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의 3·1운동은 개신교가 한국민족주의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시위중 상당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교회이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그리스도교도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경은 그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이는 3월 31일과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1905년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나갔다고 전한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일제는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인근의 교회건물과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살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일제의 만세운동자에 대한 학살사례는 몇 가지 두드러진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책은 비인도적인 대량살육과 만행, 그리고 대규모 검거이었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검거된 인사에 대해서도 극악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들의 식민지 통치 법규에 의해서 처형하였다.
한국민의 만세운동 상황과 일제의 무력탄압은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어 열강들은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 공격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생생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보내어 여론화하였다. 198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이틀뒤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때까지 방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