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 텔레스,
기원전 아리스토 텔레스가 위 이론을 주창한
이래 1862년 파스퇴르의 실험 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위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1862년 실험에 의해
오늘날 위 사실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나 모 미생물이 있어야 자손들이 만들어 진다는것을
알고 있다.
"미래의 국제전화는 이 인터넷 전화가 주도할것"
1999년 새롬기술이 다이얼패드를 선보이며.
당시엔 획기적이어서 한때 돌풍을 일으켰으나
휴대전화와 메신저의 보급 그리고 가격경쟁의
국제전화요금때문에 난립하던 인터넷
전화 시장은 정말 폭삭 쫄~~~~~~딱 망하고 말았고
새롬사장은 구속된 처지에다.
금상첨화(?)로 새롬기술은 적대적 M&A 에 몰락하고 말았다.
나우의 VT모드만 살아있을뿐..
"일개 신부가 유전학에 대해 몰 안다고."
1865년 당시 유전학에 권위자 였던 식물학자 칼 네겔리,
그는 당시 그레고어 요한 멘델이 보낸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
의 논문을 보고. 그러나 오늘날 이 논문은 "멘델의 법칙" 이 되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정도로 유명한 유전학의 기초 이론이 되어있다.
진화론의 찰스 로버트 다윈 조차도 이 업적을 눈여겨보지 못하
고 놓쳐버려 20세기까지 거의 30년이상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1884년 그가 사망할때까지도 잊혀져있었고 1900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업적이 알려졌다.
"그 사업을 포기하다니 그건 힘들어요 모터롤라에 우린 뒤져있다구요"
인텔사의 자문단,
1980년대 인텔사 회장이 된 앤디그로브가 디램산업에서 철수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 사업에 뛰어 든다는 용단을 내렸을때.
사실 디램 최초의 발명 업체로서 인텔사에게 디램산업은 1968년
회사가 창립된 이후 80년대까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의 저가 물량공세에 하향세를 그리던 인텔사는
적자에 허덕이자. 1980년대 중반 CEO 앤디 그로브의 반대를 무릅쓴
용단덕분에 90년대 날개를 다시 활짝 피게 된다.사실 당시 인텔
사가 첨 시작한 CPU산업은 선발업체 모터롤라에 비해 한참이나
뒤져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컴퓨터는 몰라도 인텔사는 알정도로.
CPU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이겼다. 이제 디램산업은 우리꺼야"
일본 반도체 업체들.
1980년대 중반 인텔사가 디램산업을 철수한다는 선언을 듣고,
사실 그당시 인텔사의 철수 선언은 얼마전 세가의
드림캐스트 사업 백지화 선언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반향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 업체들이 승리감에 젖어 희희낙락한 사이.
인텔이 일본업체에 당한거 보다 몇배로 뒤에서
묵묵히 준비만하며 칼을 간 업체들이 있으니 바로 우리 한국
업체들. 1983년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최초로 64K 디램을 개발한
이래 90년대 16M DRAM을 기점으로 우리업체는 당시 주도했었
던 일본업체를 압도하기 시작하더니 오늘날 전세계 디램 반도체
시장의 7~80%를 장악할 정도로 우리 업체가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일제시대의 복수를 다짐하며 일부러 디램만 역점사업으로
둔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우리는 멋지게 일본을 눌렀다.
여기서 바보가 된건 일본 업체들, 알다시피 반도체 사업의 양대축은
CPU부분과 메모리 부분이라 할수있는데. 인텔사를 겨냥하며 CPU에
관심을 안가지고 디램에 역점을 두고 공세를 펼쳤지만 한때만 풍미
했을뿐 결국 CPU 부분이고 디램 즉 메모리 부분이고 양쪽 시장을
모두 빼았겼으니. 그들이 당황해한건 당연한 이야기 . - -
그러나 지금 뒤에서 인도와 중국이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일본꼴 안나려면 분발하여야 하겠다. 흠.. - -
"물리학의 끝에 도달했다."
1880년대 많은 물리학자들.
19세기에 전기 자기 열역학에서의 잇다른 대단한 발견을 이루자,
그러나 1900년경 이러한 생각은 구식 보수과학자들에 머물렀고
1914년 새로운 물리학이 만들어져 당시 대답할수 있는 것보다
더많은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미지의 분야가 배로 넓어지는듯.
"광전효과에 관한 업적으로 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여합니다"
1921년 노벨상 위원회.
아인슈타인 그는 1905년 노벨상급 논문을 3개 발표한다.
<광전효과의 해석>, <브라운운동의 해석>, 그리고 <특수상대성원리>.
그러나 그는 <광전효과의 해석>에 관한 논문만으로 평생 한번만
노벨 물리학상을 탓다.
물론 <광전효과의 해석>의 논문이 오늘날 양자론을 자리잡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바 있지만.
오늘날 물리학이나 세계사에 그의 세논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건
<특수상대성원리> 라는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업적으로는 그는 평생동안 상한번 타본적이 없으니.
정말 아이러니 한 일이다.
유명한 발언 하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1927년 아인슈타인.
당시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가 발표한 '불확정성의 원리'
에 대한 논문을 반박하며, 불확정성의 원리란 간단하게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알려고 할수록 운동량은 그만큼
덜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기 보다는 확률로서
이해하는게 훨씬 정확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뉴턴시대 부터 이어왔던 물리학의 결정주의 연구를
단박에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니 주위의 반대를 받은게
어쩜 당연할수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여러 실험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할수 있게 되었고
이 논문으로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탄다
"교류는 많은 문제점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1885년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의 직류방식을 포기하고 교류로 전환하자는
주장에. 당시 직류방식의 전기는 거리에 따라 손실이
많아 전기공급소에서 수Km 떨어진 곳까지만 공급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고민했던 에디슨이 테슬라에게 문제점 해결방법
을 의논했지만 테슬라의 교류전환 의견에 한마디에 퇴짜를
놓는다. 결국 둘은 결별하고 말았고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
사에 교류방식 특허권을 팔았다. 웨스팅 하우스는 교류방식
의 편리성으로 에디슨의 독점시장을 잠식해 들어갔고.
결국 오늘날 교류방식이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테슬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것이다.
(오래됫지만 아우크소 정새암님 의견 늦어서 죄송)
"대중성이 없잖아"
2002년 월드컵전 KTF.
국가대표 공식 서포터즈 붉은악마의 스폰서 제의에 계약금
2천만원만 제시하며.
결국 SK 텔레콤이 5억에 사들였고, 대박을 터뜨린다.
파급 효과는 거의 100배가량 그 이상도.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팀이 엄청난 포상금에.
1달 유급 포상휴가를 받았다는 소문이 - -
이번엔 빗나간 예언 10편
"이건 영화로 만들수 없어요, 불가능한 일이죠.."
1969년 <반지의 제왕> 원작자 톨킨의 후손들,
당시 영화사였던 미라맥스사의 사울 자엔츠에게 영화판권을 단돈
1만파운드 (울돈으로 천이백만원)에 팔며,
그러나 오늘날 <반지의 제왕>영화는 3편에 걸쳐서 제작하였고
전세계에 큰인기를 끌어 몇십억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근데 1차 판권구입자 미라맥스사도 그리 돈을 벌진 못하였으니
그들은 영화 제작을 위해 모회사 디즈니사의 예산결제를 부탁
했으니 얻지 못해 결국 뉴라인 영화사에 1천만 달러에 판권을 넘긴다.
톨킨의 자손은 그당시 영화기술의 한계를 알기도 하였고,
후에 그나마 영화의 여파로 책또한 많이 팔려 그리 큰 손해는
못봤을 테지만, 고작 1천만달러에 팔아버린 미라맥스의 모회사
디즈니사로서는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 안드레아 페링거외 2명저 <도둑맞은 아이디어> 참조 -
"이 그림 1만~2만엔(10에서 20만원) 정도 되겠지"
2003년 2월 일본 서양화가 나카가와 가즈마사의 유족,
고 나카가와 가즈마사의 수집품중 하나였던 그림 하나를
경매에 넘기며, 그러나 경매를 의뢰받은 회사는 이 작품이
초기 고흐작품과 비슷하다고여겨 의뢰했고 진품으로 판명되
급히 3천만엔(울돈 3억원) 으로 경매초기가를 정정하는
해프닝을 벌였다.(신문기사를 눈여겨 보신분이라면 아실수도)
"전 미치광이 과학자에요 제가 어찌하여 감히.."
1994년 수학자 존내쉬,
자신의 게임이론에 대한 노벨 경제학상 제의를 한차레
고사하며, 결국 주위의 끈질긴 권유에 힘입어 결국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지만, 존 내쉬 그는 정말 정신병자였다.
그는 21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박사학위 논문
<비 협조적인 게임>을 통해 내쉬균형 을 창안한 이후
1958년 <포춘> 지가 선정한 천재수학자로
명성을 드높였지만 그후 30년간 '영혼의 암'이라 불리는
정신분열증을 앓아 암흑속에 갖힌다.
그가 암흑속을 헤메는동안 그의 논문은 실제적으로
경제학 진화생물학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한참후 그가 깨어난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탓다. 그는 노벨상 역사상 경제학상을 받은 유일한
수학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작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으니..
흥행은 보나마나.. - -
- 실비아 네이사저 <아름다운 정신> 참조 -
"이렇게 엉성한 그림은 얼른 가져 가시오"
1950년대 한 고리대금 업자.
한국 서예가겸 정치가 손재형이 돈을 빌리는 대신
담보로 준 추사의 조그마한 그림 한점을
개성의 갑부 손세기씨에게 당시 200원 (오늘날 2천만원)
정도에 넘기며, 그가 시큰둥했던 이 조그마한 그림이
바로 오늘날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다. 오늘날 시가 20억원을 웃도는 명품.
이 그림의 가치성은 그림과 불혹의 나이에 완숙한 추사체
에만 있는것이 아니었으니, 그건 바로 이 그림의 뒷면에
글씨들. 추사 김정희가 이 그림을 완성한후 제자 이상적에
선물로 보내준 이후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중국 북경에
가게 되었고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서 세한도를 내보였고,
이 때 자리를 함께 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詩文)을 직접 써서 남겼
던것이다. 현재 세한도의 두루마리에는 그림 뒤쪽에 이들의
시문이 모두 붙어 있으며, 이외에도 김준학(金準學), 오세창
(吳世昌, 1864∼1953),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정인보
(鄭寅普, 1892∼?)의 찬문(讚文)도 포함되어 있다.
- 고제희저 <누가 문화재를 벙어리기생이라고 했는가> 참조 -
"그냥 우리 집안 족보인줄 알았습니다."
1972년 강릉의 심교만씨.
자신의 가문대대로 내려오던 고서 1질을 발견해 건국대 도서관에
기증하며, 그 1질의 고서가 바로 국보 142호 동국정운 전질이다.
사실 1972년 이 1질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선 국보 71호
로 지정된 1권과 6권뿐이 었다. 그리고 그거만 존재하고 모두 소
실된줄 알았었다. 그리고 이 2권만으로 우리 한학사에 연구에 중요한
자료였었는데 72년 모든 권이 발견했으니 한학계가 떠들썩 했던건
당연한일. 오늘날 초기 발견된 2권과 전질 6권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료인지는 안보고도 짐작할수 있다.
"회사 비용만 축내는 신통치 않은 연구를 중단하시오"
1990년 일본 니치아 화학,
나카무라 슈지 교수가 청색 LED 기술 연구를 계속하자,
그러나 그는 아이디어가 아까워 회사 몰래 계속 연구해
개발한 기술들을 회사이름으로 특허를 냈고, 이 특허기술들은
오늘날 DVD 기술은 물론 LCD 모니터등에도 도입되 큰 성장을
이루어 회사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회사는 이익만 챙기고 나카무라 교수에겐 어떠한 보상
도 해주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모멸찬가?
결국 현재 나카무라 교수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에 이른다
(불쌍할뿐..)
"자네 미쳤군, 그 좋은 자리를 차버리고 온곳이 고작 여기야"
1982년 제리 볼드윈,
그의 친구 하워드 슐츠가 고액연봉의 당시 스웨덴의 대기업
해마플라스트의 부사장의 자리를 박차고 미국내에서 단지
4개의 점포만 있었던 조그마한 자신의 커피전문점에 마케팅
책임자로 합류하는것을 보며, 비록 자신의 회사였지만
제리로선 그의 친구가 한심해 보였을수도..
1971년 고든보커, 제리 볼드윈, 제브시글
3명의 시애틀에서 공동 창업하여 시작했던 이 조그만 커피전문
점은 1982 현 CEO 하워드 슐츠의 합류를 기점으로 놀라운 발전
을 거듭해 오늘날 전세계 2400여개의 체인점을 가진 세계 최대의
커피 체인점이 되었으니.
그 조그마한 커피전문점이 바로 오늘날 스타벅스이다.
"그 당시에도 식탁에서 먹었을꺼야"
15세기 말 레오나르도 다빈치,
당시 새로 지어진 밀라도의 한교회 식당벽에 그의 명작 벽화
<최후의 만찬> 을 그리며,
그러나 훗날 역사학자 조지 램서는 말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팔레스타인들은 벽화에 나온것처럼 식탁
을 사용하지 않았다. 음식을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먹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최후의 만찬>은 그런 실수를 뒤엎을 정도로
뛰어난 희대의 걸작중에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추운곳엔 호수는 존재 할수 없어요."
1980년 지질학자들,
1979년 남극 보스토크 기지에서 남극의 두꺼운 얼음 아래에 호수가
존재할수 있다는 가설에 대해.
그러나 후에 인공위성의 관측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고,
오늘날 남극 얼음밑에 적어도 76개정도의 호수가 있다는게
밝혀졌다. 그중 가장 큰 호수인 보스토크호는 미래의 연구
대상으로서 각광받고 있는데. 이 호수는 빙하로부터 3㎞ 이
상 아래에 위치해 두꺼운 빙하가 호수의 물과 외부공기를 2천만년
가량 차단했을거라고 예상되고 있고, 호수의 깊이또한 약 900m에
달해 오늘날 '지구상의 마지막 미개척지'라고 불리며 고대 지구 생태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오염의 문제 때문에 아직 직접적인 탐사 못하고 있고
현재 오염없이 순수한 탐사의 방법에 대해 연구중에 있다.
"VHS는 우리 베타 규격에 상대도 안되지"
1971년 소니의 전사장 오가 노리오,
자신의 회사와 비슷한 시기에 VTR을 개발한 마쓰시타사가 가정용
VTR 규격의 VHS 방식을 비꼬며,
당시 화면의 선명도나 용량의 크기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소니의
베타 방식이 한수 위였다는 게 중론, 하지만 소니가 기술력의 우위
만 믿고 원천기술을 공개하지 않고 독점을 노렸던 반면 마쓰시타
는 재빨리 기술을 공개해 다른 가전업체들을 우군으로 삼는 전략
을 택했다. 소프트웨어 확보를 위해 비디오테이프 제조회사에도
적극 협조했다. 그 결과 가정용 VTR시장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VHS가 석권했다. 베타 방식은 뛰어난 품질을 앞세워
방송용 기자재 시장을 차지했지만 이 때의 패배는 두고두고
소니의 '한' 으로 남았다.
"그는 발을 헛딧혀 절벽에 떨어진후 부상으로인해 동사했을것"
1991년 유럽의 고고학자들,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 알프스 해발 3000m지점에
서 발견된 5천년전 유럽인 미이라의 사인을 두고,
그러나 의 가설은 5년이 지난후 어이없게 깨졌으니 그의 오른
팔에 화살촉이 발견된것, 첫발견때 그들은 그걸 주의깊게 못봤던
것이다.
결국 그 미이라는 고대시대의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5년간 묵묵히
침묵으로 감추었고,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코앞의 진실을 모른채 5년간 삽질만 한 격
이니 - -
첫댓글 이 이야기는... 너무 어려버 ;;;
저두 먼지머르고 퍼다놓거에요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