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나는 어떤 일군인가?”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군입니까? 여기 바울을 도왔던 하나님의 일군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이름은 약 여섯 명이지만 9절이 디모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 세 종류의 일군을 발견합니다.
1. 데마와 같은 일군입니다.
본문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골4:14을 보면 데마는 과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일시적으로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자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항해 떠나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저렇게 헌신한 사람을 이토록 옥에 갇히고 비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회의, 아마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진정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복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어요. 세상의 영광과 복을 구하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언제든지 그만 둘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산 고신대학 다니는 학생의 말을 들으니 처음 입학하면 90%는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2학년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사모 되겠다는 사람은 몇 %도 남지 않는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 보이니까 그러나 목회자 사모가 된 선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시적 감정으로는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곧 그만 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반대가 와도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는 데마라면 진정 회개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2. 마가와 같은 일군입니다.
14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가는 120명의 문도들이 기도하다 성령 받은 다락방 주인집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방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뿌리가 깊은 사람이에요. 그러한 마가는 어떤 고난도 각오하고 제 1차 전도사역 때 바울과 바나바를 돕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복음사역에 외로움과 박해와 고난이 심해지자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뒤돌아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1차 전도는 마가에 있어서는 실패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데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제 2차 때 또 다시 뉘우치고 바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제 1차 때 제 맘대로 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행 15:39). 그래서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로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뉘우치고 나중에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 늘 찾아가서 만나며 바울을 돕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한 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골4:10이나 벧전5:13 등을 볼 때 사도들이 인정할 만큼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이 마가입니다. 감상적으로 하다가 말다가 하는 약한 마가였지만 진실로 변화 받은 마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에는 못했다면 지금은 뉘우치고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보면 일군이지만 과거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나서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도 마가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사람이 두려워 숨어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이 인정하고 교회에 실망을 주지 않는 참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누가와 같은 일군이 있습니다.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바울에게 분신같이 있으면서 바울을 도왔던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복음을 쓴 집필가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는 유망한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누가가 바울을 극진히 수종을 들면서 함께 했던 흔적들이 있지만 누가는 우리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충성된 일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더구나 일생 목회를 도와 말없이 교회를 섬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같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는데도 한결같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교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저도 간혹 그런 생각해 봅니다.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교인이 되었을까? 좋은 교인이었을까? 가시 같은 교인이었을까?
그러나 누가는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노라’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주었고 모든 수고를 감내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속적인 영광을 버리고 오직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굶고 헐벗은 누가였습니다. 가서 보십시다만 하나님 나라에 바울의 상이 크겠지만 이와 똑 같이 상을 받은 사람이 누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회원 여러분!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군을 찾으십니다.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는 자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가와 같다면 속히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가와 같이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사랑하는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직분자임명]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 (딤후 2:20-21)
오늘은 우리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합당한 자격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을 일컬어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 7절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한 것은, 교회의 존귀함을 말해 줍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다니,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대체로 집은 건물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지은 건물도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믿음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집 주인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집의 일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기만성(大器晩成) 이라는 말을 씁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그릇에 견주어 ‘그릇이 크다’, ‘그릇이 작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똑같은 식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
모든 인간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비해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니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신자들을 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나옵니다. 신자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그 중에는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골고루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금 그릇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을 말합니다. 은그릇은 전자보다는 덜 충성스런 신자들을 말합니다.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은그릇만 못한 신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사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핍박자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시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둘 점은, 누구나 날 때부터 어떤 종류의 그릇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금 그릇인 사람은 없습니다. 날 때부터 질그릇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은 질그릇인 사람도 금 그릇이 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죄 사함을 받아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 받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실제로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씻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담대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는데,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은 사람이라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 사함은 곧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면, 깨어진 놋그릇을 녹여서 새 그릇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그릇은 이전의 놋그릇이 아니라, 새 그릇입니다. 이전에는 오물을 담는데 쓰던 놋요강이었더라도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밥상에 올리는 새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믿기 이전에 우리는 깨어지고 더러워진 놋요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완전히 녹여서 새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죄 사함 받은 성도라야 하고, 또한 매일같이 회개생활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성도라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게 감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도 한 때는 믿는 무리 가운데 속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해 낼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아시므로 때가 되면 그런 자들을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2장 18-19절에는 “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19)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갖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단에 속한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 때 기성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단들은 지금도 교패가 붙은 집만 찾아다닙니다.
이단은 병균과 같습니다. 그것도 감기를 옮기는 바이러스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을 전염시키는 병균입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단에게 넘어갑니다. 또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이단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살펴야 합니다.
이단은 비유하자면, 기독교의 짝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을 살 형편이 되지 않은 경우에 값싼 짝퉁을 사서 기분을 냅니다. 단 돈 몇 만원에 수백만 원 하는 명품과 똑같이 만든 짝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짝퉁을 가졌다고 해서 건강을 해친다거나 명예가 실추된다거나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짝퉁은 사정이 다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짝퉁을 일컬어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선지자의 짝퉁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고, 사도의 짝퉁을 거짓 사도라고 합니다. 한 교회에 속해 있으나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짝퉁 신자를 거짓 형제라고 부릅니다.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있기 마련이고,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는 현실을 보고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4:11).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 물들지 않은 성도라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도덕적인 오염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알게 모르게 도덕적인 오염에 물들기 쉽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노아가 살던 때보다 더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지켜 세상 풍속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직분자의 도덕적인 자격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12)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13)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육신의 정욕, 재물에 대한 탐욕, 높임 받으려는 권력욕, 칭찬받으려는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높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나태 곧 게으름입니다. 다른 일은 부지런히 하면서 신앙생활은 한없이 나태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잠언 6장에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하신 대로, 신자가 게으르면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빈궁하고 곤핍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으므로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서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보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로 나가서 부지런히 장사하여 갑절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는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와서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와서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특히 직분자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23절에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집사님들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구역장님들은 구역식구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보살펴야 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맡은 학생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치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대접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직분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이 다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섬김을 받는 사람일까요? 어린 신자들, 연약한 신자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피차 섬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이르기를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 섬기기에 힘씀으로 사랑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꾼들이 이 섬기는 일에 솔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한 분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집에 쓰임 받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히 쓰이든 천히 쓰이든,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쓰임을 받으려면 금 그릇처럼 귀히 쓰여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격은 우리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죄와 이단과 세속과 나태함과 같은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재물과 건강 등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을 비롯해서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이 깨끗한 그릇이 되셔서 하나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임 받는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 제단을 다시 수축하기 (왕상 18:30~40)
예수님은 눅12:49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를 원하셨다. 그 불은 거룩한 불이다. 죄악과 정욕의 불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의 불이다. 그 불이 붙어야 죄악을 이긴다. 그 불이 붙어야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다. 그 불이 붙어야 축복의 인생이 된다. 그 불이 붙어야 부흥의 주인공이 된다. 이 불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여 사람의 심령을 타게 했을 때 120문도의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교회를 확산하는 생명 공동체가 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들어가는 지역 마을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든든하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부흥의 불길이 로마에까지 퍼져나갔다.
조선 땅에도 1885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의 어두움의 시대에 하나님은 1907년 평양에 불을 던져 주셨다.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회개로 시작된 말씀 집회는 통회와 자복, 합심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한 달 뒤인 1907년 2월 10일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의 부흥회에 2,000명이 모여 회개와 자복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각 간증을 하였다. 한 주간 더 연장된 이 부흥의 역사로 학교는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문을 닫았다. 불이 심령에 떨어지고 교회에 떨어지고 평양에 떨어졌을 때 이 불은 전국으로 옮겨 붙었고 1919년 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저력으로 승화되었다.
이 불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주님이 부흥의 불을 다시 한번 더 내리시도록 갈망해야 한다. 이 시대는 죄악의 시대다. 어두운 영들이 판을 치고 생명을 팔아버리는 시대다. 학교 교육이 무너져서 가정의 공동체가 해체되므로 청소년들이 신음하고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술과 마약, 알콜 중독, 음란과 사치, 방탕이 판을 치는 패역의 시대다. 교회마저도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성직자, 교회 지도자들도 길을 잃어버리고 다같이 방황하는 시대다. 표류하는 시대, 겉만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만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다.
그래서 불이 더욱 임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본성이 자비와 긍휼이시기에 렘3:22~23의 말씀처럼 이 땅을 진명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더욱 강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불을 내려주실 것이다. 마치 오늘 본문 엘리야가 고군분투하는 갈멜산 위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드러내시려 태우는 불을 내려주시듯 믿음의 부흥, 야훼 신앙의 부흥을 위해 불을 주실 것이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진멸하는 불을 갈망하며 그 불이 떨어지는 현장에 서 있었는가?
Again 1907을 사모하는 우리는 “이 땅에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겠다. 불로써 응답하시는 역사는 바로 왕상18:30의 말씀대로 단을 수축하므로 일어났다.
왕상18:30~31은 바로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과정이다. 불은 바로 회복된 단 위에 임한 것이다.
첫째, 용서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1)
엘리야는 백성을 모아 놓고 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라고 하였다. 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라 하였다.
북왕국 출신인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남왕국 유다를 상징하는 유다와 베냐민의 돌도 취하였다. 분단의 벽, 정치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화해와 일치, 연합의 단을 쌓아 올렸다. 바로 벽이 없는 용서의 단이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단은 용서가 있는 단이다. 용서는 예배를 성공시키는 열쇠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다. 용서는 곧 부흥의 시작이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하였다. 예물을 드리려거든 먼저 사과하라. 용서보다 급한 일이 없다.
둘째, 예배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3)
왕상18:32을 보면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만들었다. 이것은 여기가 예배의 단이라는 구별의 표시다. 예배의 단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보호하는 울타리 표시이다. 그리고 왕상18:33을 보면 “또 나무는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다. 제물과 제물을 사르는 장작, 그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예배의 본질 중의 하나가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불로 임하는 단은 단을 수축하되 예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제물과 장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부흥회에 불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제물과 장작을 준비하여 예배의 단을 쌓는 주인공이 되자. 구약시대의 제물과 장작은 신약시대의 헌금이다. 찬송이다. 마음이다. 불이 붙는 불쏘시개가 되어 구별된 헌금, 구별된 뜨거운 찬양, 구별된 헌신의 마음이 단에 올려질 때 야훼 신앙을 세우는 회복과 부흥의 불로 타오르게 될 것이다. 헌금이 드려지지 못하고 찬송이 드려지지 못하고 헌신이 드려지지 못하는 단은 형식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불을 원하지만 인색하고 땀 흘리는 대가를 올려놓지 못하는 단을 고쳐야 한다.
셋째, 거룩함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5)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게 하였다. 그리고 왕상18:33~34을 보면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한다. 모두 세 번을 명령하였으니 12통의 물을 부었다. 이것은 백성들 가운데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 구경꾼처럼 갈멜산에 있었지만 12통의 물을 붓는 일에 나선 무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3년 6개월간의 가뭄,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 그런데도 12통의 물을 제단 위에 붓는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치 내 혈관 속에 있는 피를 쏟아붓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물 붓기가 있으므로 단이 정결케 되었다. 송아지의 각을 뜨느라 더러워지고 어지럽혀진 단과 단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은 물로 씻어내릴 수 밖에 없다. 단은 질서가 잡히고 더러운 것은 씻겨 도랑에 채워졌다. 단은 깨끗해야 한다.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하는 것이다. 비록 장작과 제물과 돌과 흙이 씻어내리는 물로 젖었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는다. 젖은 장작, 젖은 돌도 태우므로 하나님은 더욱 큰 영광을 받는다.
우리는 단 위에 물을 부어 정결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의 단이 눈물로, 보혈로 정돈되어 깨끗하고 청결하고 순전하게 정화되도록 하자. 거기에 불이 임한다.
넷째, 기도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6)
왕상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하였고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하였다.
눈에 보이는 제단이 수축되자. 그 제단에 나아간 엘리야는 기도의 단, 부르짖는 단을 쌓았다. 그 기도 내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내 가족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불로 응답 받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엘리야 자신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으로 족한 겸손한 기도였다.
기도가 있을 때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다. 본래 기도는 성령의 불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눅11:13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성령은 기도로 받고 기도는 성령의 약속으로 인해 더욱 간절하게 된다. 매일 매일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0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단을 쌓을 때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불을 받았다. 집에서, 숲에서 기도의 단을 쌓은 그는 육체의 질병을 돌아보지 않고 뜨겁게 사역하였다. 29세의 나이에 절명한 그의 기도 일기는 훗날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붙였다. 기도의 사람의 글만 읽어도 뜨거운 불이 임하였으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의 단을 쌓으면 누구나 불이 떨어질 수 있다. 불이 내려와야 한다. 불이 오면 부흥이 시작되고 그 부흥은 대적자를 물리치는 승리의 삶이 된다. 더 나아가 그 부흥은 축복의 비를 내리는 회복의 시작이다. 뜨겁게 기도하자.
20세기 전도자 빌 그레함 목사가 말하길 “부흥의 열쇠는 세 가지이다. 그 첫째와 둘째는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도 기도다.” 라고 하였다. 기도는 절대적이다.
금번 강화에서의 부흥회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힘들었다. 월요일 아침에 먹은 음식에 탈이 났다. 식구들도 같이 탈이 났다.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 그리고 기도의 지원이 없는 사역, 거기에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1907년의 부흥은 기도의 단을 쌓으므로 불이 점화되었다. 금번 Again 1907을 갈망하는 “부흥이여, 다시 오라!”의 부흥집회는 기도의 함성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자.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수원 오목천의 부흥으로, 수원 오목천의 부흥이 제주 한라를 넘어 갈멜산까지, 열방 족속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도록 불을 구하자. 위로부터 불이 내리는 응답,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기 위해 모이자. 제단 중심으로 달려나오고 어린이로부터 중학생,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 나오자. 모두 다 기대감을 가지고 무너진 제단을 쌓아 올리므로 마음에 불이 붙는 축복을 받길 축원한다.
예수님의 사도 임직 (막 3:13-19)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임직을 위한 임직자 선거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일은 교회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하고 귀한 일인만큼 이런 일들은 사탄의 극심한 방해작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함께 치룰때 함께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임직자를 세우는 일은 어떤 한 사람에게 명예를 주는 일도 아니고 어떤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임직을 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향한 선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감정과 입장으로 보면 안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경우 장로님과 안수집사 임직은 약 10년만에 갖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세상에 힘들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운동을 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돈을 버는 것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얻는 것은 없습니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가장 보람있고 가장 가치있는 일이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가는 일은 결국 이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세워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33명이 죽었고 1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미국 건국이래 총기사건으로는 최대의 사건이요 세계적으로도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총기사건으로는 최고의 사건입니다. 버지니아공대를 들어갈 정도면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고 대학생이면 그래도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조승희의 충격적인 총기난사사건은 어릴 때부터의 자폐증, 대인기피적인 과대망상증과 미국 사회의 냉대가 맞물린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그의 할머니에 의하면 "조승희는 어릴 때부터 무척 차가운 아이였고 부모가 무슨 말을 시켜도 잘 하지 않는 등 자폐증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문제는 "친구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는데도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외톨이로 자랐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승희와 친구라고 밝히고 나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만 봐도 조승희가 얼마나 '외톨이'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해 왔고 그 과정에서 세상과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승희는 20여 년 동안 간직하며 키워 온 성격적 결함과 정신적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만의 '악마'를 배양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노스이스턴 대학교 범죄 박사인 제임스 알랜 폭스 박사는 말했습니다.안타까운 것은 그의 그런 성격적인 결함 정신이상자의 증상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잘 치유받지 못하고 그냥 두었습니다. 물런 거기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서 혹시 우리 교회 속에 이런 영적인 외톨이가 없는가를 한번 생각하엿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조금 더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 중에서 이런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을 조금만 더 넓히고 한 주님의 가족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가 가장 집중해야 할 일 오늘 우리 자신들이 먼저 집중해야 할 일 바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져가는 일입니다. 이땅에 오셧던 우리 주님이 가장 집중하셨던 일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사도를 세우십니까? 왜 주님은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의 원하는 자들을 임직하심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울때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원하셨는가 그 기준이 정확하게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누가복음 6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난 뒤에 밝으매 12명을 부르사 사도로 임명하셧다고 합니다. 12명의 사도를 임명하시되 12명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12명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주님의 일꾼들을 세우셨습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12명을 불렀을까요? 주님이 부르신 12명의 사도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12명의 사도들을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별볼일없는 사람들이었다는 특징입니다. 당시에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잡던 어부출신이거나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세금을 받아내던 세리인이거나 지극히 알아주지 않던 무명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불렀습니다. 특히 세리같은 직업은 그당시에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이었습니다.그래서 세리같은 직업은 종교단체의 어떤 조그마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세리의 증언은 유대법정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정도로 증오하였습니다.
이 12명의 이력를 기초로 분석해보면 성인들 성숙한 자들과는 거리가 먼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사도로 원하셧고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몇몇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셧습니다. 먼저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본명은 시몬이고 베드로가 새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반석이란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돌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의 베드로를 보면 아주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저녁가 아침이 다른 정도로 잘 변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반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시몬을 반석으로 변화시켜서 반석으로 그를 쓰실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무명의 사람을 들어서 유명한 사람으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시몬을 불러서 베드로 이름을 주시고 반석같이 베드로를 세워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의 다른 사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소개됩니다. 이 두사람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여기 보아너게라는 말은 ‘우뢰의 아들’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우뢰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의미로는 하늘의 메신저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사물을 파괴시키는 벼락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이 성격이 벼락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추리해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성격적으로 분명히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벼락같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안좋은 성격의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받아 세워지게 되면 불같은 성격은 불같은 성격대로 불같은 열정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를 불러 세울때 약점고 있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러서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비록 약점이 있지만 비록 문제가 있지만 그 약점과 문제를 넘어선 변화의 귀한 계획을 갖고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음 주에 임직을 위해 이렇게 우리가 세우기를 원하는 자들을 당회에서 추천하엿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사람 올려놓고 이렇게 저렇게 재어보면 약점없는 사람 문제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들을 과거를 보고 이들의 현재적인 약점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실망할 수 잇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잠재된 많은 가능성 큰 장점들도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목적을 따라 사명을 따라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지면 놀라운 변화와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약한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는 주님 없는 자들을 들러 부요하게 하시는 주님 무능한 자들을 들어 능력있는 자들로 사용하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의 손길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될 귀한 사람들을 통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이 주님이 사도로 부를때 순종하였습니다. 갈리지 바다에서 고기잡던 베드로는 배와 그물를 버려두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레위는 세관에 있다가 주님께서 부르실때에 그 부르심 앞에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즉각적으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였을까? 어쩌면 주님은 이들이 갖고 있던 지식보다도 가문보다도 실력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중심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주님의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그 부르심 앞에 온전히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임직하심
14절에 예수님께서 사도로 임직하실때의 목적은 바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사도를 임직하심은 바로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땅에 오신 우리 주님은 외톨이로 계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능력의 주님 그 풍성하신 주님에게도 교제할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12명을 선택하여 교제의 관계를 갖는 소그룹을 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택하여 사도로 임직한 이들과 함께 3년동안 함께 하셨습니다. 잠잘때도 함께 하셨고 밥을 먹을때도 함께 하셨고 사역을 할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12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시어서 함께 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과 일꾼들과 함께 하시면서 교제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고전1장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미쁘신 우리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같이 불성실하고 약한 자들을 불러서 우리 주님은 이 시간도 함께 하면서 교제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특별히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임직받는 것을 단지 일하기 위한 일꾼으로서만 부름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과 함께 있어 깊은 교제를 갖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교제의 소명을 갖고 더 예배의 자리로 더 기도의 자리로 더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직분은 계급은 아니지만 마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함께 하다보면 성숙해지고 함때 하다보면 더 이해도 되어지고 함께 하면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
주님께서 12명의 사도와 함께 하는 것은 교제의 차원을 넘어선 그 이상의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갚은 있음으로 인해서 그들을 훈련하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12명의 사도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각 주님의 행동을 닮아가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말씀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기적과 능력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본들을 보여주셧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로 세워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제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닮은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에게 하시는 말슴을 들어야 하고 내가 그 말씀을 우리가 듣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분을 가장 경험할 수 있는 채널이 있다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그래서 우리가 제자훈련을 할때 가장 강조하는 거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때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객관적인 증거는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요한복음10장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먼저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를 바랍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3년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항상 주야로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죄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이 먼저 항상 말씀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항상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잘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매일 24시간 중에서 얼마나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하루에 몇분이나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두기 위한 시간 그 말씀을 듣기 위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단들에게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열심입니다. 강릉에 어떤 이단은 주중에 매일 3시간씩 4일간 말씀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도 밤낮으로 열심히 그것을 좇습니다. 물론 그들은 너무 극단적이고 치우친 삶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있습니다.그러나 기성교회 성도들이 이부분에 있어서 반성할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깊이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라면 기도는 주님께 말하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령 내가 1시간 성경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가 1시간 주님께 말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아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균형잡힌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종종 보면 성경은 많이 알고 주님의 뜻은 많이 아는데 기도가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만 앞서고 이론만 난무하게 됩니다. 반대로 기도는 많이 하는데 말씀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의지대로 잘못 기도함으로 주님의 응답과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뜻을 갖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새벽을 깨우면서 함께 새벽기도축제를 합니다. 이런 기회는 평상시에 새벽기도를 하지 못하던 분들도 작정을 하고 한번 도전하여 영적도약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삶의 기준과 습관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 기준과 습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나는 절대로 새벽에는 일어날 수 없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새벽에 함깨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평생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밖에는 용량이 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한다면 그 시간이 밤이 늦더라도 새벽이더라도 한낮이라도 한번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와 도전과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추운 시간이든 더운 시간 한번 함께 하는 드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 임직하심
14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라고 합니다. 주님이 함께 있으므로 교제도 하고 훈련도 하는 것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교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훈련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제하고 함께 하시고 훈련하시면서 함께 하시고 난 뒤에 사도들에게 원하는 궁극적인 뜻은 바로 세상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귀를 물리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땅에 오신 주님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앗습니다. 이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곳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은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복음으로 세상으로 나가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불러 세워 세상으로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냥 내보내시지 않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10장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마귀가 물러가며 귀신이 쫓김을 당합니다.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질병이 고침받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교회 속에서 훈련받고 세워진 주님의 일꾼들이 이 세상을 향해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할때에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은 단지 교회당 안에 갇힌 일꾼들이 아닙니다. 더욱 세상을 향해 거룩한 선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를 지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가 이 강릉의 십일조를 담당하는 복음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에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지도록 전도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특별히 교회 제직들은 교회에서 함께 하고 있는 목요전도학교,열린모임,이웃초청축제와 같은 날을 행사로 여기지 말고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시고 함께 동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도 선교가 우리 지역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계를 향해 항상 세계적인 안목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꿈꾸고 있는 선교지는 한 나라가 미국이고 다른 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움직이는 두나라가 저는 이 두나라이다고 봅니다. 그래서 할수있는 데로 미국과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를 실천하고 싶은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미국은 글로발시대에 아직까지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우리가 인정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복음으로 선교하면서 부딪힐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또한 그렇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부딪히면서 복음을 증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개인적으로는 그런 기도를 드립니다. 미국 중에서도 뉴욕은 미국의 중심이고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지교회를 개척하여서 복음으로 훈련된 우리의 젊은이들을 파송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세계적인 선교사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영어를 훈련하고 말씀으로 훈련되어 그곳에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복음의 비젼을 갖고 있는가 얼마나 선교의 마인드가 있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꾼들이 세상에 거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에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고백했습니다.그래서 그는 눈을 들어 아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러 유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너무나도 일할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없음을 탄식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임직자들을 세움으로 인해서 더욱 복음이 확장되는 교회로 세계에 복음을 수출하는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가기를 축원합니다.
나가는 말 ))))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서 지금 여기서 일하십니다. 이땅에 오신 주님은 12명의 사도를 임직하되 부족하고 연약하고 흠이 많고 약점이 많은 사람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친히 몸된 교회를 위해 귀한 주님의 일꾼을 세워 함께 동역하시고 그 일꾼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아무쪼록 임직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더욱 귀하게 쓰임받는 임직자로 세워져가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일꾼으로서 한 세대에 귀하게 쓰임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모여서 기도합시다 (마 18:19-20)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지금 대단히 바쁜 때인데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흔히 말하듯 우리나라는 지금 고령화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인적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국가의 미래는 물론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할 것이냐 할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기성세대는 일생 기도로 단련된 세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은 하나님께서 21세기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일군들입니다. 앞으로 우리 국민의 50% 60% 70%까지 될 이 엄청난 인적자원을 기도의 부대로 최대한 활용한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를 변화시키는 부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면 신기한 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으로 기도의 향이 올라가니까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모여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할 때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여서 기도할 때 어떤 은혜를 주실까요?
1. 모여서 기도할 때 비전을 주십니다.
행 13장을 보면 모여서 기도할 때 안디옥 교회에 놀라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세계 선교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때입니다. 아무 소망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비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모여서 기도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행 2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념할 때 능력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모여서 기도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디 있든지 기도 안하는가 하고 개인플레이했더라면 그렇게 큰 능력은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작개비가 모이면 더 잘 타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도의 교통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모여서 기도할 때 부흥을 주십니다.
행2:41에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초대교회가 모여 기도할 때 부흥을 주셨습니다. 부흥은 기도 없이는 안 됩니다. 1907년에 일어난 한국이 부흥도 기도할 때 주셨습니다. 1903년 세계를 휩쓸었던 영국 웨일즈의 부흥도 기도로 일어났습니다. 10년 전 남미 콜롬비아 칼리에 나타난 부흥도, 미국 펜사콜라에서 일어난 부흥도 모두 모여서 기도하다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모임들이 많지만 기도하는 모임은 적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퓰러 신학교의 교회성장학 교수 피터 와그너는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이유를 기도에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부터 기도하는 일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 시작하자 교회성장이 멈추게 되었고 대신 무속과 불교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21세기에 가장 희망 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4. 모여서 기도할 때 사역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행 12장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인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단의 공격목표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만 넘어뜨리면 교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성도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주의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강단이 살아서 교회가 복을 받고 내 가정이 복을 받고 내 심령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모여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모두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모두 개인기도도 열심히 하고 모여서도 기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은급부 야유회 설교 ) 하나님이 보입니다 (롬 1:20)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무척 사랑하시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께서 은퇴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나들이에 좋은 일기로 복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장마 기간에 이 좋은 날을 주심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일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신 종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기에 장마기간이라고 해도 좋은 일기 달라고 저는 담대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이 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잠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보신 분, 계십니까? 저는 성령은 체험했어도 아직 어려서인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여러분은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볼 수 없다가 바른 정설입니다. 왜냐하면 딤전6:16에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성품과 생명과 능력과 하시는 일 등 간접적으로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할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빌립아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그렇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요:8-9). 그런데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서 보면 하나님이 잘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자연에서 보면 어떤 하나님이 보입니까?
1. 자연에서 보면 좋으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저는 산을 좋아합니다. 산에 오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산은 언제나 우리에게 넉넉히 주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요구한 것 보셨습니까? 언젠가 칡이 필요해서 산에서 칡을 구했는데 산은 그냥 주었습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캤지만 1년을 넉넉히 먹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그렇게 진할 수가 없습니다. 냉장고 탈취 제거에 도토리나무 잎이 좋다고 해서 한 줌 뜯었지만 역시 그냥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넣었더니 한 반년 간 그 효과가 지속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연은 꼭 아버지 품과 같고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좋은 것을 주고 또 주고 또 주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병이 드는데 상당 부분 영양부족이 그 원인이랍니다. 식물들도 보면 흉하게 비틀어지고 병들고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이런 것들이 미량요소 부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도 미네랄 부족이 오면 온갖 질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은 많이 먹고 살지만 화학적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미네랄 함량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 난 것보다 30분의 1 혹은 50분의 1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난 것을 먹으면 몸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것만 먹는다면 종합영양제가 필요 없습니다. 온갖 영양소가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연에서 보면 치료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에 오면 아무리 피곤하고 답답해도 자연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숲이 의사입니다. 자연에는 산소도 많고 음이온도 많고 피톤치드와 같은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가까이하면 건강합니다. 생노병사 프로그램에 보듯 숲에 오면 혈액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치의 판정을 받은 사람들도 황토집 짓고 자연을 가까이하고 자연을 먹고 늘 운동하는 사람들은 사는 것을 봅니다.
오늘 하나님께 맑은 날씨를 구한 것은 산림욕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림욕이 그렇게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곳 내장산에서 쉬거나 걸으면서 산림욕하고, 오후에는 담양에 가서 대나무 숲을 걸으며 죽림욕을 하고, 오다가 또 한 가지 욕을 더하려고 합니다. 온천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가지 욕을 하게 되는데 기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좋은 일기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자연에서 보면 능력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 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들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 때 보면 바람의 힘이 얼마나 강합니까? 세상을 뒤집어 놓을만한 힘입니다. 홍수 날 때 보면 비 그 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뇌성벽력 칠 때 나오는 그 전기의 량은 수억 볼트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도 없이 조용한 데도 가장 강한 것이 있는데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양입니다. 아무 소리 없이 비취는 것 같지만 그 힘으로 천지만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연의 위엄과 그 능력을 오해하여 그것이 신인 줄 알고 숭배하지만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주는 것일 뿐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4. 자연에서 보면 공의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자연이 사람 차별하는 것 보셨어요? 사람이 문제지 자연은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산에 접근하려는데 무슨 사찰관람료를 내라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돈 내는 사람에게만 들어가게 하고 돈 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문제이지 자연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안겨다 줍니다.
자연은 인자해서 웬만큼 해를 주어도 말없이 복원력을 가집니다. 인내하고 인내합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자연을 훼손하면 자연은 더 이상 우리의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보호운동 구호가 “자연은 사람보호, 사람은 자연보호”라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자연은 공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훼손은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연 속에서 심판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5. 자연에서 보면 계시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계시에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입니다. 일반계시는 자연의 여러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진리가 보입니다. 이치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계시의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연이 주는 뿐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보다 천배 만 배 더 크고 영원한 은혜를 누리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수종 드는 여인 (막 1:29-31)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또 다른 신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에 수종을 들어야 할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며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게을리 하고 주님께 수종을 들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다 예수님께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어떤 사람입니까?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아닙니까?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이면 베드로를 대신해서라도 맨 앞장을 서서 예수님께 수종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마치 목회자의 어머니나 장모와 같은 위치입니다. 이 분들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마땅히 예수님을 수종 들어야 할 사람이 열병 때문에 꼼작할 수 없이 누워 괴로움 가운데 뒤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장모를 깊이 관찰해 보면 몸의 열병도 열병이려니와 마음의 열병이 심하게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무도 모를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잡으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지런하고 신실하던 베드로라는 사위가 어느 날 갑자기 무명의 예수라는 청년을 만나더니 배와 그물과 부모와 자식까지 내버리고 따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혼자만 아니고 동생 안드레까지 끌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육신의 열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열병에 깊이 들었던 것입니다.
눅4:38에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한 것처럼 마음 역시 심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장모가 병 고침 받고 일어나 즉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육신의 열병은 물론 마음의 열병까지 치료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열병에서 놓임 받지 못했다면 결코 수종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열병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려면 이 열병에서 치료되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치료받아야 할 마음의 열병은 무엇일까요?
1. 실망의 열병입니다.
주를 위해 충성해도 아무 결과도 없을 때 실망의 열병이 듭니다. 이 열병에 들면 아무리 강조해도 주를 위해 수종들 수 없습니다. 눅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실망한 두 제자입니다. 실망이 컸으니 태산 같던 사명 역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눈을 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자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실망의 열병에서 고침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6:7-9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말씀합니다.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일을 당하고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왔는데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한데 어떻게 피곤한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 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사람의 손의 열 배나 되는 큰손이 나타나서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오른쪽에서 붙들고 왼쪽으로 넘어지면 왼쪽에서 붙들고 앞으로 꼬꾸라지면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한 목사님은 다시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일을 했지만 사람이 알아주지 않거나 상처를 받게 될 때 실망의 열병이 옵니다. 지상에서 상을 받으려고 하니 실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상 받을 생각만 하면 실망치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충성하게 됩니다. 마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랬습니다. 하늘의 상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시려고 그러시는데 왜 사람의 칭찬을 구하십니까? 사람이 알아주면 그 사람은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칭찬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이 실망의 열병을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2. 세속의 열병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하나님의 일에 수종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세상 영광을 더 좋아하고 돈을 좋아했습니다. 요5:44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눅16:14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눅20:46에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속의 열병에 빠진 것입니다. 그랬기에 쓸데없는 일만 하다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계라고 세속이 틈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총회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권모술수와 돈다발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납니다. 실망할까봐 깊이 말할 수 없지만 돈이 아니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있습니다. 돈을 너무 좋아합니다. 명예를 너무 좋아합니다. 권세를 너무 좋아합니다. 돈 없어 정치 못하겠다고 고민하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고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계가 세속의 열병에 빠져 있는 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좋아하면 하나님께 수종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꽉 찬 마음에 어찌 예수님이 거할 곳이 있겠습니까? 그 마음으로 어찌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할 때 다른 오락과 취미에 마음이 가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의 소 떼와 양 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의 일에 열망해서는 수종들 수 없습니다. 전에 황해도 재령읍에 정 찬유 장로라고 있었는데 그는 주일 성수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는 분이고 또 돈도 잘 벌어서 2층 양옥집을 지으려고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데 "네 집은 그렇게 화려하게 지으면서 내 집은 어찌하여 양철집으로 내버려두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내일부터 곧 하나님이 계실 거룩한 집부터 건축하겠습니다." 그 이튿날 곧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예배당으로 바꾸어 가지고 잘 지었는데 그것이 "재령 동부 예배당"으로 당시에는 한국 제일의 예배당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병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3. 불평의 열병입니다.
일하다 불평이 생기면 일 할 수 없습니다. 흑인으로서는 미국 최초의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월(Colin Powell)을 아실 것입니다.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지만 언제나 긍정적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는 공장에서 도랑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동료 인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임금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또 한 사람은 묵묵히 성실하게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파월이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한 사람은 뭐가 못마땅한지 계속 불평만 하고 있었지만 묵묵히 일하던 사람은 이제 승진하여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 공장에 다시 갔을 때 불평만 하던 사람은 원인불명의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해고됐지만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파월에게 굉장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파월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파월이 흑인으로서 출세하기에는 악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로 일관했을 때 4성장군인 합참의장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너무 높게 올려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불평이 생깁니다. 이렇게만 된 것도 감사하십시다. 욕심을 줄이십시다. 목회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인데 반대만 하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생각입니다. 큰일을 하지 않았지만 따라만 준 것도 감사합니다. 내 앞에 대들지만 않은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욕심을 줄이면 목회가 즐겁습니다.
우리 여전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회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집에서도 남편이 있는 것만도 감사하고, 아내가 있는 것만도 감사하고, 자녀가 큰 출세 못해도 예수 믿는 것만도 감사하고,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불평의 열병이 사라져야 비로소 주를 위해서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낙심 가운데 계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눅4:38에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먼저 마음의 열병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라는 말은 '크라테시스'라는 말인데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가볍게 잡은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움켜쥐셨습니다. 그리고 열병에 앓아누운 장모를 강하게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며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강하게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사람은 못 일으켜도 하나님은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열병과 마음의 열병에서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하나님의 일군을 만드실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습니까? 실망의 열병입니까? 세속의 열병입니까? 불평의 열병입니까? 어떤 열병입니까? 오늘 주의 말씀으로 치료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최고로 수종 들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열병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주님께 온전히 수종 드는 사랑하는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8.03.09 여전도회 헌신예배*주님의 쓰시는 여전도회(삿4:1-10)
교회안에서 여인들의 역할은 참으로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교회안에 여 성도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여성들의 봉사로 인하여 발전된 교회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계에서 살아간 여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따라 고향 친척을 떠났던 아브라함을 끝까지 따랐던 순종의 여인 사라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었던 고통의 세월 속에서 여인의 몸으로 잘 이겨 놀라운 가문을 이룬 시모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지도자로 키운 지혜의 여인 요게벳이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민족을 살린 여인 에스더, 죽을 목숨 다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해 사도 바울을 도왔던 충성된 여인 뵈뵈와 브리스가, 그리고 이 시대에 한 가정을 지키는 믿음의 여인들... 교회의 충성스런 여인들... 그 손길이 헛되지 않으며 그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변함없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수고하시는 여전도회 모든 성도들의 수고로 가정과 교회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줄을 믿습니다. 그 열매가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고 행한 일을 인하여 많은 칭찬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드보라 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인 중에 가장 용감한 여인을 꼽는다면 누구나 드보라를 꼽습니다. 드보라는 믿음의 여인일 뿐 아니라 민족을 구원한 민족의 지도자요 영웅이었습니다. 실로 드보라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사사의 사명인 재판하는 일은 물론이고 선지자로서의 사명도 잘 감당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물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쓰신 여인의 신앙적 특성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쓰시는 여전도회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줄 아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사사로 부름 받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은 드보라를 비롯한 사사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명은 끝이 난 것입니다. 엘리도 말년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오히려 사무엘이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5장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안타깝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서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그 영혼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단 사무엘 시대나 이사야 시대뿐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 영혼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현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불 일 듯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서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경 말씀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묵상이란 영어로는 medit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약이라는 영어 medicine과 어원이 같습니다. ‘메디켈루스’입니다. 마치 약이 우리 몸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서 약효를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와 우리 온 심령 속에 퍼져가면서 영향을 미쳐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묵상하는 방법은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깊이 심령 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심령 속에 들어온 그 말씀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마치 되새김질 하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받아 삶에 적용해 가는 것입니다.
둘째, 설교를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경청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경청(listening)이란 단순한 청취(hearing)와는 다릅니다. 외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설교를 경청한다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기도 중에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기도 중에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말씀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차분한 가운데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에 집중하십시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분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내 간절한 바람인지, 아니면 사탄이 던져놓은 마음인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확신이 들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그 마음을 붙들고 더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환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기도했던 내용을 되새기면서 환경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명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사명과 관련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와 연관해서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며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들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시어서 하나님앞에 귀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이 주실 승리에 확신이 있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7절)
7절에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 주님의 뜻을 전하는데 드보라에게서는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기색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주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강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다." 드보라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지도자인 사사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매일 매일 여러가지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전쟁에서부터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 그리고 영적인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의 삶속에는 온갖 종류의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것이요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승리를 확신한 자입니다. 다윗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사울 왕에게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했고(심상17:32), 기고만장한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를 향하여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싸우기 전에 미리 승리를 확신했고 승리를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벌써 패배를 생각하고, 포로되는 것을 생각하고, 죽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지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직접 대결하기 전에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 목을 벨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리적인 힘보다는 정신적인 힘이 더 강하고, 정신적인 힘보다는 신앙의 힘, 영적인 힘이 더 강한 법입니다. 신앙의 힘은 그 어떤 것도 당해 낼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늘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도, 저주도 이기셨고, 질병과 죽음도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또한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으므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골리앗과 이스라엘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무기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이었고 용기와 신앙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도들의 무기는 결코 육체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면 상대 거리도 될 수 없지만,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믿고 맡기면 하나님이 지키고 관리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모든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해 주실 것을 믿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앞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3. 믿음대로 실천하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9절)
주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그 음성을 전달하는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전쟁터로 달려 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여인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위험한 전쟁터 까지 나아갑니다. 반면에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아니하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실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을지라도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쓸모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에 대하여 말할 때 살아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죽을 수도 있으며 죽어 있는 상태도 가능할 때 하는 것입니다. 생물체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 사물에게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살아 있음과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로마서나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과 대치되는 듯이 생각하지만 오히려 상호 보완적 완성도를 높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살아 있는 믿음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행위와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진리를 잘못 이해하면 믿음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인식하여 삶 속에서 행위의 열매 없이 즉 구체적인 행동을 배제하고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신다 그때의 그 형편을...."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받아 드릴뿐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 순종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사랑의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있어야 합니다. 강요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하고,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듯이 참된 믿음은 이 행함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동반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과의 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남편이거나 아내일 수 도 있으며 우리의 자녀 일 수 도 있고, 우리의 형제 일 수 도 있으며 나란히 하고 함께 사는 이웃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살아 있는 행위를 보여 줍니다.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믿음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을 알며 교리를 인정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생활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을 염려 중에 하고 있으며 둘째는 중심으로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지적 믿음과 실천적 믿음이 하나로 일체화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고 실천적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불가 분리(不可分籬)의 관계이며 참된 믿음은 봉사와 선행으로 나타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내적 변화가
없는 외형적 믿음의 허구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입증되며 행함으로 입증됩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기를 원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을뿐 아니라 믿는대로 행동하는 삶입니다. 믿기때문에 믿음이 삶속에 배어나와 변화된 삶이 자연스레 나타납니다.
오늘날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이 관념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강한 도전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을 체험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도전을 주시는 목적은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동화해야 합니다. 받은 감동에 이끌려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해야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농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메운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밖으로 나가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그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보니 꽃은 시들어 낙화되고 없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집 밖에서 말 발굽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백마 한마리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농부를 향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농부에게 어서 빨리 와서 승마를 즐기라고 손짓하는 듯 했습니다. 농부는 '오늘은 빨리 나가 동편에 있는 울타리를 수리해
놓고 저 훌륭한 백마를 타며 즐겨 보자'하고는 급히 일하러 나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급히 돌아와 보니 그 아름다운 백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신기한 일들을 즐기기 위해 다른 일들을 정지하고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순종하되 지금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해야 할 급한 일을 하고나서 시간나면 그때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천하기는 하겠으나 기회가 많으니 천천히 하겠다고 다음에는 꼭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영원히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 것 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최대한 빨리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여러분의 기억에서 그 말씀을 지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계산하지 말고 즉각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눈치채고 다가와 감동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식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깨달으면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다시금 여러분의 뜻을 더 중요하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말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곧 바로 믿음대로 실천하여서 주님앞에 쓰임받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백성의 헌신 1 / 시 110:1~7 : 정근두 목사
본문 : 시편 110:1~7 제목 : 주의 백성의 헌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랜만에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지난 화요일 밤 마지막 비행기로 울산에 도착했더니 공항에 환영 나온 사람들의 반은 울산교회 교역자들, 성도님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라서 여러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주보를 펼치는 순간 지난주일 설교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전화도 한 통 없는 하나님” 저를 빗댄 제목 같아서 찔끔했습니다. 천국에는 전화가 없겠지만 미국에는 전화가 있을 건데 말입니다.
사실 전 한 달 동안 열심히 하루도 빼지 않고 제게 일어난 일들을 교회 홈페이지 제 카페에 실리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전화였다는 것을 알고 아직도 코드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디지털 방식으로 교신을 시도했는데 여러분은 아날로그 방식의 연락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만나 여러분의 얼굴을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한풀 꺾이고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 불어오는 계절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할 말씀으로 시편 110편을 택했습니다.
다윗의 시 110편은 구약 시편 가운데서 신약 성경에 자주 인용되고 설명되는 부분입니다. 시편 110편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시인 다윗이 쓰고 시편에 실린 시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기쁨, 그의 탄식조차도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승화된 것이 시편 계시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로서 화한 것입니다. 다윗이 쓴 인간의 시가 다시 되돌아와서 하나님의 계시, 시편 말씀으로서 우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110편을 묵상해보면 1절과 4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인상적인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금반지에 박힌 두 개의 다이아몬드 같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 두 개를 어떤 틀에서 설명해야할지 쉽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다이아몬드 하나라고 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되겠습니다만 똑 같은 크기의 금강석 반지를 가지고 예쁜 반지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전체를 먼저 살피고 나서 다음에 금반지에 박힌 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중심한 설교를 두 편 따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질 첫 번째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주의 백성들은 헌신해야 합니까? 주의 백성의 헌신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저는 이 짧은 계시의 말씀 속에 포함된 무한한 내용을 다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1절만 해도 충분히 한 편 설교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제기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시편 110편을 개괄적으로 먼저 살피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시편 110편 1절은 그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예로운 자리요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으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살면서 섬겨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 분을 가리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마 이런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고백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능,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로 헌신해야 할 주인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한 번 지난여름 한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날들을 누구를 위해서 사용했습니까? 6, 7, 8 월 여름 한 계절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주를 위해서 드렸습니까? 90일 하고도 이틀이나 되는 숫한 날들 가운데 며칠을 주님 위해 드렸습니까?
그는 결코 주일의 주인만은 아니십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소위 평일이라고 이르는 그 날들도 주님께 속한 날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여름 들어 오늘까지 석 달 열흘 가운데서 며칠을 주를 위해서 따로 드렸느냐를 묻지를 않습니다. 그 모든 날들이 주를 위해서 드려진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의 힘과 지혜를 드려서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굽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린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까? 우리는 찬송하면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라고 찬양합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한 번 돌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추석을 앞둔 이 한 해를 어떻게 돌봐주셨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 가을에 논에 가서 벼를 벤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지키는 이유는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도와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 가지고 얼마나 주를 위해서 드렸습니까? 지금껏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은 얼마였고 하나님께 드린 것은 얼마였습니까? 우리가 드린 물질의 헌신이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고백과 걸맞은 것인지 여러분은 이 시간 마음속에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교육, 그것이 우리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 자녀 한 달 학원 비는 얼마이며 신앙훈련을 위해 드린 돈은 얼마인지 비교해 보십시오. 좋은 사람 만나서 한 자리 식사하는 비용조차도 드리지 않았다면 새로운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왕의 이름에 걸맞게 그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최후 승리를 하실 왕이십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그는 대적과 싸우시는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그 싸움의 영원한 향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원수를 그의 발등상 되게 하실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싸움의 최종 승리는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확실한 승리가 그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님을 그 자리에 임명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은 바로 우리의 대리자이십니다. 최후 승리에 주께 헌신한 주의 백성이 참여할 것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날마다 헌신한 그 백성이 영원히 그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여름 한 계절을 보내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며 헌신한 자들이 승리의 영광을 영원토록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 원수와 싸워서 이기기 위한 하나님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그 날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최후 승리가 보장된 자리에 임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듯이 그 백성의 승리의 영광,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분이 헌신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분은 알고 섬길 때에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왕이실 뿐만 아니라 그 원수로 그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능력자이십니다. 그분은 마지막 승리자이십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구십니까? 시편 110편 4절은 그 분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왕이며 제사장이던 멜기세덱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는 평화의 왕이요, 평화의 도시 살렘의 왕으로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족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였다는 말도 없고 후손이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등장한 사람이기에 영원한 왕이며 제사장이신 주님의 예표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승전한 아브라함에게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받음으로서 아브라함보다도 높으신 자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레위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분으로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왕이고 제사장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 분의 직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그 직분에 완벽히 구비된 분이십니다.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레위 제사장직과는 다릅니다. 온전한 것의 그림자이던 그들의 직분은 수시로 교제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그 맡은 일을 완벽히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수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1절에 말한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은 바로 그 죄를 정결케 하는 직무를 완수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사죄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용서받은 백성의 헌신은 사죄 받은 은혜에 부합해야 합니다.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가을의 초입에 드리는 9월 첫 주일 예배가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왕께 헌신하는 백성이 되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예배가 되어져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명예를 돌려드리십시오. 여러분은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분께 합당한 헌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최종 승리자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면 #우리가 헌신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3절은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5절은 #“그 노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께서 #“주의 권능의 홀”#을 주님께 내어 보내시는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신은 언제 필요합니까? 주께서 그 권능으로 다스리는 그 때에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권능으로 그 원수 중에서 다스리는 그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권능으로 원수 중에서 다스리는 그 날, 우리는 헌신을 요구받은 주의 백성들입니다.
사실 세상에 군대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군대도 안가도 되고 말이지요. 그러나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싸우는 날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평화스러운 때는 쓸데없는 국방비를 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날을 위해서 우린 60만이라는 대군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 . .”#지금 메시야의 능력은 그 교회 가운데,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기 권세를 주셔서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사장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 이미 하늘과 땅의 권세가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열방 가운데서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역이 지금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 주의 왕권을 나타낼 때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그 옛날 승리를 보장했듯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장하는 그 홀을 통해서 오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 여호와께서 그 홀을 자기의 우편에 앉으신 왕에게 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시온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진행하는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왕권의 확장을 위해서 여러분이 헌신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미 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시작한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국내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합천으로, 의령으로 청년 1부에서 나아가 사역했습니다. 비록 사역 중에 사고도 있었지만 본래 싸움에는 피아간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차량도 부서지고 사람도 다쳤지만 교회는 그것을 잘 감당했습니다.
국내뿐이 아니라 국외로도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서 승리의 소식을 안고 온 고등부 팀들도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몽골로 나아가서 올해도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수고한 모든 분들께 우리는 환호의 격려를 해야 합니다. 키르키즈 정밀 정탐 팀의 사역도 칭송받을 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여름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사되어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결단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까?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열방 가운데 계심을 알기에 그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기를 우리를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이름이,”# 더 높아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린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드린 기도에 걸맞은 헌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 드리기에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 어떻게 헌신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도 다가올 승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면서 그 날들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미 주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5절과 7절은 이 싸움의 면모를 보다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방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이 싸움은 왕이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싸움이요 그의 최후 승리를 재촉하는 싸움입니다. 마냥 기다리고 앉아계신 분이 아니라 한 날 오셔서 그 백성을 위해서 모든 싸움을 끝내실 분입니다. 다시 오실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셔서 끝까지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무찌를 것입니다.
단번에 그들을 정복할 것입니다.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리듯이 하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열방이 주님의 능력을 목도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권세가 주께 굴복할 것입니다. 지금껏 그 발아래 엎드리지 않던 모든 세력이 마지못해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40일 후에 멸망할 성을 바라보고 초막을 짓고 앉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들, 이러다가 망하지”,라고 읊조리며 망할 그 때만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나가지 못하면 후원해야 합니다. 아니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닙니다. 선교지는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이 선교지입니다. 거기서 왕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거기서 영원한 제사장 그 분의 사죄의 은총을 소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삼지 않는 열방은 그 때에 망할 것입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 노하시는 날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조차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다리에는 쓰인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시록은 이같이 주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나 우리 주께서는 왕으로서 군림할 것입니다. 열방 중에서 그 날은 심판하실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의 진노의 날 열방을 쳐서 파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그 날은 기진하도록 힘을 다하여서 싸우는 날입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읽어보면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치열한 전투의 선봉 장되신 그리스도께서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라는 구절은 여러 갈래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해석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번역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종잡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어렵게 풀기 시작하면 성경은 항상 미궁입니다.
그러나 저 군인들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훈련을 심하게 받는 날은 수돗물만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수기 물 아니면 안마시지만 수돗물이라고 마다 하겠습니까? 지쳐서 피곤한 군인들에게서는 길 가의 물도 마다않고 마십니다.
치열한 고대의 전투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피곤한 싸움에 지친 병사들에는 그 길 가의 시냇물조차도 피로회복의 전기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왕 우리 사령관이 그 머리를 드십니다. 이제 승리하시고 승리자로서 나타나십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싸움은 이제 마감되고 승리자로서 머리를 드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전에는 그가 슬픔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머리를 숙이셨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를 드신 승리의 왕이십니다. 기쁨의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머리를 드십시오. 여러분의 구속의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최후 승리하실 왕, 영원불변하실 제사장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우리 역시 왕이요 제사장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지금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왕이라고 고백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주간의 삶을 살면서 그 분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왕으로, 통치자로서 그 분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한 주간의 삶, 168시간을 그 분을 위해서 드려야만 합니다. 큐티 하는 30분이 아니라 24시간 하루가 그 분께 속한 시간들입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위대하신 분으로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지금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로서 이미 통치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상은 그 분을 아직 보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지 아니했지만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 분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분을 가리켜서 주요 왕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삶이 왕을 왕으로서 대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삶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의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그 분의 조롱당하는 것을 여러분은 왜 보고만 있어야만 합니까? 그 분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것을 여러분은 왜 바라보고만 있어야만 합니까? 왜 손을 맺고 있어야만 합니까? 주께서 통치하신다고 찬송하는 주의 백성들이 그 이름에 걸맞은, 그 분께 어울리는 헌신을 드립시다. 왕 되신 그 분께 여러분이 삶 전부를 드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일주일의 삶을 지켜보면 직원으로 채용될 자신을 가진 삶을 살아가십시오. 왕 되신 그 분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통치의 권위 아래 굴복하십시오. 교회는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 허리끈을 졸라매고서라도 주 섬기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벌 것인지도 생각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이 주신 것을 믿는다면 주님을 위해 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여러분이 존경하는 분을 위해서 선물 하나를 살 때도 얼마를 씁니까?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드리는 헌금은 주의 이름에 걸 맞는 예물이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제대로 헌신할 때 세상을 변할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통치를 시작하셨도다”#라고 하늘의 찬양은 들려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싸움을 끝내시고 심판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곧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시고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누가 최후 승리자에게 속해 있는지 밝히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 1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이십니다.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시간과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에게 주어진 물질로 헌신해야 할 주인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월 들어 오늘까지 석 달 열흘 가까운 많은 날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미 물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국내외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가지 못하면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기도로 격려로 물질로 후원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하긴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닙니다. 선교지는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라는 것 꼭 잊지 마십시오. 현대인의 마지막 선교지는 직장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거기서 왕 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거기서 영원한 제사장 그 분의 사죄의 은총을 소개해 주십시오.
시편 110편 4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또한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 예수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수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을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왕 되신 주님은 바로 죄를 정결케 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입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사죄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용서받은 백성의 헌신은 사죄 받은 은혜에 어울려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왕께 헌신하는 백성이 되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분께 합당한 헌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지금은 여러분이 헌신할 때입니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시작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것은 그 싸움의 일부입니다. 국내외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분은 잘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주어진 싸움을 싸웁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미 주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돌리고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의 삶이되길 바랍니다. 아멘.
본문 : 시편 110:1~7 제목 : 주의 백성의 헌신(2)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한가위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그리고 매서운 태풍 매미도 잘 통과했습니까?
40여년 만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말미암아 23년만의 최대 흉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해보면 이 태풍 뒤에도 감사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미시적으로 본다면 태풍 같은건 정말 우리의 삶에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태풍 역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자연 섭리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거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제목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태풍이 지나간 푸른 하늘 조차도 우리에게는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살피던 말씀을 계속해서 살피겠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주의 백성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헌신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폈습니다. 누구에게 헌신하는가를 알때에 우리는 새롭게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 추석명절 지나면서 여러분 누구에겐가 감사의 선물을 보내보신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결정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누구신지 바로 안다면 우리는 새롭게 그 분을 향한 헌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우리가 섬기는 왕은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이십니다. 그가 최후 승리를 거둘 때 까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이 가진 것을 드려 그 분께 헌신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여름, 많은 분들이 국내외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므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도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기도로, 격려로, 물질로 헌신했습니다.
또한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선교지입니다. 현대인의 마지막 선교지는 자기 직장이고 자기 동네입니다. 거기서 왕 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왕이신 동시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시편 110편 4절은 소개합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 예수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왕 주님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신 제사장이십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기 백성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영원한 제사장, 왕 되신 분께 헌신하는 백성이 드리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주일 지나갔고 명절도 지나고 태풍도 불었으니까 뭐가 기억에 남아있겠습니까마는 지난주일 여러분이 두 번째로 살폈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왕을 위해서 그 제사장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할 때를 살폈습니다.
#우리가 헌신해야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것은 그 싸움의 일부를 감당한 것입니다. 국내외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분은 잘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싸우는 자들입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주어진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가 우리 주님께 모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후 승리는 주님께 속한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돌리고 충성을 다하는 복된 대열에 들어서신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필 주제는 “주의 백성의 헌신,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주의 백성으로 우리는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한 구절씩 살펴봅시다. #“주의 권능의 날에”#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주께서 그 권능을 교회를 통해서 만방에 드러내는 날입니다. 주의 권능의 홀을 보내셔서 원수 가운데서 다스리는 때입니다. 우리의 왕,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그의 군사이기에 우리 주의 기치가 휘날리는 그곳에 함께 모여야 합니다. 주께서 권능의 홀을 보내셨기에 열방 중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주보에 실리는 승전보를 여러분은 읽고 계십니까? 열방과 족속, 나라와 방언 가운데서 선교사들이 보내오는 승리의 소식을 감동적으로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왕이시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애정을 가진 백성들은 주보에 실리는 이야기들을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보에 어떤 이야기들이 실리고 있는지를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 일에 마음을 함께 합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요청을 지금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이 대한민국만큼 글 읽는 비율이 높은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미국사람들도 우리보다 글 못 읽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우리글은 정말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서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먹으면 일주일이면 다 배울 수 있어요. 숟가락 젓가락 구별해 쓸 줄 아는 사람 같으면 일주일이면 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경로대학 오셔서 한글학교 한번 배워보십시오. 그러면 더듬거리지만 한글 다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주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왕의 승리를 위한 것일진대 우리는 헌신하는 자세를 날마다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백성 된 우리는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본문 3절이 보여주는 헌신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은 그들을 일컬어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벽이슬을 관찰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아름다움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선함의 상징인 이슬을 하다못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라도 보신 적이 없습니까?
주의 거룩한 백성들은 새벽이슬처럼 새 날의 활력이 넘치는 백성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일을 즐겁게 자원하는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못해서 눈치를 봐서 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구속해주시고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왕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이 여기 모여 앉았습니다. 새벽이슬의 신선함이 여러분의 헌신에는 언제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열두시 시간 맞추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새벽이슬의 신선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황금분활이라고 했던 열시 예배와 열두시 예배에서 열두시 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열시에 나올 수 있는 분들 열시에 나오셔서 예배드리면 좀 덜 복잡할 것입니다. 몇 시에 나오든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 감동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시들어진 꽃송이 전달 받으면 기쁘겠습니까? 장미꽃 한다발 선물로 받을 때에 시들어진 것 받고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들어빠진 후에 탄식을 주님은 듣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생기 넘치는 헌신을 받으시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은 새벽이슬같이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지난 여름 지나면서 우리는 많은 분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못한 것을 마지막 병상에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직 생명의 원기가 여러분에게 있을 때에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주께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여러분의 손에 가진 것 있을 때에, 통장에 잔고가 남아있을 그 때에 주를 위해서 충성하십시오. 재산 다 날리고 나서 ‘그 때 주를 위해 쓸 걸’ 하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 때 교회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걸,’ 어리석은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말 때문에 혹시 연세 드신분들 “우리는 이제 한물지나갔다”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많아져도 얼마든지 젊음의 생기를 가지고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교회 성도들은 그 말 믿지 못해도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은 그 말 믿을 수 있습니다. 최복만 장로님, 우성욱 장로님, 얼마나 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까?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의 명단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들어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람에 이름이 빠지는 일이 가끔은 있습니다. 잘 하려고 하는데도 실수가 납니다. 또 어떤 때는 교회의 법칙에 따라서 70이 넘으면 서리집사에서 명단도 빠지고 사진도 빠집니다. 그러면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지 몰라요.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요람에 사진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주보에 이름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나아오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더 문자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세마포 흰 옷을 입고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모습을 여러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싸움은 주께서 싸우시는 싸움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주께 나와 섬기는 자들하고 여러분을 비교해 부십시오. 거룩함은 주의 백성의 표시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의 힘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지 않을 때 무력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이 싸움은 주께서 대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옷에 피뭍힐 일은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니까 주께서 이미 그 싸움을 싸우셨다고, 선혈이 낭자한 옷을 입고 포도주 틀을 짓밟고 계시는 분으로서 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의 싸움을 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기입니다.
거룩함의 소원이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오고 싶습니다. 주일이 기다려 집니다. 성도들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사역자들을 보면 기쁩니다. 그런데 거룩함을 상실하면, 죄악에 뒹굴다 보면 주일 오는 것 부담스럽습니다. “또 주일 오네.”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 와서 성도들 봐도 눈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쳐다보면 마치 내 죄를 다 보는 것처럼 겁이 납니다.
거룩한 옷 - 주님 주시는 의를 사모하고 주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왕 그 분께서 새로운 힘을 날마다 공급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주를 위해서 충성하기로 작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주님은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으로, 아름다움과 순결함으로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과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을 합하십시오.
최선의 헌신을 하는 주의 백성들을 보면 보는것만 해도 힘이 납니다. 그러기에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놀라운 영향력을 세상 속에 미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울산교회보다 큰 교회,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한 오륙년 되었나요? 서울의 온누리 교회에 올라간 적 있었지요? 집사님 한분이 그러셨어요 “우리 울산교회 보다 큰 교회 있는 것 처음 알았다”고 그러더군요. 미리 알아놓으십시오 많이 있습니다. 울산교회보다 큰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교회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여느 찬송 소리와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헌신하려고 하는 자세가 남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을 믿습니다. 저는 결코 서울에서 일할 데 없어서 울산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경상도 사람들 사귀는데 세월 걸리지만 마음 합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8학군 출신들이 대학 1,2학년 까지 잘 나간다고, 그런데 3,4학년 접어들면서 부터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더 한몫 한다고 그러더군요. 합천산골짝, 거제도 이런데서 인물 안 납디까? 우리 울산 사람들 마음먹으면 천하를 바꾸는 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말 왕께 드리는 헌신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 영화에서 멋지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는 사람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세상에 사라져버릴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드는 영광스러운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영원한 왕, 승리하실 그분을 위해서 드리십시오. 그 분이 우리에게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고 마지막 피를 쏟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주 위해 충성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남은 만 명의 군사들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300명을 추리셔서 기드온과 함께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 분께 가까이 가기를 소원하십시오. 한 사람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함께 주를 섬길 때, 거기에는 놀라운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혼자 찬송 하는 것 보다,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같이 하면 더 힘을 얻습니다.
백 사람의 헌신은 열 사람의 헌신의 열 배가 아니라 백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를 섬기기로 작정하고 나아가면 우리 울산교회는 울산광역시 전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의 소식은 한국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을 여러분의 주께서 여러분의 삶에 원하고 계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여러분으로부터 기대하고 계시는 왕이 계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순결함을 여러분의 삶에서부터 주님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활기를 가진 자만이 주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무력한 젊은이들보다는 생기 넘치는 노년의 삶을 더 아름답게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성 노회, 사랑 선교회는 결코 일이 이제 다 끝난 모임이 아닙니다. “나는 올해는 안 올라 갈 거다” 안 올라 가려고 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여러분의 헌신을 통해서도 앞으로 주의 교회를 위해서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울산교회는 성노회 연령에 속하는 두 분 장로님처럼 앞장서서 주의 일에 헌신하는 분들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 몇 년하고 돌아와서 종적을 감췄지만 아직도 일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듣고 있습니다.
노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아니한 소원들을 가지고 기도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노회, 1,2 사랑 선교회는 1,2 청년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무력한 젊은이들보다는 생기 넘치는 헌신하기로 작정한 노년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추석에 자녀들이 가져오는 선물꾸러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저 녀석들 마음속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노년들이 많아질 때에 우리 울산교회는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매월 붙여주는 용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젊었을 때 가졌던 그 신앙의 정열이 내 자녀들에게 있는지를 살필 때에 교회는 날로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성노회, 1,2사랑선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젊은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르신 여러분, 노년이라고 이제 힘이 없다고 결코 말씀하지 마십시오. 기력이 여전치 못하지만 아직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평생 이룬 것 보다 더 큰 일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영원히 살아계시기에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왕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승리자로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에 따라서 합당한 삶을 살아보십시오.
새벽이슬은 날마다 내려서 초목을 새롭게 합니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백성들의 헌신도 날마다 요구됩니다. 주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영원히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전5555 1년 4개월 앞두고 있습니다. 1년4개월 앞둔 채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초가을 시원한 날씨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헌신의 소원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물론 저는 비전5555를 스스로 세운건 아닙니다. 외압에 의해서 타의반 자의반 이렇게 기도하며 오천명의 예배자, 오백명의 헌신자, 오십명의 장단기 선교사, 국내외 장학생, 다섯곳의 개척교회 후원과 설립을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1년여 앞두고 한번 보십시오. 물론 아직도 오천명 예배자, 별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통계가 보여주는바에 의하면 오천명 등록자를 울산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백명 헌신자, 각 영역에서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십명 국내외 선교사들 벌써 87명, 50년 되면 100명은 채울것입니다. 국내외 장학생 오십명, 아주 미진한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 곳 개척교회, 일산 벧엘교회, 대구불꽃교회, 제2울산교회, 제3울산교회, 그리고 이제 10월 달에는 시간만 나면 일본 가서 다섯 번째 교회 개척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달 말에 선교사님 이사하고 우리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복만 장로님은 혼자 나가셔서 벌써 일곱 곳 교회 개척을 했고 그중에 여섯 곳은 예배드릴 건물까지 갖추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후원 했던 것, 하나도 개인용도로 쓰지 않고 다 모아서 여섯 곳 예배처소를 만드는 일에 드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가 간구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넘치게 해 주시는 분들이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배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위해서 즐거이 헌신하려고 하면 덥던지 춥던지 날씨 상관 하겠습니까? 주의 날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 시간입니까? 드리십시오. 재능입니까? 드리십시오. 물질입니까? 드리십시오. 그 승리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 영광에 동참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있습니다. 최후 승리의 싸움을 위해서 주의 권능을 힘입고 싸워야 할 오늘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그날의 승리가 오늘 헌신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여러분의 왕, 영원한 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고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고백에 어울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주간의 삶 168시간 순간순간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 드려지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왕, 여러분의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통해서 영원한 제사장 사역이 이 땅에 편만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사죄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용서의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백반 울산 시민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새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을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부 2부 예배시간 보니까 틀림없이 지난주간은 명절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다가 태풍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태풍에 다 날아갔는지 새로 나온 사람 한사람도 없었어요. 보통 때는 여름 지나면서 한번도 그런 일 없었는데. 이제 태풍도 다 불었고 하니까 다시금 원대복귀 합시다.
사람들은 죄 용서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데 애꿎은 조상 탓만 하고 있습니다. 조상 앞에 술잔만 따라드리면 복 받을 걸로 생각합니다. 부모 그렇게 돌아가게 한 것은 누구 잘못인데 돌아가시고 난 뒤에 술잔만 따르면 복 받을 걸로 생각하는 그 얌체들, 살아계신 부모를 잘 섬겨야 됩니다. 복 받으려면.... 꼭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한다니까요. 성경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그랬는데 살았을 때는 공경하지 않고 백화소주 갖다가 따라드린다고 잘 될 걸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열에 여러분이 함께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무디어진 주를 향한 사랑들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더운 여름 지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지쳐있는 모습을 가지고 때로는 서로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가을바람 불어오는데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주께 드리기로 각오하십시오.
우리 왕,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을 위해서 우리의 삶 마지막 순간까지 쏟아 붓기를 소원합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드리고 주를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를 소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악하여지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창녀와 같이 되어지는 이 세대 가운데서 주의 마음에 합한 신앙공동체를 이 땅에 많이 회복하여 주기를 간구합시다. 마을마다, 세워진 교회마다, 주를 위해서 지사충성하는 군사들이 모여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여서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여서 자기주장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 꿈꾸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드릴 것이 없을 때는 눈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피 까지도 쏟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돌아봅시다. 막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셨습니까? 이제는 구체적인 헌신을 계획하십시오. 사람들의 평균 수명 이라는 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남자 72세, 여자 79세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나이를 빼면 지금 몇 년 남았는지 계산할 줄 알아야 안 됩니까? 물론 그보다 빨리 갈수도 있고 좀더 하나님이 남기실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정도 계산은 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몇 년 남았는지 봐 가면서 살아야지 언제까지나 손자들, 손녀들 매달려 가지고 그렇게 세월 보내면 안 됩니다.
나는 손자들에게 매여 있는 우리 권사님들 볼 때에 안타까운 생각은 들지만 마음으로 크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너희 아이 너희 키워라” 이말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그럴 겁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이 세 명은 낳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사들 닮아서 그렇죠? 여차하면 다섯 명도 낳으라고 권합니다. 말 듣는 사람이 아직은 없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자기 아이는 자기가 키워야 됩니다. 연세가 들어가면 이제 곧 신랑 만날 건데 신부 화장 해야지 언제 손자 손녀들 기저귀만 갈아 채운다고 그러고 있어서 어쩔 겁니까? “너 뭐하다 왔니?” “난 손자 키우다가 왔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주님 일은 맞습니다. 그러나 좀 더 큰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로 그것이 주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지 한번 양심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남의 양심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젊음의 아름다움은 쉬이 사라집니다. 구체적인 헌신계획 한번 잡아 보십시오. 나의 남은 햇수 몇 년인데 그 날 어떻게 주를 위해 쓸 것인지 계산한번 해보십시오.
우리의 날들은 쉬이 지나갑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주님 아는 영광의 광채가 빛나야 합니다. 그때 화장품 가지고 얼굴 다듬을 거라고 매달리지 말고 하긴 하겠지만 옛날처럼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거든요. 이제는 신앙의 아름다움이 얼굴에서 빛나야 할 때 아니겠습니까? 할일 많은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뭐하다가 왔니?”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돌아오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예배한 모든 주의 백성의 마음 속에 주를 위한 다짐이 새로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는 새롭게 충성하고자 하는 소원이 가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꿈이 현신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손댄 일들, 이루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치열한 마지막 싸움을 싸우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방에서 도움의 요청을 듣고 있습니다. 내미는 손을 보고 있습니다. 그 내미는 손을 붙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도움을 응해야만 합니다.
어떤 요청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한 공동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오늘 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새벽별과 같이 빛나는 내일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한 주간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멋있게 주를 위해서 남은 생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헌신과 축복 (마 19:23-30) : 윤성진 목사
1.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말씀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하는 것은 부모 자신을 위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이 자녀들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따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들에게 이런 명령, 저런 명령을 하시는데, 하나님 자신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들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너의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명령과 계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도 아브라함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주신 명령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천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 불고기를 좋아해서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복주며 아브라함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그처럼 혹독한 명령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집이 없어서, 집에서 사시기 위해서 <내 집 지어내어라>고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주신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하신 때도 있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다시 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먹기 위해서 우리에게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창고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물질을 황충이 먹어치우지 않게 하시려고, 하늘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하시는 명령들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요, 관원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고 하면 베드로보다도 더 위대하게 사용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행복을 위하여, 청년을 축복하시기 위하여서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띄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든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주시는 명령인 줄 믿고 순종하여서, 순종했던 자들이 받았던 그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의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가족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될 것인가? 그래서 “주님,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이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아멘.
얼마나 대단한 약속입니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세상으로는 마지막 날입니다. 모든 인류는 심판받는 날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치는 날이 있듯이,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경기하는 날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은 그때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때에 우리들도 예수님 주변의 보좌에 앉아서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최고의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영생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누리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영생을 얻게 되는 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물질과의 올바른 관계,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때에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도 더 넘치도록 하나님께서는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날이 바로 영생얻는 날입니다.
옛날에 임금의 자리를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금에게 집이 없겠습니까? 물질이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아내가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모든 행복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영생을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축복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는 이 세상의 물질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고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최고의 축복인 영생을 얻었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눈을 감아도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포기할지라도 영생만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소유하고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드린 자에게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자에게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이 땅에서도 받는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29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드린 자마다> 얼마나 받아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배만 해도 대단한데,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그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면 <백 배나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자에게 백 배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그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투자해서 백 배나 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나 받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백 배(百倍)라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다 뜻할 때 백이라는 말들을 씁니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자 그대로 백가지의 행동이지마는 모든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많이 받는다, 넘치도록 받는다, 남김없이 받는다, 모두를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 배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 잘 믿어서 받는 복이 백 배만 되겠습니까?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고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셨던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가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새롭게 신축할 때에 그의 전 재산이었던 논 세마지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업이 없으니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교회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유학을 갔습니다.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어졌고,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지냈고, 현대 한국의 지성인 중의 가장 선구자가 되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고백했습니다. 논 팔아 밭 팔아 공부시켜 놓으면 일본관리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대에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것 드렸더니 천 배로 만 배로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집이나 전토와 같은 물질은 백 배나 받습니다. 그런데 뭐까지 백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백 배나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백 배나 받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한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시대인데, 부모가 백 명쯤 되어보세요. 어떻게 그 부모를 다 모시겠습니까?
요즘 자식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외국에 가서 공부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자녀를 외국에 보내고, 그 자식이 또 걱정되어서 어머니가 따라가서 자식을 또 뒷바라지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곳에서 돈 벌어가지고 보냅니다. 그래서 부부가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 말이 생겨졌습니다.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자식을 여럿 낳지 못하고 하나만 낳아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녀를 백 명이나 한번 낳아보세요. 백 명이나 한번 얻어 보세요. 그러면 그게 복이 되겠습니까?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도 백 명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내를 백 명이나 얻고 남편을 한 백 명이나 얻어서 백 명의 아내, 백 명 남편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백 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이나 자식을 백배로 주신다는 것은 백 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 형제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형제보다도 더 귀한 형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부모보다도 더 귀한 부모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백 명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백 명의 자식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백 명의 아내보다도 더 귀한 아내, 백 명의 남편보다도 더 귀한 남편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룻기서 4장 15절에 보면 룻이 결혼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귀한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귀한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니, 열 아들보다 귀한 자식이니” 하는 말들을 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물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에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릴 수 있는 재능을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합니까? 물질적으로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백 배나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 배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준다는 것입니다. 백 명보다도 더 나은 형제를 주실 것이고, 백 명보다도 더 나은 부모를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자식보다 더 나은 자식을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아내와 남편보다도 더 나은 부부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것 주님 앞에 드려서 아름다운 가족을 백배나 얻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가 이런 뜻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서 백 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도 되어집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아들이 없었습니까? 디모데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었습니다. 누가가 의사인 자기의 직업을 다 팽개치고 옥중에 와서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그의 건강을 돌보았고,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삶을 다 책임져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정말 좋은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었습니다. 눈까지 빼어주겠다고 효도하는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같이 옥에 갇히면서 효도할 자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을 때, 그에게는 성도들이 다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좋은 아들이었고, 좋은 부모였고, 좋은 형제자매가 되어서 이 땅에 살 때 그는 외롭지를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살아본들 70년이요, 80년입니다. 백 배를 받아보고 성공을 한들 잠깐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어려워도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백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최고의 은혜와 축복인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백 배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 어떻게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집이나 전토,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식, 부부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위하여서 교회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 내 직장, 내 집, 내 평안을 위해서 교회 나왔고, 이것을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포기하며 어떻게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게 될 때, 느끼게 될 때, 깨닫게 될 때에, 경험하게 될 때, 어떤 명령이든지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였습니다. 경건치 않은 우리였습니다. 연약한 우리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서, 은혜주시기 위해서, 복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내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생명버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셨고, 영생의 축복을 주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경험하게 되면 내게 있는 생명까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무엇을 내어 놓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도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이 큰 은혜를 늘 체험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물질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시간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재능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것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제게 주신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제게 주신 이 재능과 힘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자는, 청지기 의식을 가진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고 백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주님께 드린 자에게 주시는 복
전주 삼래읍에 박집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섬기고 있는데,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지어야 할 때가 되어졌습니다.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서 이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이야기이고 또 촌이었기 때문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집을 짓다가 그만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어졌습니다. 우기는 오는데 벽은 세워졌으나 지붕이 이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박집사님이 부인하고 의논합니다. 우리 대대로 물려오는 땅,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우리가 노력해서 다시 살 수가 있지만, 교회를 이렇게 두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니까, 우리 논을 팔아서 교회 공사를 완공하자고 두 분이 의논하여서 논을 팔아서 그 돈으로 교회를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붕을 덮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50대 연령인 사람은 잘 알고있는, 사라(Sarah)호라는 큰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는 수군수군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가봐. 우리 집도 안 날아갔는데, 왜 교회지붕이 날아가지?”. 그러니까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믿음이 약한 교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박집사님은 새벽마다 하늘이 뻥 뚫린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지붕이 어떻게 이렇게 날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줍니다. “박집사야” “예” “네게 눈이 있지 않느냐?” “예. 제게 눈이 있습니다. 눈가지고 어떻게 하라고요?” <눈이 있지 않느냐?>는 음성이 똑똑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집을 짓고 도배를 하면 얼마나 좋은 도배지를 가지고 도배를 합니까?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신문지를 가지고 도배를 할 때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신문지로 도배를 하는데, 시신경이 망가지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사가지고 이식하면 눈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눈을 사고도 다시 팔수도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 그의 머리를 팍 지나가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이 “박집사야, 네 눈이 있지 않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생각나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그 말씀은 바로 내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하고 예수전주병원에 달려갔습니다. “이 병원에 눈을 삽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 눈을 산다고.” “지금 살 수 있습니까?” “지금은 살 수 없는데, 서류를 작성해서 주고 가면 눈 살 사람이 있을 때 연락할테니까 그때 가서 눈을 팔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소를 주고 서류를 갖추어서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느 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큰 음성을 들려 주셨는데,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내가 알고 눈 팔아서 내가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고 하니까 부인이 펄쩍 뜁니다. 어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냐고, 당신없는 교회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느냐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이니까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다시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음성은 더 똑똑하게 들려옵니다. 부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니까 내가 그 음성에 순종해야 되겠노라고 하도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신 눈 하나 뽑고, 내 눈 하나 뽑아서 팔자고 합니다. 그것도 또 괜찮은 제안입니다.
그래서 또 기도해보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박집사야,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셨지, “박집사야, 네 한쪽 눈, 네 아내 한쪽 눈”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고 또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동의를 하고 서류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동네 사람의 동의서를 또 하나 받아가지고 서류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전주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박집사는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가운을 입었습니다. 눈을 빼는 수술을 준비를 했습니다. 박집사님이 수술가운을 입은 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 때 묻은 찬송을 펴서 ‘내 눈으로 나의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찬송을 해야 되겠다’ 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합니다. 수술하려던 의사가 보니까, 이 사람이 이상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주예수병원은 다 예수 믿는 의사들입니다. 그 의사도 장로님이었습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찬송가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 알고, 당신이 왜 눈을 뽑는지 그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고는 내가 눈을 수술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박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디어디에 사는 집사입니다. 교회를 지었습니다.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논 팔아서 지붕을 이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지붕이 날라 갔습니다. 어느 날 “네 눈 있지 않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 눈 빼어서 하나님의 집 지으라고 하는 줄 알고 눈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내가 이렇게 수술합니다. 그 의사 장로님이 수술하려고 하던 기구를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박집사라는 이 사람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눈 빼어서 교회 지으려고 하는데, 이 놈은 장로라고 하면서 박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가진 집도 돈도 많은데 그 은혜 보답하지 못한 이 놈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통곡을 합니다. 옆에 있던 보조의사가 웁니다. 간호사가 같이 따라서 웁니다. 그 소리가 원장에게 들어갔습니다. 온 병원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모두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웁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울지 말고 박집사님을 위해서 헌금하십시다.” 하고 헌금하니까 바로 그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헌금이 나왔던지, 당시에 교회를 잘 지을 수 있는 돈과 논을 스무마지기 살 수 있는 돈이 나왔습니다. 그 돈을 주면서 “당신의 눈을 우리가 뽑을 수 없습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아름다운 교회짓고 또한 논밭을 사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십시오,” 하면서 집사님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까지 바쳤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받지 아니하시고 수양을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며 복주고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고, 그 축복을 아브라함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에게 드렸더니 오천 명이 먹고 남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까지라도 빼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눈 받지 아니하고 더 좋은 것으로 백 배나 그에게 갚아 주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아내, 나를 위해서는 우리가 아낌없이 쓰면서, 내 몸과 내 건강과 내 생명, 내 물질, 그것을 꼭 쥐고 있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 놓으면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때에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드리면, 버리면, 사용하면 이 세상에서 백 배나 갚아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증거는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 영생을 축복으로 주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읽을 때에 부자 청년처럼 돌아서는 우리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을 섬겨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우리의 몸을 주님 앞에 드려서 이 땅에서 백 배나 받을 뿐만 아니라,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자식,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아내와 남편, 백 명보다도 더 귀한 부모, 백 명보다도 더 귀한 형제를 얻어서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영생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직 예배 설교] 예수님의 마음 (빌 2:5)
이 시간에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제목입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다 들으시고 답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것입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답이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정답이죠?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 하나님 마음처럼 넓고 크고 아름답고 뜨겁고 위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갔더니 들어가 보아라 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심장이 있는데 그 심장 여기저기가 크게 뻥뻥 뚫려 있고 그렇게 갈래갈래 찢어져 있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 심장이 누구의 심장이었겠습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만 가지고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만 가진다면 어떻게 반목과 질시가 있을 수 있고, 이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불충성과 악함이 있고, 이 마음만 가지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송 받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엇이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 임직 받으시는 분들이나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 예수님의 마음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될까요?
저는 몇 년 전에 치유상담을 전공하신 분의 강의를 들어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분은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머리를 가리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뇌를 치료하면 마음도 치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으나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뇌가 건강해도 마음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혹은 뇌는 건강해도 신체의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여러 가지 심리적인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뇌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봐도 뇌를 치료하여 훌륭한 사람 되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뇌를 치료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교회는 필요 없고 병원만 세우면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갈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방법은 성령 충만 받는 거예요.
길지는 않지만 목회일생 속에서 문제 가진 교인들을 보면서 때로는 맘 상할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 볼 때 그 영혼이 은혜 받지 못해서 그랬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더 마음이 더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하기 전에 먼저 은혜부터 받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고전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했습니다. 벧전2:21에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야곱이가 양치면서 우물가에 나무들을 알록달록하게 벗겨놓고 그것을 보고 알록달록한 새끼를 배도록 한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사람을 보더라도 좋은 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본받는다 해서 잘한다 했더니 보니까 좋은 점은 놔두고 나쁜 점만 본받더라고요.
또 어느 사람은 어떤 모임이 갖다 오더니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회의를 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왜 그런지 살펴보니 거기서 나쁜 점을 배워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가지마!”, 그랬습니다. 모임들이 많지만 비방을 일삼고 파워게임만 하려는 그런 곳은 피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지 누구를 본받는 것입니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기껏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이 시는 충신 정몽주의 어머니가 이성계 부자의 더러운 권력다툼에 끼지 말라는 애끓는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 시를 읊으신다면 무엇이라 하실까요? 우리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의 심장을 가졌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 잘 믿고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충성하고 섬기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면서 자기 직분에 충성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송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애기가 태어났어도 어머니의 젖과 돌봄이 없으면,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이 교회의 품을 떠나서 결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고 문제 해결을 받은 사람이 그 얼마인지 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곳을 의미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린아이가 와서 안기고 마음껏 젖을 빨아먹을 수 있는 엄마의 가슴과 같은 곳입니다. 시댁에서 시달리는 딸이 친정에 와서 마음껏 울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한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엄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것이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많은 여자보다 엄마가 더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여자가 많으면 말이 많습니다. 이 말 저 말, 온갖 말들이 무성합니다. 쓸모 있고 영양가 있는 말보다, 남을 비난하고, 비하하고, 험담이 많습니다. 자기자랑과 교만 섞인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로 인하여 상처를 입히고, 새 가족들이나, 이미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치료받으러 교회 왔다가, 더 큰 상처를 입고 돌아갑니다. 교회 안에 아내가 많으면 잔소리가 많아집니다. 바가지 긁는 소리,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시어머니가 많으면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밥이 왜 꼬들하냐? 밥이 왜 왜 죽 같으냐? 낮에 집에 안 있고 어니 싸돌아 다니냐? 등등 잔소리로 시작하여 잔소리로 마치면, 집안에 평안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안에 시어머니와 같이 잔소리하는 자가 많으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엄마가 많으면 따뜻하고 포근해 집니다. 엄마가 많은 친정 같은 교회! 시댁에서 시달리다가 친정에 오면 마음이 편한 것처럼, 누구든지 세파에 시달리다가 교회 오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저는 오늘 헌신 예배드리는 제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서 엄마의 역할을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 교회는 전도지에는 "친정 같은 교회"라고 써놓고, 교회 안에 친정엄마는 없고 온통 여자들만, 아내들만, 시어머니들만 잔뜩 있어 오만상 시끄럽습니다. 엄마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한국 아줌마는 사람들과 종이 다르다고 합니다만, 엄마는 그야말로 종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느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비탄에 잠겼습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발 아들을 단 5분만 만나보게 해주세요. 단 5분만...."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말했습니다. "아들을 5분 동안 만나게 해주겠다. 그러면 아들의 언제 모습을 보고 싶으냐. 어머니의 품에서 재롱을 피우던 모습인가?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인가? 아니면 학교에서 상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인가?" 어머니는 한참 생각한 뒤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제게 용서를 빌던 모습니다. 아들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제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엄마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주면서도 더 못해준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어머니는 지우개가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지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엄마가 많으면 얼마나 따듯하겠습니까? 얼마나 푸근하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이 크겠습니까? 그야말로 만민이 와서 기도하고 싶은 곳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얘기를 기록해 놓은 열왕기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어떤 왕을 소개하면서 꼭 빠지지 않고 기록한 것은 그 왕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22:1-2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고, 23:31-32에는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을 올리고, 그 왕의 행적이 선하였는지, 악하였는지를 기록함은 그 어머니의 역할에 따라 왕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만큼 자식에게 미쳐지는 영향이 어머니의 역할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어떤 어머니가 있느냐?에 따라 교회분위기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머니보다 엄마가 많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뛰어 달려들어 안길 수 있는 품이 있는 엄마, 먹을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엄마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는 어떤 자들이 득실거렸습니까? 강도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는 엄마 품처럼 해 놓았는데, 그 안에 있는 성전지도자들 즉 제사장들이 엄마의 품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상처 입은 자들을 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이 되어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들었습니다. 의자와 좌판을 들러 엎고 장사꾼들이 내어 쫓았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 교회에 오시면, 어떤 분위기일까요? 어느 교회에 가난한 자매 한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견디다 못해 자기 몸을 팔아 오빠의 병을 회복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교회 교인들이 하도 그 얘기를 수군거려 오빠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충격으로 오빠는 그만 자살해 버렸습니다. 기껏 자기 몸을 팔아서 살려 놓은 오빠가 목숨을 끊어버리자 그 동생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의 장례식 날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너 아무개 목사야! 너는 네게 맡겨진 양떼를 얼마나 돌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양은 한 마리도 없고, 이리떼만 데리고 있다가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엄마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우들이 엄마노릇을 해야 합니다. 엄마 노릇하여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다독이며 젖을 먹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인간적인 시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잔소리 하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잘 하는 사람들을 모함하면 교회는 험악한 곳이 됩니다. 저 옛날 유대에 제사장,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자기보다 못하다 싶으면 무시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고 열심히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시기하며 끄집어 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교회는 역시 엄마가 필요하고, 그 엄마의 역할을 1여전도회 회원은 물론 우리 모든 교우들이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구미지역은 대부분이 객지 생활입니다. 교회에 친정 엄마 같은 성도들이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됩니다. 나가서 전도하지 못해도 엄마노릇만 해도 제 발로 옵니다. 말없이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또 그들을 위해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먹일 수 만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 가져다 먹이는 엄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모범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가 본받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많은 교회 또한 강합니다. 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교회 안에서 엄마 같은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쉼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강한 교회를 만드는 자가 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설교자 : 강재식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안나의 신앙생활 (눅 2;36-38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시간에 “안나의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할을 잘하려고 하면 훌륭한 사람을 나의 모델의 목표로 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경배의 대상으로 믿을 뿐 아니라 신앙의 모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우리의 신앙의 모본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을 들라면 여선지자 안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럼 안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1.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7절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성전에서 날마다 기도하며 성전 중심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겠습니까? 그래서 안나라는 이름의 뜻은 한나와 같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장소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예배가 드려진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많이 나타난 곳이기 때문에 장소 자체에도 영적 에너지가 충만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현장에만 와도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은혜 받거나 기도하기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교회는 양 우리와 같아서 우리 떠난 양은 이리에게 잡아먹힙니다. 세상과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혹은 교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아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공급 받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엘림 오아시스에 있었던 것처럼 사막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온갖 도우심이 하나님이 세운 종들과 성도들을 통해서 공급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실시하는 모든 공적예배에는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교회에서 잘 배워서 하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가며 해야 합니다. 요즘 사이버 공간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이단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주장을 하면 다 이단의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안나처럼 교회중심의 생활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드리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7절 “주야에 금식하며 섬기더니” 주야에 금식하며 섬겼다는 것은 기도가 보통 기도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금식하는 동기가 여러 가지이지만 금식의 동기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안나의 경우 순탄치 않는 그의 인생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안나의 인생은 그의 출가와 과부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합니다. 출가 후 7년 지나고 과부가 된지 84년이라 했으니 그의 나이 약 120세인데 그 인생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입니까? 젊은 청상과부로 일생을 과부로 보냈으니 말입니다. 당시 과부는 의지할 곳 없는 극빈 계층에 속했습니다. 젊어서는 젊어서 늙어서는 늙어서 고달팠습니다.
그러나 안나는 자기 몸을 죄에게 드리지 않고 그리고 염려와 근심에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날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몸이 보통 물건입니까? 이것은 강력한 영적 투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아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죄에 드리거나 염려와 근심과 고독에 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온전히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성경이 안나를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라 소개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성경의 언급은 단지 족보 추적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 곳에 붙인 이름 브니엘과 같은 이름입니다. 안나를 이 이름으로 소개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간절한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부부가 똑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다르게 갑니다. 남녀의 장수의 차이를 보면 옛날에는 8세 요즘은 6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여성이 더 오래 삽니다. 그래서 혼자가 남습니다. 그러나 남은 인생 재혼할 수도 있지만 바울은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정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나처럼 기도로서 남은여생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5:5-6에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했어요. 우리는 남편이 있든 없든 아내가 있든 없든 예수님께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데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6절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리고 37절에 “섬기더니” 이 말씀으로 보아 죽도록 충성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이 많아 늙었다고 뒤로 빠지거나 못한다고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연세 많다고 못 한다 안 한다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정년이 어디 있으며 봉사의 정년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지만 사람이 잘못해서 더 빨리 늙을 수 있습니다. 풀무원 원장 원경선씨는 191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올해 우리 나이로 95세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연식을 모를 때 환갑이 되도록 혈변을 보는 등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남양주에 자연농업을 시작하면서 그의 건강은 회복되었고 90세가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가보았지만 지금도 건강하십니다. 그가 국내나 해외에 강의 나가 종일 강의를 하는데 그를 돕는 젊은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모세와 같이 80세가 출발이시기 바랍니다. 갈렙처럼 85세일지라도 마음 조금도 약해지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120세가 되어도 시력도 청력도 기력도 쇠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연세가 드실수록 감사를 더 많이 하세요. 연세가 드실수록 더 봉사하고 더 구제하고 더 선교하세요.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세요. 이제는 천국에다 쌓을 생각을 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되게 됩니다.
4. 예수 만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8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씀입니다. 늘 기도하고 섬기면 지금도 예수를 만납니다. 큰 체험으로 다가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체험하지 못한다면 기도하지 않거나 자기 생각과 주장과 습관을 버리지 않는 등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도 성령께서 기도 줄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세요. 무엇을 구할까 염려하거나 내 기도 제목으로만 채우지 말고 기도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세요. 그러면 신기하게 기도가 실타래가 풀리듯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할수록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방언을 할 때도 방언 따로 내 기도 따로 하면 방언의 신비함과 풍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해주시는 기도이므로 어떤 것에 생각을 집착하지 말고 기도하다 보면 뭐가 떠오르고 생각나면서 주님이 뜻이 나에게 채워지게 됩니다. 이 훈련이 잘 되면 영적으로 열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안나와 같이 기도 잘해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봉사하다가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흐름 따라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봉사하면 예수를 만납니다. 새 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의 장모 간증이 유명합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봉사했더니 하나님께서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사위를 그렇게 큰 일하도록 밀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봉사하다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5. 예수를 전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8절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예수 만나야 예수를 잘 전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선지자로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만나 전했습니다.
여전도회란 전도하는 회입니다. 교회 살림도 잘해야 하지만 살림만 하라는 회가 아닙니다. 전도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구상하고 힘쓰고 물질 쓸 때 주님이 잘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결실은 하나님이 맺어주시니까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믿고 본받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안나 선지자를 본받으십시다. 우리 모두 안나처럼 교회 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드리며 충성하며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전하는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배로운 고난’이라는 제목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여러 곳에서 고난이 보배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식이 찬란한 구절을 보셨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이라면 그만큼 보배로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씀 드리면
1. 고난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히12:10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고난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간증했습니다.
2. 고난은 더 깊은 영적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롬 5:3-5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 왜 그럴까요? 고난은 우리를 깊은 기도 속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을 주실 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못 맞춥니다. 한나 보세요. 한나가 고통 속에 한이 맺혀 얼마나 깊이 기도합니까? 그래서 얻은 아들이 사사 선지자 제사장 삼권을 다 가진 사무엘입니다. 이처럼 깊은 기도자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은혜입니다.
3. 고난은 놀라운 부흥을 가져다 줍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했습니다(출1:12). 초대교회를 보면 핍박 속에서 더욱 부흥했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고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의 동기를 조사하면서 발견한 것은 거의 고난 속에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못 고칠 병에 걸렸다든지, 자녀를 잃었다든지, 이런 한 맺힌 과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이처럼 기독교는 주님의 고난 속에서 만들어졌고 또한 고난 속에서 자랍니다.
이 시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고통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평안하다고요? 돌아보세요. 하나님의 마음 아프게 한 것은 없나요? 혹은 내 일생 다가도록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또한 일군으로서 느껴야 할 고통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통을 느꼈으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했겠습니까? 이 고통이 있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부흥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함께 하심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교회를 위해 남기신 고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은 피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느끼십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고 순종합시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보배로운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나는 어떤 일군인가?”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군입니까? 여기 바울을 도왔던 하나님의 일군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이름은 약 여섯 명이지만 9절이 디모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 세 종류의 일군을 발견합니다.
1. 데마와 같은 일군입니다.
본문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골4:14을 보면 데마는 과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일시적으로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자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항해 떠나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저렇게 헌신한 사람을 이토록 옥에 갇히고 비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회의, 아마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진정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복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어요. 세상의 영광과 복을 구하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언제든지 그만 둘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산 고신대학 다니는 학생의 말을 들으니 처음 입학하면 90%는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2학년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사모 되겠다는 사람은 몇 %도 남지 않는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 보이니까 그러나 목회자 사모가 된 선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시적 감정으로는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곧 그만 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반대가 와도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는 데마라면 진정 회개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2. 마가와 같은 일군입니다.
14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가는 120명의 문도들이 기도하다 성령 받은 다락방 주인집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방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뿌리가 깊은 사람이에요. 그러한 마가는 어떤 고난도 각오하고 제 1차 전도사역 때 바울과 바나바를 돕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복음사역에 외로움과 박해와 고난이 심해지자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뒤돌아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1차 전도는 마가에 있어서는 실패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데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제 2차 때 또 다시 뉘우치고 바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제 1차 때 제 맘대로 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행 15:39). 그래서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로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뉘우치고 나중에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 늘 찾아가서 만나며 바울을 돕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한 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골4:10이나 벧전5:13 등을 볼 때 사도들이 인정할 만큼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이 마가입니다. 감상적으로 하다가 말다가 하는 약한 마가였지만 진실로 변화 받은 마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에는 못했다면 지금은 뉘우치고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보면 일군이지만 과거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나서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도 마가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사람이 두려워 숨어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이 인정하고 교회에 실망을 주지 않는 참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누가와 같은 일군이 있습니다.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바울에게 분신같이 있으면서 바울을 도왔던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복음을 쓴 집필가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는 유망한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누가가 바울을 극진히 수종을 들면서 함께 했던 흔적들이 있지만 누가는 우리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충성된 일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더구나 일생 목회를 도와 말없이 교회를 섬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같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는데도 한결같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교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저도 간혹 그런 생각해 봅니다.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교인이 되었을까? 좋은 교인이었을까? 가시 같은 교인이었을까?
그러나 누가는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노라’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주었고 모든 수고를 감내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속적인 영광을 버리고 오직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굶고 헐벗은 누가였습니다. 가서 보십시다만 하나님 나라에 바울의 상이 크겠지만 이와 똑 같이 상을 받은 사람이 누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회원 여러분!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군을 찾으십니다.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는 자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가와 같다면 속히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가와 같이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사랑하는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직분자임명]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 (딤후 2:20-21)
오늘은 우리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는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합당한 자격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을 일컬어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 7절에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한 것은, 교회의 존귀함을 말해 줍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다니,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대체로 집은 건물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한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지은 건물도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믿음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집 주인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집의 일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기만성(大器晩成) 이라는 말을 씁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그릇에 견주어 ‘그릇이 크다’, ‘그릇이 작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똑같은 식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
모든 인간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비해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니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신자들을 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나옵니다. 신자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그 중에는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골고루 다양한 그릇이 있습니다.
금 그릇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을 말합니다. 은그릇은 전자보다는 덜 충성스런 신자들을 말합니다.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은그릇만 못한 신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릇은 일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사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핍박자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시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둘 점은, 누구나 날 때부터 어떤 종류의 그릇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금 그릇인 사람은 없습니다. 날 때부터 질그릇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은 질그릇인 사람도 금 그릇이 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죄 사함을 받아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 받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실제로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씻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담대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는데,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은 사람이라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 사함은 곧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면, 깨어진 놋그릇을 녹여서 새 그릇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그릇은 이전의 놋그릇이 아니라, 새 그릇입니다. 이전에는 오물을 담는데 쓰던 놋요강이었더라도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밥상에 올리는 새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믿기 이전에 우리는 깨어지고 더러워진 놋요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완전히 녹여서 새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죄 사함 받은 성도라야 하고, 또한 매일같이 회개생활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성도라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게 감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도 한 때는 믿는 무리 가운데 속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진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해 낼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아시므로 때가 되면 그런 자들을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2장 18-19절에는 “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19)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갖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단에 속한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 때 기성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단들은 지금도 교패가 붙은 집만 찾아다닙니다.
이단은 병균과 같습니다. 그것도 감기를 옮기는 바이러스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을 전염시키는 병균입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단에게 넘어갑니다. 또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이단에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 안에 이단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살펴야 합니다.
이단은 비유하자면, 기독교의 짝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명품을 살 형편이 되지 않은 경우에 값싼 짝퉁을 사서 기분을 냅니다. 단 돈 몇 만원에 수백만 원 하는 명품과 똑같이 만든 짝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짝퉁을 가졌다고 해서 건강을 해친다거나 명예가 실추된다거나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짝퉁은 사정이 다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짝퉁을 일컬어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선지자의 짝퉁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르고, 사도의 짝퉁을 거짓 사도라고 합니다. 한 교회에 속해 있으나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짝퉁 신자를 거짓 형제라고 부릅니다.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있기 마련이고,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는 현실을 보고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4:11).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에 물들지 않은 성도라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도덕적인 오염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알게 모르게 도덕적인 오염에 물들기 쉽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노아가 살던 때보다 더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지켜 세상 풍속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직분자의 도덕적인 자격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12)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13)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육신의 정욕, 재물에 대한 탐욕, 높임 받으려는 권력욕, 칭찬받으려는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높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나태 곧 게으름입니다. 다른 일은 부지런히 하면서 신앙생활은 한없이 나태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잠언 6장에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하신 대로, 신자가 게으르면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빈궁하고 곤핍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으므로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서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보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로 나가서 부지런히 장사하여 갑절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는데,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와서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이 이르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와서 말하기를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특히 직분자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23절에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집사님들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구역장님들은 구역식구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보살펴야 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맡은 학생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치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대접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직분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이 다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섬김을 받는 사람일까요? 어린 신자들, 연약한 신자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피차 섬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이르기를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 섬기기에 힘씀으로 사랑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꾼들이 이 섬기는 일에 솔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한 분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집에 쓰임 받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히 쓰이든 천히 쓰이든, 어떤 식으로든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쓰임을 받으려면 금 그릇처럼 귀히 쓰여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격은 우리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죄와 이단과 세속과 나태함과 같은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재물과 건강 등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을 비롯해서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이 깨끗한 그릇이 되셔서 하나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임 받는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 제단을 다시 수축하기 (왕상 18:30~40)
예수님은 눅12:49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를 원하셨다. 그 불은 거룩한 불이다. 죄악과 정욕의 불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의 불이다. 그 불이 붙어야 죄악을 이긴다. 그 불이 붙어야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다. 그 불이 붙어야 축복의 인생이 된다. 그 불이 붙어야 부흥의 주인공이 된다. 이 불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여 사람의 심령을 타게 했을 때 120문도의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교회를 확산하는 생명 공동체가 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들어가는 지역 마을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든든하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부흥의 불길이 로마에까지 퍼져나갔다.
조선 땅에도 1885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래 일제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의 어두움의 시대에 하나님은 1907년 평양에 불을 던져 주셨다.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회개로 시작된 말씀 집회는 통회와 자복, 합심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한 달 뒤인 1907년 2월 10일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의 부흥회에 2,000명이 모여 회개와 자복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각 간증을 하였다. 한 주간 더 연장된 이 부흥의 역사로 학교는 공부를 할 수 없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문을 닫았다. 불이 심령에 떨어지고 교회에 떨어지고 평양에 떨어졌을 때 이 불은 전국으로 옮겨 붙었고 1919년 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저력으로 승화되었다.
이 불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주님이 부흥의 불을 다시 한번 더 내리시도록 갈망해야 한다. 이 시대는 죄악의 시대다. 어두운 영들이 판을 치고 생명을 팔아버리는 시대다. 학교 교육이 무너져서 가정의 공동체가 해체되므로 청소년들이 신음하고 컴퓨터 중독, 게임 중독, 술과 마약, 알콜 중독, 음란과 사치, 방탕이 판을 치는 패역의 시대다. 교회마저도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성직자, 교회 지도자들도 길을 잃어버리고 다같이 방황하는 시대다. 표류하는 시대, 겉만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만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다.
그래서 불이 더욱 임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본성이 자비와 긍휼이시기에 렘3:22~23의 말씀처럼 이 땅을 진명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더욱 강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불을 내려주실 것이다. 마치 오늘 본문 엘리야가 고군분투하는 갈멜산 위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드러내시려 태우는 불을 내려주시듯 믿음의 부흥, 야훼 신앙의 부흥을 위해 불을 주실 것이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진멸하는 불을 갈망하며 그 불이 떨어지는 현장에 서 있었는가?
Again 1907을 사모하는 우리는 “이 땅에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마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하겠다. 불로써 응답하시는 역사는 바로 왕상18:30의 말씀대로 단을 수축하므로 일어났다.
왕상18:30~31은 바로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과정이다. 불은 바로 회복된 단 위에 임한 것이다.
첫째, 용서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1)
엘리야는 백성을 모아 놓고 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라고 하였다. 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라 하였다.
북왕국 출신인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남왕국 유다를 상징하는 유다와 베냐민의 돌도 취하였다. 분단의 벽, 정치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 화해와 일치, 연합의 단을 쌓아 올렸다. 바로 벽이 없는 용서의 단이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단은 용서가 있는 단이다. 용서는 예배를 성공시키는 열쇠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다. 용서는 곧 부흥의 시작이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하였다. 예물을 드리려거든 먼저 사과하라. 용서보다 급한 일이 없다.
둘째, 예배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3)
왕상18:32을 보면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도랑을 만들었다. 이것은 여기가 예배의 단이라는 구별의 표시다. 예배의 단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보호하는 울타리 표시이다. 그리고 왕상18:33을 보면 “또 나무는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았다. 제물과 제물을 사르는 장작, 그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예배의 본질 중의 하나가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불로 임하는 단은 단을 수축하되 예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제물과 장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부흥회에 불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제물과 장작을 준비하여 예배의 단을 쌓는 주인공이 되자. 구약시대의 제물과 장작은 신약시대의 헌금이다. 찬송이다. 마음이다. 불이 붙는 불쏘시개가 되어 구별된 헌금, 구별된 뜨거운 찬양, 구별된 헌신의 마음이 단에 올려질 때 야훼 신앙을 세우는 회복과 부흥의 불로 타오르게 될 것이다. 헌금이 드려지지 못하고 찬송이 드려지지 못하고 헌신이 드려지지 못하는 단은 형식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불을 원하지만 인색하고 땀 흘리는 대가를 올려놓지 못하는 단을 고쳐야 한다.
셋째, 거룩함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5)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게 하였다. 그리고 왕상18:33~34을 보면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한다. 모두 세 번을 명령하였으니 12통의 물을 부었다. 이것은 백성들 가운데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 구경꾼처럼 갈멜산에 있었지만 12통의 물을 붓는 일에 나선 무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3년 6개월간의 가뭄,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 그런데도 12통의 물을 제단 위에 붓는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치 내 혈관 속에 있는 피를 쏟아붓는 것과도 같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물 붓기가 있으므로 단이 정결케 되었다. 송아지의 각을 뜨느라 더러워지고 어지럽혀진 단과 단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은 물로 씻어내릴 수 밖에 없다. 단은 질서가 잡히고 더러운 것은 씻겨 도랑에 채워졌다. 단은 깨끗해야 한다.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하는 것이다. 비록 장작과 제물과 돌과 흙이 씻어내리는 물로 젖었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는다. 젖은 장작, 젖은 돌도 태우므로 하나님은 더욱 큰 영광을 받는다.
우리는 단 위에 물을 부어 정결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의 단이 눈물로, 보혈로 정돈되어 깨끗하고 청결하고 순전하게 정화되도록 하자. 거기에 불이 임한다.
넷째, 기도의 단을 쌓을 때 불이 임한다. (왕상18:36)
왕상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하였고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하였다.
눈에 보이는 제단이 수축되자. 그 제단에 나아간 엘리야는 기도의 단, 부르짖는 단을 쌓았다. 그 기도 내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내 가족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불로 응답 받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엘리야 자신의 영광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으로 족한 겸손한 기도였다.
기도가 있을 때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다. 본래 기도는 성령의 불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눅11:13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으니 성령은 기도로 받고 기도는 성령의 약속으로 인해 더욱 간절하게 된다. 매일 매일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0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단을 쌓을 때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불을 받았다. 집에서, 숲에서 기도의 단을 쌓은 그는 육체의 질병을 돌아보지 않고 뜨겁게 사역하였다. 29세의 나이에 절명한 그의 기도 일기는 훗날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붙였다. 기도의 사람의 글만 읽어도 뜨거운 불이 임하였으니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의 단을 쌓으면 누구나 불이 떨어질 수 있다. 불이 내려와야 한다. 불이 오면 부흥이 시작되고 그 부흥은 대적자를 물리치는 승리의 삶이 된다. 더 나아가 그 부흥은 축복의 비를 내리는 회복의 시작이다. 뜨겁게 기도하자.
20세기 전도자 빌 그레함 목사가 말하길 “부흥의 열쇠는 세 가지이다. 그 첫째와 둘째는 기도요, 그리고 마지막 셋째도 기도다.” 라고 하였다. 기도는 절대적이다.
금번 강화에서의 부흥회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힘들었다. 월요일 아침에 먹은 음식에 탈이 났다. 식구들도 같이 탈이 났다.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 그리고 기도의 지원이 없는 사역, 거기에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1907년의 부흥은 기도의 단을 쌓으므로 불이 점화되었다. 금번 Again 1907을 갈망하는 “부흥이여, 다시 오라!”의 부흥집회는 기도의 함성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자.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수원 오목천의 부흥으로, 수원 오목천의 부흥이 제주 한라를 넘어 갈멜산까지, 열방 족속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도록 불을 구하자. 위로부터 불이 내리는 응답,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기 위해 모이자. 제단 중심으로 달려나오고 어린이로부터 중학생,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 나오자. 모두 다 기대감을 가지고 무너진 제단을 쌓아 올리므로 마음에 불이 붙는 축복을 받길 축원한다.
예수님의 사도 임직 (막 3:13-19)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임직을 위한 임직자 선거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일은 교회에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하고 귀한 일인만큼 이런 일들은 사탄의 극심한 방해작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함께 치룰때 함께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임직자를 세우는 일은 어떤 한 사람에게 명예를 주는 일도 아니고 어떤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임직을 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향한 선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감정과 입장으로 보면 안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경우 장로님과 안수집사 임직은 약 10년만에 갖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특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세상에 힘들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운동을 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돈을 버는 것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얻는 것은 없습니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가장 보람있고 가장 가치있는 일이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가는 일은 결국 이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세워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33명이 죽었고 1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미국 건국이래 총기사건으로는 최대의 사건이요 세계적으로도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총기사건으로는 최고의 사건입니다. 버지니아공대를 들어갈 정도면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고 대학생이면 그래도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조승희의 충격적인 총기난사사건은 어릴 때부터의 자폐증, 대인기피적인 과대망상증과 미국 사회의 냉대가 맞물린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그의 할머니에 의하면 "조승희는 어릴 때부터 무척 차가운 아이였고 부모가 무슨 말을 시켜도 잘 하지 않는 등 자폐증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문제는 "친구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는데도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외톨이로 자랐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승희와 친구라고 밝히고 나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만 봐도 조승희가 얼마나 '외톨이'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해 왔고 그 과정에서 세상과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승희는 20여 년 동안 간직하며 키워 온 성격적 결함과 정신적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만의 '악마'를 배양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노스이스턴 대학교 범죄 박사인 제임스 알랜 폭스 박사는 말했습니다.안타까운 것은 그의 그런 성격적인 결함 정신이상자의 증상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잘 치유받지 못하고 그냥 두었습니다. 물런 거기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서 혹시 우리 교회 속에 이런 영적인 외톨이가 없는가를 한번 생각하엿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조금 더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 중에서 이런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을 조금만 더 넓히고 한 주님의 가족으로서 아름다운 삶을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가 가장 집중해야 할 일 오늘 우리 자신들이 먼저 집중해야 할 일 바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져가는 일입니다. 이땅에 오셧던 우리 주님이 가장 집중하셨던 일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사도를 세우십니까? 왜 주님은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의 원하는 자들을 임직하심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울때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원하셨는가 그 기준이 정확하게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누가복음 6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난 뒤에 밝으매 12명을 부르사 사도로 임명하셧다고 합니다. 12명의 사도를 임명하시되 12명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12명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주님의 일꾼들을 세우셨습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12명을 불렀을까요? 주님이 부르신 12명의 사도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12명의 사도들을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별볼일없는 사람들이었다는 특징입니다. 당시에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잡던 어부출신이거나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세금을 받아내던 세리인이거나 지극히 알아주지 않던 무명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불렀습니다. 특히 세리같은 직업은 그당시에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이었습니다.그래서 세리같은 직업은 종교단체의 어떤 조그마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세리의 증언은 유대법정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정도로 증오하였습니다.
이 12명의 이력를 기초로 분석해보면 성인들 성숙한 자들과는 거리가 먼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사도로 원하셧고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몇몇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셧습니다. 먼저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본명은 시몬이고 베드로가 새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반석이란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돌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의 베드로를 보면 아주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저녁가 아침이 다른 정도로 잘 변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반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시몬을 반석으로 변화시켜서 반석으로 그를 쓰실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무명의 사람을 들어서 유명한 사람으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시몬을 불러서 베드로 이름을 주시고 반석같이 베드로를 세워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의 다른 사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소개됩니다. 이 두사람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여기 보아너게라는 말은 ‘우뢰의 아들’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우뢰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의미로는 하늘의 메신저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사물을 파괴시키는 벼락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이 성격이 벼락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추리해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성격적으로 분명히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벼락같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안좋은 성격의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받아 세워지게 되면 불같은 성격은 불같은 성격대로 불같은 열정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를 불러 세울때 약점고 있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러서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비록 약점이 있지만 비록 문제가 있지만 그 약점과 문제를 넘어선 변화의 귀한 계획을 갖고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음 주에 임직을 위해 이렇게 우리가 세우기를 원하는 자들을 당회에서 추천하엿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사람 올려놓고 이렇게 저렇게 재어보면 약점없는 사람 문제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들을 과거를 보고 이들의 현재적인 약점만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실망할 수 잇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잠재된 많은 가능성 큰 장점들도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목적을 따라 사명을 따라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지면 놀라운 변화와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약한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는 주님 없는 자들을 들러 부요하게 하시는 주님 무능한 자들을 들어 능력있는 자들로 사용하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의 손길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될 귀한 사람들을 통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이 주님이 사도로 부를때 순종하였습니다. 갈리지 바다에서 고기잡던 베드로는 배와 그물를 버려두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레위는 세관에 있다가 주님께서 부르실때에 그 부르심 앞에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즉각적으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였을까? 어쩌면 주님은 이들이 갖고 있던 지식보다도 가문보다도 실력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중심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주님의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그 부르심 앞에 온전히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임직하심
14절에 예수님께서 사도로 임직하실때의 목적은 바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사도를 임직하심은 바로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땅에 오신 우리 주님은 외톨이로 계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능력의 주님 그 풍성하신 주님에게도 교제할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12명을 선택하여 교제의 관계를 갖는 소그룹을 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택하여 사도로 임직한 이들과 함께 3년동안 함께 하셨습니다. 잠잘때도 함께 하셨고 밥을 먹을때도 함께 하셨고 사역을 할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12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시어서 함께 하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과 일꾼들과 함께 하시면서 교제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고전1장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미쁘신 우리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같이 불성실하고 약한 자들을 불러서 우리 주님은 이 시간도 함께 하면서 교제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특별히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권사로 임직받는 것을 단지 일하기 위한 일꾼으로서만 부름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과 함께 있어 깊은 교제를 갖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교제의 소명을 갖고 더 예배의 자리로 더 기도의 자리로 더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직분은 계급은 아니지만 마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함께 하다보면 성숙해지고 함때 하다보면 더 이해도 되어지고 함께 하면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
주님께서 12명의 사도와 함께 하는 것은 교제의 차원을 넘어선 그 이상의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갚은 있음으로 인해서 그들을 훈련하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12명의 사도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각 주님의 행동을 닮아가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말씀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기적과 능력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본들을 보여주셧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로 세워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제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닮은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에게 하시는 말슴을 들어야 하고 내가 그 말씀을 우리가 듣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분을 가장 경험할 수 있는 채널이 있다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그래서 우리가 제자훈련을 할때 가장 강조하는 거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때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객관적인 증거는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요한복음10장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먼저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를 바랍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3년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항상 주야로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죄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이 먼저 항상 말씀가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항상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잘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매일 24시간 중에서 얼마나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하루에 몇분이나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두기 위한 시간 그 말씀을 듣기 위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단들에게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열심입니다. 강릉에 어떤 이단은 주중에 매일 3시간씩 4일간 말씀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것도 밤낮으로 열심히 그것을 좇습니다. 물론 그들은 너무 극단적이고 치우친 삶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있습니다.그러나 기성교회 성도들이 이부분에 있어서 반성할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깊이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라면 기도는 주님께 말하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령 내가 1시간 성경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가 1시간 주님께 말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아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균형잡힌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종종 보면 성경은 많이 알고 주님의 뜻은 많이 아는데 기도가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만 앞서고 이론만 난무하게 됩니다. 반대로 기도는 많이 하는데 말씀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의지대로 잘못 기도함으로 주님의 응답과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뜻을 갖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새벽을 깨우면서 함께 새벽기도축제를 합니다. 이런 기회는 평상시에 새벽기도를 하지 못하던 분들도 작정을 하고 한번 도전하여 영적도약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삶의 기준과 습관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 기준과 습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나는 절대로 새벽에는 일어날 수 없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새벽에 함깨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평생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밖에는 용량이 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한다면 그 시간이 밤이 늦더라도 새벽이더라도 한낮이라도 한번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와 도전과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추운 시간이든 더운 시간 한번 함께 하는 드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전도와 선교를 위해 임직하심
14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라고 합니다. 주님이 함께 있으므로 교제도 하고 훈련도 하는 것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교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훈련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제하고 함께 하시고 훈련하시면서 함께 하시고 난 뒤에 사도들에게 원하는 궁극적인 뜻은 바로 세상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귀를 물리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땅에 오신 주님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앗습니다. 이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곳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은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복음으로 세상으로 나가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불러 세워 세상으로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냥 내보내시지 않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10장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마귀가 물러가며 귀신이 쫓김을 당합니다.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질병이 고침받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의 일꾼으로서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교회 속에서 훈련받고 세워진 주님의 일꾼들이 이 세상을 향해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할때에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은 단지 교회당 안에 갇힌 일꾼들이 아닙니다. 더욱 세상을 향해 거룩한 선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를 지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가 이 강릉의 십일조를 담당하는 복음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에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지도록 전도하는 교회를 만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특별히 교회 제직들은 교회에서 함께 하고 있는 목요전도학교,열린모임,이웃초청축제와 같은 날을 행사로 여기지 말고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시고 함께 동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도 선교가 우리 지역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계를 향해 항상 세계적인 안목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꿈꾸고 있는 선교지는 한 나라가 미국이고 다른 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움직이는 두나라가 저는 이 두나라이다고 봅니다. 그래서 할수있는 데로 미국과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를 실천하고 싶은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미국은 글로발시대에 아직까지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우리가 인정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복음으로 선교하면서 부딪힐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또한 그렇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부딪히면서 복음을 증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개인적으로는 그런 기도를 드립니다. 미국 중에서도 뉴욕은 미국의 중심이고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지교회를 개척하여서 복음으로 훈련된 우리의 젊은이들을 파송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세계적인 선교사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영어를 훈련하고 말씀으로 훈련되어 그곳에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복음의 비젼을 갖고 있는가 얼마나 선교의 마인드가 있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일꾼들이 세상에 거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에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고백했습니다.그래서 그는 눈을 들어 아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러 유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면 너무나도 일할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없음을 탄식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임직자들을 세움으로 인해서 더욱 복음이 확장되는 교회로 세계에 복음을 수출하는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가기를 축원합니다.
나가는 말 ))))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서 지금 여기서 일하십니다. 이땅에 오신 주님은 12명의 사도를 임직하되 부족하고 연약하고 흠이 많고 약점이 많은 사람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친히 몸된 교회를 위해 귀한 주님의 일꾼을 세워 함께 동역하시고 그 일꾼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아무쪼록 임직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더욱 귀하게 쓰임받는 임직자로 세워져가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일꾼으로서 한 세대에 귀하게 쓰임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모여서 기도합시다 (마 18:19-20)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지금 대단히 바쁜 때인데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흔히 말하듯 우리나라는 지금 고령화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인적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국가의 미래는 물론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할 것이냐 할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기성세대는 일생 기도로 단련된 세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은 하나님께서 21세기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일군들입니다. 앞으로 우리 국민의 50% 60% 70%까지 될 이 엄청난 인적자원을 기도의 부대로 최대한 활용한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를 변화시키는 부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면 신기한 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으로 기도의 향이 올라가니까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모여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할 때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여서 기도할 때 어떤 은혜를 주실까요?
1. 모여서 기도할 때 비전을 주십니다.
행 13장을 보면 모여서 기도할 때 안디옥 교회에 놀라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세계 선교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때입니다. 아무 소망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비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모여서 기도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행 2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념할 때 능력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모여서 기도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디 있든지 기도 안하는가 하고 개인플레이했더라면 그렇게 큰 능력은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작개비가 모이면 더 잘 타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도의 교통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모여서 기도할 때 부흥을 주십니다.
행2:41에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초대교회가 모여 기도할 때 부흥을 주셨습니다. 부흥은 기도 없이는 안 됩니다. 1907년에 일어난 한국이 부흥도 기도할 때 주셨습니다. 1903년 세계를 휩쓸었던 영국 웨일즈의 부흥도 기도로 일어났습니다. 10년 전 남미 콜롬비아 칼리에 나타난 부흥도, 미국 펜사콜라에서 일어난 부흥도 모두 모여서 기도하다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모임들이 많지만 기도하는 모임은 적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퓰러 신학교의 교회성장학 교수 피터 와그너는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이유를 기도에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부터 기도하는 일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 시작하자 교회성장이 멈추게 되었고 대신 무속과 불교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21세기에 가장 희망 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4. 모여서 기도할 때 사역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행 12장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인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단의 공격목표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만 넘어뜨리면 교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성도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주의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강단이 살아서 교회가 복을 받고 내 가정이 복을 받고 내 심령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모여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모두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모두 개인기도도 열심히 하고 모여서도 기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은급부 야유회 설교 ) 하나님이 보입니다 (롬 1:20)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무척 사랑하시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께서 은퇴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나들이에 좋은 일기로 복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장마 기간에 이 좋은 날을 주심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일생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신 종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기에 장마기간이라고 해도 좋은 일기 달라고 저는 담대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이 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잠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보신 분, 계십니까? 저는 성령은 체험했어도 아직 어려서인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여러분은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볼 수 없다가 바른 정설입니다. 왜냐하면 딤전6:16에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성품과 생명과 능력과 하시는 일 등 간접적으로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할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빌립아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그렇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요:8-9). 그런데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서 보면 하나님이 잘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자연에서 보면 어떤 하나님이 보입니까?
1. 자연에서 보면 좋으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저는 산을 좋아합니다. 산에 오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산은 언제나 우리에게 넉넉히 주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요구한 것 보셨습니까? 언젠가 칡이 필요해서 산에서 칡을 구했는데 산은 그냥 주었습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캤지만 1년을 넉넉히 먹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그렇게 진할 수가 없습니다. 냉장고 탈취 제거에 도토리나무 잎이 좋다고 해서 한 줌 뜯었지만 역시 그냥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넣었더니 한 반년 간 그 효과가 지속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연은 꼭 아버지 품과 같고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좋은 것을 주고 또 주고 또 주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병이 드는데 상당 부분 영양부족이 그 원인이랍니다. 식물들도 보면 흉하게 비틀어지고 병들고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이런 것들이 미량요소 부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도 미네랄 부족이 오면 온갖 질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은 많이 먹고 살지만 화학적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미네랄 함량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연에서 난 것보다 30분의 1 혹은 50분의 1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난 것을 먹으면 몸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것만 먹는다면 종합영양제가 필요 없습니다. 온갖 영양소가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연에서 보면 치료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에 오면 아무리 피곤하고 답답해도 자연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숲이 의사입니다. 자연에는 산소도 많고 음이온도 많고 피톤치드와 같은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가까이하면 건강합니다. 생노병사 프로그램에 보듯 숲에 오면 혈액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치의 판정을 받은 사람들도 황토집 짓고 자연을 가까이하고 자연을 먹고 늘 운동하는 사람들은 사는 것을 봅니다.
오늘 하나님께 맑은 날씨를 구한 것은 산림욕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림욕이 그렇게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곳 내장산에서 쉬거나 걸으면서 산림욕하고, 오후에는 담양에 가서 대나무 숲을 걸으며 죽림욕을 하고, 오다가 또 한 가지 욕을 더하려고 합니다. 온천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가지 욕을 하게 되는데 기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좋은 일기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자연에서 보면 능력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 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들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 때 보면 바람의 힘이 얼마나 강합니까? 세상을 뒤집어 놓을만한 힘입니다. 홍수 날 때 보면 비 그 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뇌성벽력 칠 때 나오는 그 전기의 량은 수억 볼트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도 없이 조용한 데도 가장 강한 것이 있는데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양입니다. 아무 소리 없이 비취는 것 같지만 그 힘으로 천지만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연의 위엄과 그 능력을 오해하여 그것이 신인 줄 알고 숭배하지만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주는 것일 뿐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4. 자연에서 보면 공의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입니다. 자연이 사람 차별하는 것 보셨어요? 사람이 문제지 자연은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산에 접근하려는데 무슨 사찰관람료를 내라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돈 내는 사람에게만 들어가게 하고 돈 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문제이지 자연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안겨다 줍니다.
자연은 인자해서 웬만큼 해를 주어도 말없이 복원력을 가집니다. 인내하고 인내합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자연을 훼손하면 자연은 더 이상 우리의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보호운동 구호가 “자연은 사람보호, 사람은 자연보호”라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자연은 공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훼손은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연 속에서 심판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5. 자연에서 보면 계시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계시에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입니다. 일반계시는 자연의 여러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진리가 보입니다. 이치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계시의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연이 주는 뿐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보다 천배 만 배 더 크고 영원한 은혜를 누리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수종 드는 여인 (막 1:29-31)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또 다른 신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에 수종을 들어야 할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주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하며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게을리 하고 주님께 수종을 들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다 예수님께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어떤 사람입니까?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가 아닙니까?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이면 베드로를 대신해서라도 맨 앞장을 서서 예수님께 수종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마치 목회자의 어머니나 장모와 같은 위치입니다. 이 분들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마땅히 예수님을 수종 들어야 할 사람이 열병 때문에 꼼작할 수 없이 누워 괴로움 가운데 뒤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장모를 깊이 관찰해 보면 몸의 열병도 열병이려니와 마음의 열병이 심하게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무도 모를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잡으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지런하고 신실하던 베드로라는 사위가 어느 날 갑자기 무명의 예수라는 청년을 만나더니 배와 그물과 부모와 자식까지 내버리고 따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혼자만 아니고 동생 안드레까지 끌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육신의 열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열병에 깊이 들었던 것입니다.
눅4:38에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한 것처럼 마음 역시 심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장모가 병 고침 받고 일어나 즉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육신의 열병은 물론 마음의 열병까지 치료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열병에서 놓임 받지 못했다면 결코 수종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열병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려면 이 열병에서 치료되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치료받아야 할 마음의 열병은 무엇일까요?
1. 실망의 열병입니다.
주를 위해 충성해도 아무 결과도 없을 때 실망의 열병이 듭니다. 이 열병에 들면 아무리 강조해도 주를 위해 수종들 수 없습니다. 눅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실망한 두 제자입니다. 실망이 컸으니 태산 같던 사명 역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눈을 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시자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실망의 열병에서 고침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6:7-9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말씀합니다.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일을 당하고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왔는데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한데 어떻게 피곤한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 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사람의 손의 열 배나 되는 큰손이 나타나서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오른쪽에서 붙들고 왼쪽으로 넘어지면 왼쪽에서 붙들고 앞으로 꼬꾸라지면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한 목사님은 다시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일을 했지만 사람이 알아주지 않거나 상처를 받게 될 때 실망의 열병이 옵니다. 지상에서 상을 받으려고 하니 실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상 받을 생각만 하면 실망치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충성하게 됩니다. 마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랬습니다. 하늘의 상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시려고 그러시는데 왜 사람의 칭찬을 구하십니까? 사람이 알아주면 그 사람은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칭찬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이 실망의 열병을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2. 세속의 열병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하나님의 일에 수종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세상 영광을 더 좋아하고 돈을 좋아했습니다. 요5:44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셨습니다. 눅16:14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눅20:46에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속의 열병에 빠진 것입니다. 그랬기에 쓸데없는 일만 하다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계라고 세속이 틈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총회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권모술수와 돈다발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납니다. 실망할까봐 깊이 말할 수 없지만 돈이 아니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있습니다. 돈을 너무 좋아합니다. 명예를 너무 좋아합니다. 권세를 너무 좋아합니다. 돈 없어 정치 못하겠다고 고민하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고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계가 세속의 열병에 빠져 있는 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좋아하면 하나님께 수종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꽉 찬 마음에 어찌 예수님이 거할 곳이 있겠습니까? 그 마음으로 어찌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할 때 다른 오락과 취미에 마음이 가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의 소 떼와 양 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의 일에 열망해서는 수종들 수 없습니다. 전에 황해도 재령읍에 정 찬유 장로라고 있었는데 그는 주일 성수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는 분이고 또 돈도 잘 벌어서 2층 양옥집을 지으려고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데 "네 집은 그렇게 화려하게 지으면서 내 집은 어찌하여 양철집으로 내버려두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내일부터 곧 하나님이 계실 거룩한 집부터 건축하겠습니다." 그 이튿날 곧 설계사를 불러다 설계를 예배당으로 바꾸어 가지고 잘 지었는데 그것이 "재령 동부 예배당"으로 당시에는 한국 제일의 예배당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병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3. 불평의 열병입니다.
일하다 불평이 생기면 일 할 수 없습니다. 흑인으로서는 미국 최초의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월(Colin Powell)을 아실 것입니다.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지만 언제나 긍정적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는 공장에서 도랑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동료 인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임금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또 한 사람은 묵묵히 성실하게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파월이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한 사람은 뭐가 못마땅한지 계속 불평만 하고 있었지만 묵묵히 일하던 사람은 이제 승진하여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 공장에 다시 갔을 때 불평만 하던 사람은 원인불명의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해고됐지만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파월에게 굉장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파월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파월이 흑인으로서 출세하기에는 악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로 일관했을 때 4성장군인 합참의장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너무 높게 올려놓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불평이 생깁니다. 이렇게만 된 것도 감사하십시다. 욕심을 줄이십시다. 목회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인데 반대만 하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생각입니다. 큰일을 하지 않았지만 따라만 준 것도 감사합니다. 내 앞에 대들지만 않은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욕심을 줄이면 목회가 즐겁습니다.
우리 여전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회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집에서도 남편이 있는 것만도 감사하고, 아내가 있는 것만도 감사하고, 자녀가 큰 출세 못해도 예수 믿는 것만도 감사하고,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불평의 열병이 사라져야 비로소 주를 위해서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낙심 가운데 계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눅4:38에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먼저 마음의 열병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라는 말은 '크라테시스'라는 말인데 '움켜쥔다'는 말입니다. 가볍게 잡은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움켜쥐셨습니다. 그리고 열병에 앓아누운 장모를 강하게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며 부르짖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강하게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사람은 못 일으켜도 하나님은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열병과 마음의 열병에서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하나님의 일군을 만드실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습니까? 실망의 열병입니까? 세속의 열병입니까? 불평의 열병입니까? 어떤 열병입니까? 오늘 주의 말씀으로 치료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최고로 수종 들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열병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주님께 온전히 수종 드는 사랑하는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8.03.09 여전도회 헌신예배*주님의 쓰시는 여전도회(삿4:1-10)
교회안에서 여인들의 역할은 참으로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교회안에 여 성도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여성들의 봉사로 인하여 발전된 교회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계에서 살아간 여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따라 고향 친척을 떠났던 아브라함을 끝까지 따랐던 순종의 여인 사라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었던 고통의 세월 속에서 여인의 몸으로 잘 이겨 놀라운 가문을 이룬 시모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죽음을 무릅쓰고 민족의 지도자로 키운 지혜의 여인 요게벳이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민족을 살린 여인 에스더, 죽을 목숨 다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해 사도 바울을 도왔던 충성된 여인 뵈뵈와 브리스가, 그리고 이 시대에 한 가정을 지키는 믿음의 여인들... 교회의 충성스런 여인들... 그 손길이 헛되지 않으며 그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변함없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수고하시는 여전도회 모든 성도들의 수고로 가정과 교회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줄을 믿습니다. 그 열매가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고 행한 일을 인하여 많은 칭찬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드보라 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인 중에 가장 용감한 여인을 꼽는다면 누구나 드보라를 꼽습니다. 드보라는 믿음의 여인일 뿐 아니라 민족을 구원한 민족의 지도자요 영웅이었습니다. 실로 드보라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사사의 사명인 재판하는 일은 물론이고 선지자로서의 사명도 잘 감당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물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쓰신 여인의 신앙적 특성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쓰시는 여전도회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줄 아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사사로 부름 받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은 드보라를 비롯한 사사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명은 끝이 난 것입니다. 엘리도 말년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오히려 사무엘이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5장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안타깝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서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그 영혼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단 사무엘 시대나 이사야 시대뿐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 영혼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현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불 일 듯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서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경 말씀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묵상이란 영어로는 medit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약이라는 영어 medicine과 어원이 같습니다. ‘메디켈루스’입니다. 마치 약이 우리 몸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서 약효를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와 우리 온 심령 속에 퍼져가면서 영향을 미쳐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묵상하는 방법은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깊이 심령 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심령 속에 들어온 그 말씀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마치 되새김질 하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받아 삶에 적용해 가는 것입니다.
둘째, 설교를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경청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경청(listening)이란 단순한 청취(hearing)와는 다릅니다. 외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설교를 경청한다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기도 중에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기도 중에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말씀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차분한 가운데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에 집중하십시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분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내 간절한 바람인지, 아니면 사탄이 던져놓은 마음인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확신이 들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그 마음을 붙들고 더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환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기도했던 내용을 되새기면서 환경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명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사명과 관련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와 연관해서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며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들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시어서 하나님앞에 귀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이 주실 승리에 확신이 있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7절)
7절에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 주님의 뜻을 전하는데 드보라에게서는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기색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주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강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다." 드보라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지도자인 사사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매일 매일 여러가지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전쟁에서부터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 그리고 영적인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의 삶속에는 온갖 종류의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것이요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승리를 확신한 자입니다. 다윗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사울 왕에게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했고(심상17:32), 기고만장한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를 향하여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싸우기 전에 미리 승리를 확신했고 승리를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벌써 패배를 생각하고, 포로되는 것을 생각하고, 죽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지고 만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직접 대결하기 전에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 목을 벨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리적인 힘보다는 정신적인 힘이 더 강하고, 정신적인 힘보다는 신앙의 힘, 영적인 힘이 더 강한 법입니다. 신앙의 힘은 그 어떤 것도 당해 낼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늘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도, 저주도 이기셨고, 질병과 죽음도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또한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으므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골리앗과 이스라엘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무기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이었고 용기와 신앙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도들의 무기는 결코 육체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면 상대 거리도 될 수 없지만,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믿고 맡기면 하나님이 지키고 관리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모든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해 주실 것을 믿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앞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3. 믿음대로 실천하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9절)
주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그 음성을 전달하는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전쟁터로 달려 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여인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위험한 전쟁터 까지 나아갑니다. 반면에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아니하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실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을지라도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쓸모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에 대하여 말할 때 살아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죽을 수도 있으며 죽어 있는 상태도 가능할 때 하는 것입니다. 생물체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 사물에게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살아 있음과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로마서나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과 대치되는 듯이 생각하지만 오히려 상호 보완적 완성도를 높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살아 있는 믿음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행위와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진리를 잘못 이해하면 믿음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인식하여 삶 속에서 행위의 열매 없이 즉 구체적인 행동을 배제하고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신다 그때의 그 형편을...."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받아 드릴뿐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그 순종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사랑의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있어야 합니다. 강요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하고,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듯이 참된 믿음은 이 행함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동반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과의 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남편이거나 아내일 수 도 있으며 우리의 자녀 일 수 도 있고, 우리의 형제 일 수 도 있으며 나란히 하고 함께 사는 이웃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살아 있는 행위를 보여 줍니다.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믿음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을 알며 교리를 인정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생활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을 염려 중에 하고 있으며 둘째는 중심으로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지적 믿음과 실천적 믿음이 하나로 일체화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고 실천적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불가 분리(不可分籬)의 관계이며 참된 믿음은 봉사와 선행으로 나타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내적 변화가
없는 외형적 믿음의 허구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입증되며 행함으로 입증됩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기를 원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을뿐 아니라 믿는대로 행동하는 삶입니다. 믿기때문에 믿음이 삶속에 배어나와 변화된 삶이 자연스레 나타납니다.
오늘날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이 관념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강한 도전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을 체험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도전을 주시는 목적은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동화해야 합니다. 받은 감동에 이끌려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해야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농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메운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밖으로 나가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그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보니 꽃은 시들어 낙화되고 없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집 밖에서 말 발굽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백마 한마리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농부를 향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농부에게 어서 빨리 와서 승마를 즐기라고 손짓하는 듯 했습니다. 농부는 '오늘은 빨리 나가 동편에 있는 울타리를 수리해
놓고 저 훌륭한 백마를 타며 즐겨 보자'하고는 급히 일하러 나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급히 돌아와 보니 그 아름다운 백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신기한 일들을 즐기기 위해 다른 일들을 정지하고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순종하되 지금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해야 할 급한 일을 하고나서 시간나면 그때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천하기는 하겠으나 기회가 많으니 천천히 하겠다고 다음에는 꼭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영원히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 것 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최대한 빨리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여러분의 기억에서 그 말씀을 지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계산하지 말고 즉각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눈치채고 다가와 감동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식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깨달으면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다시금 여러분의 뜻을 더 중요하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말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곧 바로 믿음대로 실천하여서 주님앞에 쓰임받는 여전도회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백성의 헌신 1 / 시 110:1~7 : 정근두 목사
본문 : 시편 110:1~7 제목 : 주의 백성의 헌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랜만에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지난 화요일 밤 마지막 비행기로 울산에 도착했더니 공항에 환영 나온 사람들의 반은 울산교회 교역자들, 성도님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라서 여러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주보를 펼치는 순간 지난주일 설교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전화도 한 통 없는 하나님” 저를 빗댄 제목 같아서 찔끔했습니다. 천국에는 전화가 없겠지만 미국에는 전화가 있을 건데 말입니다.
사실 전 한 달 동안 열심히 하루도 빼지 않고 제게 일어난 일들을 교회 홈페이지 제 카페에 실리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전화였다는 것을 알고 아직도 코드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디지털 방식으로 교신을 시도했는데 여러분은 아날로그 방식의 연락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만나 여러분의 얼굴을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한풀 꺾이고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가을바람 불어오는 계절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새롭게 할 말씀으로 시편 110편을 택했습니다.
다윗의 시 110편은 구약 시편 가운데서 신약 성경에 자주 인용되고 설명되는 부분입니다. 시편 110편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시인 다윗이 쓰고 시편에 실린 시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기쁨, 그의 탄식조차도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승화된 것이 시편 계시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로서 화한 것입니다. 다윗이 쓴 인간의 시가 다시 되돌아와서 하나님의 계시, 시편 말씀으로서 우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110편을 묵상해보면 1절과 4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인상적인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금반지에 박힌 두 개의 다이아몬드 같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 두 개를 어떤 틀에서 설명해야할지 쉽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다이아몬드 하나라고 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되겠습니다만 똑 같은 크기의 금강석 반지를 가지고 예쁜 반지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전체를 먼저 살피고 나서 다음에 금반지에 박힌 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중심한 설교를 두 편 따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질 첫 번째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주의 백성들은 헌신해야 합니까? 주의 백성의 헌신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저는 이 짧은 계시의 말씀 속에 포함된 무한한 내용을 다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1절만 해도 충분히 한 편 설교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제기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시편 110편을 개괄적으로 먼저 살피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시편 110편 1절은 그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예로운 자리요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으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살면서 섬겨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 분을 가리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마 이런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고백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능,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로 헌신해야 할 주인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한 번 지난여름 한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날들을 누구를 위해서 사용했습니까? 6, 7, 8 월 여름 한 계절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주를 위해서 드렸습니까? 90일 하고도 이틀이나 되는 숫한 날들 가운데 며칠을 주님 위해 드렸습니까?
그는 결코 주일의 주인만은 아니십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소위 평일이라고 이르는 그 날들도 주님께 속한 날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여름 들어 오늘까지 석 달 열흘 가운데서 며칠을 주를 위해서 따로 드렸느냐를 묻지를 않습니다. 그 모든 날들이 주를 위해서 드려진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의 힘과 지혜를 드려서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굽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린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까? 우리는 찬송하면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라고 찬양합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한 번 돌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추석을 앞둔 이 한 해를 어떻게 돌봐주셨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 가을에 논에 가서 벼를 벤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지키는 이유는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도와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 가지고 얼마나 주를 위해서 드렸습니까? 지금껏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은 얼마였고 하나님께 드린 것은 얼마였습니까? 우리가 드린 물질의 헌신이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고백과 걸맞은 것인지 여러분은 이 시간 마음속에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교육, 그것이 우리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 자녀 한 달 학원 비는 얼마이며 신앙훈련을 위해 드린 돈은 얼마인지 비교해 보십시오. 좋은 사람 만나서 한 자리 식사하는 비용조차도 드리지 않았다면 새로운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왕의 이름에 걸맞게 그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최후 승리를 하실 왕이십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그는 대적과 싸우시는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그 싸움의 영원한 향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원수를 그의 발등상 되게 하실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싸움의 최종 승리는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확실한 승리가 그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님을 그 자리에 임명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은 바로 우리의 대리자이십니다. 최후 승리에 주께 헌신한 주의 백성이 참여할 것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날마다 헌신한 그 백성이 영원히 그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여름 한 계절을 보내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며 헌신한 자들이 승리의 영광을 영원토록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 원수와 싸워서 이기기 위한 하나님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동참하는 백성들이 그 날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최후 승리가 보장된 자리에 임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듯이 그 백성의 승리의 영광,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분이 헌신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분은 알고 섬길 때에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왕이실 뿐만 아니라 그 원수로 그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능력자이십니다. 그분은 마지막 승리자이십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누구십니까? 시편 110편 4절은 그 분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왕이며 제사장이던 멜기세덱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는 평화의 왕이요, 평화의 도시 살렘의 왕으로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족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였다는 말도 없고 후손이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등장한 사람이기에 영원한 왕이며 제사장이신 주님의 예표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승전한 아브라함에게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받음으로서 아브라함보다도 높으신 자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레위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분으로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왕이고 제사장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 분의 직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그 직분에 완벽히 구비된 분이십니다.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레위 제사장직과는 다릅니다. 온전한 것의 그림자이던 그들의 직분은 수시로 교제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그 맡은 일을 완벽히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수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1절에 말한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은 바로 그 죄를 정결케 하는 직무를 완수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사죄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용서받은 백성의 헌신은 사죄 받은 은혜에 부합해야 합니다.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가을의 초입에 드리는 9월 첫 주일 예배가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왕께 헌신하는 백성이 되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예배가 되어져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명예를 돌려드리십시오. 여러분은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분께 합당한 헌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이 최종 승리자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면 #우리가 헌신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3절은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5절은 #“그 노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께서 #“주의 권능의 홀”#을 주님께 내어 보내시는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신은 언제 필요합니까? 주께서 그 권능으로 다스리는 그 때에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권능으로 그 원수 중에서 다스리는 그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권능으로 원수 중에서 다스리는 그 날, 우리는 헌신을 요구받은 주의 백성들입니다.
사실 세상에 군대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군대도 안가도 되고 말이지요. 그러나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싸우는 날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평화스러운 때는 쓸데없는 국방비를 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날을 위해서 우린 60만이라는 대군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 . .”#지금 메시야의 능력은 그 교회 가운데,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기 권세를 주셔서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사장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 이미 하늘과 땅의 권세가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열방 가운데서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역이 지금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 주의 왕권을 나타낼 때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그 옛날 승리를 보장했듯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장하는 그 홀을 통해서 오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 여호와께서 그 홀을 자기의 우편에 앉으신 왕에게 내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시온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진행하는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왕권의 확장을 위해서 여러분이 헌신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미 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시작한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국내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합천으로, 의령으로 청년 1부에서 나아가 사역했습니다. 비록 사역 중에 사고도 있었지만 본래 싸움에는 피아간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차량도 부서지고 사람도 다쳤지만 교회는 그것을 잘 감당했습니다.
국내뿐이 아니라 국외로도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서 승리의 소식을 안고 온 고등부 팀들도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몽골로 나아가서 올해도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수고한 모든 분들께 우리는 환호의 격려를 해야 합니다. 키르키즈 정밀 정탐 팀의 사역도 칭송받을 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여름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사되어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결단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까?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열방 가운데 계심을 알기에 그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기를 우리를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이름이,”# 더 높아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린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드린 기도에 걸맞은 헌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 드리기에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 어떻게 헌신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도 다가올 승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면서 그 날들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미 주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5절과 7절은 이 싸움의 면모를 보다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방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이 싸움은 왕이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싸움이요 그의 최후 승리를 재촉하는 싸움입니다. 마냥 기다리고 앉아계신 분이 아니라 한 날 오셔서 그 백성을 위해서 모든 싸움을 끝내실 분입니다. 다시 오실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셔서 끝까지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무찌를 것입니다.
단번에 그들을 정복할 것입니다.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리듯이 하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열방이 주님의 능력을 목도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권세가 주께 굴복할 것입니다. 지금껏 그 발아래 엎드리지 않던 모든 세력이 마지못해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하기를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40일 후에 멸망할 성을 바라보고 초막을 짓고 앉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들, 이러다가 망하지”,라고 읊조리며 망할 그 때만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나가지 못하면 후원해야 합니다. 아니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닙니다. 선교지는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이 선교지입니다. 거기서 왕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거기서 영원한 제사장 그 분의 사죄의 은총을 소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삼지 않는 열방은 그 때에 망할 것입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 노하시는 날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조차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다리에는 쓰인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시록은 이같이 주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나 우리 주께서는 왕으로서 군림할 것입니다. 열방 중에서 그 날은 심판하실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의 진노의 날 열방을 쳐서 파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그 날은 기진하도록 힘을 다하여서 싸우는 날입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읽어보면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치열한 전투의 선봉 장되신 그리스도께서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라는 구절은 여러 갈래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해석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번역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종잡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어렵게 풀기 시작하면 성경은 항상 미궁입니다.
그러나 저 군인들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훈련을 심하게 받는 날은 수돗물만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수기 물 아니면 안마시지만 수돗물이라고 마다 하겠습니까? 지쳐서 피곤한 군인들에게서는 길 가의 물도 마다않고 마십니다.
치열한 고대의 전투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피곤한 싸움에 지친 병사들에는 그 길 가의 시냇물조차도 피로회복의 전기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왕 우리 사령관이 그 머리를 드십니다. 이제 승리하시고 승리자로서 나타나십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싸움은 이제 마감되고 승리자로서 머리를 드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전에는 그가 슬픔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머리를 숙이셨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를 드신 승리의 왕이십니다. 기쁨의 왕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머리를 드십시오. 여러분의 구속의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최후 승리하실 왕, 영원불변하실 제사장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우리 역시 왕이요 제사장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지금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왕이라고 고백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주간의 삶을 살면서 그 분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왕으로, 통치자로서 그 분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한 주간의 삶, 168시간을 그 분을 위해서 드려야만 합니다. 큐티 하는 30분이 아니라 24시간 하루가 그 분께 속한 시간들입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위대하신 분으로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지금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로서 이미 통치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상은 그 분을 아직 보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지 아니했지만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 분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분을 가리켜서 주요 왕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삶이 왕을 왕으로서 대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삶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의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그 분의 조롱당하는 것을 여러분은 왜 보고만 있어야만 합니까? 그 분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것을 여러분은 왜 바라보고만 있어야만 합니까? 왜 손을 맺고 있어야만 합니까? 주께서 통치하신다고 찬송하는 주의 백성들이 그 이름에 걸맞은, 그 분께 어울리는 헌신을 드립시다. 왕 되신 그 분께 여러분이 삶 전부를 드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일주일의 삶을 지켜보면 직원으로 채용될 자신을 가진 삶을 살아가십시오. 왕 되신 그 분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통치의 권위 아래 굴복하십시오. 교회는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 허리끈을 졸라매고서라도 주 섬기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벌 것인지도 생각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이 주신 것을 믿는다면 주님을 위해 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여러분이 존경하는 분을 위해서 선물 하나를 살 때도 얼마를 씁니까?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드리는 헌금은 주의 이름에 걸 맞는 예물이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제대로 헌신할 때 세상을 변할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통치를 시작하셨도다”#라고 하늘의 찬양은 들려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싸움을 끝내시고 심판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곧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시고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누가 최후 승리자에게 속해 있는지 밝히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편 1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이십니다.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시간과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에게 주어진 물질로 헌신해야 할 주인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6월 들어 오늘까지 석 달 열흘 가까운 많은 날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미 물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국내외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가지 못하면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기도로 격려로 물질로 후원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하긴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닙니다. 선교지는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라는 것 꼭 잊지 마십시오. 현대인의 마지막 선교지는 직장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거기서 왕 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거기서 영원한 제사장 그 분의 사죄의 은총을 소개해 주십시오.
시편 110편 4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또한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을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 예수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완수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을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왕 되신 주님은 바로 죄를 정결케 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입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사죄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용서받은 백성의 헌신은 사죄 받은 은혜에 어울려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원한 제사장, 영원한 왕께 헌신하는 백성이 되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분께 합당한 헌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지금은 여러분이 헌신할 때입니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시작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것은 그 싸움의 일부입니다. 국내외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분은 잘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주어진 싸움을 싸웁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미 주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돌리고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의 삶이되길 바랍니다. 아멘.
본문 : 시편 110:1~7 제목 : 주의 백성의 헌신(2)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한가위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그리고 매서운 태풍 매미도 잘 통과했습니까?
40여년 만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말미암아 23년만의 최대 흉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해보면 이 태풍 뒤에도 감사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미시적으로 본다면 태풍 같은건 정말 우리의 삶에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태풍 역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자연 섭리의 일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거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제목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태풍이 지나간 푸른 하늘 조차도 우리에게는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살피던 말씀을 계속해서 살피겠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주의 백성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헌신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폈습니다. 누구에게 헌신하는가를 알때에 우리는 새롭게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 추석명절 지나면서 여러분 누구에겐가 감사의 선물을 보내보신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결정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누구신지 바로 안다면 우리는 새롭게 그 분을 향한 헌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을 왕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우리가 섬기는 왕은 보통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왕이십니다. 그가 최후 승리를 거둘 때 까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능력과 주권과 위엄의 자리에 앉으신 왕이십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그 영광과 능력의 자리에 앉으신 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이 가진 것을 드려 그 분께 헌신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여름, 많은 분들이 국내외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므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더위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도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기도로, 격려로, 물질로 헌신했습니다.
또한 나아간 곳만이 선교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선교지입니다. 현대인의 마지막 선교지는 자기 직장이고 자기 동네입니다. 거기서 왕 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분은 왕이신 동시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시편 110편 4절은 소개합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헌신해야 할 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영원한 제사장 예수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전능자의 우편에 앉으신 왕 주님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신 제사장이십니다.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기 백성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영원한 제사장, 왕 되신 분께 헌신하는 백성이 드리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왕을,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왕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그 분께 헌신하는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주일 지나갔고 명절도 지나고 태풍도 불었으니까 뭐가 기억에 남아있겠습니까마는 지난주일 여러분이 두 번째로 살폈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왕을 위해서 그 제사장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할 때를 살폈습니다.
#우리가 헌신해야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바로 오늘이요 지금입니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천년 전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것은 그 싸움의 일부를 감당한 것입니다. 국내외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분은 잘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싸우는 자들입니다. 다가올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주어진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가 우리 주님께 모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후 승리는 주님께 속한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영예를 돌리고 충성을 다하는 복된 대열에 들어서신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필 주제는 “주의 백성의 헌신,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주의 백성으로 우리는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한 구절씩 살펴봅시다. #“주의 권능의 날에”#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주께서 그 권능을 교회를 통해서 만방에 드러내는 날입니다. 주의 권능의 홀을 보내셔서 원수 가운데서 다스리는 때입니다. 우리의 왕,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그의 군사이기에 우리 주의 기치가 휘날리는 그곳에 함께 모여야 합니다. 주께서 권능의 홀을 보내셨기에 열방 중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소식을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주보에 실리는 승전보를 여러분은 읽고 계십니까? 열방과 족속, 나라와 방언 가운데서 선교사들이 보내오는 승리의 소식을 감동적으로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왕이시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애정을 가진 백성들은 주보에 실리는 이야기들을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보에 어떤 이야기들이 실리고 있는지를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 일에 마음을 함께 합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요청을 지금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이 대한민국만큼 글 읽는 비율이 높은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미국사람들도 우리보다 글 못 읽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우리글은 정말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서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먹으면 일주일이면 다 배울 수 있어요. 숟가락 젓가락 구별해 쓸 줄 아는 사람 같으면 일주일이면 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경로대학 오셔서 한글학교 한번 배워보십시오. 그러면 더듬거리지만 한글 다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주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왕의 승리를 위한 것일진대 우리는 헌신하는 자세를 날마다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백성 된 우리는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본문 3절이 보여주는 헌신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은 그들을 일컬어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벽이슬을 관찰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아름다움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선함의 상징인 이슬을 하다못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라도 보신 적이 없습니까?
주의 거룩한 백성들은 새벽이슬처럼 새 날의 활력이 넘치는 백성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일을 즐겁게 자원하는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못해서 눈치를 봐서 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구속해주시고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왕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이 여기 모여 앉았습니다. 새벽이슬의 신선함이 여러분의 헌신에는 언제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열두시 시간 맞추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새벽이슬의 신선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황금분활이라고 했던 열시 예배와 열두시 예배에서 열두시 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열시에 나올 수 있는 분들 열시에 나오셔서 예배드리면 좀 덜 복잡할 것입니다. 몇 시에 나오든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 감동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시들어진 꽃송이 전달 받으면 기쁘겠습니까? 장미꽃 한다발 선물로 받을 때에 시들어진 것 받고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들어빠진 후에 탄식을 주님은 듣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생기 넘치는 헌신을 받으시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은 새벽이슬같이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지난 여름 지나면서 우리는 많은 분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지 못한 것을 마지막 병상에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직 생명의 원기가 여러분에게 있을 때에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주께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여러분의 손에 가진 것 있을 때에, 통장에 잔고가 남아있을 그 때에 주를 위해서 충성하십시오. 재산 다 날리고 나서 ‘그 때 주를 위해 쓸 걸’ 하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 때 교회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걸,’ 어리석은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말 때문에 혹시 연세 드신분들 “우리는 이제 한물지나갔다”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많아져도 얼마든지 젊음의 생기를 가지고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교회 성도들은 그 말 믿지 못해도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은 그 말 믿을 수 있습니다. 최복만 장로님, 우성욱 장로님, 얼마나 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까?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의 명단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들어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람에 이름이 빠지는 일이 가끔은 있습니다. 잘 하려고 하는데도 실수가 납니다. 또 어떤 때는 교회의 법칙에 따라서 70이 넘으면 서리집사에서 명단도 빠지고 사진도 빠집니다. 그러면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지 몰라요.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요람에 사진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주보에 이름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나아오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더 문자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세마포 흰 옷을 입고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모습을 여러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싸움은 주께서 싸우시는 싸움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주께 나와 섬기는 자들하고 여러분을 비교해 부십시오. 거룩함은 주의 백성의 표시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의 힘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지 않을 때 무력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이 싸움은 주께서 대신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옷에 피뭍힐 일은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니까 주께서 이미 그 싸움을 싸우셨다고, 선혈이 낭자한 옷을 입고 포도주 틀을 짓밟고 계시는 분으로서 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의 싸움을 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기입니다.
거룩함의 소원이 있으면 주님 앞에 나오고 싶습니다. 주일이 기다려 집니다. 성도들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사역자들을 보면 기쁩니다. 그런데 거룩함을 상실하면, 죄악에 뒹굴다 보면 주일 오는 것 부담스럽습니다. “또 주일 오네.”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 와서 성도들 봐도 눈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쳐다보면 마치 내 죄를 다 보는 것처럼 겁이 납니다.
거룩한 옷 - 주님 주시는 의를 사모하고 주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왕 그 분께서 새로운 힘을 날마다 공급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주를 위해서 충성하기로 작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주님은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으로, 아름다움과 순결함으로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과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을 합하십시오.
최선의 헌신을 하는 주의 백성들을 보면 보는것만 해도 힘이 납니다. 그러기에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놀라운 영향력을 세상 속에 미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울산교회보다 큰 교회,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한 오륙년 되었나요? 서울의 온누리 교회에 올라간 적 있었지요? 집사님 한분이 그러셨어요 “우리 울산교회 보다 큰 교회 있는 것 처음 알았다”고 그러더군요. 미리 알아놓으십시오 많이 있습니다. 울산교회보다 큰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교회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여느 찬송 소리와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헌신하려고 하는 자세가 남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을 믿습니다. 저는 결코 서울에서 일할 데 없어서 울산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경상도 사람들 사귀는데 세월 걸리지만 마음 합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8학군 출신들이 대학 1,2학년 까지 잘 나간다고, 그런데 3,4학년 접어들면서 부터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 더 한몫 한다고 그러더군요. 합천산골짝, 거제도 이런데서 인물 안 납디까? 우리 울산 사람들 마음먹으면 천하를 바꾸는 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말 왕께 드리는 헌신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 영화에서 멋지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는 사람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세상에 사라져버릴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드는 영광스러운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영원한 왕, 승리하실 그분을 위해서 드리십시오. 그 분이 우리에게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고 마지막 피를 쏟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주 위해 충성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남은 만 명의 군사들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300명을 추리셔서 기드온과 함께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 분께 가까이 가기를 소원하십시오. 한 사람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함께 주를 섬길 때, 거기에는 놀라운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혼자 찬송 하는 것 보다,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같이 하면 더 힘을 얻습니다.
백 사람의 헌신은 열 사람의 헌신의 열 배가 아니라 백배가 될 수 있습니다. 주를 섬기기로 작정하고 나아가면 우리 울산교회는 울산광역시 전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의 소식은 한국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신선함을 여러분의 주께서 여러분의 삶에 원하고 계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여러분으로부터 기대하고 계시는 왕이 계십니다. 새벽이슬 같은 순결함을 여러분의 삶에서부터 주님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활기를 가진 자만이 주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무력한 젊은이들보다는 생기 넘치는 노년의 삶을 더 아름답게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성 노회, 사랑 선교회는 결코 일이 이제 다 끝난 모임이 아닙니다. “나는 올해는 안 올라 갈 거다” 안 올라 가려고 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여러분의 헌신을 통해서도 앞으로 주의 교회를 위해서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울산교회는 성노회 연령에 속하는 두 분 장로님처럼 앞장서서 주의 일에 헌신하는 분들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 몇 년하고 돌아와서 종적을 감췄지만 아직도 일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듣고 있습니다.
노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아니한 소원들을 가지고 기도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성노회, 1,2 사랑 선교회는 1,2 청년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무력한 젊은이들보다는 생기 넘치는 헌신하기로 작정한 노년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추석에 자녀들이 가져오는 선물꾸러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저 녀석들 마음속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노년들이 많아질 때에 우리 울산교회는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매월 붙여주는 용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젊었을 때 가졌던 그 신앙의 정열이 내 자녀들에게 있는지를 살필 때에 교회는 날로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성노회, 1,2사랑선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젊은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르신 여러분, 노년이라고 이제 힘이 없다고 결코 말씀하지 마십시오. 기력이 여전치 못하지만 아직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평생 이룬 것 보다 더 큰 일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영원히 살아계시기에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왕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승리자로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에 따라서 합당한 삶을 살아보십시오.
새벽이슬은 날마다 내려서 초목을 새롭게 합니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백성들의 헌신도 날마다 요구됩니다. 주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영원히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전5555 1년 4개월 앞두고 있습니다. 1년4개월 앞둔 채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초가을 시원한 날씨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헌신의 소원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물론 저는 비전5555를 스스로 세운건 아닙니다. 외압에 의해서 타의반 자의반 이렇게 기도하며 오천명의 예배자, 오백명의 헌신자, 오십명의 장단기 선교사, 국내외 장학생, 다섯곳의 개척교회 후원과 설립을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1년여 앞두고 한번 보십시오. 물론 아직도 오천명 예배자, 별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통계가 보여주는바에 의하면 오천명 등록자를 울산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백명 헌신자, 각 영역에서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십명 국내외 선교사들 벌써 87명, 50년 되면 100명은 채울것입니다. 국내외 장학생 오십명, 아주 미진한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 곳 개척교회, 일산 벧엘교회, 대구불꽃교회, 제2울산교회, 제3울산교회, 그리고 이제 10월 달에는 시간만 나면 일본 가서 다섯 번째 교회 개척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달 말에 선교사님 이사하고 우리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복만 장로님은 혼자 나가셔서 벌써 일곱 곳 교회 개척을 했고 그중에 여섯 곳은 예배드릴 건물까지 갖추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후원 했던 것, 하나도 개인용도로 쓰지 않고 다 모아서 여섯 곳 예배처소를 만드는 일에 드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가 간구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넘치게 해 주시는 분들이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배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위해서 즐거이 헌신하려고 하면 덥던지 춥던지 날씨 상관 하겠습니까? 주의 날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 시간입니까? 드리십시오. 재능입니까? 드리십시오. 물질입니까? 드리십시오. 그 승리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 영광에 동참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있습니다. 최후 승리의 싸움을 위해서 주의 권능을 힘입고 싸워야 할 오늘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그날의 승리가 오늘 헌신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여러분의 왕, 영원한 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고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고백에 어울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주간의 삶 168시간 순간순간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 드려지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왕, 여러분의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통해서 영원한 제사장 사역이 이 땅에 편만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사죄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용서의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백반 울산 시민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새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을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부 2부 예배시간 보니까 틀림없이 지난주간은 명절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다가 태풍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태풍에 다 날아갔는지 새로 나온 사람 한사람도 없었어요. 보통 때는 여름 지나면서 한번도 그런 일 없었는데. 이제 태풍도 다 불었고 하니까 다시금 원대복귀 합시다.
사람들은 죄 용서 받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데 애꿎은 조상 탓만 하고 있습니다. 조상 앞에 술잔만 따라드리면 복 받을 걸로 생각합니다. 부모 그렇게 돌아가게 한 것은 누구 잘못인데 돌아가시고 난 뒤에 술잔만 따르면 복 받을 걸로 생각하는 그 얌체들, 살아계신 부모를 잘 섬겨야 됩니다. 복 받으려면.... 꼭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한다니까요. 성경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그랬는데 살았을 때는 공경하지 않고 백화소주 갖다가 따라드린다고 잘 될 걸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열에 여러분이 함께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무디어진 주를 향한 사랑들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더운 여름 지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지쳐있는 모습을 가지고 때로는 서로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가을바람 불어오는데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주께 드리기로 각오하십시오.
우리 왕,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을 위해서 우리의 삶 마지막 순간까지 쏟아 붓기를 소원합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드리고 주를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를 소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악하여지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창녀와 같이 되어지는 이 세대 가운데서 주의 마음에 합한 신앙공동체를 이 땅에 많이 회복하여 주기를 간구합시다. 마을마다, 세워진 교회마다, 주를 위해서 지사충성하는 군사들이 모여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여서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여서 자기주장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 꿈꾸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드릴 것이 없을 때는 눈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피 까지도 쏟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돌아봅시다. 막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셨습니까? 이제는 구체적인 헌신을 계획하십시오. 사람들의 평균 수명 이라는 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남자 72세, 여자 79세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나이를 빼면 지금 몇 년 남았는지 계산할 줄 알아야 안 됩니까? 물론 그보다 빨리 갈수도 있고 좀더 하나님이 남기실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정도 계산은 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몇 년 남았는지 봐 가면서 살아야지 언제까지나 손자들, 손녀들 매달려 가지고 그렇게 세월 보내면 안 됩니다.
나는 손자들에게 매여 있는 우리 권사님들 볼 때에 안타까운 생각은 들지만 마음으로 크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너희 아이 너희 키워라” 이말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그럴 겁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이 세 명은 낳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사들 닮아서 그렇죠? 여차하면 다섯 명도 낳으라고 권합니다. 말 듣는 사람이 아직은 없지만 말이지요. 그러나 자기 아이는 자기가 키워야 됩니다. 연세가 들어가면 이제 곧 신랑 만날 건데 신부 화장 해야지 언제 손자 손녀들 기저귀만 갈아 채운다고 그러고 있어서 어쩔 겁니까? “너 뭐하다 왔니?” “난 손자 키우다가 왔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주님 일은 맞습니다. 그러나 좀 더 큰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로 그것이 주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지 한번 양심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남의 양심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젊음의 아름다움은 쉬이 사라집니다. 구체적인 헌신계획 한번 잡아 보십시오. 나의 남은 햇수 몇 년인데 그 날 어떻게 주를 위해 쓸 것인지 계산한번 해보십시오.
우리의 날들은 쉬이 지나갑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주님 아는 영광의 광채가 빛나야 합니다. 그때 화장품 가지고 얼굴 다듬을 거라고 매달리지 말고 하긴 하겠지만 옛날처럼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거든요. 이제는 신앙의 아름다움이 얼굴에서 빛나야 할 때 아니겠습니까? 할일 많은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뭐하다가 왔니?”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돌아오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예배한 모든 주의 백성의 마음 속에 주를 위한 다짐이 새로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는 새롭게 충성하고자 하는 소원이 가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꿈이 현신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손댄 일들, 이루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치열한 마지막 싸움을 싸우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방에서 도움의 요청을 듣고 있습니다. 내미는 손을 보고 있습니다. 그 내미는 손을 붙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도움을 응해야만 합니다.
어떤 요청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한 공동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헌신을 오늘 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새벽별과 같이 빛나는 내일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한 주간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멋있게 주를 위해서 남은 생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헌신과 축복 (마 19:23-30) : 윤성진 목사
1.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말씀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하는 것은 부모 자신을 위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이 자녀들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따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들에게 이런 명령, 저런 명령을 하시는데, 하나님 자신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들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너의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명령과 계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도 아브라함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주신 명령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천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 불고기를 좋아해서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복주며 아브라함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그처럼 혹독한 명령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집이 없어서, 집에서 사시기 위해서 <내 집 지어내어라>고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주신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하신 때도 있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다시 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먹기 위해서 우리에게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창고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물질을 황충이 먹어치우지 않게 하시려고, 하늘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하시는 명령들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요, 관원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고 하면 베드로보다도 더 위대하게 사용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행복을 위하여, 청년을 축복하시기 위하여서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띄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든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주시는 명령인 줄 믿고 순종하여서, 순종했던 자들이 받았던 그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의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가족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될 것인가? 그래서 “주님,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이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아멘.
얼마나 대단한 약속입니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세상으로는 마지막 날입니다. 모든 인류는 심판받는 날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치는 날이 있듯이,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경기하는 날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은 그때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때에 우리들도 예수님 주변의 보좌에 앉아서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최고의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영생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누리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영생을 얻게 되는 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물질과의 올바른 관계,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때에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도 더 넘치도록 하나님께서는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날이 바로 영생얻는 날입니다.
옛날에 임금의 자리를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금에게 집이 없겠습니까? 물질이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아내가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모든 행복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영생을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축복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는 이 세상의 물질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고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최고의 축복인 영생을 얻었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눈을 감아도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포기할지라도 영생만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소유하고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드린 자에게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자에게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이 땅에서도 받는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29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드린 자마다> 얼마나 받아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배만 해도 대단한데,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그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면 <백 배나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자에게 백 배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그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투자해서 백 배나 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나 받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백 배(百倍)라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다 뜻할 때 백이라는 말들을 씁니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자 그대로 백가지의 행동이지마는 모든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많이 받는다, 넘치도록 받는다, 남김없이 받는다, 모두를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 배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 잘 믿어서 받는 복이 백 배만 되겠습니까?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고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셨던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가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새롭게 신축할 때에 그의 전 재산이었던 논 세마지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업이 없으니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교회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유학을 갔습니다.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어졌고,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지냈고, 현대 한국의 지성인 중의 가장 선구자가 되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고백했습니다. 논 팔아 밭 팔아 공부시켜 놓으면 일본관리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대에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것 드렸더니 천 배로 만 배로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집이나 전토와 같은 물질은 백 배나 받습니다. 그런데 뭐까지 백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백 배나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백 배나 받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한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시대인데, 부모가 백 명쯤 되어보세요. 어떻게 그 부모를 다 모시겠습니까?
요즘 자식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외국에 가서 공부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자녀를 외국에 보내고, 그 자식이 또 걱정되어서 어머니가 따라가서 자식을 또 뒷바라지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곳에서 돈 벌어가지고 보냅니다. 그래서 부부가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 말이 생겨졌습니다.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자식을 여럿 낳지 못하고 하나만 낳아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녀를 백 명이나 한번 낳아보세요. 백 명이나 한번 얻어 보세요. 그러면 그게 복이 되겠습니까?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도 백 명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내를 백 명이나 얻고 남편을 한 백 명이나 얻어서 백 명의 아내, 백 명 남편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백 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이나 자식을 백배로 주신다는 것은 백 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 형제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형제보다도 더 귀한 형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부모보다도 더 귀한 부모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백 명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백 명의 자식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백 명의 아내보다도 더 귀한 아내, 백 명의 남편보다도 더 귀한 남편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룻기서 4장 15절에 보면 룻이 결혼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귀한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귀한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니, 열 아들보다 귀한 자식이니” 하는 말들을 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물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에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릴 수 있는 재능을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합니까? 물질적으로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백 배나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 배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준다는 것입니다. 백 명보다도 더 나은 형제를 주실 것이고, 백 명보다도 더 나은 부모를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자식보다 더 나은 자식을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아내와 남편보다도 더 나은 부부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것 주님 앞에 드려서 아름다운 가족을 백배나 얻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가 이런 뜻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서 백 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도 되어집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아들이 없었습니까? 디모데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었습니다. 누가가 의사인 자기의 직업을 다 팽개치고 옥중에 와서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그의 건강을 돌보았고,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삶을 다 책임져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정말 좋은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었습니다. 눈까지 빼어주겠다고 효도하는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같이 옥에 갇히면서 효도할 자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을 때, 그에게는 성도들이 다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좋은 아들이었고, 좋은 부모였고, 좋은 형제자매가 되어서 이 땅에 살 때 그는 외롭지를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살아본들 70년이요, 80년입니다. 백 배를 받아보고 성공을 한들 잠깐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어려워도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백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최고의 은혜와 축복인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백 배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 어떻게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집이나 전토,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식, 부부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위하여서 교회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 내 직장, 내 집, 내 평안을 위해서 교회 나왔고, 이것을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포기하며 어떻게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게 될 때, 느끼게 될 때, 깨닫게 될 때에, 경험하게 될 때, 어떤 명령이든지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였습니다. 경건치 않은 우리였습니다. 연약한 우리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서, 은혜주시기 위해서, 복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내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생명버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셨고, 영생의 축복을 주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경험하게 되면 내게 있는 생명까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무엇을 내어 놓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도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이 큰 은혜를 늘 체험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물질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시간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재능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것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제게 주신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제게 주신 이 재능과 힘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자는, 청지기 의식을 가진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고 백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주님께 드린 자에게 주시는 복
전주 삼래읍에 박집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섬기고 있는데,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지어야 할 때가 되어졌습니다.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서 이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이야기이고 또 촌이었기 때문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집을 짓다가 그만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어졌습니다. 우기는 오는데 벽은 세워졌으나 지붕이 이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박집사님이 부인하고 의논합니다. 우리 대대로 물려오는 땅,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우리가 노력해서 다시 살 수가 있지만, 교회를 이렇게 두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니까, 우리 논을 팔아서 교회 공사를 완공하자고 두 분이 의논하여서 논을 팔아서 그 돈으로 교회를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붕을 덮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50대 연령인 사람은 잘 알고있는, 사라(Sarah)호라는 큰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는 수군수군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가봐. 우리 집도 안 날아갔는데, 왜 교회지붕이 날아가지?”. 그러니까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믿음이 약한 교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박집사님은 새벽마다 하늘이 뻥 뚫린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지붕이 어떻게 이렇게 날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줍니다. “박집사야” “예” “네게 눈이 있지 않느냐?” “예. 제게 눈이 있습니다. 눈가지고 어떻게 하라고요?” <눈이 있지 않느냐?>는 음성이 똑똑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집을 짓고 도배를 하면 얼마나 좋은 도배지를 가지고 도배를 합니까?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신문지를 가지고 도배를 할 때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신문지로 도배를 하는데, 시신경이 망가지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사가지고 이식하면 눈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눈을 사고도 다시 팔수도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 그의 머리를 팍 지나가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이 “박집사야, 네 눈이 있지 않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생각나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그 말씀은 바로 내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하고 예수전주병원에 달려갔습니다. “이 병원에 눈을 삽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 눈을 산다고.” “지금 살 수 있습니까?” “지금은 살 수 없는데, 서류를 작성해서 주고 가면 눈 살 사람이 있을 때 연락할테니까 그때 가서 눈을 팔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소를 주고 서류를 갖추어서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느 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큰 음성을 들려 주셨는데,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내가 알고 눈 팔아서 내가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고 하니까 부인이 펄쩍 뜁니다. 어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냐고, 당신없는 교회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느냐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이니까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다시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음성은 더 똑똑하게 들려옵니다. 부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니까 내가 그 음성에 순종해야 되겠노라고 하도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신 눈 하나 뽑고, 내 눈 하나 뽑아서 팔자고 합니다. 그것도 또 괜찮은 제안입니다.
그래서 또 기도해보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박집사야,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셨지, “박집사야, 네 한쪽 눈, 네 아내 한쪽 눈”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고 또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동의를 하고 서류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동네 사람의 동의서를 또 하나 받아가지고 서류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전주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박집사는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가운을 입었습니다. 눈을 빼는 수술을 준비를 했습니다. 박집사님이 수술가운을 입은 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 때 묻은 찬송을 펴서 ‘내 눈으로 나의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찬송을 해야 되겠다’ 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합니다. 수술하려던 의사가 보니까, 이 사람이 이상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주예수병원은 다 예수 믿는 의사들입니다. 그 의사도 장로님이었습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찬송가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 알고, 당신이 왜 눈을 뽑는지 그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고는 내가 눈을 수술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박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디어디에 사는 집사입니다. 교회를 지었습니다.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논 팔아서 지붕을 이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지붕이 날라 갔습니다. 어느 날 “네 눈 있지 않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 눈 빼어서 하나님의 집 지으라고 하는 줄 알고 눈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내가 이렇게 수술합니다. 그 의사 장로님이 수술하려고 하던 기구를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박집사라는 이 사람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눈 빼어서 교회 지으려고 하는데, 이 놈은 장로라고 하면서 박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가진 집도 돈도 많은데 그 은혜 보답하지 못한 이 놈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통곡을 합니다. 옆에 있던 보조의사가 웁니다. 간호사가 같이 따라서 웁니다. 그 소리가 원장에게 들어갔습니다. 온 병원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모두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웁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울지 말고 박집사님을 위해서 헌금하십시다.” 하고 헌금하니까 바로 그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헌금이 나왔던지, 당시에 교회를 잘 지을 수 있는 돈과 논을 스무마지기 살 수 있는 돈이 나왔습니다. 그 돈을 주면서 “당신의 눈을 우리가 뽑을 수 없습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아름다운 교회짓고 또한 논밭을 사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십시오,” 하면서 집사님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까지 바쳤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받지 아니하시고 수양을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며 복주고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고, 그 축복을 아브라함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에게 드렸더니 오천 명이 먹고 남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까지라도 빼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눈 받지 아니하고 더 좋은 것으로 백 배나 그에게 갚아 주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아내, 나를 위해서는 우리가 아낌없이 쓰면서, 내 몸과 내 건강과 내 생명, 내 물질, 그것을 꼭 쥐고 있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 놓으면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때에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드리면, 버리면, 사용하면 이 세상에서 백 배나 갚아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증거는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 영생을 축복으로 주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읽을 때에 부자 청년처럼 돌아서는 우리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을 섬겨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우리의 몸을 주님 앞에 드려서 이 땅에서 백 배나 받을 뿐만 아니라,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자식,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아내와 남편, 백 명보다도 더 귀한 부모, 백 명보다도 더 귀한 형제를 얻어서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영생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직 예배 설교] 예수님의 마음 (빌 2:5)
이 시간에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제목입니다. 말씀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다 들으시고 답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것입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답이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정답이죠?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있을지라도 우리 하나님 마음처럼 넓고 크고 아름답고 뜨겁고 위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갔더니 들어가 보아라 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심장이 있는데 그 심장 여기저기가 크게 뻥뻥 뚫려 있고 그렇게 갈래갈래 찢어져 있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 심장이 누구의 심장이었겠습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만 가지고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만 가진다면 어떻게 반목과 질시가 있을 수 있고, 이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불충성과 악함이 있고, 이 마음만 가지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송 받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엇이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 임직 받으시는 분들이나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 예수님의 마음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될까요?
저는 몇 년 전에 치유상담을 전공하신 분의 강의를 들어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분은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머리를 가리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뇌를 치료하면 마음도 치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으나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뇌가 건강해도 마음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혹은 뇌는 건강해도 신체의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여러 가지 심리적인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뇌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봐도 뇌를 치료하여 훌륭한 사람 되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뇌를 치료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교회는 필요 없고 병원만 세우면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갈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방법은 성령 충만 받는 거예요.
길지는 않지만 목회일생 속에서 문제 가진 교인들을 보면서 때로는 맘 상할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 볼 때 그 영혼이 은혜 받지 못해서 그랬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더 마음이 더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하기 전에 먼저 은혜부터 받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고전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했습니다. 벧전2:21에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야곱이가 양치면서 우물가에 나무들을 알록달록하게 벗겨놓고 그것을 보고 알록달록한 새끼를 배도록 한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사람을 보더라도 좋은 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본받는다 해서 잘한다 했더니 보니까 좋은 점은 놔두고 나쁜 점만 본받더라고요.
또 어느 사람은 어떤 모임이 갖다 오더니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회의를 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왜 그런지 살펴보니 거기서 나쁜 점을 배워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가지마!”, 그랬습니다. 모임들이 많지만 비방을 일삼고 파워게임만 하려는 그런 곳은 피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지 누구를 본받는 것입니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기껏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이 시는 충신 정몽주의 어머니가 이성계 부자의 더러운 권력다툼에 끼지 말라는 애끓는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 시를 읊으신다면 무엇이라 하실까요? 우리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의 심장을 가졌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 잘 믿고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충성하고 섬기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면서 자기 직분에 충성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송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애기가 태어났어도 어머니의 젖과 돌봄이 없으면,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이 교회의 품을 떠나서 결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고 문제 해결을 받은 사람이 그 얼마인지 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곳을 의미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어린아이가 와서 안기고 마음껏 젖을 빨아먹을 수 있는 엄마의 가슴과 같은 곳입니다. 시댁에서 시달리는 딸이 친정에 와서 마음껏 울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한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엄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것이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많은 여자보다 엄마가 더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여자가 많으면 말이 많습니다. 이 말 저 말, 온갖 말들이 무성합니다. 쓸모 있고 영양가 있는 말보다, 남을 비난하고, 비하하고, 험담이 많습니다. 자기자랑과 교만 섞인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로 인하여 상처를 입히고, 새 가족들이나, 이미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치료받으러 교회 왔다가, 더 큰 상처를 입고 돌아갑니다. 교회 안에 아내가 많으면 잔소리가 많아집니다. 바가지 긁는 소리,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시어머니가 많으면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밥이 왜 꼬들하냐? 밥이 왜 왜 죽 같으냐? 낮에 집에 안 있고 어니 싸돌아 다니냐? 등등 잔소리로 시작하여 잔소리로 마치면, 집안에 평안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안에 시어머니와 같이 잔소리하는 자가 많으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엄마가 많으면 따뜻하고 포근해 집니다. 엄마가 많은 친정 같은 교회! 시댁에서 시달리다가 친정에 오면 마음이 편한 것처럼, 누구든지 세파에 시달리다가 교회 오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저는 오늘 헌신 예배드리는 제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서 엄마의 역할을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모 교회는 전도지에는 "친정 같은 교회"라고 써놓고, 교회 안에 친정엄마는 없고 온통 여자들만, 아내들만, 시어머니들만 잔뜩 있어 오만상 시끄럽습니다. 엄마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한국 아줌마는 사람들과 종이 다르다고 합니다만, 엄마는 그야말로 종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느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비탄에 잠겼습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발 아들을 단 5분만 만나보게 해주세요. 단 5분만...."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말했습니다. "아들을 5분 동안 만나게 해주겠다. 그러면 아들의 언제 모습을 보고 싶으냐. 어머니의 품에서 재롱을 피우던 모습인가?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인가? 아니면 학교에서 상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인가?" 어머니는 한참 생각한 뒤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제게 용서를 빌던 모습니다. 아들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제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엄마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주면서도 더 못해준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어머니는 지우개가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지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엄마가 많으면 얼마나 따듯하겠습니까? 얼마나 푸근하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이 크겠습니까? 그야말로 만민이 와서 기도하고 싶은 곳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얘기를 기록해 놓은 열왕기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어떤 왕을 소개하면서 꼭 빠지지 않고 기록한 것은 그 왕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22:1-2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고, 23:31-32에는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을 올리고, 그 왕의 행적이 선하였는지, 악하였는지를 기록함은 그 어머니의 역할에 따라 왕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만큼 자식에게 미쳐지는 영향이 어머니의 역할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어떤 어머니가 있느냐?에 따라 교회분위기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머니보다 엄마가 많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뛰어 달려들어 안길 수 있는 품이 있는 엄마, 먹을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엄마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는 어떤 자들이 득실거렸습니까? 강도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는 엄마 품처럼 해 놓았는데, 그 안에 있는 성전지도자들 즉 제사장들이 엄마의 품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상처 입은 자들을 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이 되어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들었습니다. 의자와 좌판을 들러 엎고 장사꾼들이 내어 쫓았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 교회에 오시면, 어떤 분위기일까요? 어느 교회에 가난한 자매 한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견디다 못해 자기 몸을 팔아 오빠의 병을 회복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교회 교인들이 하도 그 얘기를 수군거려 오빠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충격으로 오빠는 그만 자살해 버렸습니다. 기껏 자기 몸을 팔아서 살려 놓은 오빠가 목숨을 끊어버리자 그 동생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의 장례식 날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너 아무개 목사야! 너는 네게 맡겨진 양떼를 얼마나 돌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양은 한 마리도 없고, 이리떼만 데리고 있다가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엄마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우들이 엄마노릇을 해야 합니다. 엄마 노릇하여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다독이며 젖을 먹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인간적인 시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잔소리 하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잘 하는 사람들을 모함하면 교회는 험악한 곳이 됩니다. 저 옛날 유대에 제사장,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자기보다 못하다 싶으면 무시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고 열심히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시기하며 끄집어 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교회는 역시 엄마가 필요하고, 그 엄마의 역할을 1여전도회 회원은 물론 우리 모든 교우들이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구미지역은 대부분이 객지 생활입니다. 교회에 친정 엄마 같은 성도들이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오게 됩니다. 나가서 전도하지 못해도 엄마노릇만 해도 제 발로 옵니다. 말없이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또 그들을 위해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먹일 수 만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 가져다 먹이는 엄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모범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가 본받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많은 교회 또한 강합니다. 1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교회 안에서 엄마 같은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쉼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강한 교회를 만드는 자가 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설교자 : 강재식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안나의 신앙생활 (눅 2;36-38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시간에 “안나의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할을 잘하려고 하면 훌륭한 사람을 나의 모델의 목표로 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경배의 대상으로 믿을 뿐 아니라 신앙의 모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우리의 신앙의 모본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을 들라면 여선지자 안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럼 안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1.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7절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성전에서 날마다 기도하며 성전 중심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겠습니까? 그래서 안나라는 이름의 뜻은 한나와 같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장소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예배가 드려진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많이 나타난 곳이기 때문에 장소 자체에도 영적 에너지가 충만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현장에만 와도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은혜 받거나 기도하기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교회는 양 우리와 같아서 우리 떠난 양은 이리에게 잡아먹힙니다. 세상과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혹은 교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아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공급 받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엘림 오아시스에 있었던 것처럼 사막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온갖 도우심이 하나님이 세운 종들과 성도들을 통해서 공급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실시하는 모든 공적예배에는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교회에서 잘 배워서 하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가며 해야 합니다. 요즘 사이버 공간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이단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주장을 하면 다 이단의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안나처럼 교회중심의 생활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드리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7절 “주야에 금식하며 섬기더니” 주야에 금식하며 섬겼다는 것은 기도가 보통 기도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금식하는 동기가 여러 가지이지만 금식의 동기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안나의 경우 순탄치 않는 그의 인생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안나의 인생은 그의 출가와 과부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합니다. 출가 후 7년 지나고 과부가 된지 84년이라 했으니 그의 나이 약 120세인데 그 인생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입니까? 젊은 청상과부로 일생을 과부로 보냈으니 말입니다. 당시 과부는 의지할 곳 없는 극빈 계층에 속했습니다. 젊어서는 젊어서 늙어서는 늙어서 고달팠습니다.
그러나 안나는 자기 몸을 죄에게 드리지 않고 그리고 염려와 근심에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날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몸이 보통 물건입니까? 이것은 강력한 영적 투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부를 돌보아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죄에 드리거나 염려와 근심과 고독에 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온전히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성경이 안나를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라 소개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성경의 언급은 단지 족보 추적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 곳에 붙인 이름 브니엘과 같은 이름입니다. 안나를 이 이름으로 소개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간절한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부부가 똑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다르게 갑니다. 남녀의 장수의 차이를 보면 옛날에는 8세 요즘은 6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여성이 더 오래 삽니다. 그래서 혼자가 남습니다. 그러나 남은 인생 재혼할 수도 있지만 바울은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정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나처럼 기도로서 남은여생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5:5-6에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했어요. 우리는 남편이 있든 없든 아내가 있든 없든 예수님께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데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6절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리고 37절에 “섬기더니” 이 말씀으로 보아 죽도록 충성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이 많아 늙었다고 뒤로 빠지거나 못한다고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연세 많다고 못 한다 안 한다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정년이 어디 있으며 봉사의 정년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지만 사람이 잘못해서 더 빨리 늙을 수 있습니다. 풀무원 원장 원경선씨는 191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올해 우리 나이로 95세쯤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연식을 모를 때 환갑이 되도록 혈변을 보는 등 온갖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남양주에 자연농업을 시작하면서 그의 건강은 회복되었고 90세가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가보았지만 지금도 건강하십니다. 그가 국내나 해외에 강의 나가 종일 강의를 하는데 그를 돕는 젊은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모세와 같이 80세가 출발이시기 바랍니다. 갈렙처럼 85세일지라도 마음 조금도 약해지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120세가 되어도 시력도 청력도 기력도 쇠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연세가 드실수록 감사를 더 많이 하세요. 연세가 드실수록 더 봉사하고 더 구제하고 더 선교하세요.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세요. 이제는 천국에다 쌓을 생각을 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되게 됩니다.
4. 예수 만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8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씀입니다. 늘 기도하고 섬기면 지금도 예수를 만납니다. 큰 체험으로 다가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체험하지 못한다면 기도하지 않거나 자기 생각과 주장과 습관을 버리지 않는 등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도 성령께서 기도 줄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세요. 무엇을 구할까 염려하거나 내 기도 제목으로만 채우지 말고 기도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세요. 그러면 신기하게 기도가 실타래가 풀리듯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할수록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방언을 할 때도 방언 따로 내 기도 따로 하면 방언의 신비함과 풍성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해주시는 기도이므로 어떤 것에 생각을 집착하지 말고 기도하다 보면 뭐가 떠오르고 생각나면서 주님이 뜻이 나에게 채워지게 됩니다. 이 훈련이 잘 되면 영적으로 열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안나와 같이 기도 잘해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봉사하다가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흐름 따라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봉사하면 예수를 만납니다. 새 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의 장모 간증이 유명합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봉사했더니 하나님께서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사위를 그렇게 큰 일하도록 밀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봉사하다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5. 예수를 전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38절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예수 만나야 예수를 잘 전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선지자로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만나 전했습니다.
여전도회란 전도하는 회입니다. 교회 살림도 잘해야 하지만 살림만 하라는 회가 아닙니다. 전도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구상하고 힘쓰고 물질 쓸 때 주님이 잘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결실은 하나님이 맺어주시니까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믿고 본받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안나 선지자를 본받으십시다. 우리 모두 안나처럼 교회 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드리며 충성하며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전하는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배로운 고난’이라는 제목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여러 곳에서 고난이 보배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식이 찬란한 구절을 보셨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이라면 그만큼 보배로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씀 드리면
1. 고난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히12:10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고난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간증했습니다.
2. 고난은 더 깊은 영적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롬 5:3-5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 왜 그럴까요? 고난은 우리를 깊은 기도 속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을 주실 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못 맞춥니다. 한나 보세요. 한나가 고통 속에 한이 맺혀 얼마나 깊이 기도합니까? 그래서 얻은 아들이 사사 선지자 제사장 삼권을 다 가진 사무엘입니다. 이처럼 깊은 기도자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은혜입니다.
3. 고난은 놀라운 부흥을 가져다 줍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했습니다(출1:12). 초대교회를 보면 핍박 속에서 더욱 부흥했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고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인들의 신앙의 동기를 조사하면서 발견한 것은 거의 고난 속에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못 고칠 병에 걸렸다든지, 자녀를 잃었다든지, 이런 한 맺힌 과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이처럼 기독교는 주님의 고난 속에서 만들어졌고 또한 고난 속에서 자랍니다.
이 시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고통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평안하다고요? 돌아보세요. 하나님의 마음 아프게 한 것은 없나요? 혹은 내 일생 다가도록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또한 일군으로서 느껴야 할 고통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통을 느꼈으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했겠습니까? 이 고통이 있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부흥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함께 하심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교회를 위해 남기신 고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은 피하지 말고 감사합시다. 느끼십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고 순종합시다.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보배로운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