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터가 길지인가 흉지인가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대개 청와대터를 흉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청와대 터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그런 논란이 제기 될 때마다 터에 대한 검토를 하였지만
줄 곳 그 자리를 지켜왔다.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의 말로가 좋지 않다고 하여 청와대 터가 나쁘다고
설명하는데 청와대 터는 대한민국의 심장부로 나라를 대표하는 곳이다.
청와대 터의 좋고 나쁨의 판단은 대한민국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와 관계가 더 깊다고 본다.
조선조시대 경복궁 터에 대하여도 지속적으로 찬반양론이 존재하여 왔다.
세종조시대 경복궁 터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자 세종대왕은 황희정승으로 하여금 조사 보고케하고
직접 신하들을 데리고 백악산(북악산)에 올라 한양땅과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경복궁 터에 대한 논란을 잠재웠다.
그럼에도 이후에도 경복궁 터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었다.
임진왜란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경복궁터는 고종대에 와서야 다시 조선의 정궁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경복궁 뒷편에 청와대가 자리 잡았다.
청와대 터가 자리 잡고서도 청와대 터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청와대터를 지켜왔다.
청와대 터를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 터가 천하의 제일복지라고 굳건히 믿고 있다.
청와대 터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은 가장 빠른 기간안에 세계경제 10대국으로 성장하여 왔고
앞으로도 그 성장의 속도를 더해 가리라고 생각된다. 오늘 아침 기사를 검색하다보니
청와대 터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여기에 옮겨둔다.
수도이전의 논란 속에서도 청와대 터를 지켜온 것은 대한민국의 국운이라고 본다.
북악산 두꺼비 바위 아래 자리 잡은 청와대가 대한민국의 경제적 도약을 이끌어가는
천하제일의 복지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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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규 교수 國運風水] 청와대 터는 吉地인가 凶地인가? 세종대왕은 명당이라고 했는데… |
입력 : 2015.01.31
청와대 터는 풍수상 길지인가, 흉지인가? 최근 청와대 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개 흉지라는 답변을 듣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통령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것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흉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대통령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음을 근거로 든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것과 한류 문화 대국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이지만 대통령들의 통치력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일부였으므로 경복궁 터를 풍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북악산을 중심축으로 한 청와대 본관과 약간 동쪽으로 비켜 중심축을 잡은 경복궁. / 김두규 교수 제공
경복궁 터에 대한 풍수 논쟁은 오래됐다. 흉지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1433년(세종 15년) 당시 풍수 학인(學人) 최양선이었다. 그는 경복궁 터가 아니라 현재 가회동 일대가 '혈처(집 짓기에 좋은 곳)'라고 임금에게 아뢴다(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가회동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최양선의 주장에 대해 세종은 영의정 황희 등 대신들과 풍수 학인들로 하여금 남산과 북악산을 직접 올라가 살피게 한다. 의견은 경복궁 터가 길지라는 다수파와 흉지라는 소수파로 나뉜다. 그런데 소수파가 승복하지 않자 며칠 후 세종이 직접 북악산을 올라가 살핀다. 세종은 "오래 살피고, 찬반양론을 듣고, 또 반복해서 살핀 결과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렇듯 경복궁 명당론이 '확정'되었음에도 흉지론이 떠도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오해한 데서 비롯했다. 최 교수는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청와대 터가 '신들의 거처'라고 평한 적이 있다. 단지 큰 교회·사찰·성당이 들어서면 더 좋았을 곳이란 뜻이었는데 이를 사람 살기 적합지 않은 곳이라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호지무전미(好地無全美)'라는 풍수 격언이 있다. 제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최양선이 말한 대로 경복궁 터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조선 초 이곳에 궁궐을 짓던 건축가들(정도전·김사행 등)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풍수적으로 보완했다.
우선, 경복궁 중심축을 북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비켜 잡았다. 왜냐하면 북악산이 동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린 데다 험석(險石)이 많아 그 바로 아래 건물을 세우면 위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백 년 후 서울을 찾은 서양 건축학자도 같은 의견이었다. 1986년 경복궁을 찾은 독일 하노버대학교 건축학과 란트체텔(Landzettel) 교수는 북악산과 경복궁의 입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악산은 궁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에게 불운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산 모양이면서도 동시에 좌우 반듯한 대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험한 산 아래 궁궐을 지은 조선 건축가의 위대함을 보았다. "뾰족한 북악산과 동쪽으로 길게 흐르는 능선을 감안해 궁궐 터를 (약간 틀어) 잡은 것은 탁견이었다"고 평한다.
또 다른 풍수적 보완책도 있다. 북악산처럼 험한 바위가 많은 곳은 소나무를 심어 그 강기(剛氣)를 완화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왕기를 키웠다는 건국 설화와 맥을 같이한다. 되도록 많은 소나무를 심는 게 좋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청와대 본관을 증·개축(또는 신축)하는 날이 온다면 풍수적 지혜를 활용해 콘크리트 건물을 소나무를 활용한 한옥으로 바꾸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마음도 편해질 수 있다.
첫댓글 "누구는 어떻다고 말했다"라는 남의 말씀의 인용은 많은데,
"나는 어떻게 판단한다"라는 자신의 주장은 없어, 늘 앙꼬없는 빵같다는 생각입니다
풍수칼럼 115번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청와대와 경복궁의 입지에 대한 풍수적 의견은 여러차례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에도 충분히 의견을 썻는데 안보이시나요? 여러의견들이 많지만 저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兀山 (allmee) 위에 실린 국운풍수를 보고 한 말인데.... 올산님의 글은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sonkwcc 넵 저도 그것은 궁금합니다 청와대 터를 풍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청와대에 근무하였거나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명당이라고 했다고요, 세종은 불교뿐만 아니라 성황당.무당.풍수지리에도 관대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이롭지 못다하다 해 1444년(세종26년)부터는 왕자.종친가로 전전하다가 1450년(세종32년) 2월 16일 향년 54세로 8남인 영응대군 집에서 죽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이성무의 방촌 황희 평전 p137, p138)
세종대왕은 위대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도 경복궁내 경회루 앞에 위치합니다
소생이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일본의 에도성이 최고의 흉지, 다음이 경복궁, 중국의 자금성은 천하대지라고 판단합니다
현장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할 것인가는 최종의사결정권자의 력량입니다. 최종의사결정권자는 다양한 의견을 듣지만 최종의사결정을 할 때는 고뇌의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항상 존중되에야 한다고 봅니다. 언젠가 나에게 그런 기회가 부여되었을 때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의 흥망이 무상하고, 가정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선영을 잘못쓴 것에 기인하는 것이 많음을 현장에서 확인하였다.
오너의 결정이 결국 잘못된 것도 많은데, 그들에게 국외자가 뭐라 할 것도 없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태는
존중할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입니다. 인터불고 권회장 같은 분은 제외하고...
개인적 사항에 대한 문제점이나 비판적 의견은 자문을 받았을 때 제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제가 감히 말할 주제는 못 되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집터가 아닌 바에야 개인의 길흉으로, 그것도 결과론으로 그 터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두꺼비바위가 , 경복궁의 동쪽으로 약간 치우침 같은 고려나 현상에 의미를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경복궁과 청와대 터는 여러의견들이 있었지만 당시의 최종의사결정권자는 최선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 선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