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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事史記 스크랩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은 마의태자가 아니다
청호당 추천 0 조회 130 12.10.30 22: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은 마의태자가 아니다 

 

 

 

나는 경순왕과 고려태조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 출생한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만 알고 살아왔다.

2009년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아이의 과제물- 친가와 외가의 가계도를 작성하는 숙제를 도와주고 나서 우리집에 있는 경주김씨 대안군파 대동보를 펼쳐놓고 직계조상을 거슬러 올라갔다.  원정-인위- 순웅으로 거슬러 올라갔는데, 이 조상들이 어떤 분들인가 궁금하기도 하여 고려사를 뒤져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던 중 머리가 완전히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순웅(順雄)이 흔히 마의태자로 일컬어져 왔던 일(鎰-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첫째 아들)의 둘째 아들이란 사실이었다.

자신의 조상에 대한 이해는 자아 정체성과도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큰 혼란과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크나큰 충격을 계기로 외람되게도 족보연구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우리집에서 가지고 있는 1987년 대안군파 대동보는 1922년 대안군파 대동보를 편찬하면서부터 발생한 오류를 그대로 이어왔던 것이다.

역사연대적으로 고찰해 볼 때 순웅 장군은 대안군의 6세손이나 7세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묘지명이라는 역사자료를 통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 계대는 명백히 오류였다.

나는 신라삼성연원보(1934년)와 경주김씨족보(1934년)에 순웅의 아버지가 흔히 마의태자로 불리우던 일(鎰)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이 기록에 대하여 역사고증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고려사가들 사이에도 고려사 기록이 한줌밖에 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많은데,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한 일(鎰)에 대한 기록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얼마전부터 고려사절요(김종서) 태조실록편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신묘 14년(931년)

봄 2월 정유일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귀순할 뜻을 알려왔다.

 

겸용(謙用)이라고 하면, 김일의 궐명(궁궐에서 부르던 이름)이 겸용(謙用)인데 겸용을 보내 귀순할 뜻을 알렸다니! 

나는 혹시나 해서 고려사(정인지)를 들여다 보았다.

 

고려사 제2권 세가2 태조 신묘 14년(931)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신해일에 왕이 신라로 갔다. 이날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 경내에 이르러 장군 선필(善弼)을 먼저 보내 신라 왕의 안부를 물었다. 신라 왕이 명령을 내려 백관들은 교외에서 왕을 영접하고 자기 사촌 동생인 상국 김유렴(金裕廉)은 성문 밖에서 왕을 영접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 자신은 정문 밖에 나와서 왕을 맞으면서 절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답배하였다. 신라 왕은 왼쪽으로, 왕은 오른쪽으로 궁전에 오르면서 서로 앞서기를 사양하였다.

왕이 수원으로 온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신라 왕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때 회견 석상에는 정분과 예절이 극진하였었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을 때에 신라 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에게서 심중한 침해를 받고 있으니 이 통분한 사정을 어찌하겠소?”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니 좌우 신하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왕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여름 5월 정축일에 왕이 신라 왕, 그의 태후,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 김유렴(金裕廉), 잡간 예문(禮文),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 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餘), 관봉(寬封),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계미일에 왕이 돌아오는데 신라 왕이 혈성(穴城)까지 나와서 전송하고 김유렴을 인질로 삼아 왕을 수종케 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태수 겸용(謙用)은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소생 태자 김 일(金 鎰)의 다른 이름이 틀림없었다.

그 당시 겸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태자 일(鎰) 외엔 없었다.

 

일(鎰) 태자가 만일 당시 신라를 고려에 넘기고자 하는 경순왕의 뜻에  결사반대하고 있었다면 경순왕의 명을 받들어 고려 왕건에게 달려가 신라를 양국하는 뜻을 전달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삼국사기(김부식)와 삼국유사(일연, 김견명)의 기록, 마의태자가 천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걸치고 평생 초식하며 살다가 죽은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록이었다.

어쩌면 왕자 일(겸용)이 김부대왕의 뜻-신라를 고려에 양위하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로 달려갔던 것은 그 역시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고려로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2010년 12월 31일 1시쯤 나는 고려사와 관련하여 숱한 책을 썼던 김창현 교수의 <광종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일(鎰) 왕자의 둘째 아드님 순웅대장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광종의 제국>을 읽고 있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충주의 힘은 혜종 원년(944)에 건립한 두 개의 비석에 잘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영월 흥녕사에 건립된 징효대사의 비석으로 여기에는 군(君)인 왕요와 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등이 관여하였다. 이 중 유긍달과 그의 외손인 왕요, 왕소, 그리고 좌승 유권열은 충주 계열이다.

왕경은 명주 왕순식의 휘하 장군이고 왕렴은 왕순식의 아들이며,

김일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 김부의 아들이고, 태조를 옹립한 공신으로 태조의 임종을 지켰던 염상은 정계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었는데 해찬이라는 칭호로 보아 비석 건립 당시 해군을 지휘하였던 것 같다"(<광종의 제국>, 김창현 지음, 푸른역사 p.143-144)

 

뭐랄까 무엇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흥녕사 징효대사의 비문에 김일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 정보는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김일이라고 한글로만 썼는데, 옆에 한자로 일의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줬었으면 좋으려만 싶었다.

만일 "일"이란 이름의 한자가 중량 鎰이라면?????

급한 마음에 우선 "일"의 함자가 어떤 한자인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책의 뒷면에 수록되어 있는 참고문헌을 살펴보니 이지관 스님(전조계종총무원장)이 펴낸 <역대고승비문고려편> 눈에 띄었다.

이 책에 일의 한자가 표기되어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구하려고 교보문고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품절이었다.

2011년 새해가 밝아오는 1월 1일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는  아침에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1월 1일 신정이라 휴관이었다.

서울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등뒤로 하고 돌아서며 나는 그 앞의 눈을 밟았다.

 

인터넷으로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를 찾아보니 국보612호였고, 태조25년(942년)에 건립되었으며 소재지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였다.

 

 

 

 

 

 

 

이 탑비는 고려 제 2대 혜종 원년 944년에 건립되었는데, 탑비의 후면에 군(君) 왕요, 君 왕소, (   ) (   ) 대왕, 필영대왕, 대광 영장(英章), 대승 왕경, 소판(蘇判) 김일(金鎰),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장사(長史) 김휴(金休), 원윤 한헌옹, 원보 관헌, 원윤 기오(奇悟) 등 5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전문은 최언위가 지었다. 최언위는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경주 삼최(三崔)로 불리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다.

 

"용덕 4년(924년) 4월 15일에 비문이 이미 작성되었으나 국가에 일이 많아 시기가 20년이 사이가 있다가 갑자기 4군에 전쟁의 연기가 그치고 온 나라의 먼지가 잠잠해지니 천복 7년(942년) 6월 11일에 건립한다"(흥녕사 징효대사 탑비명, 조선금석총람 上 p. 162)

 

본래 비문이 작성된 시기는 태조 7년(924년)이었으나 혜종 원년(944년)에 이르러서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이 탑비문을 지은 최언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혜종 의공대왕 갑진 원년(944년)

 

겨울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 최언위가 죽었다.

최언위는 신라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오르고 42세에 비로소 본국에 돌아오니 집사시랑 서서원학사로 임명되었다.

뒤에 신라가 귀부하자 태조가 최언위를 태자사로 삼아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도록 명하였다. 궁원의 액호(편액에 쓰는 전각)는 모두 그가 지어 정한 것이요,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77세에 죽었으며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최언위가 944년 12월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면 그가 징효대사 비문을 작성했던 924년 그의 나이는 57세였을 것이다.

징효대사는 19세에 장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75세 되던 효공왕 5년(901년)에 입적하였다. 942년에 탑비가 세워졌으니 대사가 입적한 지 42년이 흐른 이후다.

징효대사 탑비문은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최윤(崔潤)이 글씨를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비에 새겼다.

후면에는 탑비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으로 君 왕요, 君 왕소, 필영대왕, 대광 영장, 대승 왕경, 소판(蘇判) 김일(金鎰),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장사(長史) 김휴(金休), 원윤 한헌옹, 원보 관헌, 원윤 기오(奇悟) 등 5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군(君) 왕요는 훗날 정종이고, 군(君) 왕소는 광종이다.

왕요, 왕소는 고려 태조의 제 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이다.

김부대왕과 혼인한 낙랑공주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이니 낙랑공주-왕요-왕소는 친형제다.

 

먼저 (    ) (    )대왕은 필독이 불가하므로 논의가 불가하고, 또  필영대왕이 누구인지 그에 대한 고려사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자세히 논하기 어렵다. 다만 특이한 것은 고려초 당시 왕실에서는 친족을 대왕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참고: 고려사 후비열전 

 

신명 순성 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는 충주인(忠州人)이니 증 태사 내사령(贈太師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로 태자(太子) 왕태(王泰), 정종(定宗), 광종(光宗), 문원 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증통국사(證通國師)와 낙랑(樂浪), 흥방(興芳) 두 공주(公主)를 낳았다.

훙하매 시호(諡號)를 신명 순성 태후(神明順聖太后)라 하였다.


경종비 헌의 왕후(獻懿王后) 유씨(劉氏)는 종실(宗室) 문원 대왕(文元大王) 정(貞)의 딸이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통해 보면, (     )  (      )대왕, 문원대왕은 고려태조의 자녀로서 君 왕요, 君왕소와 혈족의 관계가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대광 영장은 태조의 제 23비 월화부인(月華夫人)의 아버지다. 후비열전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월화 원부인(月華院夫人)은 대광(大匡) 영장(英章)의 딸로 사(史)에 성씨(姓氏)를 잃었다.


 

대승 왕경(王景)은 김순식(왕순식)의 아들 김수원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나타나 있는 좌승 왕렴은 김순식의 둘째아들 김장명이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왕경(王景)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목부인(貞穆夫人)은 왕씨로 명주인 삼한공신 태사 삼중대광 경(景)의 여(女)였고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를 낳았다"

 

김순식, 김예, 김수원, 김장명 등 그 명주(강릉)일가 친족들은 922년 7월에 고려태조 밑으로 들어가서 왕씨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김순식은 왕순식, 김예는 왕예, 김수원은 왕경, 김장명은 왕렴으로 바뀐다.

 

936년 9월(태조19년) 김순식, 김예, 김수원, 김장명은 신검의 후백제군과의 일리천전투에서 고려 2만여명의 마군(馬軍) 이끌고 나가 승리의 공신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고려초 삼한공신에 올랐으며, 왕예(김예)의 딸이 대명주원부인으로 고려태조의 제 14비가 되고, 김순식의 아들 수원(왕경)의 딸이 정목부인으로 고려태조의 제 8비가 되었다.

 

김선희-대광대보

 

김예(왕예)-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내사령-女 대명주원부인(고려태조왕건 제 14妃)

 

김순식(왕순식)-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김수원(왕경)-삼한벽상공신 태사 삼중대광-女 정목부인(고려태조왕건 제 8妃)

 

김장명(왕렴)-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중요한 인물일수록 먼저 기록하는 동양의 오랜 기법으로 보면 징효대사 탑비문 상위에 기록된 소판(蘇判) 김일(金鎰)은 더욱 눈길을 끈다.

 

소판 유긍달은 충주호족으로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다.

유긍달의 관직은 태사 내사령인데 징효대사 탑비에서는 소판(蘇判)으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소판이란 관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소판이란 신라 17등급의 관직 가운데 3등급의 관직으로 잡찬의 별칭이다. 특히 소판은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높은 관직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경문왕(제48대) 9년(877년)

가을 7월에 왕의 아들 소판 김윤(金胤) 등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를 사례하고....란 기록이 있다. 여기서 경문왕의 왕자 김윤에게  소판의 관직이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진골이 아님에도 예외적으로 소판의 관직을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다.

 

유긍달은 신라의 진골 출신이 아님에도 왜 소판이란 관직을 썼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징효대사 탑비문에는 유독 김일, 유긍달 이 두 이름 앞에만 소판이라는 관직이 붙어 있다.  

유긍달은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로 태조왕건의 장인인 동시에 왕요-왕소-낙랑공주의 외조부이다. 

당시 그는 태사 내사령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라 있었다.

이런 그에게 소판이라는 신라식의 관직을 붙여놨던 것은 아마도 소판이 진골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매우 고귀한 관직이므로 소판의 관직을 명시함으로써 어떤 특별성을 부여하기 위함인 듯 하다.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942년)에 새겨진 소판(蘇判) 김 일(金 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려사학자들이 학술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이종욱<고려초 940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이란 논문에서다.

 

우선 김일(金鎰)의 이름과 관련하여 김일이란 이름이 나타나 있는  다른 두 개의 기록과 비교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경문왕12년(872년)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찰주본기에 송악군태수(松岳郡太守) 대나마(大奈麻) 신(臣) 김일(金鎰)이라 쓰여진 것이 있다(황수영, 한국금석유문, p.16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성여왕4년(890년) 때 건립된 낭혜화상 탑비명(郎慧和尙 塔碑銘)에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무주도독(武州都督 소판(蘇判) 일(鎰) 개왕손야(皆王孫也)라 새겨진 것이 있다(조선금석총람 상 p. 72-73).

 

노용필은 <신라고려초기정치사연구>(2007년, 한국사학)에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872)의 김일, 낭혜화상탑비명(890년)의 김일, 그리고 징효대사탑비(942년)의 김일에 대해 논하면서 셋 모두를 동일인물로 보는 오류를 범하였다(노용필, 2007년, 신라고려초정치사연구, p.157을 보라).

 

특히 황룡사 9층 목탑찰본주기에 등장하는 대나마 김일에서, 대나마는 신라관직의 17등급 가운데 10등급에 해당하므로 진골만이 받았던 소판 김일과 결코 동일인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찰주본기는 872년에 작성되었으므로 그 당시 김일(金鎰)의 나이를 최소 20세로만 잡아도 징효대사탑비에 등장하는 김일과 동일인으로 본다면 942-872=70+20= 90세가 된다.

최소한 20세로 잡아도 나이가 92세이므로, 실제 나이가 이 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낭혜화상 탑비명의 소판 김일 역시 그 탑비가 890년에 세워졌으니 당시 일(鎰)의 나이를 20세로만 잡아도 942-890=52+20=72세가 된다.

30세로 잡으면 82세, 40세로 잡으면 92세, 50세로 잡으면 102세가 된다.

그러므로 노용필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노용필의 논문을 읽노라면 그가 신라의 관직 소판과 대나마의 차이가 어떠함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며, 특히 경순왕의 아들 가운데 김일(金鎰)이란 왕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이종욱은 1981년 그의 논문 <고려초 940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에서 신라황룡사 9층 목탑찰주본기의 대나마 김일(872년)과 낭혜화상 탑비명의 소판 김일(890년)이 942년 징효대사탑비가 건립될 당시에 생존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징효대사탑비에 새겨진 소판 김일(942년)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려 묘지명 집성을 펴낸 김용선 교수는 <대안군 은열의 묘지명>해설에서 이런 각주를 달았다.

 

"신라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872년)에 나오는 김일(金鎰)과 충남 보령의 낭혜화상비문(890년)에 나오는 일(鎰)이라는 이름은 연대가 너무 앞서므로 김일과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법흥사 증효대사비(924년)에 나오는 세번째 인물(김일)도 경순왕의 사망연대(978)를 참고해 보면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또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로 한 결정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신라의 왕자, 즉 마의태자가 김일인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요컨데, 김용선교수는 황룡사 목탑찰주본기의 김일(872년), 낭혜화상비문의 김일(890년), 징효대사탑비문의 김일(942년), 세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마의태자가 김일인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징효대사 탑비에 새겨진 김일을 경순왕의 아들로 본 것과 다름아니며, 김일이 마의태자가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 학자이기도 하다.

 

김용선 교수의 이 견해를 옳게 생각한다.

그런데 김용선 교수는 징효대사탑비(942년 건립)의 비문 작성 시기를 924년으로 잡고 있는 것 같다.

924년에 비문을 작성했다가 나랏일이 많이 생겨 늦어져 942년에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최언위가 탑비전문를 처음 작성한 시기는 924년으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윤(글씨), 최환규(새김)에 의해 최종적으로 탑비 후면에 새겨진 탑비 건립에 관여한 인물들의 작성시기는 924년으로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탑비에 새겨진 君 왕소(광종)의 탄생년도가 925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요, 왕소가 탑비 건립에 관여했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별로도 탑비건립에 관여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연대를 942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징효대사 탑비문은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최윤(崔潤)이 글씨를 썼고, 최환규(崔奐規)가 새겼다)

 

고려사와 관련하여 여러 많은 저서를 썼으며 고려사가들의 논문에 자주 인용되는 김창현 교수는 2003년 <광종의 제국>에서 이 김일(金鎰)의 이름에 대하여 "김일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 김부의 아들"이라고 썼다( 김창현, <광종의 제국>, 1983년, 푸른역사 p.143-144).

김창현 교수는 징효대사 탑비에 등장하는 김일을 경순왕의 아들로 본 것이다.

 

君왕요, 君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장사(長史) 김휴(金休), 원윤 한헌옹, 원보 관헌, 원윤 기오(奇悟) 등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좌승 유권열은 고려태조의 모사다.

그가 태조곁에서 종종 조언을 올린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유권열은 특히 명주의 김순식 일가를 태조 왕건에게로 돌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던 인물이다. 고려사절요 태조 5년 7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명주 장군 순식이 항복하였다. 일찌기 왕이 순식이 항복하지 않음을 근심하니 시랑 권열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고 형이 아우에게 훈계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지금 승(僧, 스님)이 되어 내원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권열의 말을 따르니 순식이 드디어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순하였으므로 왕씨의 성을 내려주고 집과 토지를 주었다"

 

 

여기에 맏아들 수원(守元)이란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징효대사 탑비에 등장하는 왕경이다.

모사 유권열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해찬 염상(廉相)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염상은 왕규, 박수문 등과 함께 태조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몇 안되는 인물이다.

 

또 하나 주목해 봐야 할 인물이 왕규이다.

그는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왕씨 성을 받았는데, 태조의 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 6비 소광주원부인, 혜종의 후광주원부인이 그의 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왕규가 왕요-왕소 형제를 해치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태조가 죽고나서  혜종이 즉위한 그 즈음 왕위계승싸움을 둘러싸고 혜종의 장인 왕규는 끝내 신명순성왕후의 두 아들 왕요, 왕소 그룹에게 밀리고 만다.

그리고 궁궐을 애워싼 서경의 왕식렴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다.

 

 

한헌옹은 고려사 태조 18년(935년) 10월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어 입조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헌헌옹 등을 보내어 가서 회보하게 하였다"는 기록에 보이는 인물이다.

 

관헌은 936년 9월에 백제와의 마지막 전쟁 일리천전투에서 유금필과 함께 용맹한 기병 9천 5백명을 이끌었던 장군이다.

 

기오에 관한 기록은 남겨진 것이 없으나 그의 9세손 죽산박씨 박인석의 묘지명에 의하면 기오는 고려 최고의 직위였던 삼한공신 삼중대광이었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죽은 이후 혜종과 왕요- 왕소의 형제의 왕위계승싸움은 치열했는데, 고려사가들은 한결같이 왕경(김수원), 김일(金鎰), 유긍달, 유권열, 왕렴(김장명), 염상, 한헌옹, 관헌, 기오 등을 왕요, 왕소의 정치그룹으로 본다. 

렇다면 김일(金鎰)은 왕요가 정종으로 등극하는데 모종의 정치적인 역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김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소판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신라 진골 출신이라는 점

 

2. 君 왕요, 왕소의 정치그룹에서 상위의 위치에서 활동했다는 점

 

3. 비문에 등장하는 왕경(김수원), 왕렴(김장명)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

 

4. 탑비건립년도인 942년에 생존해 있던 인물이라는 점

 

참고로, 휘 순웅 대장군(또는 상장군이며, 경주최씨대동보엔 시중으로 명시되어 있다)이 강릉김씨 선환의 3녀와 혼인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릉김씨족보와 경주김씨족보에 이 기록이 동시에 나타나며, 경주최씨 대동보엔 순웅의 따님이 경주최씨 최승로의 손자 최주(崔周)와 혼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징효대사 탑비에 새겨진 김일이 경순왕의 아드님이 분명하다면, 강릉김씨 김순식의 두 아들 수원, 장명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여겨지는바 김일 태자가 아드님 순웅의 혼인을 직접 주선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원(周元)-신(身)-자사(紫絲)-동정(東靖)-영진-식희-춘용-굉보

                                                             영길-선강-강명-수웅

                                                                     선희-  예- 밀

                                                                               육

                                                                               필

                                                                            대명주원부인(태조14비)

                                                             

                                                                      순식-수원-정목부인(태조8비)

                                                                               장명

                                                              영견-견술

                                                              영환-선환-광열

                                                                              광육

                                                                              경겸(사위)

                                                                              강명(사위)

                                                                             김순웅(사위)

                                                                              원충(사위)

                                                        

                             <참고: 강릉김씨계보>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소생 태자 휘 일(鎰)의 자(字)는 겸용(謙用)으로 알려져 있다.

 

겸용이란 자(字)는 동국사략(권근, 1403년)에 처음 등장한다.

동국사략(권근 1403년)은 고려사(정인지 1451년), 고려사절요(김종서 1452년)보다 50년 정도 연대가 앞선다.

 

동국사략은 1402년(태종2년) 6월에 왕명에 따라 유학자 권근(權近 : 1352~1409)을 중심으로 하륜(河崙), 이첨(李詹) 등이 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에 완성한 것으로 단군에서 삼국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일명 〈삼국사략〉이라고도 하는데 8권으로 되어 있으며 활자본이다.

 

동국사략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서라벌에 와서 만났는데..."

 

고려사 제2권 세가2 태조 신묘 14년(931)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신묘 14년(931년)

 

봄 2월 정유일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귀순할 뜻을 알려왔다.

 

 

이처럼 동국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모두 태수 겸용으로 기록되었는데, 931년, 이 당시 휘 일(鎰=謙用)은 대략 20세 초반의 약관의 나이였다.

태수라고 하면 흔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맡는 직위라고 생각하지만, 고려사 기록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태조 신성대왕 무인 원년(918년)에 궁예에게 귀부했던 왕건도 그의 나이 18-20세에 금성태수가 되었다.

이처럼 당시 태수는 왕건의 경우처럼 젊은 나이에도 맡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제2권 세가2 태조 신묘 14년(931)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신해일에 왕이 신라로 갔다. 이날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 경내에 이르러 장군 선필(善弼)을 먼저 보내 신라 왕의 안부를 물었다.

신라 왕이 명령을 내려 백관들은 교외에서 왕을 영접하고 자기 사촌 동생인 상국 김유렴(金裕廉)은 성문 밖에서 왕을 영접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 자신은 정문 밖에 나와서 왕을 맞으면서 절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답배하였다. 신라 왕은 왼쪽으로, 왕은 오른쪽으로 궁전에 오르면서 서로 앞서기를 사양하였다.

 왕이 수원으로 온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신라 왕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때 회견 석상에는 정분과 예절이 극진하였었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을 때에 신라 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에게서 심중한 침해를 받고 있으니 이 통분한 사정을 어찌하겠소?”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니 좌우 신하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왕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여름 5월 정축일에 왕(고려태조)이 신라 왕, 그의 태후,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 김유렴(金裕廉), 잡간 예문(禮文),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 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餘), 관봉(寬封),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계미일에 왕이 돌아오는데 신라 왕이 혈성(穴城)까지 나와서 전송하고 김유렴을 인질로 삼아 왕을 수종케 하였다. >>

 

그렇다면 935년 신라를 고려로 양국하기에 앞서 931년 고려태조에게 특별히 사신으로 보냈던 그 겸용은 누구였을까?

 

천년의 신라를 고려에 양국하기 위해 보내는 매우 중요한 일에 특별임무를 부여받고 고려태조에게 달려갔던 겸용(謙用)은 단순히 보통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김부대왕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하고, 김부대왕과 양국의 뜻을 같이하고 있었을 것이며, 사신으로 보낼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 조건에 만족하는 인물로는 경순왕의 왕자밖엔 없을 것이다.

 

1772년 간행된 경주김씨족보엔 경순왕의 태자의 궐명(闕名)을 겸용(謙用)이라고 기록하면서, 참고 문헌으로 동국사략을 소개하였다.

 

 

 

                                                  <1772년 경주김씨족보>

 

 

 

월성가승에서도 경순왕-겸용-순웅-인위의 계보를 밝히면서 동국사략을 참고 문헌으로 이어놓았다.

 

 

 

 

 

인원왕후(숙종비)의 아버지 경원부원군 김주신을 비롯한 김덕운 등 계림군파 후손들은 동국사략에 기록된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태자(太子) 겸용(謙用)으로 동일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772년부터 이미 경주김씨족보에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태자의 궐명(궁궐에서 부르는 이름)을 겸용(謙用)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이처럼 태자의 궐명이 겸용(謙用)이었다는 사실이고, 경순왕의 양국의 뜻을 태조 왕건에게 전달했던 태수 겸용(謙用)이 곧 태자 겸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겸용을 징효대사 탑비에 새겨진 김일(金鎰)과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신묘 14년(931년)의 기록,

 

봄 2월 정유일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귀순할 뜻을 알려왔다.

 

2. <고려사> 제2권 세가2 태조 신묘 14년(931년)의 기록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3.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문(942년, 국보612호,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에 새겨진 소판 김일(金鎰)

 

 

이 세개의 사료는 서로 해석적 평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징효대사탑비문(942년)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란 이름과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14년(931년)기록된 겸용(謙用)이란 이름을 동일인(鎰=謙用)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김창현 교수의 견해-징효대사 탑비문의 김일은 경순왕의 아들라는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높다.

김창현 교수의 견해를 따른다면 왕자 김일((金鎰)은 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경순왕과 함께 고려로 들어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울러 김일은 마의태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 더 정확히는 강원도 인제 금부리에서 신라부흥군을 이끈 마의태자는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어째서 왕자 김일(金鎰)은 지금까지 무려 천년동안이나 개골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로 알려져 오게 되었을까 의문이 생긴다.

 

E.H. 카아(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규정하면서, 역사는 사료와 해석의 결합이라고 했다.

 사료와 해석의 결합이 역사가 된다는 카아의 역사학적 통찰은 천년동안 마의태자로 알려져 왔던 왕자 김일(金鎰)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1145년, 고려 인종23년)이다. 그리고 136년 후에 쓰여진 일연(김견명)의 삼국유사(1281년, 고려 충렬왕7년)에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삼국사기(1145년)와 삼국유사(1281년)는 개골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친 마의태자에 대해 네러티브형식(이야기식)으로 서술해 놓으면서 그 왕자의 이름을 기록하진 않았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태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고 막내 왕자는 머리를 깎고 회엄종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범공이라 하였고 후에 법수사,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후세 사람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자, 즉 마의태자를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첫째 왕자로 태어난 김일(金鎰)로 간주했던 것 같다.

  경주김씨 모든 족보에 경순왕의 첫째 아들 일(鎰)이 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한 해석적 오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한다.

 

1934년 경주김씨족보(김태훈 편저)와 역시 같은 해인 1934년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 편저)는 김일(金鎰)의 계보를 김부대왕-일-순웅-인위-원정-지예로 기록했는데, 김태훈 편저 경주김씨족보(1934년)는 개골산으로 들어간 태자로 기록했으며, 김경대 편저 신라삼성연원보(1934년)는 송희부인 석씨 소생의 왕자(奮)과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했다.

 이처럼 모든 경주김씨 족보에 김일(金鎰)을 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했다.

 

 이러니 지금까지 김일(金鎰)을 마의태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사료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한 해석적 오류로 말미암아 일(鎰)은 완벽하게 마의태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경순왕의 왕자 일(鎰)이 흥녕사 징효대사탑비(942년, 고려 태조25년)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휘 일(鎰)을 마의태자로 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휘 일(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소위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고, 토마스 S.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 쉬프트(인식 전환)였다.

 

마의태자에 대한 천년의 오해와 그 진실...그 오해란 김일을 마의태자로 본 것이고, 그 진실이란 김일은 마의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이 신라를 고려로 양국(935년)하기에 앞서 931년 태수 겸용(謙用)을 고려 왕건에게 보내어 양국의 뜻을 전했다는 그 공통된 기록에 대해, 일찍이 역사학적, 보학적 해석이 가해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마의태자 이야기가 나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실일 것이다.

인제 금부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의태자의 유적을 볼 때 마의태자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기록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어디엔가 기록이 남겨져 있다는 것, 1934년에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편저)에는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를 두 명으로, 즉, 경순왕과 송희부인 석씨 소생의  왕자 분(奮)과 죽방부인 박씨 소생의 왕자 일(鎰)로 기록했다.

 

신라삼성연원보의 김일(鎰)에 대한 기록-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록한 부분은 분명히 오류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김분(金奮, 송희부인 석씨의 5子)에 대한 기록마저 오류일까?

어느 일부분에 오류가 보인다고 해서 전체가 다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족보에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족보를 연구하는 보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다.

일(鎰)을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로 기록한 것으로 봐서 신라삼성연원보는 부분적으로 오류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록을 오류로 본다면, 인제 김부리(金富里)에서 신라부흥운동을 펼친 마의태자가 누구인지 밝힐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지고 만다.

신라삼성연원보는 인제 금부리 유적지와 함께 마의태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된다.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로 금부리에서 신라부흥운동을 펼친 왕자는 경순왕과 송희 부인 석씨 사이의 왕자 분(奮)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1년 2월 16일 

 

 

제갈량과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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