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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
-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
1. 서 언
◦어버이날 :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일의 하나. 5월8일. 보건사회부에서
주관하여 조상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를 헤아리고 어른과
노인에 대한 존경과 보호에 관련된 각종 기념행사를 한다.
공휴일은 아니다
◦어린이날 : 어린이를 위하여 정한 날. 5월5일. 정부는 1970년 6월15일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선포하여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였다
이것은 대백과 사전에 ‘어버이날’, ‘어린이날’에 대해서 언급하는 설명이다. 이 두가지 뜻 깊은 날을 맞이하면서 5월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결국은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부모는 자식의 중요성과 꿈을 심어 줌으로써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 핵가족화로 이런 의미가 차츰 사라지는 것 같다. 이것은 왜 일까?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신문기사를 보자
가족내 서열 노친네가 꼴찌
소 팔고 논밭 팔아가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그 덕으로 아들은 무사히 공부를 마친 뒤 취직을 했고, 또 자기에게 걸맞은 아내를 얻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들이 성공하면 그 부모를 용상에라도 올려줄 듯, 유난스런 한국적 모성애를 쏟아 붓느라 자기 인생을 탕진한 어머니는 병들어 죽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아들집으로 올라왔다. 노인 혼자 시골집에서 밥해먹고 홀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아들과 함께 살아볼 요량으로,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아들집에 올라왔으나,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며느리의 눈총을 받더라도 손주 재롱을 보면 혼자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듯한, 덜 쓸쓸한 노년을 그려보면서 고향 이웃들과 작별할 때의 꿈과는 너무도 달랐다. 며느리는 고사하고 아들조차도 ‘그저 며칠 계시다가 내려가시려니’ 생각하는 눈치였으니, “잘 올라오셨습니다. 노인이 혼자서 어떻게 조석 진지 손수 지어 잡수시고 농사까지 지을 수 있느냐”는 동정 어린 한마디는 빈 입에라도 뱉어주지 않았으니, 당초의 기대는 너무나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시골에서 손수 말린 곶감을 손주에게 주면, “그런 것 안 먹는다”면서 도시 아이들의 군것질거리를 더 좋아했고, 할아버지 얘기보다 게임이나 TV프로를 더 즐겼다. 아파트가 답답해 나갔다가 점심때를 놓치고 들어와도, 강아지 밥은 때맞춰 챙겨주면서도, 노인의 끼니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다. 마른 빵 조각으로 끼니를 겨우 때웠는데, 국물 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목이 말라 부엌에라도 들어 갈라치면 파출부가 질겁을 하지 않는가?
노인이 외출을 해도 “어딜 가시느냐”고 묻는 이가 없고, 심지어는 파출부 조차도 열쇠없이 문 열어달란다고 짜증을 내며 객식구 취급했다. 한 열흘쯤 머무르는 동안 아들집의 역학구조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으니, 손주는 1번, 며느리는 2번, 돈벌어오는 아들은 3번, 재롱부려주는 강아지는 4번, 며느리 대신 일을 해주는 피출부는 5번인데, 군식구나 다름없는 노인 자신은 꼴찌인 6번이 아닌가. 견디다 못한 노인은 옷가지를 챙겨 가방을 쌌다. 그러나 손주도 며느리도 파출부조차도 “왜 그러느냐”고 묻지를 않았다. 노인은 아들집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그래도 내 자식인데, 자식에겐 알려야지’ 하고 아들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얘 3번아, 6번은 그만 내려간다”라고 알렸단다.
노인학대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의 얘기였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효 실천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였으며, 효 정신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좋은 전통이며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정신인 것이다.
그럼 어버이날에 대한 유래와 시대별로 효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보자.
2. 어버이날의 유래
어버이날의 유래는 1910년께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하여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1914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정한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4년부터 원래의 ‘어머니날’을 개칭해 어머니․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조상과 어른들을 위한 날로 포괄적 규정을 한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은 서양 사람들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돈독하였었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님에 대한 효성을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고,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내었었다.
부모님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추우나 더우나 모든 괴로움을 무릅쓰고 우리를 길러 주시고 또 항상 걱정을 하신다. 그러나 자식된 우리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효도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께 걱정 끼쳐 드리지 않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3. 시대별로 본 우리 孝
가. 고조선 시대의 孝
한국에서 형식적 체계로써 효의 가르침이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단군 때의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단군이 하느님의 자손이고 그들 자신을 天孫이라고 자부하였다. 단군은 신성한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여 민족의 생활이 행복하였다. 『규원사화』안군기에 나오는 단군의 가르침에 따르면,
"네가 사는 것은 부모가 있기 때문이요,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오직 너의 부모를 공경하고 이에 능히 하늘을 공경하여 나라 안에 미치면 이것이 곧 충효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곧 부모는 하늘에서 내려와 살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근본을 섬기는 효라 할 수 있다.
나. 삼국시대의 孝
삼국시대 때부터는 정책적으로도 효가 크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1) 신라의 경우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신라 경덕왕은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 조곡 3백석을 내리고, 집과 전답을 하사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눌지왕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해마다 전국 각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불러모아 남당(南堂) 뜰에서 거대한 養老宴을 베풀었으며 눌지왕도 친히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잔치가 끝날 무렵 노인들에게 곡물과 비단을 나이에 따라 분량을 달리하여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2) 고구려의 경우 『문헌비고』에 의하면 고구려의 유리왕은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없는 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노인들에게 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로 하는 물자를 하사해 주었고 고구려의 태조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없는 노인, 경제력이 없는 노인에게 의식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3) 백제의 비류왕도 불우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救貧政策을 실시했음이 『문헌비고』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도 처음에는 ‘海東曾子’라고 불릴 정도로 효행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4) 통일 신라
신라는 통일 이후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하였는데 8세기 경덕왕 때에는 이를 태학감으로 개칭하면서 교과내용을 3과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그 중 효사상의 중심경전인 『효경』을 3과의 공통 필수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가족제도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 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시대까지의 가족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진평왕대의 고승 圓光은 평생을 지킬 가르침을 구하는 두 젊은이(貴山과 項)에게 世俗五戒를 주었다.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이 그것인데 여기서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 고려시대의 孝
고려는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旌表정책을 통해 효행자들을 표창함으로써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을 권장했으나, 서민들은 물론 지배층에서도 일반적으로는 불교식 상제례를 행했다.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설화 중에서 효행에 관한 일화가 점철되어 있음을 볼 때 효가 얼마나 민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중요시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1) 태조 왕건
고려 태조 왕건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일에 충실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건국 초기부터 효도를 정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2) 성종
고려가 건국된 지 80여 년 후인 성종 때에 이르러 그러한 태조의 정신은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성종은 교지를 내려서 " 무릇 나라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먼저 근본이 되는 것을 힘써야 하나니, 그 근본이란 효도보다 더함이 없다. 효도는 삼황오제의 本務이며 모든 일의 기강이요 百善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성종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이웃 노인들을 공경하는 법이라고 강조하면서 80세 이상 되는 노인을 전국적으로 조사하여 그들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경로사상을 온 백성에게 장려하였다.
또한 성종은 12목에 경학박사를 두게 한 다음 교지를 내려 말하는 가운데 "재능과 인격을 겸비하여 임금을 섬김은 忠의 시작이요,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냄은 효의 다함이라"하고 "經學과 孝悌에 뛰어난 사람들을 발굴해 올리라"고 하여 忠과 孝를 아울러 적극 권장하였다.
(3) 문종과 인종
문종과 그 왕후는 지방에 행차할 때마다 그 지방의 효자․효부와 열녀 등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많은 상을 내려서 그들을 격려하였으며, 노인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곤 하였다. 인종은 교지를 내려 효도를 적극 권장하였을 뿐 아니라 불효막심한 자식들은 엄중하게 다스리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효경』과 『논어』를 대량으로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골고루 보급시킴으로써 효도정신을 크게 선양하였다.
(4) 의천
大覺國師 '義天'은 그의 『講蘭盆經發辭』에서, "큰 자비는 사랑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큰 孝는 친하지 아니함이 없다." 라고 하여 효의 참뜻과 불효죄의 막대함을 이야기하고 효를 행하면 복이 더없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5) 현종
고려 현종은 『현화사비문』에서, "양친의 慈愛에 보답하고 모든 부처님의 誓願에 응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라고 하였으며, 蔡忠順도 같은 비문에서, "유교와 불교의 二門은 모두 효를 최고로 한다고 할 것이니, 효의 지극한 덕은 두터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6) 효행자 표창제도
고려왕조는 효행자를 표창하는 제도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지방관료들로 하여금 해당지방의 효행자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보고된 효자들에게는 그 효행정도의 차이에 따라 술과 과일이나 비단 또는 약식 등의 푸짐한 상품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조세의 감면이나 부역의 면제 그리고 旌表, 旌閭 또는 신분상의 해방이나 승진 등 매우 융숭한 포상을 하였다. 나라에서 이런 '정려'를 내린 것은 효도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고 뉘우쳐서 효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고려왕조는 관리채용제도에 있어서도 '孝廉制'를 실시하여 효성이 지극한 자를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효렴제'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행해오던 제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왕조에 이 제도를 실시했다.
(7) 효행록 편찬
고려 말기에는 권보에 의해 『孝行錄』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효행설화를 최초로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노래로 불러 외우도록 하여 효도를 고취하는 자료로 삼았다.
라. 조선시대의 孝
(1) 유교적 孝로의 재편
조선 왕조는 개국과 함께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정책을 실시하여 국가 시책과 일반 민중의 생활양식을 모두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 생활방식으로 개혁시켰다. 여말에 들어온 송대 성리학은 이전의 유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명확히 했다.
성리학이 불교적 효행을 부정하고 유교적 효행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 유교적 가례의 정비와 실천이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朱子家禮』로 불리는 예서의 편찬이다. 『주자가례』에서 관혼상제 의식이 조상의 위패를 모신 家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의도는 바로 불교적 효행을 유교적 효행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2) 주자가례의 보급
그리하여 고려 말기부터 성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적 효 사상을 담은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했다.
(3) 효 사상을 다룬 많은 책들의 간행
'삼강오륜'은 정치적, 사회적 생활 규범으로서 체계화되었고, 인쇄술의 발달과 문화의 향상에 힘입어 효 사상의 보급이 상당히 진정되었다. 효 사상은 사회 교화 이념으로 더욱 일반화되었고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교본으로서 많은 책들이 활발하게 간행되었다.
특히 세종은 즉위 10년에 군신들에게 孝悌의 정신을 높이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안으로 경연에서 변계량 등 군신들에게 "『효행록』같은 서적을 널리 배포해서 국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보고 익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직제학 '설순'에게 편찬을 지시하였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효행서로는 『삼감행실도』 『이륜행실도』 『삼강록』등이 있다. 특히 숙종의 서문과 송시열의 발문이 붙은 박세무의 『동몽선습』은 예의와 착한 심성의 행실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 교육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양 교과서로서 효행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간행되었다.
(4)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효사상
(가) 퇴계의 효
그는 인륜사상으로 ‘효’와 ‘인’을 강조했다. 그는 『戊辰六條疏』에서 "효는 백 가지행실의 근원이 되는 것이니 한 가지 행실이라도 어그러짐이 있으면 순수한 효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인은 만 가지 선에 으뜸이 되는 것이니 한 가지의 선이라도 갖추지 못하면 인은 온전한 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퇴계는 『修身十訓』의 제 7훈에서 "가정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효를 극진히 하고 공경함(悌)을 극진히 하여 윤리를 바로 세워나가되, 늘 은혜와 사랑을 돈독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禮安鄕約文』에서는 "孝와 悌와 忠과 信이 사람으로서 지켜가야 할 도리의 근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나) 율곡의 효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핵심이 들어있는 『성학집요』를 선조에게 올려 우선 국왕부터 성군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백성들의 가정정신이 희박하였기 때문에 총체적 난국을 초래하였다고 보고, 자신부터 효를 실천하는 수범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海州 石潭에 가서 '청계당'을 지어 종족을 모두 모아놓고 함께 살면서 경계하여야 할 訓辭(同居誡辭)를 지었다.
또한 율곡은 『社倉契約束』에서는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를 떠밀어 넘어뜨리는 행위를 大過惡이라고 하여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私刑을 함부로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契에서는 범인을 관청에 고발하여 처벌을 받게 하고, 그 후에 계에서 제명하고 대화도 주고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부모에게 낯을 붉히며 대드는 행위, 순종하지 않는 행위, 봉양하지 않는 행위, 제사를 엄숙하게 지내지 않는 행위를 할 시에는 그자를 불러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꾸짖고, 뜰에 세워 놓거나 따로 앉혀 놓았다. 또한 부모 앞에서 단정하게 앉지 않고 걸터앉거나, 소나 말을 타고 가다가 내리지 않는 행위도 그 사람을 불러다가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도록 하였다. 그러나 만일 불복하고 개과할 뜻을 보이지 않으면 관청에 고발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4. 맺 음 말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외국의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은 없다. 사회적 윤리와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가 단결의 중심이 되는 전통이 없는 나라는 곧 멸망하였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과 외세의 약탈 속에서 꿋꿋이 이겨내어 왔었다. 몇 년 전의 IMF위기도 민족이 단결하여 극복을 하였으며, 월드컵과 올림픽도 개최하였으며, 아시안 게임도 이제는 국가적 유치행사가 아닌 지방 자치에서도 소화해내는 저력있는 국가가 되었다.
단일민족국가로서 굳건하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민족정신인 “충․효․예”이다. 그 중에서도 가정의 사랑이 바탕을 이루는 孝는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결코 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孝가 굳건해질 때 사회와 민족이 바로서는 나라가 될 것이다.
‘孝도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가나안 농군 학교장의 지적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조선시대 정철 선생께서 지으신 것으로써 어버이, 즉 부모님 생전에 효도를 다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애닯다고 후회해야 소용없으니 살아 계신 동안에 잘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버이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효도하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여 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부모님 기다려 주지않습니다 살아계실적 효 실천합시다 부모님 생각만 하면 눈시울 적 십니다!
사범고시 합격한 어느 촌놈이 잘배우고 돈 많은집 딸을 마누라로 모셨왓던 얘기와 비슷하구먼,자식은 사돈네 식구가 되버린(돈에 팔려간 야기), 우린 이런 세대에서 중간쯤 있는것 같네
자네는 6번이 아니듯 하네 아직 손주가 없잖아 그리고 파출부와 강가지가 없다면 2계단 더 올라 가겠구먼 ..
숙연해지게하는 글입니다 나이들면 여자들은 양기가 입으로 간다는데 남자들은머리로 가는가봅니다 부모님기다려주지않고 살아계실적효실천 부모님생각만하면 눈시울적신다 부모님계시지만 나이들수록 공감되는좋은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