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제1장 18세기의 프랑스
4. 계몽사상
근세의 기계론적 우주관은 철학 사상에서 경험론과 합리주의를 낳았고, 이 두 철학의 흐름은 하나로 결합하여 이른바 계몽사상을 낳았다. 계몽사상이 앞세우는 유일한 최고의 기준은 이성인데, 이 이성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수학적 이성인 동시에 베이컨(Francis Bacon)의 실증적 이성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의 빛으로 인간 생활과 사회를 조명했는데, 거기에 비친 18세기의 인간 생활과 사회제도는 불합리와 모순에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는 비과학적이고 미신에 사로잡힌 데다, 정치제도와 사회질서는 권위와 전통이라는 불합리하고 몽매한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계몽사상은 이 불합리와 모순에 찬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며, 그 모순을 제거하여 합리적인 사회를 실현하려는 실천철학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전통적인 편견, 관습, 신념, 권위를 그 뿌리부터 흔들어 사람들을 전통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계몽사상가들이 속출했는데, 그들은 특히 1748년 이후 18세기 최대의 저작들을 발표하여 몽테스키외의 <법의정신>, 볼테르(Voltaire)의 <풍속 시론(Histoire de voyages de scarmentado ecrite par lui-meme)>,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디드로(Denis Diderot)와 달랑베르(Jean le Roland A’alembert) 등의 <백과전서(Encyclopedie)> 등이 그것이다.
계몽사상가들 사이에는 한결같이 이성과 진보에 대한 공통된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개혁하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결코 의견이 같지 않았다. 몽테스키외는 귀족 출신으로서 절대 군주정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공화제도 군주제도 타락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락을 어떻게 방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권력을 분산시키고 분산된 권력들이 서로 견제하는 삼권분립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삼부회나 고등법원 같은 중간 집단에 의하여 견제되는 군주제를 구상하였고, 심지어 영주권을 정당화하고 농도 해방에 대한 대가와 귀족의 면세 특권을 긍정하였다. 이처럼 그는 여전히 낡은 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한 귀족주의적 개혁가에 머물러 있었다. 볼테르도 군주제를 비난하지 않았다. 볼테르도 군주제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영국의 군주제와 같은 입헌군주제를 예찬하고, 군주들에게 계몽사상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기대하였다. 그는 200마리의 쥐보다 한 마리의 사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한 마리의 사자는 다름아닌 루이 14세를 가리켰다. 그는 철저한 계몽 전제군주론자로서 이 사회에서 땅도 집도 없는 사람들이 과연 발언권을 가져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무산계급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였다. 그는 특권 신분을 사정없이 끌어내리기는 했으나 일반 민중을 끌어올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특권 신분을 공격하는 볼테르의 독설은 역사상 그 예를 찾기 어렵다. 특히 가톨릭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비판이 한결 더 그러하였다. “파렴치를 일소하라(Ecrasez I’infame)”는 그의 슬로건은 바로 교회를 향한 포격이었다. 그는 이 슬로건을 따서 ‘Ecrlinf’라고 서명할 정도였다. 그의 교회 비판은 그가 무신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미신적인 교리와 성직자의 완고한 불관용 정신에 대한 반감에서였다. 그는 자신은 신도 종교도 없이 살 수 있으나, 일반 민중은 제 힘만으로는 도덕적,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니 신과 종교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볼테르에게 군주제가 정치적으로 좋은 것처럼 종교는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었다. 이처럼 볼테르는 어디까지나 일반 민중을 한층 낮은 차원의 존재로 취급하였다. 그는 특권 신분에 대한 부르주아의 평등은 열심히 주장했지만 부르주아에 대한 민중의 평등은 전혀 고려해 본 일이 없었다.
이에 반하여 루소는 모든 국민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절대 왕정을 계몽적인 입헌군주제로 개량하는 미온적인 개혁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되고 모든 주권은 그 계약에 동의한 인민에게 있었다. 오아권도 이 인민의 일반의지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인민주권의 원리에 위배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회계약론에 의하여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천부의 권리를 갖는다는 인권 사상과 앙시앵레짐의 반자연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사상이 대두하였다. 루소는 몽테스키외가 귀족계급에게 유보시키고 볼테르가 상층 부르주아에게 유보시켰던 정치권력을 민중 전체로까지 확대하였다.
루소의 평등주의 원칙은 철저한 민주주의 원칙으로서 그 기초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의 평등에 있었다. 모든 시민은 제 먹을 것을 제 손으로 생산하는 소규모의 토지 소유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원리상 민주주의의 헌장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그가 디종의 어느 아카데미 회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인데, 그의 평등주의적 사회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사치는 도시에서는 100명의 빈민을 만들어내고 농촌에서는 10만 명의 빈민을 죽이고 있다. 부자와 예술가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는 돈이 그들에게 쓸데없는 물건을 쥐어주는 바람에 농부의 실생활로는 돈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장식용 실을 쓰기 때문에 농부들은 옷 한 벌 없고, 우리가 주스를 마시는 바람에 많은 환자들은 미음조차 먹을 수 없으며, 우리 식탁에 채소가 올라야 하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물밖에 마시지 못하고, 우리 가발에 분을 바르느라 많은 빈민에게 빵조차 없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계몽사상에는 백과전서파,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대표하는 갖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이들 사상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회에서 제멋대로 발전하였다. 특히 왕실 내부의 권력 싸움이 서로 정적을 치기 위한 정략을 목적으로 계몽사상가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계몽사상은 1750년부터 1763년 사이에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널리 번져갔다. 정부가 탄압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볼테르와 루소가 1778년에 죽은 후에도 계몽상상은 이류 저작가들에 의하여 줄기차게 번져갔다. 보급의 주요한 수단은 인쇄물과 각종 집회, 그리고 학교였다.
책과 팸플릿에 의한 계몽사상의 보급은 문자 해독자를 전제로 하였다. 글을 읽을 줄 알려면 학교에서 글을 배워야 하는데, 읽기, 쓰기, 셈법을 가르치는 소학교가 일반 서민의 자녀들을 위하여 여기저기 세워지고, 라틴어, 과학, 역사, 지리를 가르치는 중학교가 부르주아 자녀를 위하여 여러 도시에 설립되었다. 학교 교육의 보급은 문맹자를 줄이고 문맹자의 감소는 계몽사상의 보급을 더욱 광범하게 하였다.
그러나 농촌은 아직 계몽사상의 영향을 별로 받고 있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촌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사제들뿐이었다. 이들만이 볼테르나 루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농민은 아직 가톨릭교에 대한 신앙심과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일어난 농민 폭동의 원인은 농민들이 계몽사상에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사회경제적 불만과 1775년 이래의 경제 불황의 격화에 따른 갖가지 모양의 사회적 대립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몽사상의 선전은 도시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도시였다. 계몽사상의 혁명적 이상은 부르주아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계몽 사상의 이상도 그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부르주아지는 계몽사상의 혁명적 이상에서 자기들의 역사적 사명을 의식하고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혁명적 계급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을 혁명적 계급으로 만든 것은 인간과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계몽사상이었다. 여기 부르주아 혁명의 보편적, 세계적 성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