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楊規)는 목종(穆宗)을 섬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
현종(顯宗) 원년(1010)에 거란(契丹)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조(康兆)를 토벌한다고 하며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사 호부낭중(興化鎭使 戶部郎中) 정성(鄭成), 〈흥화진〉부사 장작주부(副使 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 늠희령(判官 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거란 임금은 통주(通州)의 성 밖에서 추수하는 남녀를 사로잡아 각각 비단옷을 하사하고 종이로 감싼 화살 한 개를 주었으며, 군사 300여 명으로 하여금 흥화진까지 호송하여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화살에 밀봉한 편지가 있어 이르기를, “짐은 전왕[목종] 왕송(王誦)이 〈우리〉 조정에 복속하고 섬겼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아이를 세웠으니, 이 때문에 친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에 당도하였다. 너희들이 강조를 체포하여 짐[駕] 앞으로 보내면 그 즉시 회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개경(開京)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꽂으며 이르기를, “흥화진의 성주(城主)와 군인·백성에게 칙서를 내리노라. 짐은 전 왕인 왕송이 그 조상의 복을 이어서 우리의 번신(藩臣)이 되어 봉토[封陲]를 막고 지켜왔다. 갑자기 간흉에게 시해를 당했으므로, 짐이 정예군을 거느리고 죄인을 토벌하러 온 것이다. 그 여러 협박이 두려워 추종한 이들은 모두 다 죄를 용서해 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전 왕이 어루만져 편안한 은택을 받았고, 여러 대에 걸친 순종과 반역의 이유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짐이 뜻을 받아들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수화 등이 〈거란 임금에게〉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간흉을 제거해야 할 것이고, 어버이를 의뢰하고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가져야 할 것이니, 만일 이 도리를 어기면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엎드려 간청하건대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서 〈폐하의〉 밝으신 지략을 돌려주십시오. 하늘의 그물을 크게 열어놓으시고, 어찌 참새 같은 작은 새[鳥雀]가 먼저 뛰어들기를 바라십니까? 병거(兵車)를 준비하고 관리하시면, 용맹스러운 군대[貔貅]가 복속해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비단옷·은그릇 등 물품을 〈흥화〉진의 장수들에게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다시 칙서에 이르기를, “그대들이 올린 표문에서 아뢴 것을 잘 보았는데, 짐은 5대 성군들[五聖]을 계승하여 만방을 다스리고 있는 바, 충량(忠良)하면 반드시 표창해 주고, 흉역(兇逆)하면 반드시 쳐서 벌하였다.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였고, 저 어린 왕을 끼고서 간악한 권세를 방자히 휘두르면서 크게 위복(威福)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짐이〉 친히 〈그를〉 쳐서 벌하여 특별히 형명(刑名)을 바로잡으려고, 바야흐로 모든 군사들을 거느리고 국경 가까이 왔다. 최근에 특별히 짐이 조칙[綸音]을 반포하였는데, 대개 불러 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인 것이다. 올린 글을 황급히 살펴보니 귀순하겠다는 성의는 도무지 볼 수 없고, 피력한 내용이 성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문장도 겉으로만 공경을 보일 따름이다. 하물며 그대들은 일찍부터 관직[簪裾]에 있었으니 분명히 순종과 반역을 알 것인데, 어찌 역적 도당의 음모를 도와주고 전 왕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雪憤]을 생각하지 않는가? 마땅히 안녕과 위태로움을 돌아보고, 미리 재앙과 복을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수화가 다시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저희들은 지난번 조서[詔泥]를 받들어 진실로 변치 않는 마음[心石]을 말하고자 합니다. 허물을 보고 슬프게 여기시는[泣辜] 은혜를 베풀기 바라옵고, 형벌을 너그러이 쓰시는[解網] 인자함을 간절히 구합니다. 〈우리는〉 찬 서리와 눈보라를 견뎌내면서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며,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길이 천년의 성스러운 〈왕업을〉 받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은 표문을 보고 항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서 곧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칙명[勅詔]를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들은 백성을 위안시키고 기다려라.”라고 하면서 200,000명의 병력을 인주(麟州) 남쪽 무로대(無老代)에 주둔시켰고, 〈다른〉 200,000명의 대군으로 진격하여 통주(通州)에 이르렀다.
거란 임금이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이동시키자,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곧 포로가 되었다.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 이현운(李鉉雲),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도 역시 모두 잡히고,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이 진영에서 전사하므로 아군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거란군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명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리하여 거란군이 말을 타고 멀리까지 추격해오니, 좌·우 기군(奇軍)의 장군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모두 칼[短兵]을 손에 쥐고 돌격하여 그들을 쳐부수자 거란군이 약간 퇴각하였다. 거란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하라고 설득하니, 양규가 말하기를,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거란(契丹)이 다시 노전(盧戩) 및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가지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항복할 것을 권유하니, 성 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홍숙(洪淑)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서 노전과 마수를 잡았고, 이에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 거란 군사들이 곽주(郭州)로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원외랑(防禦使 戶部員外郞) 조성유(趙成裕)는 밤중에 도주하였고, 신녕한(申寧漢) 및 행영수제관(行營修製官)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공부낭중(工部郞中)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禮部郞中)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전사하였으며,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거란은 군사 6,000여 명을 잔류시켜 그 성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郭州)로 들어가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듬해에 거란(契丹) 임금이 개경으로 침입하여 궁궐을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 급(級)을 베었다. 양규(楊規)는 거란군을 무로대(無老代)에서 습격하여 2,000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梨樹)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石嶺)까지 가서 2,500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000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1,000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000여 명을 되찾았다. 이 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艾田)에서 맞아 싸워 1,000여 급을 베었다.
얼마 뒤에 거란(契丹)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孤軍]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전공으로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양규(楊規)의 처 은률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粟]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은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현종]은 손수 교서를 지어, 홍씨에게 하사하여 이르기를,
“그대의 남편은 재능이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겸하여 정치의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松筠]과 같은 절개를 지키다가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그 충정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6균(鈞)의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으니,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져 여러 차례 승리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도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욱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稻穀]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숙흥(金叔興)에게는 장군(將軍)을 추증하였으며, 또 명령하여 그의 모친 이씨(李氏)에게 곡식을 지급하게 하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증직 장군 김숙흥은 변방의 성을 지킬 때부터 적을 무찌르고자 나갈 정도로 용맹스러워 이미 파죽지세로 전공을 세웠으나, 복병의 화살에 맞아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지난 공로를 기념하여 마땅히 후한 상을 더하고자 한다. 해마다 그의 모친에게 곡식 50석을 지급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현종〉 10년(1019)에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하사하였고, 〈현종〉 15년(1024)에는 다시 두 사람에게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여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眞宗의 연호) 3년(1010)에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야 할 것이니,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