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이사야서를 읽기 시작했다.
예언서를 읽을수록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은
예언자들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상식,
종교적 관습과 편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은근히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을 멈추지 않는다.
메시지 성경의 머리말은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심판의 메시지(1~39장),
위로의 메시지(40~55장),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56~66장).
처음에는 심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심판은 징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죄와 왜곡이 깊어졌을 때,
공의를 회복하고
마침내 위로와 희망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조치이다.
그래서 심판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읽은 이사야 1장은
첫 장부터 거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향해
충격적인 말씀을 쏟아내신다.
"예배하는 곳에 정신없이 널려 있는 재물이 다 무엇이냐?
나는 이미 질리도록 먹었다."
"예배 시늉놀이,
같잖은 경건 놀음을 집어치워라."
심지어
아무리 오래,
아무리 크게,
아무리 자주 기도해도
듣지 않겠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왜일까.
예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삶이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
죄를 씻고,
행실을 씻고,
선한 일을 배우며,
정의를 실천하고,
억눌린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집 없는 사람을 대변하며,
힘없는 사람을 변호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룩을 교회 안의 일로만 제한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흘러가야 할 자리를
오히려 막아 버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죄였다.
그런데 이것이
수천 년 전 이스라엘만의 이야기일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정말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읽는 내내
이상할 만큼 통쾌했다.
평소 쉽게 꺼내지도 못하고,
이야기해도 좀처럼 이해받기 어려웠던 생각들을
이사야가
수천 년 전 내 앞에서
대신 외쳐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한 사람의 절규에는 무감각하면서도,
예배 횟수와,
기도 시간과,
종교적 열심에만 몰두하는 모습.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배 시늉놀이."
"같잖은 경건 놀음."
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상식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다.
내 곁에서
선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한 영혼을 살리는 상식적인 삶이
하나님께서 먼저 원하시는 기적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왜곡된 거룩을 가장 먼저 공격한다.
그들이 말하는 거룩은
세상을 떠나는 거룩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살아내는 거룩이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언자란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하고 싶으신 말씀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대신 전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사야의 두터운 예언서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