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산개세(拔山蓋世)5-통권157
용야평원(容野平原)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경 황진성의 주작문 망루. 주작금군 십장(什長) 도오진(刀五塵)은 용야평원으로 들어서는 적군을 발견하고 망루에 설치된 종을 치기 시작했다.
―뗑뗑뗑뗑뗑뗑뗑뗑뗑….
주작문 망루에서 울리는 다급한 종소리에 주작대로에 적을 두고 하루를 시작하려던 백성들은 저마다 손을 놓고 종소리가 울리는 주작문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저마다 서제가 대군을 끌고 상경으로 온다는 소문을 들어 그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막상 그 일이 실제로 닥치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히야~! 두두두두두두두….
등에 <令>자가 새겨진 삼각기를 맨 전령이 주작금군 주둔지를 빠져나와 대로를 달려 용천궁, 용호왕부로 내달았다. 이미 전환으로 전후 사정이 전달되었을 테지만 따로 전령을 보내는 것은 상경의 백성들로 하여금 큰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림으로써 일반 군졸들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서병의 움직임은 금강의 천리경에 포착되어 있어 웬만한 군관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위에서부터 가장 하위에 있는 군졸까지 각오한 일이었기에 별다른 혼란 없이 순식간에 병력 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경의 바로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용야평원에 서병의 모습이 보였다고 해서 지금 당장 싸움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그것도 천하칠대도 중 하나인 상경을 치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성 앞에 진을 치고 방법을 모색할 것이므로….
“30만 대군치고는 수가 적어 보이는데?”
금강 안 천리경이 설치된 방에서 용호군의 장군들과 고학이 서병들이 목책을 쌓고, 진을 치는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세작으로부터 신주관에 3만, 신주관 안팎에 각기 3만씩 두었다고 하더군요. 그것으로 보아 상경 공략은 대략 20만 정도로 시도할 모양이오.”
“겨우 20만으로 황진성을 공략하려 한단 말이오?”
“그건 서제에게 동조한 세력이 병주의 토제가뿐만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과거 상경은 천림왕의 본거지나 다름없었소. 당시 천림왕과 힘겨루기를 하던 서제가 상경에 아무런 수작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렇다. 천림왕과 서제가 손을 잡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그전 10여 년 간 천림왕과 서제 서포틈은 참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상경 내 상당한 암약 세력이 있을 수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상경금군이나 용호군 내부에도 서제의 암중비약(暗中飛躍)하는 세력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보다 천호변의 자갈돌 모으는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 점은 걱정 마시오. 대수영 수도대장 목남 소장이 휘하 수군들이 지난 이레 동안 모아들인 주먹만한 자갈을 엄청나게 쌓아놓았으니 금강에 옮겨 싣기만 하면 되니까.”
“기름은?”
“화공에 쓰일 기름은 천호수군대장 소천위가 책임지고 모아들이고 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양은 되지 못한다 하오이다.”
“그보다, 주군은 지금 어디 계시는 것이오?”
용호군 장군 달성모의 질문에 장내의 시선이 고학에게 모였지만 고학이라고 해서 주군의 소재를 알지는 못했다.
“열지 부인에게 알려 지금 찾고 있으니 곧 모습을 보이실 게요.”
열지 부인이란 다름 아닌 메이를 부르는 말이었다. 메이는 열지족 추장의 딸이고 열지족은 씨족이고 ‘열지’는 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이를 열지 부인이라 불렀다.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주모인 천상천화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인인지라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용황궁 귀림에 백호나한, 천상천화 내외 이외에 인물이 거처하는 것은 열지 부인 메이가 유일했다.
***
설화는 오랫동안 시리도록 찬물 속에서 유영하여 추운기가 들어 붉디붉은 홍의 궁장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라혼에게는 자신이 입은 홍의와 어울리는 청명한 하늘빛 연청의를 꺼내 손수 입혀주었다. 그렇게 타는 듯한 붉은 옷을 입은 설화와 시원한 연청의를 입은 라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침방을 나선 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는 늦은 아침이었다.
고학 군사에게 서제의 대군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주군에게 전해주라는 부탁을 받은 메이는 발그레 홍조를 띤 설화와 평소와는 다른, 준수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상의 미남자 같은 상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서자 자신이 할 말을 잊어버렸다.
‘설화 언니도 그렇지만, 상공이 저런 미남자였나?’
메이는 그 둘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느끼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라혼이 의식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호감을 가지게 하면서도 그리 매력을 느끼게 하지 않게 하는 묘용이 있는 [컨트롤 참Control Charm : 매력 조절]주문을 해지시킨 현상이었다. 그 주문은 잘생겼지만 그것이 잘생겼다고 느껴지지 않게 하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상공께 아침 인사를 드립니다.”
“메이도 편히 쉬었나?”
“예.”
“메이, 부탁할 것이 있는데….”
“예? 마, 말씀하세요.”
“밖에 있는 지심에게 전해 백수왕야를 대전에 모시라 하고, 육삼에게는 상경의 주요 인사들을 모으라 하게….”
“예, 그리고 지금 서병이 주작문 앞 용야평원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렇군.”
메이는 상공에게 말 못할 어떤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메이 또한 무녀(巫女)의 재능이 있어 가끔 앞날을 내다보는 어떤 계시를 받곤 했는데 지금도 그러한 계시가 살짝 보였다. 그러나 메이는 뭔가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느낌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뭐지? 분명 뭔가 보였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이는 이내 상념을 털어버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지심과 잔폭광마에게 상공의 명을 전했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와 함께 금강으로 천천히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설화에게 선산환도에 대한 유래와 금강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주며 급할 것 없다는 듯 용호왕부를 나서서 금강이 정박(?)해 있는 양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세상 태평한 모습으로 걷는 모습은 진정 한 폭의 그림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누구지?”
“용호왕과 천녀시잖아!”
“정말, 대단하네.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는 소린 들었지만 백호나한도 그에 못지않군.”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렇게 라혼과 설화는 그 신분에 맞지 않게 호위 군사나 시종하는 사람도 없이 상경의 대로를 걸어 양항에 들어섰다. 대로를 지나가는 금군들은 평안한 신색을 한 자신들의 주군의 모습에 묘한 감흥을 받아 자신감 넘치는 군례를 하며 지나쳐갔다.
금강이 정박한(?) 양항은 여러 가지 물자를 금강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막대한 양의 군량과 화살, 천보노를 비롯해 주먹만한 돌멩이가 가득 담긴 자갈 부대에 기름 항아리와 바싹 마른 건초 등이 도르래까지 이용하여 끊임없이 금강에 실렸다.
“이대로 들어가면 방해되겠군.”
라혼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양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일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기에 설화의 가는 허리를 잡고 금강 안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서방님, 저 이거 가르쳐줘요.”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라혼은 설화의 부탁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라혼의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는 일반적인 마법 주문이 아니라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한 것이었다. 일반 주문을 알고는 있지만 라혼이 알고 있는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주문은 시드그람 대륙의 제국 마법 길드의 표준 좌표를 이용한 주문이었다. 따라서, 동방 대륙인 칸 대륙엔 이 표준 좌표가 있을 리 없었다. 표준 좌표를 이용하지 않고 목적지가 그 지역에 대한 공부와 실제 살던 경험으로 머리 속에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친근한 지역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할 수 있는 주문이 있지만 설화를 가르칠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설화가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같은 고위 마법 주문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안 되는 거예요?”
“힘들겠어. 이건 마법이야. 네가 익힌 옥녀심공의 내력과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전에도 말했을 텐데?”
“제가 깜박했어요.”
라혼은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한 설화에게 금강의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사실 금강 내부는 그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금강은 사람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만든 피난처여서 거주 공간과 식량들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가 있을 뿐이었다. 볼 만한 것이라면 법륜 정도랄까? 라혼과 설화가 법륜 방에 들어서자 법륜 근처에서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는 귀림의 드워프들이 아는 체하며 다가왔다.
“라혼님, 설화!”
“어머? 오랜만이네요, 카쿤!”
그렇게 설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카쿤은 라혼에게 설계도를 펼쳐 보이며 물었다.
“이것 봐! 풍화륜(風火輪)이야. 이것만 있으면 금강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뿐만 아니라 비차(飛車)도 만들 수 있어. 이거 정말 대단해! 그리고 이것은 몰이 환단인의 유물을 뒤지다 발견했는데 황건역사(黃巾力士)의 설계도야. 여기에 황건역사가 자유로이 천공을 날아다니는 풍화륜이 달려 있는데 그 풍화륜의 힘을 증폭시키며 금강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아니, 풍화륜만으로는 금강을 움직일 수 없다. 풍화륜이 아닌 법륜을 연구해야 해. 풍화륜은 바람과 불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법륜은 중력자와 반중력자를 이용한 거야. 그 둘의 차이는 개미와 황소의 차이만큼 커!”
“역시 그런가?”
“하지만 풍화륜도 쓰기에 따라 쓸모가 많겠군.”
설화는 카쿤과 서방님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경청했다. 그리고 맹렬히 구르는 커다란 수레바퀴 형상의 법륜을 대충 둘러본 후 뭔가에 홀린 듯 열중하는 토지신들과 헤어져 법륜 방을 나서자 설화는 라혼에게 물었다.
“금강은 원래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요?”
“아아! 그거 사실은 내가 강제로 움직이게 한 거야. 하지만 그건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 금강이 나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알려져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까?”
“알았어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라혼은 설화를 수두로 데려갔다. 그렇게 설화에게 금강을 보여주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