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가락
초인 박경화
어릴 적 바다를 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네
이 세상 일찍 떠나신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그날은 두 손 꼭 잡고 다시 놓지는 않으리라
붉은 꽃 향기 좋아도 어머니의 사랑만 하랴
귀하고 고운 어머니 깊은 마음 뜻을 받아
한세상 잘 살아가면 세상만사가 사랑꽃이라
세월처歲月處
김동원
좀 들어 보라 카이. 의미 그거 다 쓸데없는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이가. 바람 불면 꽃 쪽으로 달빛 나오면 댓잎으로, 간들간들 사운대다 가는 게 인생 아이가. 그래, 그기라니까. 말도 안 되는 기 말 되는 기라니까. 그래, 그래, 반쯤 술에 취해 그렇게 놀다 서산으로 번지는 기라. 한 백 년 서로 얽키고 설키고 뜯어먹다 가는 기라. 좀, 좀 들어 보라 카이. 안 보이는 거 보이도록 하는 기 시詩 아이가.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 거 연놈들 이치 아이가. 쓱 쓱 허공에 썼다가, 쓱 쓱 쓱 지우는 거, 그게, 오고 가는 세월처歲月處 아이가!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흉중
김동원
1.
내가 바다를 바라본 까닭은, 밀물 속 흐릿하게 밀려오는 마흔에 가신 아버지가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네 살 난 아들을 두고 가신, 그 흉중의 물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만 보면 청상의 어머니는 “아이쿠, 느그 아부지 바닷속에 장작불 때는 것 좀 보래이” 그러셨다. 동해를 숫제 우리 집의 가마솥으로, 붉은 해를 아궁이의 장작불로, 방어나 고등어를 무슨 고봉밥처럼 귀히 여기셨다. 나만 보면 까까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우예, 이리 제 아비를 닮았을꼬?” 신기해하셨다. 언제나 엇비슥 웃는 그 서른의 어머니는 봄날 수평선 위에 핀 모란꽃처럼 환하셨다.
2.
어릴 때 나는 먼 도시에도 고향 구계항처럼, 집 집마다 앞마당 앞에 바다가 하나씩 있는 줄로만 알았다. 고래가 잡히고 시원한 대구탕을 마음껏 먹는, 그런 바다가 도시 옆구리에 출렁거리는 줄로만 알았다. 열두 살 어린 나이로 혼자 대구로 전학 오고서야, 내 바다는 동해뿐임을 알았다. 그날 엄마의 손에 이끌려 포항 역사(驛舍)에서 처음 타보았던, 그 기차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마냥 신기하여 차가운 쇳덩어리를 만지고 또 만져보면서, 고래보다 더 큰 기차 칸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3.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나는 텅 빈 하숙집 골방에 쪼그려 앉아, 늘상 바다를 그리워했다. 비릿한 엄마 냄새가 그리웠고, 얼굴도 모르는 그 아비가 보고 싶어 외로웠다. 아버지는 한겨울 장갑 낀 손이 꽁꽁 얼어붙어도, 자식을 위해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잡은 고기들은 인근 강구항이나 구계 어판장에서, 대처로 팔려나갔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면 노을이 질 무렵,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동구 밖 입구에 서서, 네 살의 나는 아비가 사 오는 알사탕을 침이 고인 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이와 나를 남겨두고 눈깔사탕을 사기 위해, 저승의 바다로 서둘러 노 저어 떠나셨다.
4.
환갑이 된 지금도 생사(生死)의 진리를 모르지만, 그때 역시도 죽음이 알사탕 같다고만 생각했다. 선친이 돌아가신 날은 몇 날 며칠 장대비가 퍼부었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문상객을 맞은 나는 마냥 신이 났다. 모처럼 집 마당에 동네 어른들로 넘쳐난 것을 본 나는, 무슨 잔치 날 같은 생각을 했다. 서른의 어머니는 죽은 남편 관(棺)을 붙잡고 호곡(號哭)을 하고, 그 설움의 깊이를 알 길 없는 난, 맞지도 않는 상복을 입고 천방지축 빗속을 뛰어다녔다. 그 어미마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지금, 그날 어린 철부지를 지켜봤을 청상의 어미 흉중을 생각하면, 아득하고 아득하다.
5.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나는 당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알사탕을 사서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동구 밖에서 오도카니 앉아 기다렸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선친의 친구분을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 와요?”라고 묻곤하였다. 그럴 때마다 바다를 가리키며 “네 아버지는 이다음 돈 많이 벌어 저 바다를 건너온단다.” 일러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남몰래 언덕에 앉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혹여, 수평선 너머 붉게 떠오르는 해를 타고, 아버지가 물 위로 나를 만나러 나오실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6.
이따금 아비가 보고 싶을 때면 어등(漁燈)을 켜고 바다를 깨워야만 했다. 여름 새벽, 우연히 동네 형을 따라, 소몰이하러 마을 뒷산 봉황산 꼭대기에 올랐던 어린 시절. 그 황홀한 일출의 바다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아침 핏빛의 바다 물속 잠기어 꿈틀거리던 붉은 햇덩이는, 사무친 아비의 글썽인 눈물이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 산정에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목 놓아 불렀다.
흐렁 흐렁 흐렁
김동원
아이고, 자가 누고! 복순 아버지, 순돌이네 큰 애, 뒷집 허갑이 아제 아이가. 신묘년 오징어잡이 한배 탔다가 몽땅 수장水漿된, 가엾은 가엾은 목숨들. 흐렁 흐렁 흐렁 물 밟고 서성이네. 그래 그래 그래…, 뭍은 무탈하니 훨훨 다 벗고 올라 가거래이. 돌아볼 것 없다 카이! 아이고, 이 새벽 뭐 할라꼬 또 흰 수의壽衣 입고 저리들 몰리오노!
꼽추 누이
김동원
천천히 노을빛이 바뀌는 게 다 보였죠
누이는 그 곱사등에 혹등고래를 숨기고 살았죠
나만 보면 까까머리를 쓸어주며
하얀 알사탕을 한 개씩 쥐어 주었죠
밤마다 어느 바다로 가야 할지 몰라
그 누이는 물이 우는 소리를 내었죠
해무海霧가 밀려와 그녀를 감싸기 전까지,
곱사등은 붉은 해를 품고 살았죠
흰 눈이 무너져 내리던 겨울 수평선 위에
누이는 깜박깜박 밤 등댓불 너머
죽어서 슬픈 초승달이 되었죠
장미와 수평선
김동원
장미가 그 남자와 키스를 했을 때
왜 바다가 눈물을 흘렸을까
돌아선 모래 벌 위에서
그녀와 난 온몸으로 소낙비를 맞았네
거들을 내렸을 때, 붉은 꽃잎은
빗물에 설레었네
수평선 그 너머로 섬은 지고 있었네
아, 그 남자가 장미와 키스를 했을 때
왜 바다는 눈물을 그렇게 흘렸을까
노을 irony
김동원
오, 장님 언어여, 더듬어라! 그 부조리를, 그 신음을 은폐하라. 들리는 곳으로 번지거라. 이상하구나, 여자여! 매화가 피더니 한강에 남자가 뛰어들고, 폭설이 내리니 차가 굴러 저승으로 줄줄이 들어가네. 흉흉하여라. 아편을 물고 모란이 꽃대를 빨고, 허공이 작대기로 노을 불을 붙이고 있구나. 아이고! 죽은 아이들 눈깔을 독수리가 파먹네. 불이 뚝 뚝 그 바다 위에 떨어지네. 이상하구나. 어제는 태양의 흑점이 끓더니, 오늘은 밤하늘 위에서 남자가 꽃 피네. 잘했다. 그래, 자알했다, 인간들아!
갑진년 '소리꽃하늘' 잔치은 11월 27일 6시에 열렸다. 합창 아리랑, 편화 회원님의 금강산타령, 보화 회원님의 대장금 주제곡(오나라), 조정명 영문학교수의 시 낭독과 예이츠, 세익스피어 영시 낭송, 라하 회원님의 태평가, 원천 회원님의 청춘가, 임화 회원님의 노들강변, 솔화 회원님의 방아타령 1, 희화 회원님의 방아타령 2, 중천 회원님의 양산도, 완화 회원님의 신고산 타령, 김정화 시인님의 시낭독, 김동원 시인의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란 주제로 강의, 마지막으로 초인 박경화 민요가의 '노랫가락'을 민요창으로 들으면서 아름다운 초겨울 밤을 건넜다. - 진심으로 박경화 민요가님과 '소리꽃하늘' 회원님께 감사의 인사 올린다. 떡과 과일 저녁 찰밥 만찬은, 맛있고 온정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