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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수당(醉睡堂)
취수당(醉睡堂)은 경북 영양 청기면 청기리 34번지에 있는 누정(樓亭)이자
또 정자를 세운 함오(咸吳) 12세(世) 휘(諱) 연(演) 공의 호(號)로서
후손이 휘(諱)를 피하여 부를 수 있는 대명사 이기도 하다.
(사진: 취수당 : 필자(筆者)가 2006년 9월에 찍음.
취수당에 대한 자세한 글은 왼쪽 메뉴를 끝까지 내리면 나오는
‘7번-종파별 전용공간’ 그 서브메뉴 ‘취수당공파 게시판’에
국역(國譯) 취수당일고(醉睡堂逸稿) 전문이 올라 있는 바
필자(筆者)가 새삼 덧붙일 능력도 없으며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필자(筆者)가 글을 보태는 까닭은?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짐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당호(堂號)의 취(醉)
취수당(醉睡堂)이나 취은당(醉隱堂) 등 함오(咸吳) 영양파(英陽派)는
어째서 당호에 취(醉)자를 자꾸 넣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온 적 있다.
그 질문 속에는 영양파(英陽派)가 술을 워낙 즐긴 것 아니냐는
소박한 의문이 들어 있을 것이다.
공의 행장기(行狀記)에 따르면 취수당(醉睡堂) 당호(堂號)의 연원(淵源)은
‘술을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잠든다’ 라는 뜻으로 표은 김시온 선생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사진 : 취수당 현판-족보 세덕편 18페이지에서)
옛날 점잖고 기개 높은 선비들이 아무리 술을 좋아했기로서니
그렇다고 당호에 까지 취(醉)를 넣을 리는 없지 않은가?
취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당시 시국(時局)에 대한 개탄 및
울분의 공감대가 당시 선비사회에 있었기에 이러한 호(號)를
서로 지어 주고 또 받아 들였다는 것이 합리적 해석일 것이다.
취은당(醉隱堂)의 한(恨)에 대하여는 필자(筆者)가 이 게시판 56번 글
‘세거지(6) 구도실-취은당파’(2006-09-08)에서 해석을 시도한 바 있고
이번 글에서는 취수당이 맞은 상황은 어떤 것일까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취수당(醉睡堂)의 세계(世系)
취수당(醉睡堂) 휘(諱) 연(演) 공에 이르는 영양파의 세계(世系)를 살펴 본다.
시조부터 6세(世)되는 휘(諱) 엄(儼)공이 안동 임하로 낙남(落南)하고,
9세 휘(諱) 필(삼수변에 畢)공에 이르러 영양으로 옮기고(移于英陽)
10세(世) 휘(諱) 민수(敏壽) 공이 두 아드님을 두시니
문월당(問月堂) 휘(諱) 극성(克成), 휘(諱) 윤성(允成) 공이다.
취수당(醉睡堂)은 문월당(問月堂)의 셋째 아드님이니
그 백씨(伯氏)는 용계(龍溪)공이요, 중씨(仲氏)는 우재(愚齋)공이고
시조부터 대수는 12세(世)이다.
(* 형제가 넷 일 때 맏은 백(伯), 둘째는 중(仲), 셋째는 숙(叔)
막내를 계(季)라고 부른다.)
여기까지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 : 세계도(世系圖)
약력(略歷)
일고(逸稿)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여기서는 족보 기록만 요약한다.
(스캔: 취수당 족보기사)
l 1598년(선조 31년) 문월당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다.
l 음보로 무과 벼슬을 하다.
l 병자호란(1636년) 때 부할(副轄)로 쌍령전투에 참가하였다.하성(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다.
l 절개를 지키고 단을 쌓아 돌에 사명대 세 글자를 새기다.
l 1669년 (현종 9년) 졸(卒)하다.
쌍령지전(雙嶺之戰)과 사명대(思明臺)
위 족보기사 중 눈길을 끈 대목이 “쌍령지전(雙嶺之戰)” 과
석각사명대 (石刻思明臺三字) 다.
쌍령전(雙嶺戰)에 대하여는 다음 글로 미루고 이번은 사명대(思明臺)
이야기만 한다.
취수당일고(醉睡堂逸稿)에 사명대(思明臺) 글씨가 취수당 뒤 서쪽 언덕
비석(碑石)에 새겨져 있다고 하나 필자가 고향 갈 때 마다 정자가 잠기어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찍은 사진이 없고 일고(逸稿) 화보에
나온 것은 너무 흐릿하다.
그런데 취수당의 백씨(伯氏) 용계공의 정자-삼구정에도
사명대(思明臺) 이야기가 나온다.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비분강개하여 … 중략(中略) 맞은편 강둑에 다시 정자를 세워
만년의 강학처로 삼았다. 그리고 정자 옆에는 사명대(思明臺)
라는 대를 축조하고 주변에 송, 죽, 매를 가꾸면서 절의를 세워
청나라에 항거하며 끝까지 복종하지 않았다.”
(영남일보 2007-04-03일자 ‘한국의 혼-누정(樓亭) (39) 중
삼구정은 용계의 항거정신이 밴 곳 항목에서)
사명대(思明臺)라 이름 붙은 곳은 우리 조상이 붙인 영양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데 그 시기는 모두 병자호란(丙子胡亂) 직후다.
존주(尊周) 와 숭정(崇禎)
조선 후기에 이 사명대(思明臺)와 늘 같이 나오는 단어가
존주(尊周) 와 숭정(崇禎)이다.
사명(思明)이란 명(明)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이요
존주(尊周)는 2500년 전 중국 주(周)나라를 존경한다는 것이고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묘호 :의종 毅宗 1610-1644)
때 쓰던 연호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중국의 이미 망한 명나라는 왜 잊지 못하며
2500년 전 없어진 주(周)나라는 왜 새삼 떠 받들고,
그 연호 숭정(崇禎)은 왜 계속 썼던 것 일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첫 머리를 보면 북경 가던 해를 숭정후삼경자
(崇禎後三庚子)로 표시하고 있으니 이는 명나라가 망하던 해
곧 1644년 이후 세 번째로 맞는 경자년이니 곧 1780년이다.
건륭 45년으로 써 버리면 간단한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썼을까?
(우리 성상 (곧 정조) 4년이라고 부기는 되어 있다.)
대보단(大報壇)
이렇게 명나라를 잊지 못한 것은 민간만 아니라 범국가적 차원이었으니,
숙종 31년-1705년 창덕궁 후원(後苑 = 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명나라의 태조, 신종-만력제와 의종 곧 숭정제를 제사 지낸다.
(위 동궐도 맨 위 중앙-후원 깊숙한 곳에 필자가 한글로 대보단이라 쓴 곳)
사대주의 (事大主義)
본토 중국사람도 잊어 버린 명(明)나라를 왜 우리 조선이 그리워하고
안타까워 했을까?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배어있는 식민사관 적
해석으로는 이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밸 없는 사대주의의 표본이다.
이렇게 간단히 해석되면야 아무리 조상님이라도 잘못 하신 것은
잘못 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를 거울삼아 고쳐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물리적으로 힘센 쪽에 붙는 것이라면
명(明)이 망한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그리울 까닭이 없지 않은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힘센 청을 좇아야 마땅한 일 아닌가?
황차 민간-재야의 선비들이라면 몰라도 조정에서 대보단을 세운 것은
청나라가 알면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 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소중화(小中華)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소중화 의식이 아닐까 한다.
우리 조상들에게 중화란 ‘인류보편의 문명’ 개념이 아니었을까?
오늘 날 미국 문명은 미국인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경험이 모아져서 이룬 것으로 우리 한국인이
그것을 배워서 흉내낸다고 하여 민족적 자존심이 상할 일이 없고
오히려 못 배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좋은 것이면 그 누가 만든 것이라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지?
중국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 알던 세계의 전부였으며
그 문명은 우리 조상에게는 온 세계의 보편 문명이었다.
이제 그 문명(=명나라)이 오랑캐 여진족(청나라)에게 사라지니
안타깝고 분할 것은 유교의 문치주의, 덕치주의 개념 상 당연했을 것이다.
중원에서 중화(中華)가 사라지고 문명의 정통을 이어 받은 곳은
오로지 조선(朝鮮)이니 우리가 바로 중화-소중화(小中華)가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상적 특색은 이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바로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요 정통이라는 생각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이상할 수 있겠지만 지금 평양의 주체사상이란 것을
부분부분이나마 간단히 듣다 보면 조선 후기의 소중화가 떠 오른다.
세계의 공산주의가 다 망했으니 평양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발전 과정과 소중화는 그 구조가 비슷한 것 아닐까?
오늘 날 우리 눈에 비록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우리 조상들에게
사명(思明), 존주(尊周), 숭정(崇禎) 은 조선이 세계문화의 한 가운데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지 식민사관에서 폄하하는 사대주의 개념이 아니었다.
숭정처사(崇禎處士)
숭정처사에 대하여 취수당일고의 역자 서수용 선생은
일고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전략(前略)
본인은 사실 숭정처사에 대해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다.
....
사실 시대의 큰 흐름은 소수파의 입장에서 정면으로 거부하기는
외롭고 어려우며 그래서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더욱 절감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항상 비주류는 주류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비주류의 소수파가 의리와 절개를 지니고 있는데
비해 반대입장에서 있는 측은 시류에 편승하고 소위 대세론으로
적당히 넘어가 도리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 나간 데가 허다하다.
숭정처사(崇禎處士)는 어떤 분들이었는가?
사실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로 보면 숭정처사
그 분들은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한 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나라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신흥세력인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여
주변국으로 영향을 미침은 필연이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외교적으로 발빠르게 대응치 못해 야기된 전략이
병자호란인지 모른다.
중략(中略)
숭정처사들은 한결같이 현실적인 고난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
알면서도 한 시대의 명성이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영원한 인간승리요 정신 승리라는 길을 흔쾌히 선택했다.’
위 서수용 선생 기술과 필자(筆者)의 견해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
존주(尊周), 사명(思明)을 부르짖던 숭정처사(崇禎處士)들이 그 당시
선비사회의 비주류는 아니었다. 바로 그들이 당시 선비사회를 이끌던
선구자들이었다. 다만 자신이 믿는 바를 철두철미 실행에 옮긴 것이
남 달랐을 뿐이다.
용계(龍溪),우재(愚齋), 취수당(醉睡堂) 세 분은 병자호란 후 조선 후기
시대사상의 한 가운데에서 매운 절개를 세웠던 숭정처사(崇禎處士)였다.
이것이 취수당일고(醉睡堂逸稿)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굳이
글을 더하는 까닭이다. 이 글의 제호는 취수당이지만 용계, 우재, 취수당이
사셨던 시대배경 설명을 통하여 그분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취수당일고 첫 머리에 사명단 (思明壇) 이라는 시가 실려 있고,.
이에 대한 국역(國譯)은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직역(直譯)으로 따지면 나무랄 데 없을 것이다.
또한 위 시가 문장적으로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는 필자의 한문(漢文)
실력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해인데 아무리 한글로 번역해
놓은 들 당시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저 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왜 중국 금릉 이야기가 나오는지?
서쪽으로 중주(中洲)는 왜 쳐다 보며 그러다 왜 갑자기 호롱불 돋우어
검기(劍氣)로 하늘을 찌르고 싶은 것인지?
중주(中洲)란 단순히 지리적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보편문명이요
명(明) 왕조가 쓰러진 뒤에는 그 문명의 정통을 이어 받은 조선(朝鮮)이 바로 중주다.
삼전도에서 당한 나라의 치욕과 야만에 짓밟힌 문명을 생각하니
어찌 마음이 쓸쓸해 지다가 검기가 솟구치지 않겠는가?
예는 취수당의 시로 들었지만 용계공, 우재공의 시와 문장에 들은
감정이 다 이와 같기에 우정 글 한편 보태어 설명해 보려 함이다.
망서루(望西樓)
사진은 취수당 측면으로 망서루 현판이 걸려 있다.
공연히 일도 없이 서쪽을 보는 것이 아니고 야만에 짓밟힌 문명
곧 나라를 생각하며 삼전도의 치욕을 갚고자 하는 결의가 담겨 있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병자호란의 개요와 쌍령전투.
그 후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가서 치욕을 당한 후
우리 조상들이 절치부심하며 청기에 입향하는 과정을 써 볼까 한다.
이상
첫댓글 수고많이하셨습니다 글을 보면서 마음 이 찡해옴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글을 과연 그누가 쓸수 있을까요^^취수당에 대해서도 잘 이해가 되는군요.감사합니다,다음글을 기대해 보면서늘 강영 하십시요,
선조님 아니 조상님에 글을보이 마음징 해오네요 취수당 꼭한번 가보고십습니다 훌륭한글에서 휴식을 취해봅니다 좋은글 올여주심을 갑사하게생각합니다
취수당 취은당 의미에 대해 왜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아주 조금 이해 가 될듯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