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시대를 나누는데 대하여 예배학자들의 이견이 존재한다. 먼저 예배 형태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중세시대를 둘로 나누었는데 A. D. 500-900년을 서방교회 예전의 두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예배의식(the Roman Rite)과 갈리칸 예배의식(the Gallican Rite)이 병존하던 시기로 규정하였고 A. D. 900-1520년을 로마의식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 시기로 파악하였다. 맥스웰의 이러한 구분은 예배의 역사를 서방교회 중심으로 분류하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다. 한편,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는 중세의 초기를 그레고리 1세가 죽은 604년부터 그레고리 7세가 사망한 1085년까지로, 중세 후기는 1085년에서부터 루터(Luther)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한 1517년까지로 정리하였다. 그는 대략 인물을 중심으로 중세시대를 구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예배에 있어서 사실상 이러한 시대의 구분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예배의 변화는 때때로 급격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속적으로 이어져 진행되곤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가 예배 신학의 변화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다른 시대적 구분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맥스웰(W. Maxwell)이나 화이트(J. White)는 중세시대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예배의식이 어떻게 발전(formation)되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중세시대 예배에 대한 다른 견해는 예배의식이 어떻게 변질(deformation)되어 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중세시대를 예배의 변질과 퇴보의 관점에서 살펴 보려한다면, 중세시대의 시작은 어쩌면 기독교가 공인(A. D. 313년)된 이후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예배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변질되어 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중세 교회-예배신학의 변질
이미 살펴본대로 초대교회의 예배는 삶을 통해 봉사하는(liturgy of life) 예배의 신학을 견지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제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듯이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들의 예배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확증하는 것이었다. 초대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떤 거룩한 장소(place)나, 거룩한 행위(action)가 아니라 성도들 각자의 올바른 삶이었다. 그들은 이교도들이 "당신들에게는 왜 제단이 없는가? 왜 교회가 없는가?"라고 질문할 때 도리어 그 질문과 비판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초대교회는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거룩한 장소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디에서 모이든지, 지하 카타콤이든지, 가정집이든지, 어느 곳도 그들이 가진 신앙과 확신을 유지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는 도리어 기독교가 공인(A. D. 313년)된 이후, 더 나아가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I) 황제(A. D. 371년)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국교 화와 더불어 로마 정부는 예배를 드릴 장소를 마련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 변질의 단초가 되었다.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 옛 성전의 역할을 하게되고 그 안에 신비한 물건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점차 신비스러움을 강조하는 예배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사제들이 중제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예배는 점차 성과 속을 구별하는 구약의 제사장 중심의 예배신학이 다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변질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희생 제사적 개념이 부활하였다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신념이 점차 퇴색하면서 인간은 또 다시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었다.
예배의식의 발전
중세 시대는 예배의식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성숙기, 혹은 발전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레고리 1세(A. D. 540-604)가 그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안 성례집(Gregorian Sacramentay)과 그레고리안 챤트(Grogorian Chant)를 발간한 것을 정점으로 교회의 예배는 어느 정도의 표준적 형태를 갖기 시작하였다.
6세기 이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예배가 점차로 차이를 보이며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동방교회의 예배는 보다 심미적이고 미학적인 특징을 가지며 풍부한 의식들을 발전시켰다. 특히 동방교회는 요한계시록 4-5장에 있는 천상예배의 이미지를 현장화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동방적 세계관과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서방교회의 초기예배는 지나친 의식을 배제한 채로 단순하게 진행되었다. 로마인들의 실용주의적 정신이 영향을 준 것이 큰 이유였다. 서방교회 예배의 큰 특징은 장엄함에 있었다. 비록 단순하였지만 장엄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하나님 임재의 느낌 등은 서방교회의 예배를 살아있게 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예배도 점차 복잡한 순서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성체를 들어올리거나, 종을 울리고, 촛불을 사용하며, 향을 사용하며,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은 의식들이 5세기가 넘어서면서 서방교회의 예배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1세기에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가 만들어지면서 예배안에서 신조를 사용하는 순서도 포함되었다.
9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기간은 예배가 다양하게 발전한 시기라고 말할수 있다. 정교한 예배의식이 발전하였고, 교회의 건축양식이나 장식물, 교회내부의 기물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들로 바뀌게 되었다. 조명과 향, 보석으로 장식된 제단, 황금으로 만든 성배등이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예배자료들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다양하게 발전되어온 예배가 서서히 하나의 통일된 예배의식으로 정형화되어졌다. 이것은 거의 후기 중세기 전기간동안 진행되었는데 교황 그레고리 7세(A. D. 1028-1085)로부터 시작되어 1570년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 로마 미사경본(Roman Missal)이 발표될 때까지 이어졌다. 1570년 이후 로마교회는 하나의 완성된 의식서를 가지게 되었고 이 예식은 종교개혁자들이 만든 그것과는 대조되어 후에 로마 카톨릭예배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비(Mystery)를 강조한 예배의식
예배 의식이 점차 발전해 감에 따라 예배는 신비스러움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뀌졌다. 중세의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슈메만(A. Schme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신성한 행위, 신비스러움은 참여자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제의의 외적인 조직의 발전과 회중으로부터 성직자(그 신비를 수행하는 자)를 점차 구별하는 태도, 의식을 통해 집례자의 신비적이고 두려움을 주며 거룩해 보이는 것을 강조하는 것, 의례적인 정결, 범접할 수 없는 상태, 속된 것에 대한 성스러운 것 등을 강조하는 태도 등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비스러움이 강조되어 가는 예배에서 일반 회중의 역할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초기만 하여도 어느 정도 회중들의 예배참여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중들은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예배자가 되어갔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는 중세예배가 신비성을 추구하게 된 이유로 세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교회 안으로 많은 이교적 축제와 관습이 들어왔다는 점, 둘째, 예배의 언어로 일상의 용어가 아닌 라틴어가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로, 미사를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웨버가 지적하듯이 예배가 하나의 "제사"라는 생각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였다는 점은 중세교회의 예배가 얼마나 변질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다.
결국, 중세교회의 예배가 의식적으로 화려해지고 장엄해 지면 질수록, 그들의 예배의 신학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 중심의 예배신학에서 탈피하였던 초대교회가 다시 중세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제들에게 중재를 맡기게 되는 변질과 타락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배가 신비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예배는 더욱 이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고,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에서 점점 더 멀리 가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세례 성례전(Sacrament of Baptism)
초대교회의 세례 성례전은 주로 강이나 개인의 집에 있는 목욕탕에서 집례되었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세례 성례전은 세례당(Baptistry)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세례당은 대부분 예배당과 붙어있었지만 주로 다른 건물로 되어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세례당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8각형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8일째되는날 새로운 창조를 하셨음을 상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성인들의 세례 성례전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들의 세례는 줄어들었고 9세기경에는 세례를 받는 대부분이 유아들이었다. 이시기에 들어서면서 세례당의 커다란 세례조(Baptismal Font)는 어린이 세례를 위한 조그만 세례조(Baptismal Font)로 변화되었다.
이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세례 성례전이 죄를 씻는 신비한 의식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세례를 받기 전에 죽은 어린이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한 질문이 될 만큼 세례는 죄를 씻어주는 신성한 의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태어난 즉시 세례를 줄만큼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이 세례 성례전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하였다. 이것은 Laurence Hull Stookey교수가 그의 책 Baptism에서 지적하듯이 세례 신학의 가장 심각한 훼손중에 하나이었다.
세례 성례전이 신비스러운 원죄의 제거(the removal of original sin)라는 생각이 퍼져가면서 세례반에 들어있는 물이 특별하고 신비롭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였는데 사람들이 몰래 세례반에 들어있는 물을 마술이나, 약으로 사용하려고 훔쳐가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하여 교회는 세례반을 덮는 세례반 덮개를 만들게 되었고 열쇠를 달아 물의 도난을 방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세례반 덮개는 이후에 화려한 장식이 들어가면서 또 다른 하나의 상징물로 교회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성만찬 성례전(Sacrament of Lord's Supper)
성찬 성례전의 변화는 중세 예배변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초대교회의 성찬 성례전은 유대교의 예전과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의식이었다. 성만찬 예전은 완전하신 희생으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주님의 하신 일을 재연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제사(sacrifice)가 필요 없음을 재확인하는 예식이었다. 즉, 삶으로 나아가는 예배를 확인하여 주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 예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성만찬 예전은 전혀 달랐다. 점차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오면서 성만찬이 하나의 또 다른 제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향기로운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성만찬 예전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확연한 뒤틀림이었다. 초대교회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드릴 희생제사가 필요 없음"을 강조하고 확증하기 위하여 "단번에 이루신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성만찬 예전을 행하였는데 이제 중세시대에는 성만찬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가장 합당한 제물이라는 해석도 함께 뒤따랐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와 더불어 우선 성만찬을 집례하는 자세가 바뀌었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을 집례할 때 집례자가 회중들을 마주보고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온전함을 얻었음을 확증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자세이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이르러 제사적 성격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성만찬의 집례자는 회중을 뒤로하고 제단을 향하여 서게 되었다. 구약에서 각종 제물로 제사를 드리던 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었을 뿐 중세시대의 성만찬 예전은 구약의 제사장적 예배신학을 그대로 재현하게 되었다.
성만찬이 포함된 미사의 효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해 지면서 점차 교회는 필요이상으로 많은 미사(성만찬이 포함된)를 강요하게 되었다. 화목제사(Propitiatory sacrifice)로서의 개념을 갖게된 미사는 하나님 앞에 일정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졌고, 두 번 미사를 드리는 것은 한번 드리는 것보다 두 배의 효력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렇게 미사(성만찬이 포함된)를 많이 드리는 것이 경건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교회에는 끊임없이 미사가 이어졌으며 사제들은 사례비를 받고서 특정한 사람(산 자, 병자, 혹은 죽은 자)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곤 하였다. 후에 알려진 성직매매란 결국 성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이득과 관련이 있었다. 이를 위해 보다 많은 제단이 필요하게 되자 예배당 안에는 동쪽을 향한 곳에는 어김없이 제단을 만들어 한 예배당에 많은 제단이 있게 되는 중세교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만들기도 하였다. 결국, 역동적이던 예배는 미신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성직자나 회중은 똑같이 예배와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였다.
헌신(devotion)을 강조한 예배
중세 교회의 예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미사(예배)와 더불어 중요한 요소는 수도운 운동이다. 수도운 운동은 중세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기독교 운동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삶의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여야 한다"는 초대교회의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운동의 결과는 다른 중세시대의 변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수도원 운동의 기본적인 전제는 기도와 헌신(devotion)을 삶의 유일한 내용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즉, 수도원 수사들이 이해하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란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이 기도에 부수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수도원은 기도를 또 하나의 제사(sacrifice)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항하여 생겨난 운동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운동은 예배의 태도면에서 기존교회의 예배 신학과 다른 점이 없었다. 수도원 운동은 기도라는 도구를 미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제사로 보았다는 것이 특이할 뿐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많은 기도문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기도규칙서의 출현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노래로 드리는 기도인 찬양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devotion)으로 강조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수도원 운동은 개인의 경건을 계발하는데 관심을 두었으며, 점차 그리스도인이 공동체와 삶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에 대하여는 무감각하게 되었다.
나가는 말
중세교회의 예배는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사라진 무감각한 예배였다. 예배의식은 화려하고 장엄하게 발전되어 갔지만, 정작 그 안에 숨겨진 예배신학은 초대교회가 가졌던 기쁨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제가 중재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담보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예배신학의 변질과 쇠퇴가 도래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강력하게 중세예배에서 미신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였는지 지금까지 살펴본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교회의 예배의 타락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신념이 퇴색하고,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교회가 사로잡히게 될 때마다 교회는 변질되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세 교회의 예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중세 교회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필자인 나만의 생각일까?...
출처 : 김경진 교수(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겸임교수) /http://cafe.daum.net/sel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