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은 창작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다. 남원에서는 매년 단오에 춘향제가 열리고, 명절 때면 어김없이 <춘향전>이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으로 각색되어 선보인다. 춘향전이 이처럼 긴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도 불사하는 열녀 이야기, 신분을 초월한 남녀의 로맨스가 감동을 주기 때문에'라고 설명하기 하기에는 뭔가 미진한 점이 있다. 신분이 다른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작품 자체 내에 주목하여 춘향전을 다시 감상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춘향전>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나름으로 춘향전을 감상해 보았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작품의 주인공인 춘향에 주목해 보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열녀이다. 기생의 딸임에도 정절을 목숨처럼 지키는 여인으로, 결국 사랑의 성취를 이루어 내고야 만다.
그런데 '춘향이는 과연 열녀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춘향은 아버지가 양반이라고는 하나 기생의 딸이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지만 반상의 구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춘향에게 독선생을 붙여 글공부를 시키고, 양반의 부녀자들처럼 교육한 것은 춘향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을 것이다. 글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반편이기는 하나 자신이 양반의 소생임을 알게 되면서 기생의 딸이라는 사회에서 부여한 자신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 사이에 괴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조동일 교수의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세계의 부조리한 신분질서에 자아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춘향은 세계의 질서에 굴하지 않고, 양반 자제 이도령을 발판으로 삼아 신분 상승의 욕구를 관철시킨 인물로 파악할 수 있다. 신관 사또의 자제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이도령과 결합할 수 있다면 충분히 자신의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춘향은 세계의 모순을 간파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저항하고, 마침내는 자신의 꿈, 욕망을 성취하고 마는 인물로 파악할 수 있다. 당시 규방의 여인들과는 다른 근대적인 의식을 지닌 여인으로 생각된다.
춘향이의 신분상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몽룡에 대해 살펴보자. 춘향이의 성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데 반해 이몽룡은 점차적으로 변하는 인물로, 철없는 글방 도령이 어떻게 춘향과의 사랑을 이루는지 주목해 보자. 이몽룡은 철없는 글방도령으로 양반집 자제이다.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의 외모에 반해서 춘향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춘향을 보기 위해 담을 넘는 행동까지 불사한다. 여기까지는 양반집 도령의 치기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춘향과의 결합 후에 이몽룡은 변모한다. 비록 적극적이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춘향과의 결합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거에 급제하면 춘향을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몽룡이 춘향을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도령이 춘향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같이 도망가야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 행동으로 치달았을 경우의 결과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저 산골마을에서 화전이나 일구면서 최후를 마감하는 한 부부의 모습 정도가 상상된다. 이것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춘향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춘향이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을 끝까지 붙잡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한 이몽룡도 양반이라는 신분의 이점을 너무나 잘 알고, 그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며 살아온 인물이므로 그러한 결합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몽룡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기존의 질서, 제도를 이용하여 춘향과의 결합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다. 장원급제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춘향과의 결합을 성취하는 것이다. 세계의 질서에 직접 부딪쳐 싸워 이기기보다는 세계의 질서에 어느 정도 순응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해 나가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은 자신의 욕망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런데 신분상승과 연인과의 결합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욕망이 이루어지자 거기에 만족하고 만다. 이몽룡은 큰 벼슬에 오르고, 춘향은 정경부인으로 아들딸 낳고 잘 산다. 자신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맞섰던 세계의 부조리함을 잊어버린 채 말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한계로 지적되고는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서 개인이 세계에 맞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일궈냈다는 것도 춘향전을 읽는 주된 독자층인 일반 평민, 여성들에게는 재미와 더불어 상당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춘향전>에서 변화되었으면 하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비판과 아울러 변화되었을 때의 작품의 결말에 대해서 나름으로 상상해 보았다. 우선 춘향의 어머니 월매에 주목해 보자. 춘향이가 신분상승의 욕구를 갖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춘향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양반의 여식이므로 행동을 삼갈 것을 가르치는 등 기생의 딸이라는 춘향의 신분과는 맞지 않게 키운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랬기 때문인데, 아무리 춘향을 양반집 규수들처럼 교육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월매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춘향이 세계의 질서와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는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춘향의 신분상승과 딸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월매의 바람을 둘 다 충족시켜야 한다면 차라리 춘향을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키웠으면 어떠했을까? 춘향의 빼어난 외모와 총명함을 감안한다면 황진이와 같은 당대 최고의 기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원의 신관사또에게가 아니라 더 나아가 임금의 눈에 들어 왕궁에서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았다면 왕자를 낳아 조선의 국모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그랬다면 정경부인이 부럽겠는가. 세계와의 대결에서 춘향은 비록 승리했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을 경우 그 책임의 원인은 월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의 모습, 질서에 눈뜨게 한 월매의 교육으로 인해 춘향의 의식이 각성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춘향의 몸종인 향단이를 살펴보자. 이 작품이 기존의 불합리한 신분제도에 반기를 들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면, 춘향이보다는 향단이가 그 주인공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춘향이는 반편이기는 하지만 양반의 여식이다. 양반의 신분에 포함될 만한 요소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춘향과 이도령의 결합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만약 이몽룡과 향단이가 결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색 춘향과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몸종 향단이가 있었다면 말이다. 양반 자제와 천민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치열한 세계와의 갈등이 예상된다. 그 과정에서 면천이라는 보다 확실히 자아의 승리가 표면화될 것이다.
한편으로 작품의 전개에서 향단이의 모습을 살펴보자. 춘향이와의 결합을 통해 이몽룡이 변화한 반면 춘향의 옆에서 항상 춘향을 보필하는 향단이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보면 춘향과 향단이의 신분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춘향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보이는 반면 향단이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천민이라는 같은 신분 내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신분차가 또 발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춘향전>의 인물을 중심으로 춘향전을 새로이 감상해 보았다. <춘향전>은 신분을 초월한 남녀의 로맨스라는 보편적인 제재를 변화하는 우리의 시대상황 속에서 독자들의 욕구에 맞추어 적절히 형상화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