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운명'이 인생에 끼어든 한 예
좋든 나쁘든, 살아오면서 어쩌다 한 번씩 너무나 극적이거나 신기한 일이 벌어질 경우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인야는,
'이게 운명인가 보다.'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야 같은 사람을 운명론자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신을 믿지 않으니...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그런 인야가 결국 독일을 떠나고 있었고, 인간적인 영역으로서는 설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일이 벌어지는데......
날이 쌀쌀해진 베를린. 새로 산 겨울 옷을 입고 인야는 마지막으로 동물원역(Zoologischer Garten) 플랫폼에 나왔다.
아직 겨울은 아닌데도 두꺼운 옷을 입은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다.
아침에 가마 있는 집에 가서 흙 작업 네 개를 찾아온 뒤 정성스레 포장했다. 한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는데, 가져가는 도중 깨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운명일 테니, 거기까지야 인야의 영역이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독일에 남겨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깨질 걸 각오하면서 했던 일이었다.
이미 책과 물감까지도 버린 뒤였다. 그러고서도 그 다음 날 베를린을 떠날 때 택시로 갈 형편이 아닌지라, 미리 덴마크 행 버스표를 예매하러 가는 길에... 터미널 보관함에 그것들을 넣어두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시아 도서관에 가봤다.
그런데 그동안 가끔씩 거기서 만나기도 했던 젊은 친구는 없었다. 신문을 보다가 몇몇을 만났고, 그중 한 명과는 둘이 달렘도르프(Dahlem Dorf) 길을 걸어 학교 식당에서 밥도 먹었기에,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려고 갔었는데......
그리고 이 모 선생 집에 한글 프로그램을 돌려주러 갔는데, 저녁 식사를 초대받은 격이 되었다.
거기서 성의 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그들과 인야 자신의 얘기, 화단 얘기 등을 하고 헤어졌다.
물론 그들 역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쩌겠는가. 어차피 인야의 인생이고 또 각자의 길이 있을 터라... 인야 자신대로 살아갈밖에.
그렇게 그 집을 나온 뒤 시간이 조금 남기에, 인야는,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면서 동물원역 플랫폼에 나와 있었다.
건너편 플랫폼에서도 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는 사람이 보일 정도로, 그날은 정말 가을도 깊은 가을 같은 서늘한 날씨였다. 돈도 없는 주제에 무리를 해서 외투를 하나 샀던 건데, 결과적으로 보면 잘 한 것 같았다.
그동안 인야가 이 동물원역을 자주 찾아왔던 건, 베를린에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였다. 옛날 바르셀로나에서 바닷가에 가던 심정으로 오던 곳이니까. 물론 베를린엔 바다가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그나마 찾아낸 게 역 앞 허물어진 교회였는데, 그 내부는 약간 어두워서 앉아서 졸 수도 있는 등...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다 보니 정이 들었던 곳이다.
더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떠 있는 듯한 예수상이 있기 때문에, 혼자 그 조각과 대화를 하곤 했는데... 거기서도 무료하면 바로 이곳 플랫폼으로 자리를 옮겨,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늘처럼 자신도 떠날 것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인야도 이제는 베를린을 떠나 덴마크로 갈 예정인데, 그동안 숱하게 찾아왔던 곳인데도, 그래서 언젠간 자신도 이곳에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왔는데도... 비행장도 이 기차역도 아닌 엉뚱한 버스 터미널에서 떠난다는 사실이 좀 이상했다.
'그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네 인생은 수수께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나지만, 나 같이 불안한 떠돌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도 한 순간에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미리 뭔가를 예단할 순 없다. 그나저나 지금의 나는 뭔가를 해보겠다고 베를린에 왔다가, 제대로 시도조차 못한 채... 도망치는 꼴인가? 그럴 수도 있다.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 떠나는 거니까. 그렇다고 나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괜히 우울하게 자아 비판만 하지는 말자. 아직도 나에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하고 있고, 또 다른 일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답답하고 암울했던 베를린을 떠나는 걸, 그리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생은 나를 또 어떤 삶으로 이끌어갈지......'
하늘엔 낮은 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언제나 이 도시 베를린이 그랬던 것처럼, 음울하고 답답하게.
'잘 있거라, 허물어진 교회야, 그리고 여기 플랫폼아. 그동안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선 어떤 면에선 동반자이기도 했단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기 베를린을 떠나는데, 너희들과도 이별인데, 또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잘 있거라. 그리고 내가 다음에 올 때는 웃으며 만나자꾸나.'
노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스케치 한 장과 판화 한 장을 남기고 돌아오는 길에 인야는 G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마음을 녹여주는 듯했다.
'4년 반 만에 보게 될 텐데, 그녀도 나도 변해 있으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야는 노 선생 동생 집에도 역시 스케치 한 장과 판화 한 장을 드렸는데, 그 분 역시 표정이 밝아지며...
"다음에도 베를린에 오면, 꼭 연락하세요!" 했는데,
'글쎄, 내가 다음에 베를린에 와서도 그 집 신세를 질까? 아닐 것이다.'
그걸로 베를린에 와서 맺었던 사람들과의 이별 절차도 다 끝낸 셈이었다.
그리고 후련한 것 같으면서도 서글픈 심정으로 잠을 청했는데, 편히 자지는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까지를 하고 앉아서, 인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늘, 베를린을 떠나나? 음울한 날씨만큼이나 재미없는 도시,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겐 수많은 얘기를 안겨준 도시... 다시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오고 싶지는 않은 도시......'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었고, 코펜하겐에 가는 버스를 타면 파란만장했던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끝나는 것이었다.
흐린 날의 서늘한 바람이 마음까지 움츠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인야는 미국 시애틀의 H에게 엽서를 부쳤다.
'이제부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말자. 그리고 버스에 몸을 맡겨 시간에 모든 걸 싣자. 그러면 보고 싶은 G를 보게 된다. 근데, 그녀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이번에 그녀를 보면, 어떻게 이야기가 펼쳐질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 어떻게 우리의 생을 살아가다 마감할 것인가.'
간간이 햇빛이 비쳤다. 힘이 없는 희미한 햇볕이 오후 2시를 비쳤다.
"안녕, 베를린!"
베를린은 과거의 도시가 되었고, 인야는 이제 독일도 떠났다.
로스톡(Rostock)이란 곳으로 버스는 달렸고, 커다란 배 속으로 들어갔다.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배의 선실로 옮겨 탔고, 곧 배가 출발했다.
인야는 독일에서 아무 것도 해놓지 못한 상태로 떠나게 되어 비통하다거나 아쉽다는 사실보다도, G를 만난다는 기쁨에 더 들떠 있었다.
오후 6시였다.
반 시간쯤 늦게 도착했던 버스는 꽤나 덜컹거렸으나, 배는 미끄러지듯 얌전하게 움직였다.
버스의 안내방송에서는 여권검사가 있으리라고 했지만, 생략됐다.
안개가 낀 듯한 바다에는 백조와 철새들이 떠 있었다.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배는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바다는 발틱해인가?'
인야의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에겐 예감이란 게 있기는 한가 보다. 아니면 부모 자식 간에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육체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가 느렸기 때문에 아마 다음 날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 뒤, G가 아직은 일할 시간이라, 버스 터미널에 마중 나오지 못한 틈에...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인야는 한국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왜 그런지 그 전날 밤 버스에서 악몽을 꾸었고, 심한 몸부림을 쳤던 건 기억났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약 30분쯤 뒤에 다시 걸었는데, 또 안 받으시기에... 형님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그래, 전화 잘 했다. 너에게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하던 형의 입에서, "어저께, 어머니가 쓰러지셔 지금 병원 응급실에 계시단다." 하는 말에,
인야는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던 분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또 바로, 인야는 부들부들 떨며...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정말 아무 정신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운명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물론 그 얼마 뒤 정신을 가다듬고 G를 만나기까지는 했지만, 몇 년 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는커녕... 그녀의 도움으로 바로 코펜하겐에 있는 항공사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가장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항공편을 알아보는 등... 위급상황을 설명한 결과 그쪽의 특별 도움으로, 인야는 코펜하겐에서 네 시간 정도 머무는 것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물론 직항도 아닌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행로로.
인야 인생의 아주 결정적인 한 순간에, '운명'이 끼어들어... 길을 확 바꿔놓았던 것이다.
어차피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미 베를린을 떠나올 때 떠돌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비행기로 바꿔타고 가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인야는 독일을 떠나오면서도, 덴마크에서라도 뭔가를 찾아볼 생각까지 해 둔 상태였는데......
그건 어쩌면 '운명'이었을 수도 있었다. 인야와 어머니와의, 그리고 인야와 몇 년만에 만나자마자 얼굴도 보는 둥 마는 둥... 헤어져야만 했던 G라는 여인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