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도덕적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하며, 죄의 혐오스러운 본질을 깨닫지도 못한다. 하지만 율법적인 겸손은 복음적인 겸손으로 향하는 하나의 수단으로는 유용하다. 복음적인 겸손이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감각으로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죄에 빠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발 앞에 즐겁게 굴복하고 자발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부인한다.
자기 부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세상적인 성향을 부인하고 세속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본능을 부인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 중 후자가 훨씬 어렵다. 많은 은둔자들과 수도사들은 세상적인 쾌락은 버렸지만 자존심과 자기-의로움은 부정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동물적인 탐욕을 팔아서 마귀적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한 것이다.89) 위선자들은 바로 이 영역에서 매우 크게 실패한다.
위선자들도 겸손한 척한다. 자신들이 겸손한 사람들이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인 것처럼 가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나쁘게 표현한다. “나는 모든 성도보다 작은 자입니다. 나는 사악한 피조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가치도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탁월하고 훌륭한 성도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목사가 그들에게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의 말로 인정한 것과 같이 결점이 많고 신앙도 부족하고 열매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면, 그들은 매우 화를 내며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의와 선함을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부인하지 않는 한, 겉모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영적인 교만은 대개 겸손을 가장해서 나타나며 매우 교묘하고 비밀스러운 죄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구별하게 해주는 표지는 있다. 첫째, 교만의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90) 그들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는 비밀스러운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 반면에 참으로 은혜를 입은 겸손한 영혼은 오히려 자신의 현 상태가 너무 부패했고 선함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은혜를 더 많이 받게 될수록 영혼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압도당하고 자신의 작고 초라함을 영적으로 발견하게 되며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너무 조금밖에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둘째,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겸손함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91) 보통 거짓된 체험이 가짜 겸손을 수반한다. 특별히 큰 감정을 체험하면 자신이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룬 큰 성과들에 대해서 스스로 감탄한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대단히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참된 성도는 자기 겸손이 참으로 작고 오히려 교만이 더 크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왕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신발끈을 풀어주거나 발을 씻겨주는 일을 했을 때 그것을 대단한 겸손의 행위로 생각한다. 반면에 자기를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했을 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겸손은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어떤 종이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하다가 이제는 귀족 정도의 대접만 받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속의 겸손을 발견하는 속도보다 교만을 발견하는 속도가 천 배 이상 빠르다. 교만한 사람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위대한 신학자 마스트리히트가 말한 바와 같이, 겸손은 일종의 거룩한 무기력함(holy pusillanimity)이다.92)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무기력하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남들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온통 부족하고 약점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쉽게 양보한다. 그는 남의 말에 쉽게 수긍하고 순복한다. 그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 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무시되고 존중되지 않는 것을 끔찍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뻣뻣하지 않다. 그는 까다롭거나 변덕스럽지 않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무기력한 사람이다.
둘째, 온유이다. 에드워즈는 온유한 사람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과 거의 동일시한다. 어린 아이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뿌리 깊은 악의를 품거나 큰 분노로 적개심을 쌓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에 능숙하지 않고 가장하는 일에 서투르다. 그들은 명백하고 단순하다. 그들은 자기 지식을 따르기보다는 부모와 다른 어른들의 가르침을 쉽게 따른다. 이러한 설명들은 겸손에 관한 설명과 상당히 비슷하다. 온유는 용기나 열정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의 용기는 야수적인 맹렬함이 아니고 악과 정욕과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며 죄와 싸우고 선한 감정과 성향을 따라가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의 열정(zeal)은 달콤한 불꽃과 같다. 그의 열정은 이글거리며 사람들을 불태워버리는 거친 열정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부드럽고 충만한 열정이다.93)
한편, 에드워즈가 9번째 표지에서 말한 부드러운 마음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온유와 비슷하다. 에드워즈는 부드러운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는 살만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도 부드럽다. 그는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순복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운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해치려는 외부의 악한 위협이 나타나면 쉽게 공포를 느끼며, 자기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부모에게 달려가서 숨는다. 이처럼 참된 성도도 하나님께로 달려가서 숨는다. 어린아이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경고와 위협에 쉽게 겁을 먹는다. 이처럼 참된 성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간다.94) 하지만 부드러운 마음은 약한 마음이 아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죄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더 강하게 지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생길 결과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덜 두려워한다. 그의 믿음은 안정되어있기 때문에 거의 흔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와 불쾌한 표정과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볼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인다. 이것이 부드러운 마음이다.
셋째는 사랑이고, 넷째는 용서이고, 다섯째는 자비이다. 에드워즈는 이 성품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이 성품들에 관한 성경 말씀을 열거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 성품들은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만 소개했는지도 모른다.95) 어쨌든 참으로 은혜를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확실히 모든 참된 기독교적 감정은 이런 정신을 수반한다. “이런 정신이 바로 참된 성도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의 본성적인 경향(tendency)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런 경향(tendency)을 가지고 있고 이런 방식으로 역사한다.”96)
가. 4. 결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화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고 생각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화의 원리는 경향성(habit), 전체성, 진정성, 및 지속성이다. 경향성은 은혜의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학 공식과 같은 차원의 원리가 아니고 반드시 행동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원리이다. 만약 이 경향성이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은혜의 경향성이 아닌 것이다. 한편, 성화의 과정에서 참된 성도는 전체성과 진정성과 지속성의 원리 아래에서 행동한다. 그는 전체적으로 신앙의 조화와 균형을 갖추고, 전심으로 부지런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에드워즈가 말하고자 하는 성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이며, 겸손과 온유와 용서와 자비와 부드러운 마음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은 거의 동일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덕과 아름다움과 사랑이 본래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전체와의 관계란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존재 일반과의 관계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존재 일반,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덕스럽고 아름다워야 진짜로 덕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좀 더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넘어가면, 겸손와 온유와 용서와 자비와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내용을 획득하게 된다. 더욱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하자면, 본성의 변화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간 본성의 변화를 통하여, 거룩을 추구하는 과정을 밟게 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덕스럽고 아름답고 사랑이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했다.
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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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26 vol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2008) vol. 16 : Letters and Personal Writings. Edited by George S. Claghorn, (1998), 753-759. 이하에서는 예일판 에드워즈 전집(전26권)을 “WJE-Y”로 표기하고, 권수와 쪽수만 표기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WJE-Y, 16:753.
2) WJE-Y, 16:795.
3) WJE-Y, 16:761, 763-4.
4) WJE-Y, 4:209.
5) Aristoteles, 「범주론 ․ 명제론」, 김진성 역주, (서울: 이제이북스, 2005), 36-37을 참조하라. 이 10개의 범주들 중에서 “상태”는 번역본에서는 “소유”로 번역되어있었지만, 필자의 임의로 “상태/습성”이라는 말로 바꾸었다. 사실 이 말은 상태 혹은 습성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경우가 더 많다.
6)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태/습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습성은 더 지속적이고 더 오래 간다는 점에서 일시적 상태와 차이가 난다. 앎과 덕은 그런 습성에 든다. …… 예들 들어, 정의, 지혜,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은 저마다 쉽게 변하지도, 쉽게 바뀌지도 않는 듯하다.” Aristoteles, 「범주론 ․ 명제론」, 66-67.; 또한, 「형이상학」 5권 20장에서도 상태/습성(헬라어로는 ἕξις, 라틴어로는 habitus)을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소유하고 있는 사물과 소유당하고 있는 사물 사이에 있는 어떤 현실적 활동, 즉 일종의 행위 또는 운동이다. 예를 들면, 옷을 한 번 입은 후 계속 그 옷을 입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둘째는, 사물 자체 내의 혹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배치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건강은 배치가 잘 되어 있는 상태이고 병은 배치가 나쁜 상태이다. 셋째는, 어떤 사물에 이런 배치를 가진 부분이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영혼의 덕성이 이런 습성[혹은 경향성]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경향성은 어떤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Aristoteles, 「METAPHYSICA 형이상학」, 김천운 옮김, (서울: 동서문화사, 1987), 164-165.
7) Alister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2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1:145-146을 참고하라.
8) Sang Hyun Lee, The Philosoph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24.
9) Owen, Pneumatologia, 411-415.; Norman Fiering, Jonathan Edwards's Moral Thought and Its British Context, (Williamsburg: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s, 1981), 310 p.에서 재인용.
11) Fiering, Edwards's Moral Thought, 309.
12) Fiering, Edwards's Moral Thought, 310.
13) Sang Hyun Lee, Jonathan Edwards, 책 전체가 에드워즈의 경향성 개념을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특히 3-14와 34-51을 보라.
14) Sang Hyun Lee, Jonathan Edwards, 35.
16) Stephen R. Holmes, "Does Jonathan Edwards Use a Disposional Ontology? : a Response to Sang Hyun Lee," Jonathan Edwards : Philosophical Theologian, Edit. by Paul Helm and Oliver Crisp (Burlington VT: Ashigate, 2003), 99-110, passim.
17) Anri Morimoto, Jonathan Edwards and the Catholic Vision of salvation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 54-59에서 성향적 존재론을 자세히 다룬다. 한편, 앙리 모리모토의 성향적 존재론적 구원론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포괄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Kevin Woongsan Kang,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Jonathan Edwards'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Light of Union with Christ," 309-334. 특히, 310-311을 보라.; 한편, 참고적으로, George Hunsinger의 견해도 언급할 만하다. 그는, 이상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로, 에드워즈의 성향(disposition) 개념이 개혁주의 전통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비판한다. “이러한 언급[행위를 신앙의 선언인 동시에 신앙에의 기여로 본다는 언급]을 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에드워즈가 암암리에 신앙과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범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과 행위는 둘 다 그가 성향이라고 부르는 것의 표현이다.” 또한, “에드워즈가 최종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오직 성향에 의한 칭의라고 요약하는 것이 공정해 보인다.” George Hunsinger, “Dispositional Soteriology: Jonathan Edwards on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6 (2004) : 118, 119.
18) WJE-Y, 2:118-119.
19) WJE-Y, 2:206.
20) Philip F. Gura, Jonathan Edwards: America's Evangelical, (New York: Hill and Wang, 2005), 131. 이후로는 Philip Gura, Jonathan Edwards로 약술함.
21) WJE-Y, 13:168-169. (Misc. no. l.)
22) WJE-Y, 2:398.
23) WJE-Y, 2:383.
24) WJE-Y, 2:368-371.
26) WJE-Y, 2:371.
27) WJE-Y, 2:390.
28) WJE-Y, 2:391.
29) WJE-Y, 2:377.
31) WJE-Y, 2:382-383.
32) WJE-Y, 2:389.
33) WJE-Y, 2:373-374.
34) Stephan Nichols, Jonathan Edwards: A Guided Tour of His Life and Thought, (NJ: P&R Press, 2001), 122-123.
36) WJE-Y, 2:374.
37) Augustinus, De Civitate Dei, I. 8. (Augustinus,, 「하나님의 도성」, 조호연․김종흡 역,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8, 92; 제1권 8장.)
38) WJE-Y, 8:539.
39) benevolence는 보통 “자비, 박애, 자선, 호의”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기술적 용어인“benevolence to Being in general”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 일반에 대한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가끔씩 benevolence와 love를 함께 쓰기도 하기 때문에, 전자를 호의, 후자를 사랑으로 번역하되, 때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혼용할 것이다.
41) WJE-Y, 8:540.
42) WJE-Y, 8:548.
43) WJE-Y, 8:564, 573.
44) WJE-Y, 2:281, 282.
46) 델라트르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일차적 아름다움과 이차적 아름다움보다 오히려 영적인 아름다움과 본성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더 자주 썼다. Roland Delattre, Beauty and Sensibility in the Thouught of Jonathan Edwards (New York: Yale University Press, 1968 ; reprint ed.,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6), 17.
47) WJE-Y, 8:540.
48) WJE-Y, 6:334.
49) Sang Hyun Lee, Jonathan Edwards, 77-85를 참조하라.
51) 에드워즈 사상에서 존재, 아름다움, 탁월함, 및 선의 개념에 대해서 가장 집중적인 설명을 보려면 다음을 보라: Roland Delattre, Beauty and Sensibility in the Thouught of Jonathan Edwards, 1-57.
52) WJE-Y, 6:344.
53) WJE-Y, 6:335.
54) WJE-Y, 8:551.
55) 전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다음의 언급도 참고하라. WJE-Y, 13:470. (Misc. no. 408.) “이러한 영적인 빛이 없다면, 이성적 사고는 사물들의 참된 관계 속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물들 전체(things in general)와의 관계 속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
56) WJE-Y, 8:555.
57) WJE-Y, 8:611-612에서 본질상 사적인 것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설명을 참고하라.
58) WJE-Y, 8:556-557.
59) WJE-Y, 8:545-547.
61) John Smith, Jonathan Edwards: Puritan, Prescher, Philosopher (Notre Dame, Indiana: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2), 109.
62) ibid., 107.
63) 칼빈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general grace of God) 혹은 억제하는 은총(grace …… to restrain it inwardly)에 대해서 말했다(Inst., II. ii. 17.; II. iii. 3.). 그리고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같은 칼빈주의자들이 일반 은총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H. Bavinck, "Calvin and Common Grace," Calvin and the Reformation, ed. Wm. P. Armstrong (New York: Revell, 1909); idem., De Algemeene Genade (Grand Rapids: Eerdmans-Sevensma, 1922); A. Kuyper, De Gemeene Gratie, 3 Vols. (Amsterdam: Höveker en Wormser, 1902-4).
64) WJE-Y, 8:561.
65) 에드워즈는 일차적 아름다움, 영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WJE-Y, 8:573, 620, 622-623.; 2:260, 310.
66) WJE-Y, 8:566.
67) John Smith, Jonathan Edwards: Puritan, Preacher, Philosopher, 111.
68) WJE-Y, 8:542.
69) WJE-Y, 8:544.
71) WJE-Y, 2:100.
72) WJE-Y, 8:132.
73) WJE-Y, 2:106.
74) WJE-Y, 2:108.
76) WJE-Y, 8:266.
77) WJE-Y, 8:132.
78) WJE-Y, 8:396.
79) WJE-Y, 21:197.
81) WJE-Y, 13:384. (Misc. no. 293.)
82) 존 스미스는 감정론의 근본적인 토대를 표현하는 이 일곱째 표지가 전체 목록의 중간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생각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회심에 대해서, 특히 회심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본성의 변화라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한다; "Editor's Introduction", WJE-Y, 2:36-37.
83) WJE-Y, 2:340.
84) WJE-Y, 2:342.
86) WJE-Y, 2:346.
87) WJE-Y, 2:311-340에서 에드워즈는 겸손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다룬다.
88) WJE-Y, 2:311-313.
89) WJE-Y, 2:315.
91) WJE-Y, 2:331.
92) WJE-Y, 2:337.
93) WJE-Y, 2:349-353.
94) WJE-Y, 2:360-361.
96) WJE-Y,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