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일이다. 대학 다닐 때 어떤 인연으로 전라북도 이리 시에 있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학생기숙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함께 먹고 자고 청소하고, 아침저녁으로 법회에도 참여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그 기숙사에서 보냈던 한 달여의 시간은 내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청량했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의 풋풋함이 자연스레 내 발길을 원불교 알마티교당으로 이끌었고, 한동안 법회에도 참석했었다. 본래 종교적 심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탓에 성실한 신도로 계속 남지는 못했지만.
김태원 교무는 한인사회 초창기부터 꾸준히 봉사해온 분이다. 초대 한인회 교민상담실장을 맡은 이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왔다. 내가 여태껏 알마티에서 살며 만나왔던 사람 중 가장 순수한 분이 아닐까 싶다. 그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고 마음에 상처도 받는 모습을 간간히 보아왔다. 때론 답답하게도 여겨지는 고집 또한 그 순수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현재 투병중인 김태원 교무를 만나러 오랜만에 원불교 알마티교당을 찾았다. 언제가 보아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정원이 여전히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대문 밖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는 김태원 교무의 안색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좋아보였다.
- 1992년 7월에 알마티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이란 나라가 한국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인데, 포교 지역을 카자흐스탄으로 정하고 알마티에 원불교당을 세우시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원불교는 민족자생종교입니다. 그런 우리 원불교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26개국에 교당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세계화’를 이뤄나가며 세계적 종교로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1991년도 소련이 붕괴된 직후 당시 유엔종교기구 대표이셨던 좌산 상사님께서 여러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구소련 지역을 순방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제이주의 비극을 딛고 일어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고려인 사회를 보시고 큰 감명을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귀국하셔서 당시 대산 종법사님께 소비에트 붕괴로 고려인 사회도 혼란을 겪고 있으니 누구라도 보내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대산 종법사님께서 부르셔서 달려갔더니, “아무래도 젊은 네가 가는 게 좋겠다.” 하시며 느닷없이 알마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말씀드렸더니, 살아만 있으면 할 일은 주어진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땐 알마티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세계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종법사님 말씀 한마디에 아무 소용도 없는 한글교전 50권만 들고 무작정 알마티로 날아왔습니다. 1992년 7월 10일입니다. 딱 30년 전이네요.
- 오시자마자 법회를 여실 수는 없었을 텐데, 교당을 세우기 전엔 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선 말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카자흐스탄국립대학교에 등록해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한글학교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전문적인 교사 출신도 아닌데 당시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니까요. 그래서 알마티에 온 지 세 달만인 10월에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한글학교를 개설했습니다. 굉장했어요. 일주일에 백여 명 정도를 가르쳤으니까요. 알마티에 올 때 70kg 나가던 체중이 나중에 54kg까지 빠지더군요. 물론 그때 제대로 먹지 못한 탓도 있지만요.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이 나중에 교육원이나 카자흐스탄국립대학교에 교사로 나가고 삼성 같은 기업에 취직도 하고 했습니다.
이 일 말고도 초반엔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부친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를 설치해주는 등 고려일보 지원도 했고, 일 년 가까이 매주 기고도 했습니다. 고려극장에서 풍물패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나중의 일입니다만 우리 알마티교당 풍물패가 아시아TV에서 개최하는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카자흐스탄국립대학교 동양학과에서 한국어를 3년 가까이 가르치기도 했고, 법률대학에 한국어학과를 개설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 방금 부친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와서 예정에 없던 질문입니다만, 교무님 집안을 짧게 소개해 주시죠. 제가 알기로 대단한 원불교 집안이고 지금 동생 분인 김태성 교무도 제가 명성을 익히 알 만큼 남북교류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계신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요. 집안에 교무가 좀 많은 편이지요. 부친께서 청주사범학교 재학하실 때 원불교에 접하게 되셔서 그 후 교직에 계시면서 교무도 되셨어요. 그리고 당신의 동생 분들도 원불교로 이끌어, 제게는 작은 아버지 두 분과 고모님 한 분이 교무가 되셨지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인 김태성 교무가 제 동생인데, 저랑 달리 능력이 출중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북한에 혼자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 1994년도에 교당을 짓기 시작하셨지요? 지금 보기에도 교당 규모가 작지 않은데, 건립 당시엔 그 성대함에 아주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교당을 건립하느라 별일을 다 겪고 엄청난 고생을 하셨을 것 같은데, 당시 얘기를 한번 해주시지요.
93년에 시작은 했는데 본격적인 것은 94년부터였지요. 그런데 교당을 짓기 시작할 무렵 잊을 수 없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교당 건립 훨씬 전의 일입니다. 차를 몰고 쑴 근처를 지나는데 길가에 어떤 사람이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거예요. 언뜻 보니 옷차림새가 한국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차를 세우고 다가가보니 한국인이 맞았습니다. 한국에서 한 고려인에게 물건을 실어 컨테이너를 보냈는데 대금을 보내주지 않아서 알마티에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려인을 만나 대금 지불을 독촉하니까 돈은 안 주고 깡패를 시켜 여권을 뺏고 두들겨 팼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분한테 경찰에 신고해줄까 물었더니, 그건 됐고 어떻게든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예요. 여권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해줘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고심 끝에 모스크바에 있는 주러시아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 연결됐던 담당 영사가 나중에 여기 한국대사로 오셨던 이병화 씨인데, 당장 도와줄 방도는 없고 어떻게든 모스크바까지만 보내주면 나머진 대사관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를 태워 보내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94년 3월 제 앞에 다시 나타난 겁니다. 그리곤 제가 교당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비행기 표 값이라며 느닷없이 벽돌 5000장을 트럭 8대에 실어 공터에 내려놓고는 가버렸습니다. 사실 그때 교당 지을 부지는 확보했지만 여러 가지로 엄두가 나지 않아 선뜻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벽돌이 생기자 누가 다 집어가기 전에 일단 시작하자 해서 짓기 시작한 거죠. 제가 인부 네 명을 데리고 직접 짓기 시작해서 4년만인 97년에 완공했습니다. 벽면이나 바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디 한군데 똑바른 데가 없습니다. 모두 아마추어인 제가 직접 미장한 거라 그렇습니다. 그래도 25년이 지났는데도 망가진 데는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건 없었습니다. 특히 건축허가를 받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그땐 뒷돈 주지 않고는 허가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명색이 교무인데 뒷돈을 줄 순 없잖아요? 집사람이랑 매일같이 관청에 가 앉아 있었지요. 결국 일 년 만에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현재 법회는 어떻게 운영하고 계시는지요? 무례한 질문입니다만, 교세는 많이 확장하셨습니까?
우리 원불교는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지양하는 편입니다. 급격한 교세 확장보다는 종교간 평화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의 교류와 봉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포교가 이뤄지도록 노력합니다. 제가 한때 한인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산 종법사님께서 저를 알마티로 보내실 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가서 무엇보다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너무 교당 일에 연연하지 말고 봉사하라는 말씀이셨지요.
교인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법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병 치료를 위해 한국에 나가 있느라 교당을 몇 달간 비웠는데,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법회를 열어 수행도 하고 교리 공부도 했다고 하더군요.
- 한인회 창립부터 꾸준하게 참여해 오셨습니다. 4년간 감사로 봉사도 하셨고 선관위원장을 두 번 하시면서 한인회장 선거를 주재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지켜보는 입장이신데, 대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특별히 한인회에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신지요.
저는 한인회가 고마울 뿐입니다. 한인회란 조직이 있어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니까요. 저는 우리 한인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인사회 규모가 작은 편인데, 초창기 세워놓은 사업이나 행사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인회장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챙긴다든지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한 번도 없지 않았습니까?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전통과 관행이 앞으로도 우리 한인사회를 지켜줄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여기 경제상황이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교민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인회 임원 분들도 각자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지만, 그레도 좀 더 세세하게 주변을 살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다시 교당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문득 20여 년 전 일이 생각났다. 꽃나무 하나가 너무 예뻐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나를 보고 김태원 교무가 당장 파가라고 했었다. 그때 내 집 마당으로 옮겨 심은 나무가 지금 내 키보다 두 배 넘게 자라 매년 아름다운 꽃을 내게 선물한다. 알마티교당 대문을 나서는 내 등에 얹히는 김 교무의 선한 눈매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합장하고 기도했다. 부디 쾌유하소서.
박 영 식 (한인신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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