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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의 고려천리장성에 대하여!>
우리는 국사시간에 교과서를 통하여 고려시대 천리장성에 대하여 배웠왔습니다. 당시에는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배우면서 만리장성과 같은 장성이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제 나름의 위안을 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이 천리장성이 고려의
문화적 지리적 정치/군사적인 강역을 한반도 전체도 아닌 천리장성 이남의 한반도로 제한하는
족쇄역할을 하고 있다는 모순을 미처 알지 못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천리장성에 대해 제 나름대로 한꺼플 벗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문1. 고려 천리장성의 역사 기록의 해석 오류?
먼저 국사교과서에서 나오는 천리장성의 근거가 되는 역사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문 德宗……二年 平章事柳韶 創置 北境關城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
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
抵耀德靜邊和州等三城 東傳于海延 千餘里 以石爲城 高厚各二十五尺.
해석 덕종 2년 평장사 유소로 하여금 북경관성을 쌓게 하였다. 서쪽 바닷가·
옛 국내성 지경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동쪽으로 威遠·興化·
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등의
13성을 거쳐 耀德·靜邊·和州 3성에 이르렀다. 동쪽 해안에 다달았는데,
천여리이며 돌로써 성을 쌓았다.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다.
..........(《고려사》권 82
위의 고려사 기록은 천리장성을 도출하는 가장 근간이 되는 사료입니다. 이 자료의
잘 살펴보면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과의 괴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위 기록 어디에도
장성(長城)이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리장성이라면 말그대로 위 기록에
천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여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장성이라는
단어가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위 기사대로라면 평장사 유소가 축성한 것은 관성
(關城)입니다. 그럼 관성이란 무엇일까요. 관성(關城)은 관(關)과 성(城)의 합성어
이며, 성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으니 관(關)만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관(關)이란
" 빗장을 걸어 문을 닫다의 의미로 나중에는 관문의 함의를 갖는 글자로써
국경(國境)이나 국내(國內) 요지(要地)의 통로(通路)에 두어서 외적을 경비(警備)하며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나 화물(貨物) 등을 조사(調査)하던 곳"의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관성이란 관(關)에 성(城)을 축성하여 더욱 견고한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마다 설치된 독립적인 관성들의 연결선을 그어보니
천여리에 이르더라는 것이지요. 즉 독립적인 관성들의 방어선을 연결한 것이 천리에
이르는 천리장성으로 국사교과서에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의문2. 연결된 것이 아니고 관성과 관성이 떨어져 있다?
의문1.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윗글에서 관성이란 서로 독립된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장성이라면 당연히 관성들이 천리에 걸쳐 서로 길게 이어져 연결되어야 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서는 상기 관성의 독립적인 측면을 보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실정으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북한땅에 들어가서 천리장성의 유적을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북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존하게 되는데 다행이 이
관성에 대해 답사하여 보고 언급한 학자의 글이 있습니다.
" 고려사의 기록들과 현지조사자료들을 종합분석 하여 보면, 천리장성에는 약 20여
개의 진성과 100여 개의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20여 개의 진성 중에는 천리장성
벽이 직접 통과하고 있는 진성과 장성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진성이 있다.
장성과 잇닿아 있는 진성은 신의주시의 령해진성(토성리토성), 련주진성, 정주진성,
의주군의 위원진성, 도인군의 평로진성, 정평군의 장주진성, 정진성, 요덕군의
요덕진성 등 9개이다. 그 밖의 진성들은 모두다 천리장성안쪽(남쪽)에 좀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는 대체로 1-8km로서 일정하지 않다"
..........최희림,〈천리장성의 축성상 특징과 그 군사적 거점인 진성에 대하여(1),
력사과학, 1986년 3호>
상기 북한학자는 천리장성을 기존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이미 모순을 상당한 내포하고 있음이 보여집니다. 즉, 장성이 성들이 만리장성처럼
연결된 개념으로 볼때 그의 글에서 9개성만 장성과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는 장성과
모두 떨어져 있으며 그 거리가 대략 1-8km이나 된다고 하였으므로 이미 연결된 성이라는
장성의 개념에서 벗어납니다. 더구나 산악지역에서의 8km라면 완전히 독립된 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허인욱, "고려시대 천리장성의 실체와 의미" 참조)
또한 천리장성이 축성된 이후의 전투기록(몽고군 침략 등)에서도 천리장성에서의 치열한
전투기록이 아닌 독립된 관성에서의 전투가 보입니다. 몽고침입시 천리장성이 지나가는
정주성 등의 전투기록에서는 성이 포위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바 이는 정주성이
장성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독립된 관성이기에 포위공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의문3. 축성기간에서 나타나는 문제?
이번에는 의문1.의 고려사기록과 연계하여 축성기간의 미스테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상기 고려사기록에는 "덕종 2년 평장사 유소로 하여금 북경관성을 쌓게 하였다....
이하생략.."라고 되어 있고, 다른기록을 살펴보면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북경관성을 창치하게 하였다. (《고려사》권5, 덕종 2년 8월)
-여러 신하들을 문덕전에서 잔치하고, 유소 등이 관성 수축한 수고를 위로하여,
유소에게 추충척경공신의 호를 주었다.(<<고려사절요>>권4. 덕종 3년 3월)
이 두 기록이 평장사 유소가 축성하였다는 천리장성의 축성기간을 보다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천리장성은 덕종2년 8월부터 덕종3년 3월까지 약 8개월간이군요.
천리나 되는 장성을 단 8개월만에 축성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선 정조시대 때 만들어진 수원화성의 경우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당대 최고의 축성
기술과 실학의 총아인 거중기까지 투입하여 성길이 5,520m(약 10.4리)를 축성하는데
걸린 기간이 약 2년 4개월입니다. 추가적으로 개경 주위의 나성을 축조하는데 걸린
기간을 살펴보면 좀더 확실한 비교가 될 것입니다. 고려사 현종20년 8월의 기록에
이달에 개경의 羅城이 완성되었는데 약 21년만에 공사가 끝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축성된 개경나성은 약 55리 입니다. 55리의 개경나성 공사기간이
21년인 것이지요.
이를 토대로 살펴볼때 의문1.의 고려사 기록에서 도출한 천리장성 축성설에 동의
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덕종이전의 기록에 덕종조에 축성한 천여리의 관성중
다수 관성에 대한 축성 기록이 이미 있는바 덕종2년-3년에 이뤄진 관성축성은
신축도 있었겠지만 개축과 보수가 주로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이 천리장성축성에는 여러학자의 다단계 축성설의 논란이 있으나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천리장성을 도출의 의문점을 거들떠 보는
것이니 만큼....^^)
의문4. 산성 축성의 상리에서 벗어났다?
이 부분은 우리카페의 글중 "고려 천리장성의 실체"라는 글과 일맥상통하므로
참고적으로 보시면 더욱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성의 일반적인 축성의 상리는 산맥 또는 산의 능선을 따라서 축성을
합니다. 그것이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적인 측면을 극대화 함과 동시에
축성공역의 효율성을 기 할 수 있는 축성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과서의
천리장성을 보면 그런것은 무시하고 산맥을 가로질러서 성을 축성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맥을 가로 지르는 것은 댐을 쌓을 때나 그런식으로 가로질러서
쌓는 것이지 결코 산성을 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길게 이어진 천리장성
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잃는 것입니다. 즉, 각각의 산맥에 맞게 독립적인 관성이
축성되었다는 것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의문5. 다른 지역을 통과하는 장성이 존재한다?
1) 무인일에 동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대지즐로 부터 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의
장성에 이르기 까지 약 7백 리에 달하며...-고려사, 문종27년 "
2) 고려가 갈란전의 장성을 3자 증축하였다.- 금사, 태조 천보3년
위의 두 기록은 고려사와 금사의 장성관련 기록입니다. 이 기록들을 언급한 이유는
천리장성이 지나는 지명과 관련없는 지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의 기록을
보면 대지즐과 소지즐이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천리장성의 영역이었다면 진이나
주, 관이 등장하여야 하나 대지즐과 소지즐은 여진의 지명입니다. 그리고 여진의 지명을
통과하는 장성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2)의 기록은 갈란전이라는 여진의 지명
에 고려가 장성을 3척이나 높여서 증축했다는 <금사>기록입니다. 이 또한 천리장성과는
무관한 지역입니다. 현재 대지즐, 소지즐, 갈란전에 대한 확실한 위치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천리장성이 지나는 영역과는 상관없음은 확실하며, 이곳을
지나는 또 다른 고려의 장성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허인욱, 상동참조)
이상과 같이 국사교과서의 천리장성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단순히 교과서의 내용을
신뢰하기에는 상당히 의문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의문점을 가진 천리장성이 있음으로
해서 고려의 강역을 천리장성 이남으로 한정하는 시각을 만들었으며, 고려가 과소평가 되는
문제를 야기했고, 고려태조 때부터의 있어왔던 고토회복의 노력을 평가절하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점에서 서길수 교수등의 고구려와 고려 장성연구 등의 움직임은
상당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무쪼록 더 많은 연구들이 행해져서 잊혀졌던 역사가 더욱 바로서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상 말학의
소견이었습니다. 다른 좋은 사료나 견해가 있으신 분들은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달의날 by 말학 계룡산맥.................
첫댓글 계룡산맥님 글 잘읽었습니다..저도 의문을 품고 있었던 내용입니다..성은 방어의 개념인데..그 지역이란 곳이 산세가 험해서 그렇게 무리하게 연결을 하여 장성을 쌓아야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각 국가와 민족들마다 전쟁시 고유의 전투방법 및 전략전술등이 있는데 우리민족은 산성으로 둘레를 쌓아 전쟁시 그곳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합니다..만약 적군이 그 지역을 그냥 지나치면 그 산성지역의 사람들은 후방 교란을 담당하게되죠..자연과 지형지물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전략인데..우리민족이 인해전술식의 지나인들처럼 그런 장성을 쌓았다는것이 조금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었습니다..이제 의문이 풀리는군요.
나우님/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단순히 천리장성의 존재를 인정하기에는 갖고있는 의문점이 테클을 거는군요^^. 그런 견지에서 의문점을 한꺼플 벗겨 본 것입니다. 메리추석마스 해피 뉴가을 하십시요~^^.
저도 학교에서 천리장성을 배울때... 우리도 저런 장성이 있었구나 하면서 위안을 삼았었었는데...
맞습니다. 사소한 오류 하나하나 바로 잡아나 가야지 만이 올곧은 우리역사의 참모습을 볼수가 있지요. 동감동감.^^
저도 이상하게 생각 햇어읍니다.이제 알겟군요.중국과 우리는 싸우는 방식이 틀립니다.나우 이야기님 말처럼 우린 대군이 싸우는게 아니엇죠.몽고가 고려에게 당한후 경기군만 남긴 이유가 거기 잇엇읍니다.
국사지도책 보면 천리장성 벽 그림으로 해놧던데.. ㄱ-..에거 알고 가니 좋군요
천리장성은 보면, 우리가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산맥과 많은 오차가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국사 교과서의 천리장성은, 두 산맥을 가로질러서 험하디 험한 천리장성을 축조했다는 것인데, 이건 매우 모순 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