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4절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 것을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멜기세덱을 깊이 생각하라 관찰하라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그가 얼마나 높은가 알아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조상 중에 조상인 아브라함도
예물을 바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브라함하면 찍소리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지 않느냐
그러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가 아니냐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냐 멜기세덱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차가 바뀌고 법도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느 줄에 서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5절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의 지파의 제사장들은 구약에서 백성들에게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레위 지파는
다 같은 조상으로 난 형제들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난 형제들입니다.
다 같은 죄인들입니다. 목사나 신부나 교황은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일 뿐입니다.
6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멜기세덱은 레위족보에 들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일 우두머리에게서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은 그 밑에 있는 자손을 대표해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이 무슨 자격으로 받았는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복이 없습니다. 창3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사람의 심령이나 보이는 땅도 하나님이 저주해
버렸기 때문에 이 땅에는 어디에도 결코 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는
기도는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지 않는 한
이 땅에는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은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셉니다. 훨씬 셉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자신 있게
축복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자식이 나보다 훨씬 깨끗하고 진실한 것
같아서 차마 내가 축복기도를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바로 왕에게
축복기도를 합니다. 바로 왕이 기가 막혀서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내 나이 130에 험악한 세상을 살았다고 대답합니다. 그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야곱이 나중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나의 복이 나의 부여조의 복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 보다 더 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대단한 세상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먹을 것이 없어 애굽에
거지 대장으로 식솔을 이끌고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왕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요셉을 축복하면서 네 아비의 복이 내 부여조의 복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의 아비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 보다 복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내가 그 받은 복을 근거로 내가 네게 복을 준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떤 인물이 되더라도
‘너 이리와 나의 축복 기도를 받고 가’ 이 정도는 되어야 됩니다. 히11장의
명예의 전당에 나온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런 믿음의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 것이 있든지 없든지 이런 믿음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건 그들이 믿음의 실상에 의해 복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로는 이런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적으로부터 건져주신
감사와 찬송의 십일조는 이런 복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십일조입니다.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가서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쳐부순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던 우리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이 십일조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십일조이겠습니까? 십일조의
시초는 아브라함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에 의해 레위에게 주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지금도 십일조다운 십일조가 있고 율법에 의한 십일조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비로 쓰입니다.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는 것이 보통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와 경배와 찬양이 진정한 십일조가 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아 오니까 봄이 다시 오더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겁니다.
말3장은 “너희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고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하십니다.
창고가 어딥니까? 교회의 재정이 하나님의 집 창고입니까? 우리의 심령의 곡간에
하늘 양식이 있게 해야죠. 그래서 밭가는 자들에게 나눠 줄 채소가 있도록 하면
하늘 문을 열고 자루를 거꾸로 들고 붓듯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붓지
아니하는지 너희들이 시험해 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농부들에게 씨와 종자를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맞추어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합니다. 복이라고 하는 완제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의 조건을 맞추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말씀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 성취되라고 복을 빈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창15장부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떡과 잔에 참예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분의 복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축복할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대단한 존재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상태에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약속이 이루어질 대상입니다(갈3:14)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고 난 다음 많은 열매를 맺어질 대상입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으면 쭉정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축도를 할 때에
그 축도를 누가 하든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멘 하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 축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제사장을 대신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것이 바로 축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대단한 축복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 이 복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축복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그림자입니다.
7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이전 성경은 폐일언하고 하고 했는데 이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서열로 제일 낮은 지파는 레위지파이고, 그 다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 다음이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이 제일 높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을 자랑하므로 레위지파 중에 뽑힌 제사장을 제일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헤롯 때는 레위 지파가 아니더라도 매관매직이 되었습니다. 헤롯은 에돔 족속인데
곁가지가 예루살렘에 와서 그 당시 지중해에서 벌어지는 세계열강의 틈에 끼여서
재주껏 로마 황제가 바뀔 때마다 가서 뇌물을 갖다 주고 왕위를 연명해 가는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아주 간사합니다.
대제사장도 레위지파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임명을 했습니다. 지금 중국이 그렇습니다.
레위지파만이 대제사장이 되지만 성경은 그것마저도 대제사장으로서 최고의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레위지파 중에 뽑힌 제사장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의 그 이상을 모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보고 임명장을 보자고 합니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릅니다. 범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섭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룻강아지는 죽어 본 적도 없습니다. 무지하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쫒아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 안에 신앙의 구색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모든 건 다 완벽하게 갖추었는데...
사람들이 만든 제사장, 사람들이 만든 인적 권위가 교회를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
주님이 들어가실 데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의 지파 제사장만
섬긴다고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예수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사53장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금서로 여기고 억지를 부립니다.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속에 든 것을 주님이 아시므로 자기 몸을
사람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십니다(요2장) 이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의탁해 주셔야만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든 것을 그 분이 아시고 우리 속에 오시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그분이 바로 영생인데 말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서
영생을 누리리라고 말하는 목사도 있는 형편이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입니다.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해서 유지유언(有指有言)으로 손가락으로 몇 마디 전할 뿐입니다.
첫댓글 하루에도 몇번씩 주신말씀 곱씹고 되뇌어 되새김질하다보니 아둔한 귀가 열리고 눈이 밝아져 마음까지 환해져 얼굴에 광채가나는듯합니다감사합니다 아멘 !
할렐루야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이
주의 보좌를 향해 그의 부르심을 따라 계속 달려가십시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변함없이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길!
할렐루야!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