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의 “칼빈의 교회론과 오늘의 교회 갱신”을 읽고
논찬자: 박경수(장신대, 역사신학)
1. 먼저 저자가 이 논문에서 매우 긴요하고 중요한 주제를 다루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재로 인해 교회 안과 밖에서 홍역을 앓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개혁교회의 대표적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인 칼뱅의 교회론을 살피고 그 정신을 이어 가려는 시도는 대단히 시의적절하며 현실적합성을 갖춘 연구라 할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칼뱅의 교회론을 다루되, 지금까지의 교리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그의 교회론을 이해하려 시도했으며, 또한 <기독교강요> 일변도에서 벗어나 <시편주석>을 중심으로 칼뱅의 교회론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가치가 돋보인다.
2. 기독교 고전 전집(Library of Christian Classics)에서 칼뱅의 주석을 편집한 Joseph Haroutunian은 책의 서론에서 “칼뱅신학의 모든 특징은 <기독교강요>의 전문적인 주장들에서보다는 주석들의 직접적인 설명들에서 보다 간결하고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24쪽)고 주장한 바 있다. 칼뱅 스스로도 자신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 또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말씀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4쪽)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는 칼뱅연구에서 그의 성서주석과 설교가 그의 <기독교강요>나 신학적인 저작들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뱅의 <시편주석>을 중심으로 그의 교회론을 살펴보는 작업의 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김재성 교수의 논문은 최근의 칼뱅연구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기독교강요>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왔던 종래의 칼뱅연구에 대한 중요한 보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저자는 서론에서 칼뱅의 교회론에 대한 교리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글의 본문에서는 역사적 정황에 대한 분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칼뱅이 1533년 니콜라스 콥의 연설문 사건으로 프랑스를 떠난 후 “개인적인 성경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교회관을 갖게 되었다”든가, “시편 주석과 설교에는 프랑스 개신교회의 고통과 투쟁과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다소 두루뭉실한 표현만이 보일 뿐이다. 칼뱅의 교회론이 <기독교강요> 3판(1543)에서 집중적으로 증보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칼뱅의 교회론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동일한지 아니면 변화를 겪었는지, 변화했다면 어떤 역사적 상황이나 이유들로 인해 변화가 있었는지? 시기적으로 비슷한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에 나타난 교회론과 <시편주석>(1553-1557)에 나타난 교회론의 차이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에도 관심을 가졌다면 서문에서 밝힌 의도에 보다 충실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저자는 2장에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교회는 고난받는 공동체,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 선택받은 언약 공동체로 규정된다. 첫 번째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16세기 당시 급진적 종교개혁자들 또한 고난받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했기 때문에, 칼뱅과 재세례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지적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세 번째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마찬가지 이유로 칼뱅과 츠빙글리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Herman Selderhuis가 강조한 바 있는 두 번째 이미지는 교회를 정태적이 아닌 역동적인 공동체, 굳어진 제도가 아닌 변화의 도상에 있는 공동체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저자는 칼뱅의 교회 개념 중 “섞여 있는 공동체”(corpus mixtum)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당시 재세례파들의 분리주의적 성향에 대응하는 칼뱅과 여러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논리였다. 그러나 권징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칼뱅의 입장에서 가라지를 그냥 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잘못된 것을 치리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의 경계는 어디였는지 질문하게 된다.
5. 3장에서는 교회의 본질 중 통일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세간에서 흔히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분파주의자로 오해되고 있고, 심지어 칼뱅의 후예들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마치 칼뱅이 분파를 정당화하기라도 한 양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강조되었듯이 칼뱅이 교회의 일치를 위해 전심으로 노력했고, 그의 글에도 이러한 열망이 녹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 할 것이다. 저자는 칼뱅이 말한 교회의 일치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연합임을 말하고 있다. 저자가 시작한 이 논의를 오늘의 한국 교회는 더 발전시켜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다. 과연 칼뱅이 말한 통일성은 어떤 통일성인가? 왜 칼뱅은 교회의 일치를 논할 때, 가톨릭과 급진파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는가? 칼뱅이 말하는 일치와 부처가 말하는 일치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 칼뱅은 교회일치에서 어떤 원칙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들이 더 연구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6. 4장에서는 교회의 목회사역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칼뱅 당시 당회의 사역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한국장로교회에서 장로의 역할이 보다 확대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논문에서 당회라고 표현한 기관은 칼뱅 당시의 Consistory(치리법원)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당회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당시 치리법원은 저자가 말한 대로 12명의 평신도와 12명의 목사로 구성되었으며, 매주 목요일 모여 제네바의 제반 사항들을 치리하는 사법적, 도덕적, 교육적 기관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교회와 세속정부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16세기 제네바의 치리법원을 오늘날의 당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저자는 논문에서 “칼뱅은 교회가 구원의 ‘중보자’로서 ....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칼뱅의 표현인지 의문이다. 중보자라는 단어에 ‘’표시를 한 것은 이 단어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띄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가? 저자는 목사, 박사, 장로, 집사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 제네바에서 박사의 활동이 있었는가? 오늘날 성만찬의 시행과 관련하여 우리가 칼뱅의 제네바 교회로부터 배울 점은 무엇인가?
7.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21세기 한국교회로 눈을 돌린다. 먼저 저자는 “개인주의적 구원에 치우친 경건주의자들,”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하는 체험주의자들,” “형제들의 교제를 강조하는 기독교 단체들”에 반대하여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칼뱅의, 나아가서는 키프리아누스의 명제를 인용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열풍인 “셀 교회운동”에 대한 조심스러운 비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늘날 교회론의 부재를 생각할 때, “죽은 전통”은 버려야겠지만, “바른 전통”은 계승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공감이 된다. 또한 저자는 교회정치의 개혁을 역설하고,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개혁신학의 유산을 습득할 것, 그리고 건전하지 못한 현대신학을 경계할 것을 제안한다. 현대신학에 대한 비판에서는 그 강도가 높아서 슐라이어마허로부터 포스트모던에 이르기까지, 바르트, 힉, 토착화신학, 해방신학 등이, 功과 過 혹은 more나 less의 구별이 없이 비판(폭격?)을 받는다. 저자가 16세기 칼뱅의 사상과 17세기 청교도와 개혁주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후의 신학적 노력에 대한 대결적 자세는 오히려 교회를 게토화시킬 위험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변화산에서 은혜를 받고 산 아래 동네로 내려가야 한다면, 교회가 세상을 위한 공동체여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면, 현대신학의 치열한 노력들의 허물과 함께 공도 살폈으면 하는 바람이다.
8. 새로운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는 이때에, 저자가 이처럼 현실성 있는 주제를 가지고 독창적인 제안들을 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 특별히 칼뱅의 교회론을 <시편주석>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기존의 <기독교강요> 중심에서 탈피하여 새 장을 열어 준 것은 이 논문의 귀중한 공헌이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뱅의 교회론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우리 현장을 살핌으로써, 신학이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 점에도 감사를 표한다. 앞으로도 “바른 전통”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적용을 통해 개혁신학의 지평을 확장시켜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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