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가 그리운 시대
최 화 웅
멘토(mento)라는 말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 멘토르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원정을 떠나기 전에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멘토르에게 맡기면서 생겨났다. 흔히 우리는 부모와 스승의 역할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멘토라 하고 그의 지도나 조언을 받는 상대를 멘티(mentee)라고 한다. 가르치는 사람과 선출된 지도자는 1대 다수로 상대를 관계하지만 멘토링(mentoring)은 교육학에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1대 1로 지도, 조언하면서 실력과 잠재력을 개발시킨다. 몇 해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통해 멘토 열풍을 일으킨 김난도 교수가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에세이로 젊은이들에게 이 시대의 멘토, 즉 어른을 찾아 나서게 한 바 있다. 멘토르가 등장하는 <오디세이아>를 읽다보면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받은 다섯 살짜리 철부지 개구쟁이 주인공 제제의 멘토 뽀르뚜가 아저씨를 불러내고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 영화 속에서 꿈을 키워온 어린 토토의 멘토인 시골극장 영사기사 알베르토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뽀르뚜가와 알베르토는 우리들에게 겨울 햇살 같은 따뜻한 우정을 느끼게 한다. 그들의 사이는 우리가 꿈꾸어온 완벽한 멘토와 멘티의 관계로 삶을 전개한다. 누나와 형, 심지어 아버지로부터도 꾸지람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매를 맞아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된 제제에게 뽀르뚜가 아저씨는 엄마의 품 같은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가난과 학대에 시달리는 제제에게 밍기뉴라는 이름의 라임오렌지나무만이 유일하게 말벗이 될 때 뽀르뚜가는 제제의 벗, 스승, 아버지, 그리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뽀르뚜가는 겉으로 보기는 무서웠지만 외모에 비해 다정다감하며 너그럽기 그지없었다. 제제가 아플 때 손수 차를 몰아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도 한다. 처음에는 서로가 미워했지만 이 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어요. 당신은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에요.”라고 속내를 드러내었고 소풍을 가서는 뽀르뚜가에게 자기를 아들로 삼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외로움 속에서 일찍 철이 든 제제는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가, 제게 사랑을 가르쳐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느 날 뽀르뚜가가 ‘망가라치바’라는 열차에 치어 숨을 거두자 제제는 멘토를 잃은 충격에 빠져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먹지도 못하고 토해내는 고통을 겪는다. 다섯 살 난 제제가 따르던 뽀르뚜가 아저씨와의 관계에 비해 한 살 위인 여섯 살 토토와 알베르토 할아버지의 관계는 또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차원 높은 인간관계로 발전하여 신뢰와 사랑을 나눈다. 알베르토가 장난꾸러기 어린 토토를 귀찮아하고 성가셔했다. 그러나 광장을 낀 시골 소극장의 좁은 2층 영사실에서 부대끼며 지내던 동안 두 사람은 고운 정 미운 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장에서 만난 알베르토가 옆줄에 앉은 토토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졸라 컨닝이 이루어진다. 이를 계기로 영사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 듯 하며 잔심부름도 하고 말벗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사기 조작법을 어깨너머로 익히며 세상을 배워 나갔던 것이다. 청년이 된 토토는 아버지가 전사자라 군복무가 면제되어야 하는데도 병무청의 실수로 입대하는 바람에 첫사랑 엘레나를 잃고 만다.
제대 이후 망연자실해 하는 토토에게 눈이 먼 알베르토가 로마로, 그 넓은 세상으로 떠나가라고 다그친다. 알베르토는 떠나는 토토에게 시실리로 돌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고 한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알베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토토는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키워준 알베르토에 대한 감회에 젖는다. 고인이 된 알베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린 날 추억 가득한 고향을 찾은 자신에게 넘겨진 유품을 통해 영화에 미쳐 살아온 자신이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것은 멘토 알베르토의 보살핌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사무친다. 그리고는 어느 날 들려준 ‘성문지기와 공주의 사랑’처럼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망령을 풀게 된다. 알베르토의 죽음을 계기로 추억 가득한 고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젊은 날 즐겨 찾던 바닷가 방파제에 세운 차안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며 마침내 오해도 풀게 된다. 처음 영화 <시네마 천국>은 상영관을 잡지 못했으나 제 62회 아카데미 외국영화작품상과 제 47회 골든글러브 최우수외국영화작품상을 연이어 수상하면서 개봉의 길도 열렸다.
누구나 인생의 길에서는 멘토를 맺기 마련이다. 그 대상이 굳이 사람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한 권의 책, 한 곡의 음악, 한 장의 그림, 한 편의 영화면 어떠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불리고, 병역을 기피하며 자녀 진학과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과 편법증여를 밥 먹듯 하며 남의 논문을 표절해서라도 학위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활개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법을 만드는 사람보다 지키는 멘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는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아는 지혜로운 멘토, 높은 곳에서 큰소리만 치고 호령하는 사람보다 묵묵히 솔선수범하는 멘토, 약속만 하는 사람보다는 실천하는 멘토, 갖가지 고통과 시련을 겪는 사람들에게 사표(師表)가 되는 올곧고 바보 같은 멘토가 절실한 시대다. 흔히 요즘 시대를 “어른이 없다”거나 “어른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세상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과 우정을 나눌 멘토가 그립다는 외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