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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 산책
김붕래
제1장 고구려 건국
1. 영웅 신화의 유형으로 본 주몽의 생애
1. 기이한 출생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임신, 왼쪽 겨드랑이로 닷 되 크기의 알을 생산(人生卵)
(↔혁거세와 수로왕은 天生卵, 탈해왕은 인생난)
*기이한 출생의 사례
예수와 백제 무왕 - 부친 없이 탄생(무왕과 서동요)
공자는 16세의 모친과 70세의 부친 사이에서 탄생(野合),
석가는 마야부인의 왼쪽 갈비뼈를 뚫고 탄생(혁거세왕비 계룡 좌협)
황제(黃帝)는 큰 번개가 북두칠성을 감싸는 것을 보고 잉태, 24개월 만에 출생
商나라 선조 설(契)은 제곡의 2부인 간적이 제비 알을 삼키고 잉태됨
周나라 선조 후직(后稷)은 제곡의 제1부인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
홍길동 부친 홍판서 태몽, 본부인 거절, 몸종 춘섬과 관계하여 서출
*난생설화의 사례
혁거세 : 서라벌 양산 나정 옆에 자주색 알로 나타남
석탈해 : 일본 동쪽 용성국 왕비가 알을 낳아 버려짐
수로왕 : 하늘에서 내려온 줄에, 붉은 색 보자기로 싼 금합. 해처럼 둥근 알 6개
반 고 : 1만8천년 알 속에서 잠. 매일 한길씩 1만8천 년 동안 9만 리를 늘림.
2. 고귀한 신분 :
1) 주몽은 단군의 아들(삼국유사 왕력편) /천제의 아들(광개토대왕비)
2)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다 (삼국유사에 쓴 일연의 주석)
3) 부모는 하백의 딸 유화,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삼국유사, 삼국사기)
4) 용비어천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업적 -古聖同符 )
5) 헤라클레스(부친은 제우스, 모친은 인간). 아킬레스(부 왕족, 모 해신)
*천신과 지모신(地母神)의 결합
해모수와 유화 - 압록강가로 유인, 사욕을 채우고 가 버림(약탈혼 - 징기스칸)
아버지 해모수는 아침에는 인간세상 저녁에는 하늘나라에 거함(일출과 일몰)
3. 탁월한 능력 : 명궁. 명마 조련술 - 기마 민족.
헤라클레스는 2세 때 요람에 있는 뱀을 손으로 죽임
부처는 태어나자마자 7보를 걷고 '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침
오이디프스는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격퇴함
육백만 불의 사나이 / 홍길동의 천근 바위 들기
4. 기아(棄兒)
유화가 난 알을 불길하다 하여 들에 버렸으나 새와 짐승들이 돌봄.
후직은 길가, 숲, 얼음 위에 버려졌으나 짐승들의 보호를 받음
바리공주(바리데기) 설화 - 오구대왕의 7녀
모세. 이집트 강가에 버려짐.
희랍신화의 오이디푸스왕
일리어드 오딧세이의 파리스왕자
5. 모함과 역경 : 대소 왕자의 모함으로 금와왕의 마직이가 됨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노역(머리 9개의 히드라, 3개의 케르베로스 등 퇴치)
바리공주 9년의 노역(나무 하기 3년, 물깃기 3년 ,불때기 3년) -오구굿
춘향과 변학도, 심청 공양미 삼백 석
6. 주변의의 도움 :
1) 엄수에서 '어별성교(魚鼈成橋)' (=엄리대수, 엄사수, 송화강 상류-이범교)
2) 졸본부여왕은 둘째 딸(소서노)을 주어 사위로 삼아 대를 잇게 함(백제본기)
3) 유화가 아들에게 5곡의 종자를 줌(동명왕편)
4) 천태산 마고할미(바리데기), 용왕(심청전) 부처(보리수 아래, 소녀의 우유)
7. 최후의 승리 : 시련을 딛고 성공하여 고구려를 세움
홍길동(병조판서, 율도국), 심청전(왕비) 춘향전(정렬부인)
2. 육하원칙으로 본 고구려 건국고구려 28대 705년( BC 37- 668)
누가 : 고주몽(高朱蒙), 추모왕(鄒牟王), 동명성왕(東明聖王) 중모(仲牟)
BC58-BC19(BC37-BC19 재위) 승천하여 아들 유리가 玉鞭을 龍山에 묻음
추모에 대한 한자 표기 '주몽, 추모'는 처음의 뜻(안재홍)
동명은 왕의 명칭이고, 주몽은 이름이다(정국복)
동명은 부여 제족의 공동신인 보통명사다(서대석)
언제 : 기원전 37년, 신라 혁거세 21년인 갑신년. 22세(삼국유사는 12세)
(줄리어스 시저 BC100-BC37, 사마천 BC 145-BC85)
어디 : 압록강 중류(동부여는 송화강 유역) 졸본주 비류수 가에 띠집을 짓고 건국,
졸본=홀본=환인, 홀승골성=승홀골성=솔골=오녀산성
비류수=염난수=동가강=혼강
무엇 : 고구려 건국(高는 크다의 의미, 句麗는, 大城 首邑의 의미 -이병도)
어떻게 : 1. 비류수가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
2. 동명제, 북부여(北扶餘) 계승,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세움<북부여기>.
3. 졸본부여왕은 둘째 딸을 주몽의 아내로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4. 추모(鄒牟 - 처음)는 북부여에서 왔다<호태왕비>.
제2장 동명왕편으로 본 해모수, 하백과 유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의하면 해모수는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 다섯 마리가 끄는 수례를 타고 부여에 하강하여 왕이 되었는데
낮에는 정사를 다스리다 밤이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매일 이렇게 오르내리는 하늘과 땅의 거리는 2억만7천8백7십리이다.
머리에 쓴 오우관은 까마귀 깃털로 우리 전설 속의 삼족오(三足烏)와 통하니 태양의 상징이다.
(삼족은 두 다리와 성기를 뜻한다. 易仲天) 낮에는 지상에 머물다 저녁이면 하늘로 간다는 것은
낮에 떴다가(扶桑) 저녁이면 지는(咸池) 태양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해모수라는 이름은 바로 태양을 지칭하며 이것은 한민족의 광명 사상, 태양 숭배 사상의 산물이다.
해모수는 '해머슴아'(윤내현 교수)의 한자 표기일지도 모른다.
사냥 나갔던 해모수는 압록강에서 하백의 딸을 보고 자식을 두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들고 있던 채찍을 휘둘러 궁궐을 짓고 향기로운 술로 유혹하여 유화를 잡아 놓으니
하백이 찾아와 중매도 없이 사사로이 여인을 취한 무엄함을 꾸짖는다.
해모수는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밝히나 하백은 믿지 않고 그 신통력을 시험한다.
하백이 잉어가 되어 보이자 해모수는 수달이 되고, 꿩이 되어 피하니 매가 되어 쫓는다.
다시 하백이 사슴이 되자 해모수는 늑대가 되니 비로소 하백은 그가 천제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혼인을 승낙한다.
잔치에서 대취한 해모수를 딸 유화와 함께 가죽 푸대 속에 가둬 수례(오룡거)에 실어
해모수가 혼자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7일 만에 술에서 깨어난 해모수는 유화를 버려두고 혼자만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문화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해모수는 일신(日神)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고
하백(河伯)은 글자 그대로 수신(水神)을 토템으로 하는 압록강 변 어느 민족인지도 모르겠다.
(중국 책에 나오는 하백은 황하의 신이다.)
해모수가 유화를 범한 행위는 고대에 많이 있던 약탈혼의 한 모습이다.
결혼 허가를 받아내고서도 술에서 깨자 혼자 하늘로 가 버린 것은 이런 약탈혼의 단면을 증거하고 있다.
수로부인이 동해용왕에게 납치된 것도 약탈혼의 한 형태이다.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도 아버지 예수게이의 약탈혼에 의해 태어났고,
사마천이 야합(野合)이라 칭한 공자의 출생도 16세의 소녀를 70 노인이 범한 약탈혼의 결과라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비해 하백이 중신 없이 여인을 취한 해모수의 행위를 꾸짖는 것은 중신혼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해모수와 유화의 부부 관계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서는 욕정을 채운 뒤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만
<동명왕편>에서는 유화가 해모수에게 하백의 궁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등 협조적이다.
주몽이 잉태되는 과정도 <삼국유사>에서는 유화는 피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잉태되나
<동명왕편>에서는 '햇빛을 받아 주몽 낳은 것으로 되어 강제 임신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주몽의 탄생에 대해서 <동명왕편>에서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인용하여
'처음에 날 때는 왼쪽 옆구리에서 한 알을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 가량이라고 나와 있다.
해모수와 하백의 신통력 겨누는 장면에서 해모수족과 하백족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백이 변한 잉어나 꿩이나 사슴은 다 온순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데 비하여
해모수가 변화한 수달, 매, 늑대는 전투적이고 민첩하다.
한쪽이 농경민족의 평화 사상을 지녔다면 다른 민족은 기마민족의 공격성을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해모수와 하백은 공히 수중 지상 천상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지만 결국은 하백족의 패배로 끝나면서 혼인이 이루어 진다. 이런 천신족 부계, 수신족 모계의 형태는 박혁거세의 아내는 알영정 근처에서 태어났고
수로왕의 아내는 바다를 건너 아유타국에서 찾아오는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신족과 수신족의 대결 갈등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 의해 단결 승화 관계로 발전된다.
* 해모수와 해부루
해모수에 대한 인적 사항은 기록마다 다르고 상호 모순되게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고구려조에서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로 유화에게 주몽을 잉태시킨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북부여조>에는 천제 자신의 이름이 해모수라고 소개된다.
이 해모수가 해부루를 낳고 해부루는 자식을 두지 못했는데 늙어 명산대천에 기도하다가 곤연에 이르러 금와를 얻는다.
해부루를 이어 왕이 된 금와가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고 주몽이 탄생하는 그 무렵 금와는 대소 등 여러 왕자를 낳는다.
즉 금화의 왕자들과 거의 동연배의 주몽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앞뒤의 연대를 따지면 <삼국유사 고구려편>의 해모수와 북부여기의 해모수는 연대가 맞지 않는 다른 인물이 된다. 즉 족보로 따져 보면 해모수에게 대소는 증손자에 속하는데,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과 대소는 거의 동년배로 등장하는 오류가 발견된다.
그리고 북부여에 있던 해부루를 동부여로 옮기게 하고
그 고토에 도읍을 한 인물도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북부여기>에서 해모수와 해부루는 부자 관계이지만,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보면 해부루는 기존 토착민인데 신흥 이주족인 해모수가 해부루를 축출하는 모양이 된다.
부자 관계와는 정반대로, 해부루가 구세대가 되어 앞뒤가 뒤바뀌어 버린다.
또 삼국유사 고구려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라는 기록도 있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주몽은 단군의 아들인데 18년 동안 고구려를 다스렸다는 기록도 보이는 등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이 많이 보인다.
단군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보는 견해가 많듯이
(고조선은 47명의 단군이 다스린 것으로 <환단고기>는 이해하고 있다).
해모수도 한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고 어떤 대상, 즉 태양신을 상징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것이다.
동명왕을 부여족 계통에서는 왕의 칭호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북부여를 세우고 해부루를 낳은 A 해모수, 해부루가 떠난 그 터에 나라를 세운 B 해모수,
그리고 금와왕의 동부여 시절 유화를 유혹하여 주몽의 아버지가 된 C 해모수,
이렇게 다양한 해모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가설을 세워본다.
해모수가 '해머슴아'의 한자 표기이듯 해부루는 '불, 광명'의 뜻을 지니며(양주동)
금와는 '곰, 고마' 등의 뜻을 지닌, 모두 신격화된 인물이고 이들의 활동 무대는 만주 벌판이었던 것 같다
. 즉 곤연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큰 연못(안재홍)이라고도 하고
신채호는 무단장(牧丹江)시에 있는 경박호로 보고 있다.
동부여의 가섭원은 이병도는 갓벌 변두리. 갯벌로, 신채호는 훈춘(갈사나, 연해주 수목 울창)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부여는 송화강 줄기를 따라 발전했고 고구려는 압록강을 중심으로 개국했던 것 같다.
제3장 권력의 역학 관계
1. 해부루와 금와는 혈연적 부자 관계가 아닌 점에서 아직은 군장의 선출제로 해석 가능하고
금와와 대소는 혈연적 부자 관계로 군장의 세습제가 확립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즉 요순 시절의 선양제도에서 우 임금에 오면 세습제가 되는데 이는 왕권의 강화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 주몽은 능력은 있으나 세습제에 밀려 군장 후보에서 제외되자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가서 새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 성인 '해'씨를 버리고 세로운'고'씨 성을 갖게 된다.
고대 역사에서 씨와 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뜻한다.
3. 천제의 아들 해모수(해머슴아)가 하강하여 북부여를 건국하고 해부루를 낳았다<(북부여기>)는 기록과,
천신이 명하여 해부루는 동부여로 이주하고, 그 옛 터에는 해모수가 도읍했다(<삼국사기>)는 기록은 상이하다.
아들을 쫓아내고 아버지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해부루는 기존 구세력이고,
해모수는 신흥세력이라는 정 반대의 해석이 가능하게도 한다.
4. 졸본부여와 소서노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1] ~ 기원전 6년)는 온조를 시조로 하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자 고구려 동명성왕 추모왕의 두 번째 부인으로 소개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비류수 가에 이르러 오두막집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로 삼았다는 기록 밑에 주를 달아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던 것이라 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延陀勃)의 딸이,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처음에 혼인하였다.
우태 사후,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 건국에 일조했다고도 한다.
이후에 부여에 있던 동명성왕의 장자 유리명왕이 고구려에 오자 추모왕과 결별하고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6. 비류국과 송양
주몽이 건국하여 최초로 합친 나라이다. 고토를 회복한다는 뜻의 다물(多勿)이라는 말이 비류국의 합친데서 연원한다.
고토회복은 바로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비류국 송양의 딸은 고구려 2대왕 유리와 혼인한다. 역시 제1세력과 제2세력의 결혼동맹이다.
그런데 이 송씨 왕비는 유리왕 2년에 사망하고 골천의 화희(禾姬)와 한나라 치희(雉姬)를 계비로 맞아 들었는데
이 둘의 사랑 싸움 끝에 치희는 본국으로 떠나버린다.
가버린 치희를 그리며 유리왕이 불렀다는 노래가 <황조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이다.
제4장 고구려 유적지
1. 졸본성과 오녀산성(五女山城)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 구역은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桓仁)만족자치현이다.
삼국 관련 기록은 대체로 졸본성(卒本城)으로,<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비류곡 홀본(忽本) 지방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다'고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비류수 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졸본성 하면 오녀산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시 때 사용되는 산성이고,
환인현에는 평지 토성인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터에 주몽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인현 서북쪽 '육도하자향(六度河子鄕)에 위치한 이곳 주변에는 상고성자촌(上古城子村)도 있는데
이 곳은 고구려 왕족의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에 사용된 석성(石城)터인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으로 산의 높이는 821m이다. 현재 산 중턱까지는 차편을 이용할 수 있고
거기서 999계단을 갈으면 옛 성터가 나온다. 이곳이 압록강의 지류이자 비류수(沸流水)로 불리는 혼강(渾江) 유역이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년 동안 한 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하며,
깨끗하여 음료수로 사용할 수 있다.
2. 고구려 건국 위치
1)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셨다
2) 삼국사기의 기록
엄시수를 건너 졸본에 이르렀다.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오두막 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엄시수는 송화강, 비류수, 혼강의 지류)
3) 삼국유사의 기록
엄수를 건너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3.. 국내성과 환도산성
1) 국내성
<吉林省 集安市 通溝鎭>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졸본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AD 3년(유리왕 22)이며, 427년(장수왕 15)
평양천도 전까지 약 400년 동안 고구려의 도성인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국내성은 평양 천도 뒤에도 고구려 3경(三京-국내성, 평양성, 한성))의 하나로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으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인 666년(보장왕 25) 권력싸움 과정에서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았던 남생(男生)이 당나라로 투항해버림으로써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2) 환도산성(丸都山城) - 산성자산성
서기 3년(유리왕 22년)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처음 산성의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불렸으나
중국에서는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산성자산성"으로 불렀다.
이후 산성자산의 이름이 환도산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위나암성은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서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성벽이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의 일부만 남아있다.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위나암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퉁거우 강(通溝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또한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 이었다. 성벽 둘레는 약 7km이고,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다.
3). 장군총 =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集安市 龍山:土口子山>
기단식 돌방돌무지무덤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중앙에 널길과 돌방을 설치.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짐.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면적 86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장수왕릉으로 추측. 광개토왕릉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무덤 앞으로는 퉁거우 평야[通溝平野]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이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1기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배총은 기단부 3층과 묘실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향이다.
4. 단동과 대련
1) 단동(丹東)(虎山山城 = 泊灼城)<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虎山鎭>
구명(舊名) 서안평(西安平), 안동. 고구려 멸망 후 安東都護府 설치,
1965년부터 단동이라 불림
압록강(鴨綠江) 길이 800km, 120여개 섬(80%는 북한 영토),
서울에서 420km, 평양에서 220km의 거리
풍부한 수자원이 있고, 3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천연의 요새
120km의 해안선, 27개 소수민족 중 만주족은 38%
위화도 - 북한 영토, 위화도 회군<우왕 14(1388)>,
마시도 - 牛馬 등 국제 거래
압록강 대교(단동 철교-조중 우호교),
압록강 단교(斷橋,1911 일본 제작, 1950년 유엔군의 폭격으로 반파된 채 남아 있음),
유람선 30분, 20원.
2) 박작성(泊灼城)
고구려의 성 중의 하나로, 현재 단둥 시에서 20km 떨어진 호산진(虎山鎭)에 위치하고 있다.
벽돌로 쌓아 올린 명나라 장성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 기단(基壇)은 돌로 쌓아 올린 고구려성의 윤곽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의 일부로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 이름 붙여 박작성의 역사는 사라져간다.
중국은 2009년 진(秦)장성과 명(明)장성으로 대표되는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와 위치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발표한 단둥 시의 ‘호산산성’이 고구려의 박작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중앙공원, 일보과(一步跨, 넘을 과 -한 발작만 내 디디면 북한)
3) 대련(大蓮)<비사성 - 고구려, 발해 해군 기지>
*旅順 : 중국 3대 해군기지 중 하나아며 세계평화공원에는 세계 각국 원수들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의 입상되 전시되어 있다.
1894년 청일전쟁(갑오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에 유린된 역사의 땅이다.
여순 감옥 전시장에는 안중근 의사 유품(50여 점)과 신채호 선생 영정 도 있다.
*安重根 1879-1910, 1909년 10월 26일 이토오 히로부미 사살(하얼빈역)
1910 여순 감옥에서 순국(교수형) - 순국 직전에 남긴 말씀 →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申采浩 1880-1936, 여순 감옥에서 옥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 투쟁
조선상고사 (한국의 역사를 요서지방까지 확대 해석), 조선혁명선언.
4) 발해 유적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영주(요녕성 朝陽)를 탈출, 길림성 연길 돈화현(敦化顯)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건국하였다.
화룡(和龍), 흑룡강성 목단강 영안시(寧安市). 부여진(扶余鎭), 훈춘(暈春) 등으로 천도.
698년부터 926년까지 15대 229년 동안 해동성국으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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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해군 함정 '장문휴함(張文休艦)은 2대 문왕 때의 수군 명장 장문휴 장군을 기려서 명명한 것임.
(천문령, 길림성 휘발하 상류)
제5장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1. 살수대첩
612년 수나라는 두 번째의 고구려침공을 개시하였다. 수나라 육군은 탁군(涿郡 : 지금의 北京)에 집결, 좌우 각각 12군으로 편성.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 3800명,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도 40일이 소요되었다.
요하 도하작전에 성공하여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수나라는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5천명의 별동대를 편성해 오골성(烏骨城 : 지금의 봉황성)을 경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으로 직공(直攻)해 대세를 결정지으려 하였다.
별동대는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술에 고전하면서 겨우 평양성 30리 지점에까지 진군하였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들을 고구려 깊숙이 유도해 그들의 능력을 한계점에 도달하게 한 뒤, 거짓 항복할 의사를 밝혀(여수장우중문시) 퇴각할 구실을 만들어주면서 일대추격전을 전개하였다. 요동성까지 살아간 병력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한편, 수나라 해군은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 : 지금의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왕제(王弟) 고건무(高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결사대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거기에다가 육군의 참패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이처럼 수륙양면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수는 요동성 공격을 중단하고 총퇴각함으로써 두 번째 침략도 실패로 끝났다.
2.안시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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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4월 1일 당군의 선봉 이세적(李世 勣)은 통정진(通定鎭, 심양 서북, 新民)에서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신성(新城 : 지금의 무순 배관산성)·건안성(建安城, 지금의 개평) 등 여러 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전군을 집결시켜 4월 15일부터 개모성(蓋牟城, 무순 고성자 토성)을 공격, 26일에 이를 함락시켰다. 장량(張亮)이 지휘하는 수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천연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비사성(卑沙城, 沙卑城, 대련)을 5월 2일에 함락시켰다.
한편 태종도 요하를 건너와 이세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5월 17일요동성(遼東城,요양)을 함락하고, 이어서 6월 10일에는 백암성(白巖城, 白崖城, 燕州城)을 빼앗았다. 백암성 함락 후 6월 20일 당군은 안시성(安市城, 安地城, 해성 동남 영성자산성)으로 쳐들어갔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靺鞨)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두 사람은 당군과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포위 공격을 당하여 항복하였다.
안시성의 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은 고연수 등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당시 가장 위력적인 성 공격무기였던 포거(抛車, 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와 충거(衝車, 성벽을 파괴하는 돌격용 수레)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당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토산(土山)을 쌓아 성을 공격하였다.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지자 고구려군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하였다.
겨울이 되어 날씨도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으므로, 당은 할 수 없이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그 해 9월 18일 서둘러 퇴각하였다. 안시성주의 이름이 『삼국사기』 등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송준길(宋浚吉), 박지원 등에 의해 양만춘(梁萬春, 楊滿春)으로 알려졌다.
<참고자료> *삼국유사에 나타난 고구려 관련 지명 인명 정리
1.졸본 : 솔골(오녀산성)- 이범교
2.동명 : 부여 제 족의 공동신 명칭(서대석)
3.주몽 :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추모> 사기 : 추모, 중해라고도 한다.
4.우발수 : 윗벌못(上坪池)<이재호> 백두산 근처의 연못
5.웅신산 : 백두산, 삼국사기는 웅심산 <움심산-길림성 서란, 환단고기>
6.알의 탄생은 태양신화며 알의 보호는 후직의 신화에서도 보인다.
7.엄수 : 송화강 상류 휘발하 삼국사기 엄체수, 엄호수, 엄시수
부여의 엄리대수(광개토대왕비)
8.졸본주 : 현도군의 경계
9.비류수 : 염난수, 동가강(한서지리지)(이범교) 평양의 동쪽(고려사)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점함(광비)
10.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용을 타고 승천
11.주몽이 쏜 활의 백발백중에서 당시 유목생활 집단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2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삼국유사 주해),
주몽, 혹은 추몽은 단군의 아들(삼국유사 왕력편)
13.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총 7회에 걸쳐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나온다.
1.추모왕의 졸본 정착 2대 유리왕 22년 위나암,
10대 상산왕 13년 환도성 11대 동천왕 21년 평양,
16대 고국원왕 동황성 20대 장수와 15년 평양성,
25대 평원왕 28년 장안성
<참고서적>
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이화문화사. 2002
김종서. 부여, 고구려, 백제사 연구. 한국학연구원. 2006
박영규. 고구려본기. 웅진출판사. 1997
서길수. 고구려 역사 유적 답사. 사계절. 1998
신채호. 을지문덕전. 비봉출판사. 2006
신채호.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이덕일 외. 고구려는 천자의 제후국이었다. 역사의 아침. 2007
이두표 역. 동명왕편 제왕운기. 을유뮨화사. 1974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학 중앙 연구회, 2012.
표정훈.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 효형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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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민족학세계화본부에서 실시한 고구려 역사탐방의 결과물의 일부입니다
기행문 형식의 글로 먼저 올린 광개토대왕비 소고와 함께
간단한 자료 형식으로 올렸습니다.
미숙한 부분 지적해 주시면 좋은 공부가 되겠습니다
아 !!!!교수님 벌써 올려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