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元)·명(明), 고려(高麗)·조선(朝鮮)왕조의 교체(1) 이길상
가. 14세기의 동아시아
(1) 변화의 조짐들
몽고의 기마(騎馬) 군대가 동서양을 마음껏 휩쓸고 지나간 13세기 이후,
역사의 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14세기가 되면, 세계 도처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데, 유럽에서는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프랑스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고(아비뇽유수),
북부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과 흑사병 등으로 점진적으로 봉건영주들이 몰락하고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국가들이 등장하여 국토회복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세력과 싸우고 있었다.
서 아시아에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아바스 이슬람왕조가 무너진(1258) 후, 셀주크투르크를 대신한 투르크 족의 추장 오스만 베이가 소아시아 반도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근거지로 세력을 모아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며 오스만투르크를 세우고(1299) 삽시간에 서 아시아 일대를 석권, 동서 교역로(交易路)를 장악하고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중앙아시아 일대에는 칭기즈칸의 후손 티무르가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강력한 유목국가를 형성(1360),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인도의 델리까지 침범하고 마구 약탈을 감행하였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이에 못지 않는 변화의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탁발승과 홍건적이라는 계층사회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지고(至高)의 성역(聖域)인 천자(天子)에 즉위(1368)하여 명나라를 세웠고,
한반도에서는 관북 출신의 무장 이성계가 철옹성 같은 권문 세족의 틈바구니에서 최종 승자가 되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열고(1392) 삼한의 군주가 되었다.
일본열도에서도 겸창막부(鎌倉幕府/카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지고(1333) 실정막부(室町/무로마치)가 세워졌으나(1336), 영주들의 재산관리자에 지나지 않았던 수호(守護/슈고)와 지두(地頭/지토오) 들이 자기 영지를 확보하고 명인(名人/다이묘)으로 등장하면서 난세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전국시대가 전개되고, 이에 패한 자들이 왜구(倭寇)라고 불리는 이름으로 무리를 지어 바다를 떠돌면서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주원장이나 이성계가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난세(亂世)의 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을 출세시킨 난세의 최대 공로자는 바로 홍건적이라는 반원단체였다.
주원장은 이름 없는 떠돌이 중에서 홍건적에 몸담은 지 불과 13 년만에 천자가 되었고(1351 ~ 1368), 이성계는 홍건적을 토벌하고 이름을 떨친 후 30년이 지나 임금이 되었다(1361 ~1392). "위기(危機)는 곧 기회(機會)"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 원장과 이 성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 가면서 원· 명, 고려· 조선이라는 왕조교체의 내용을 살펴보자.
(2) 중국대륙
(가) 쿠빌라이 이후의 원
원의 세조 쿠빌라이가 어렵게 가꾸어 온 중국의 원나라 황실에서는 그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사서(史書)에는 원의 멸망을 황실의 권력 다툼에 따른 골육상잔(骨肉相殘), 라마교의 숭상과 교초의 남발로 재정의 파탄, 도둑과 흉년 등으로 국가 기강의 문란 등을 들고있다. 그러나 망국의 징조는 그 첫 단계가 몽고의 최대 약점이었던 바다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남동(南東) 해안, 지도에서 보면 남중국해 혹은 남지나해라고 쓰여 있는 곳은 중국이 인도양과 연결되는 통로인 동시에 동아시아가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중요한 뱃길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해적 때가 나타나 피해를 입는 선박이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다.
이 남중국 해에서 해적들이 설치자 원의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토벌군이 해적들에게 습격 당하여 패한 기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불미한 사건을 이 지방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은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겉으로 태연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원나라의 형편없는 실력을 알게 된 해적들은 마음 놓고 이 지방을 유린하기 시작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국진(方國珍 / 1319~ 1374)이라는 인물은 해적세력을 모아 원조 타도의 깃발을 올렸다.
방국진은 원래 해상 운송업을 하던 사람인데 그가 해적과 내통했다고 모함을 받아 체포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되자, 밀고 한 사람을 죽이고 도망, 결국 해적에 의탁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정말로 해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서도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토벌군을 파견했는데 이번에는 토벌군이 전멸하고 대장이 방국진에게 포로가 되는 어이없는사건이 다시 벌어졌다(1348). 이에 당황한 원조에서는 방국진에게 벼슬을 내리고,겨우 무마하였으나 이로써 원나라에서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해상 수송로를 잃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세계를 제패(制覇)했다는 몽고의 군사력이 이름 없는 해적에게 당했다는것은 그 권위에 흠집이 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약점을 천하에 알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장사성(張士誠/1321 ~ 1367)이라는 이름 없던 소금 밀매상(密買商)이 건달패와 염전의 일꾼들을 부추겨 평소 그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던 부호와 민병대를 습격, 순식간에 태주(타이조우 : 泰州)를 점령하고 다시 북상하여 고우(까오슈 : 高郵)를 본거지로 스스로를 성왕(誠王),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강소성(江蘇省/장쑤성)의 소주(蘇州/쑤쩌우)를 점령하고는 吳王이라 칭했으나(1356) 원나라 조정에서는 서로간의 책임 공방만 뒤풀이할 뿐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나라는 중요한 곡창 강남과 해상교통로를 동시에 잃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원조(元朝)에게는 치명적이라 할수 있다. 바다를 해적에게 내 주었다는 것은 해상을 통한 외국과의 무역의 길이 막힌 것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수집한 공납을 운송하는 일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남지방은 농산물의 중요 산지일 뿐만 아니라 소금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천일제염으로 당나라 후기부터 소금을 전매(專賣/국가의 독점판매)하여 국고수입의 절반을 채웠고 강남이 풍년이면 천하가 배부르고 강남이 흉년이면 천하가 굶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원나라가 이런 강남을 잃었다는 것은 국고수입의 절반과 곡창지대를 동시에 잃었다는 것이다.
(나) 홍건(紅巾)적의 난
황하(黃河/황허)가 중국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길이 5,464 km의 중국 제2의 강이고,
이 강 중하류 유역에서 황하문명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강은 중국문명의 요람이며, 양자강과 더불어 중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강만큼 변덕이 심한 강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이 강의 원류는 중국의 서쪽 청해성(칭하이성:靑海省) 파안객납산맥(바옌카라산맥 - 破顔喀納山脈)의 아합랍달댁산(야허라다쩌산 - 雅合拉達澤山 - 5,442m)에서 발원 하는 약고종열거(웨구쭝례거:約古宗列渠)가 원류라고 하는데, 하류로 오면서 지형의 고저(高低)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화북지방의 황토 층을 지나면서 부터는 물 1말에 진흙 6되라고 할 정도로 강물에 포함된 진흙의 양이 많아서 물인지 흙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가 되고, 이래서 1년에 13억 8000만 t의 진흙을 하류로 운반하는 세계 제일의 진흙탕 물 강이 되었다.
강물에 포함된 진흙은 물보다 비중이 크기 때문에 유속(流速)이 느리면 강바닥에 가라앉게 되고 강바닥에 흙이 차이면 주변보다 강바닥이 높아져 이른 바 천정천(天井川)을 만든다.
그러면 강물은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고, 이렇게 해서 강줄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넓은 평야가 형성되는데 주로 강 어귀에 발달하는 것을 삼각주(三角洲:Delta)라 하고 우리 나라 낙동강 하구의 김해 평야,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 등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황하는 강 어귀에 닿기도 전에 중간에서 물줄기가 제멋대로 이동하고, 바다에 들어갈 때는 많은 토사(土砂)가 그대로 흘러 들어가 해안선이 3년 동안 10 km나 이동하는가 하면, 강의 하구(河口)가 남북으로 왔다갔다 하는 난류(亂流)가 되고, 북쪽으로 해하(하이허:海河)에서 남쪽으로 회하(화이허:淮河) 까지의 넓은 평야 위를 흐르면서 때때로 다른 하천의 유로를 빼앗아 유로를 바꾸며 흘러서 바다에 닿기에 강어귀가 어딘지 모를 정도라고 한다.
고대문명이 이 강을 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유역은 반건조 지역에 속하고 집중호우형으로 비가 내려 수해가 극심한 반면, 연강수량은 적어 한발의 피해도 크다. 7년 홍수 9년 대한(大旱)이라는 말은 이 강 유억에서 생겨난 말이다. 홍수과 가뭄의 피해가 동시에 심한 곳이라는 뜻이다.
다시 중국은 금나라와 남송의 국경선이 되였던 회하(淮河/淮水: 화이허/화이수이)를 경계로 그 북쪽은 밀 농사지대, 남쪽은 쌀 농사지대로 작물재배의 분포가 달라진다.
문제는 밀농사 지대인 북쪽의 화북평야(호남성과 안휘성 북쪽), 이곳은 일망무제의 평야가 이어지지만 한발이 심하고 작은 강수량이 집중호우로 쏟아져 홍수가 나는가 하면 메뚜기 떼가 덮치기도 해서 자연 재해가 극심한 곳이다.
이런 자연환경은 예부터 이곳 사람들을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폭력적인 인간으로 만들었고 걸핏하면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매우 거친 곳이 되었다. 우리들이 즐겨 읽는 삼국지나 수호지의 주된 무대가 된 것도 이 곳이다.
14세기 중엽 이곳에 연이은 가뭄으로 주민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 딸자식을 팔아 모진 생명을 연명하게 되면서 인심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이런 어려운 판국에 조정에서는 황하에 제방을 쌓기 위해 이 지역 주민 20만 명 이상을 동원하게 되자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을 주도한 것이 백련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백련교도의 난이라고도 하고 그들이 서로간에 자기 편을 잘 알아보기 위한 표식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紅巾賊 혹은 紅巾徒)이라고도 한다.
백련교(白蓮敎)란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남북조시대 동진(東晋)의 승려 혜원(慧遠:334~417)이 결집한 백련사(白蓮社)에 유래하는 불교의 한 유파로서, 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나라에서 5대로 내려오는 동안 요사스러운 종교로 변질되고, 나라에서 이를 금하자 원나라 때는 비밀종교로 지하에 숨어들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말세(末世)를 당하여 대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부처님은 다시 사람의 모습을 한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나타나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을 구해 주어 이윽고 행복한 새 천지가 열린다고 선동하였다.
이는 석가모니가 입멸(入滅) 하면서 56억 7천만년 뒤에 다시 오겠다는 예언에 근거한 것으로서, 백련교도들의 신앙의 지표가 되었고, 믿음으로 인한 핍박과 고통이 클 수록 그 보상도 크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게 생각하였다. 후 고구려를 세웠던 궁예도 미륵을 자칭했다. 이런 자칭 미륵은 궁예뿐만 아니라 수 없이 나타났다.
이런 말세 관과 구세주의 사상은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농민이나 유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남(河南)과 회하(淮河/화이허) 일대에 급격히퍼져갔고, 이것이 중국인들이 몽고인들에 대한 민족감정에 불을 질러 혁명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 하북성의 빙년현(氷年縣/융덴현)에 한산동(韓山東)이라는사람이 있어서 그는 3대에 걸친 백련교의 교조(敎祖)로 신도들에게 자신이야 말로 미륵보살의 화신이며 악마를 굴복시킨 명왕의 재생(再生)이라고 선전하고 말세와 새 세상에 관한 예언으로 민심을 휘어 잡았다.
1351년 한산동을 수령으로 폭동을 일으키자, 원나라에 벼슬살이를 했던 두준도(杜逡道)를 비롯해서 자칭 남송의 명장의 자손이라는 유복통(劉福通) 등의 거물들이 이에 가세하고, 한산동 자신도 북송의 휘종의 8세 후손이라고 선전하여 그 세를 넓혔다.
그러나 한산동은 하북에서 진압 군에 잡혀서 죽고, 그의 아내와 외아들 한임아(韓林兒)는 피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유복통 등은 안휘성을 벗어나 서쪽으로 진격, 하남성 남부를 점령하고 세력이 커짐에 따라 한산동의 처자를 모셔와 한산동의 아들 한임아를 세워 소명왕이라부르고, 나라 이름을 송(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했다(1355. 2) 이래서 한임아의 송을 그 연호에 따라 용봉 정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이런 때를 기다리던 건달과 깡패 등의 무뢰한은 물론이고, 이런 것을 좋아하는 호사가들, 정세를 관망하던 농민, 불만과 불평이 많던 관리와 군인, 거지와 다름없는 유민 등이 합세하는 것이 세상인심이기 때문에 비록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고는 하나 그 세력이 삽시간에 불어나 화북과 화중 지방을 휩쓸게 되었다.
한편 동정호(洞庭湖/뚱띵호)의 북쪽, 호북(湖北/후뻬이) 지방에서도 옷감장사를 하던 서수휘(徐壽輝)를 수령으로 하는 또 다른 계통의 홍건적이 일어나 삽시간에 호북과 호남(湖南/후난) 지방을 석권하고 양쯔강 중류에 강력한 반원(反元)세력의 거점을 구축하였다.
이래서 홍건적 중 하남(河南/허난), 산동(山東/산뚱),강회(江淮/쟝화이) 지방에 할거(割去)한 한산동 일파를 편의상 동계라 하고, 호북(湖北/후뻬이), 강서(江西/쟝시) 지방에 기반을 둔 서수휘 일파를 서계라 부르며, 동계는 육상에서 게릴라전을 서계는 수군을 주력으로 양쯔강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황하 하류지역에서는 동계에 속하는 이이(李二)라는 자가 강소성(江蘇省/쟝쑤성)의 서주(徐州/쉬조우) 성(城)을 점령하고 강회(江淮/쟝화이)지 방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부대로 곽자흥(郭子興)이란 자가 있었다.
곽자흥은 강소성의 정원(定遠/띵위안) 지방의 부호 집안에서 자랐으나 주색잡기(酒色雜技)에 골몰하고 건달패와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가산을 탕진, 빈 털 털 이가 된 자로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다가 이런 난세를 만나자 군사를 모으고 머리에 붉은수건을 쓴 장사 수 천명을 이끌고 호주성(濠州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곽자흥의 호주성에 거지몰골로 험상궂은 인상의 한 승려가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쓰고 나타나 그의 부하 되기를 청원하였다. 이 거지몰골의 험상궂은 인상의 승려가 후일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章)이다.
(다) 주원장과 홍건적
중국 역대 왕조를 창업한 군주가운데는 초야에서 묻혀 살다가 난세를 만나 힘을 기르고 때를 타서 제왕의 자리에 오른 자는 있지만, 그들도 집안이 명문의 후예거나 부호에 가깝고, 평소에도 주위로부터 덕망과 인품을 쌓은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통상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원장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 모진 간난(艱難)과 고초를 이겨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그가 강남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창업을 한 것은, 화북지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홀대 받던 강남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것과, 중국적인 풍토에서 서민이 제왕에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주원장의 조부(祖父) 주초일(朱初一)은 지금의 남경(南京/난징) 동편에서 조상전래의 생업인 땅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두 아들 주오일(朱五一)과 주오사(朱五四)를 데리고 양자강(楊子江/양쯔강)을 건너 안휘성으로 이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았으나 거기라고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었고, 그 남아 조부가 사망한 후로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정처 없는유랑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데, 주사오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다시 호주(濠州)의 봉양(鳳陽/펑양)에 살고 있던 그의 형 주오일을 찾아가 세 아들(重四, 重六, 重七)과 함께 더부살이를 하였고, 이런 어려운 가운데 다시 넷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주원장이다(1328).
당시 주씨 집안은 계층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생활로 근근 히 목숨만을 부지했기 때문에 가문이나 족보는 따질 계제가 못된다. 이름에서 보이는 초일, 오일, 오사, 중사, 중육, 중칠 등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한 집에서 같이 산 사촌 간에 태어난 순서에 따라 매긴 번호로서, 주원장의 맏형이 重四라는 것은 큰댁의 아들 셋, 重一, 重二, 重三 다음 네 번째로 태어났다는 뜻일게고. 그렇다면 주원장의 이름도 처음에는 重八이나 重九라고 불렀을 것이다.
주원장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호주에는 몇 년째 계속해서 가뭄이 들었고, 여기에 메뚜기 떼까지 들판을 덮쳐서 추수를 해도 거둘 것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너나 없이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창궐해서그 모진 목숨마저 앗아갔다.
주원장의 나이 17세 되던 지정 4년(1344), 그의 아버지와 맏형, 그리고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졸지에 주원장은 고아가 되어 굶주림을 이기고자 연줄을 겨우 찾아 황각사(皇覺寺)라는 절로 들어가 중이되었다.
그러나 절마저 양식이 떨어지자 승려들은 탁발(托鉢)의 길에 나섰는데, 어린 주원장도 절에 들어간지 50일 만에 도리 없이 탁발 길에 올랐고,
말이 탁발이지 떠돌이 거렁 뱅이가 되어 각처를 누비기 3년, 나이 20세가 되어 헤어진 탁발자루를 메고 다시 황각사로 돌아와 잠시 평온을 뒤 찾았다.
아마 이 때 글도 배우고 자기의 앞날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고 보고 있으나, 깡마른 체구와 턱뼈가 튀어나온 말 상의 얼굴 윤곽, 개발같은 주먹 코와 꼬리가 위로 올라간 실눈, 뻐드렁 이빨 등의 그의 인상이 워낙 이상하게 생겨서 신도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기피하자,
중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길을 찾아 인생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오른 편의그의 초상화는 황제가 되고 나서 그린 것으로, 의젓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또 다른 초상화는 위에 얘기한 대로 추남(醜男)이 틀림 없다고 한다)
이즈음 홍건적이 일어나 각지를 누볐고, 드디어는 곽자흥의 부대가 호주를 점령하자, 황각사의 승려들도 다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주원장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정성으로 기도 드리고 점을 쳐서 홍건도가 되는것이 좋다는 점괘(占卦)를 받고,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곽자흥을 찾아 호주성의 문 앞에 이르렀다.
이상한 몰골의 중이 대장을 찾자 수문장은 적이 보낸 첩자(諜者)로 오인, 그를 형틀에 매달고 모진 매질을 가했고, 초주검이 되었을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곽자흥에게 발견되어 그의 수하가 되는 것을 허락 받아, 대뜸 분대장에 해당하는 십부장(十夫長)이 되었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 25세, 그가 십부장이 된 것은 그의 인상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하는데, 우거렁 바가지 같은 인상이 승려로서는 부적격이었으나 도둑의 무리에서는 한층 돋보여 오히려 이런 비범한 인상에 매료된 곽자흥은 자기의 양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고, 이가 후일 주원장의 창업에 지대한 공로를 끼친 마(馬) 황후다. 이후 주원장은 마치 고기가 큰 물을 만난 듯 자기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원의 토벌군이 서주를 점령하고 이이(李二)가 전사하자 그 부하들이 흩어져 일부가 곽자흥의 호주로 밀려 들어오고, 서열상 형님에 해당하는 이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곽자흥은 주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적이 많은 북쪽을 포기하고 식량이 풍부한 남쪽으로 본거지를 옮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로 하였다.
지정 14년(1354), 주원장 등은 우선 정원(定遠/띵위안)을 차지하고 제주(除州/츄조우)를 점령하여 남방 경략을 본격적으로 추진, 식량확보를 위해 화주(和州/화조우)를 공략했을 때 주원장은 부관으로 동행, 위세를 떨쳤는데,이 때 유복통 등이 한산동의 아들 한임아를 데려와서 소명왕으로 세우고 나라 이름을송, 연호를 용봉으로 했다는 그 용봉 정권으로부터 곽자흥은 도원수, 주원장도 우부원수의 첩지를 받고 정통파 홍건적의 직계장군으로서의 기반을 닦고 세력을 기르게 되었다. 이 때가 지정 15년(1355) 주원장의 나이 28세 였다.
이어서 곽자흥이 죽고 그의 장남 곽천서가 도원수가 되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이 곽천서의 홍건적은 화주에서 다시 양쯔강을 건너 태평로(현 當途/땅두)를 점령했고, 다시 동쪽으로 더 나아가 접경로(지금의 南京/난징)를 공격하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패하고 곽천우 등 홍건적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전사하자, 이제 주원장이 제 일인자가 되었고, 이듬해 지정 16년(1356)다시 접경로를 공략, 드디어 입성에 성공, 접경로를 용천부로 개편하고 여기를 본거지로 사방을 경략 해서 강동 일대에 큰 세력을 구축하자, 이에 용봉 정권에서는 그에게 오국공의 칭호를 내리고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송나라의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용봉 정권은 지정 18년(1358) 북송의 옛 수도 개봉(開封/카이펑)을 수복하고 여기에 안주하고자 했으나, 곧 원의 토벌군이 들여 닥쳐 안휘성 안풍(安豊)으로 도망, 그 세가 현저히 줄자 이를 눈치 챈 소주의 소금 밀매 상 출신 장사성은 재 바르게 안풍을 포위, 공격하자 용봉정권은 주원장에게 구원을 요청, 이에 주원장은 안풍으로 달려가 대송황제를구출하여 무사히 금릉으로 돌아와 용봉 정권으로부터 다시 오왕에 책봉되어 독자적인 정권을 이루었다(지정23년 1363)
일이 이렇게 되면 소명왕 한임아와 주원장 사이가 공식적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반대가 된다. 한임아나 유복통 등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그에 손에 달렸고, 결국 한임아 등은 주원장이 보낸 배에 실려서 가다가 배가 뒤집혀 익사하고 말았다.
이래서 주원장은 백련교를 받드는 홍건적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지금까지 그를 길러준 백련교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는데, 세력을 얻기 위해서 삼은 발판이 세력을 얻은 후에는 오히려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난세에 일어난 군벌이나 군대라는 것이 말이 군벌이고 군대지 실상은 형님 아우하는 깡패사회의 확대 판에 불과했고, 원래 깡패 사회라는 게 서열과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나, 그것 하나만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며, 더구나 중간 보스들에 의한 힘의 누수와 끝없는 탐욕은 민심을 이반시켜 다된 밥에 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몰고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결별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무뢰한들로 정권을 창출해서 왕조를 일으킨다는 것은 민심이 따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지식계급으로부터 외면 당하게되고, 힘으로 밀어 부쳐 정권을 세운다 해도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주원장은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이 중원을 통일해서 천자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소주에는 장사성, 절강 중부에는 해적출신의 방국진, 호북과 호남, 강서에는 서수휘의 뒤를 이은 진우량, 양쯔강 하구의 양주에는 원나라 세력 등이 사방에 버티고 있어서, 춘추전국시대의 군웅할거 양상이다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을 차례로 토벌하고 대도(연경/베이징)의 원나라를 타도할 때까지, 아직도 그에게는 길고도 지루한 여정이 남았다고 하겠다.
(라) 원조(元朝)의 쇠퇴
이렇게 중국 천지가 홍건적의 난으로 뒤범벅이 되었을 때 원의 조정은 이를 방치하고만 있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다. 왕실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내분과 골육상잔(骨肉相殘)을 한 것은 사실이고, 강남과 해상로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황하 이북은 이상하리 만큼 오히려 조용했다. 그것은 아직도 황제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벌이 발호하고 권신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기때문이다.
1328년 태정제가 죽자 그의 아들인 천순제가 상도에서 제위에 오르고, 한편 태정제의 조카인 문종도 대도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사촌끼리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엔 티무르의 도움을 받은 문종이 승리하여 제위를 잇게 되었다(1329) 이때 실권자는 당연히 엔 티무르로서 그는 태정제의 황후와 사통(私通)하고 왕족의 딸 40여명을 첩으로 들이는 등 호사를 다하다가 죽었다.
문종의 뒤를 이어 왕족의 노예출신 빠얀의 도움으로 원나라 최후의 황제 순제가 즉위하고, 권력의 실세가 된 바얀은 피의 숙청을 감행, 엔 티무르 일당을 남김없이 처단하고, 그는 한(漢)족인 중국인들을 몹시 싫어해서 중국인 전부를 죽일 것을 주장했으나, 그런 그의 과격한 정책이 스스로 무덤을 파 명재상이라고 불리던 도구타에게 밀려났고, 도구타 역시 장사성의 토벌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가 곧 모함을 받아 실각, 풍전등화 같은 원나라를 그나마 지탱케한 것은 자간 티무르와 그의 아들 구구 티무르로서 이들은 과감하게 홍건적을 타도하였다.
그러나 빈사상태에 빠진 원나라에서는 말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순제는 라마교에 탐익, 도를 닦는다 하여 이상한 방중술(房中術)에 매혹되어 정사는 뒷전이고, 또한 집 짓는 묘한 취미가 있어서 신하들의 집을 설계해 주기도 하고 손수 대패질을 하는 등 천하야 어찌 되었던 구중 궁궐에서 목수 일에 열중 목수 천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황태자의 어머니 즉 순제의 황후는 고려 기자오의 딸로서 공녀로 원에 왔다가 고려 출신 내시들의 도움으로 궁녀로 들어가서(1333) 황태자를 낳아(1339) 다음해에 제 2황후, 다시 정식황후가 되었다(1365).
그가 낯선 이국의 궁중에서 권모술수로 권력을 잡은 30 여년간, 그의 친정인 고려에서는 그의 친정 오빠인 기철 일파가 횡포를 부렸고, 원나라 궁중에는 많은 고려 미인들을 두고 귀족들에게 배필로 삼게 함으로써 원 나라조정의 고관, 귀족, 왕족들 사이에는 고려 여자를 아내로 삼아야 만 명문 명가로 치는 기이한 풍속까지 생겼다.
(3) 홍건적의 침입과 고려 후기의 세력 변화
(가) 홍건적의 침입
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려 후기 사회에서도 여러가지 변화가 나타나 이미 고종 45년(1258)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이북을 그들의 영토에 편입하였고, 고려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에는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자비령 이북을 차지하는가 하면,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1273년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를 두어 그들의 목마(牧馬)장을 만들었다.
그 후 동녕부는 20여년이 지난 충렬왕 16년(1290)에 만주로 옮겼고 탐라총관부도 1300년 탐라만호부가 설치되면서 고려에 귀속시켰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이를 수복할 때까지(1356) 그들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31대 공민왕(恭愍王/1351∼1374)이즉위, 그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서 비록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는 몽고식 이름을 갖기도 했고,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였으나 그의 어머니가 고려 여인이고,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가진 멸시와 고초를 당하면서 울분을 삼키다가 고려왕이 되어 개경으로 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원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중국에서는 한산동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1351),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공민왕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원 나라 배척운동을 일으켜,1352년(공민왕 1) 변발(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없애고, 1356년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기황후의 친정 오라버니인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러한 자주성 회복운동이 한창 일 때 난대 없는 불청객이 들여 닥쳐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를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한다. 홍건적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으나 고려로서는 이들을 지배한 적도 없고, 그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으나 이들이 중국에서 난을 일으키자 원의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수휘와 곽자흥 그리고 주원장이 이끄는 소위 서계는 강남지역을 근거로하였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한산동과 유복통, 이이(李二) 등이 이끄는 이른바 동계는 심한 타격을 받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서계와 합세하였으나 미쳐빠져 나가지 못한 동계의 무리 중에는 만주로 이동, 요양(遼陽 / 랴오양)을 근거지로 저항을 계속하다가, 다시 만주의 홍건적을 원조(元朝)에서 타도하자 이들은 도망 할 곳을 찾아 압록강을 넘게 된 것이 고려를 침범하게 되었다.
이들은 1359년(공민왕 8) 12월 압록강이 결빙(結氷)되자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일거에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철주(鐵州)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이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이 이들을 반격하자, 홍건적들은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다시 고려군의 추격을 받고 궤멸되어 겨우 잔병 300 명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는데 이것을 홍건적의 1차 침입이라고 한다.
그 후 홍건적들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다시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등이 10 여 만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2차 침입을 하였다.
홍건적이 절령(慈悲嶺)의 방책(防柵)을 깨뜨리고 개경(開京)으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민왕은 남쪽 복주(경북 안동)로 난을 피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이방실,상원수 안우 등이 홍건적과 대적하여 싸웠으나 그 수에 밀려 패하고 수도 개경이 이들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홍건적은 이후 수개월 동안 개경을 중심으로 머물면서 마음대로 잔학한 짓을 자행하고 그 일부는 인근지역은 물론, 원주(原州)·안주(安州) 등을 약탈하자, 이 해 12월 복주에 다다른 공민왕은 정세운·이방실·안우·김득배(金得培)등을 보내어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개경을 수복하고 난을 평정하였다(1362)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東北面)의 상만호(上萬戶)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는 휘하의 2,000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등의 목을 베고 개경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수훈을 세웠고,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기에 바다에서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이의 퇴치에도 여간 고심하지 않았는데 이런 혼란기가 이성계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392년에는 조선왕조의 창업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삼한의 새로운 군주가되었다.
(나)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가 동북면상만호로서 독로강만호 박의의 난을 진압하고(1361), 이어서 홍건적 토벌의 공으로 1362년에는동북면병마사가 되어 고려 국방의 요충을 맡게 되었고 홍건적이 물러가자 다시왜구의 출몰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를 토벌하면서 그의 이름과 함께 벼슬도 높아지기시작하였다.
이성계는 본관을 전주(全州)로 하고 있어서 전주가 그의 연고지임에는 틀림없고, 지금도 전주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어서 사적 제 339호로 보존되고 그전각 안에는 보물 제 931호인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이 있다.
그러나 이성계 자신은 전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고조부(4대조)인 이안사(李安社 : 穆祖/?~1274)가 전주의 호족으로서 할거하고 있던 중 새로 부임한 관리와 다투고, 그의 보복이 두려워 강원도 삼척으로 갔다가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고종 때 고려의 벼슬을 받아 지의주사(知宜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원(元)이 고려를 다시 침공하자 1258년 조휘(趙暉)가 영흥지방을원에게 바치고 쌍성총관부를 설치, 그가 쌍성총관이 되면서 그 세력하에 있던 덕원의 이안사도 원에 귀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남경 오천호(南京五千戶)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벼슬을 원으로부터 받았다. 다루가치란 몽고가 정복지에 파견한 그들의 관리다.
이안사(李安社)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翼祖/?~?)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호(千戶)라는 원(元)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뒤에 여진족(女眞族)의 기습을 피하여 함경도 경흥(慶興)지방에 도피하였다가, 후에 고향인 덕원으로 돌아왔는데, 천호란 몽골의 군사조직이자 행정단위로 유사시 1000명의 군인을 동원할 수 있는 부락(부족) 크기의 단위를 말하며, 천호 위에는 다시 만호가 있었으나 이는 명예직에 가깝고 실질적인 실세는 천호였다.
그의 아들 춘(椿:度祖/?~1342)은 어머니가 등주 최씨(登州崔氏) 기열(基烈)의 딸로서,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의 천호 관직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몽골식 이름을 받았고, 처음에 박씨와 결혼하여 탑사불화(塔思不花)와 자춘(子春)을 낳았으나, 얼마 후 박씨가 죽자 쌍성총관(雙城總管)의 딸 조씨(趙氏)와 재혼하고 의주(宜州/덕원)에서 화주(和州:함흥)로 옮겼다. 화주로 옮긴 것은 후처인 조씨가 조휘(趙暉)의 손녀이므로, 처가의 정치세력을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되는 이자춘(李子春:桓祖/1315 ~ 1361)은 이춘의 뒤를 이어 함경도 쌍성(雙城:永興)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을 때, 중국대륙에서는 홍건적이 난이 일어났고,고려에서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시기에 이자춘은 눈치가 빨랐던지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지 아니면, 같은 민족으로 애국심이 깊었던지 1355년(공민왕4)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 소부윤(少府尹) 이라는벼슬을 받았고, 다음해(1356)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內應)하여 고려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라는 벼슬과 함께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함흥으로 돌아가 그곳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곧 함흥으로 돌아갔다.
충신(忠臣)과 역적(逆賊), 이것은 왕조시대의 유물이라고할 수 있으나, 조상과 뿌리를 중히 여기는 우리들에게는 지금도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이되고 있다.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당시 총관이었던 조소생(趙小生/?~1362)은 한양(漢陽)조씨의 후예로서 그의 증조부 뻘인 조휘가 몽고 침입 때(1256) 투항해서 안내역을 자청하고 반대파를 처단하여 함흥일대를 몽고에 바치고 그 공으로 쌍성 총관이 되었다.이 때 이성계의 고조부가 되는 이안사는 고려의 의주지사를 지내다가 다시 원의 다루가치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고려 왕실 입장에서 이안사가 역적은 아닐지라도 충신은 될 수 없었다.
그 후 조휘의 자손은 쌍성총관직을 세습해서 조소생에 이르렀고, 이안사의 자손은 천호직으로 세습해서 이자춘에 이르렀다. 이자춘에게는항상 껄끄러운 상대 조소생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보고 쉽게 고려에 귀순하여 쌍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개경에 잠시 머물다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흥으로 돌아가 함경도 지방을 다스리다가 죽고 그 뒤를 아들 이성계가 물려받았다.
요즘의 상황으로 이를 풀어보면 이성계의 집안이나 조소생의 집안 모두가 원에 귀부(歸附)하여 영화를 누렸고, 국적도 몽고로 바꾸었다가, 몽고(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성계 집안은 현재의 지위를 보장 받는다는 조건으로 다시 변신하여 고려로 돌아왔고, 조소생은 고려에 다시 귀순한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고 볼 수 있다.
조소생은 고려귀순을 끝까지 반대하고 쌍성이 함락되자 여진으로 도주한 뒤, 만주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납합출/?~1381)를 찾아가 쌍성을 치자고 설득하여 나하추가 수만 군사로 쳐들어 왔으나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 탈환에 공을 세우고 이자춘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가 된 그의 아들 이성계(李成桂)가 이끄는 고려 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 후 고려 조정은 북원과의 관계,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등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고, 이것이 북변의 무장이었던 이성계를 중앙 정치무대로 불러들이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로 하여금 신 왕조 개창의 힘을 모으게 하였다.
다음 이야기 -원, 명, 고려, 조선왕조의 교체(2)-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