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어 줄 것이 있는 사람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1:11).
본문은 사도가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원했던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꼽고 있는데 첫째는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위해서요, 둘째는 “견고케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나누어줄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①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합니다.
㉠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그 속에 나누어주고 싶은 욕망과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무엇을 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배를 나누어주려고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 그것은 비단 로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차, 2차, 3차에 걸친 험난한 선교여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지방 모든 곳에 복음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한결같은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나누어 주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② 예레미야 20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도 같은 심정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합니다.
㉠ 욥기에 등장하는 젊은 엘리후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욥 34:18-20) 합니다.
㉡ 다윗은,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40:9) 하고 간구합니다.
㉢ 형제여, 우리 중심에서도 그런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전하여 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어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 주님 우리의 입술도 열어주옵소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 6:19), 그런 부푼 가슴을 안고 강단에 서게 하옵시며, 그 심정으로 전도 길에 오르게 하옵소서”.
③ 그러면 나누어주고자 하는 전도의 열정(熱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주님은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5-46) 하고 말씀하십니다.
㉠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하고, 그 “보배”를 발견하고, 소유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소유할 수가 있었는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하고 대답합니다.
㉡ 많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바울과 같은 복음의 열정을 사모하면서도 그 “보배와 열정”을 갖지를 못하는 원인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포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열정은 바로 “자기 부정”에서 끓어오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④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나누어 주기를 갈망했던 “신령한 은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 “신령”(神靈)이란 낱말은 “영적”이란 말이요, “육적”인 것과 구별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만사형통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한 은사집회를 하기 위해서 로마에 가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⑤ 사도는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고, 로마에 가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나누어주기를 원한 신령한 은사란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복음(福音)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살전 1:5) 하고, 성령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사”라 하는 것입니다.
㉡ 어떤 분들은 “신령”이란 말만 나오면 곧장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안수하므로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했던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행 19:6).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 한, 그런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 목적이, 흔히 말하는 은사집회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아닙니다.
㉢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하) 하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복음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능력”하면 무엇이 연상이 됩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뒤로 넘어지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 하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과 어떤 능력이 더 큰 것이며, 귀중한 것이란 말인가?
⑥ 사도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11하)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무엇이 성도를 견고케 해줍니까? 사도행전 20장에는 에베소 감독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설교가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 올 것을 내가 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29-32) 합니다. 즉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신다”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로마에 가서도 이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한 “복음”입니다. 감정은 뜨거워지고 충만하게 부풀게 하기도 하나, 바람이 빠지듯이 다시금 공허해지고 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말씀만이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⑦ 로마서가 왜 기록이 되었습니까? 바울은 여러해 전부터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지연이 되자, 자신이 로마에 가게 되면 전하려 했던 복음을 요약해서 편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로마서는 요약에 불과 합니다. 에베소에서처럼 3년을 말씀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세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 합니다.
㉡ 성령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전파되는 말씀과 함께,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살전 1:5)으로 저들을 견고케 세워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로마에 가서 나누어 주기를 갈망했던 “신령한 은사”였던 것입니다.
⑧ 로마서 첫 머리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하고 말씀한 사도는,
㉠ 로마서의 끝 부분에 이르러,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15:29)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 하도다 나누어 줄 신령한 은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여! 복 되도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0:15)!
㉡ 본문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하십니다. 형제는 빈털터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형제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몇 번이나 이를 인식하고 인정해 드리며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과 형편에 지배를 받으며 그로인해 가련하고 가엾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이를 나누어주기 때문에,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하십니다.
㉣ 형제여, 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의 영은 형제 속에서도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 그들은 자기 시대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과 같이 지금 형제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누어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