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리비도는 금기로 치닫고 시인은 그 위반의 고통으로 쓴다
- 밀봉의 연서 같은 꽃
보들레르의 꽃
금단의 비밀정원에서 훔쳐온
밀봉의 연서 같은
■ 리비도의 역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리비도의 직접적인 분출을 막는 '둑(금기)'을 쌓는 것이라고 보았다. 근친상간의 금기 같은 강력한 '법'은 리비도를 억압하는 기제이다. 둑에 막힌 물이 수압을 높이며 좁은 틈새나 우회로를 찾듯, 금기에 막힌 리비도는 단순한 본능적 배설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을 향한 강렬한 '갈망'으로 변모하며 예술로 승화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논의를 언어학적으로 확장하여, 욕망이 어떻게 '법의 산물'인지를 입증한 이는 라캉이다. 어린아이는 처음에는 생물학적 '욕구'를 가지만, 언어라는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 아이의 원초적 충동은 언어라는 좁은 둑에 갇힌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법'이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근원적 결합을 가로막을 때, 아이는 비로소 '결핍'을 경험한다. 라캉은 욕망이란 바로 이 결핍에서 자라나는 것이라고 봤다. 법이 "안 된다"고 말하며 금기를 설정하는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욕망하는 주체'가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하지 말라'는 법의 명령과 '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며 빚어낸 거대한 드라마다. 그 드라마의 첫 장면에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있었고, 그 무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동력원으로 '리비도'가 자리한다. 선악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닌, 인간에게 부과된 최초의 금기로서의 '경계'였다. 에덴이라는 완벽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했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이른바 '의식 이전의 평온' 상태였다. 하지만 선악과라는 금기는 역설적으로 인간 안에 잠자고 있던 리비도로서의 생의 에너지를 일깨웠다. 리비도는 단순히 육체적 욕망을 넘어 자아를 확장하고,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며,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근원적인 충동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리비도는 금기를 깨트린 것이다. 이 선택으로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돼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 내던졌다. 인간은 원죄의식을 지니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아 또한 탄생했다. 리비도가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독립된 주체가 되었다.
디카시가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할 때, 날시가 유발하는 강렬한 시적 충동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느꼈을 그 형언할 수 없는 유혹과 충동과도 같은 맥락으로 봐도 좋겠다. 그것을 프로이트 식으로 보면 리비도의 작동이다. 선악과와 리비도의 만남은 인간에게 '원죄의식'과 함께 잃어버린 결핍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창작의 숙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예술가도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시인은 내면의 리비도에 이끌려 금기를 꿈꾸고, 그 위반의 고통 속에서 시예술을 꽃 피운다.
디카시 「보들레르의 꽃」은 금기와 위반이라는 관점에서 리비도의 작동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고향집 작은 연못가에 이름 모를 꽃이 피었다. 그 꽃을 보들레르의 꽃이라고 명명했다. 이 디카시는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을 제목으로 차용하여 문화적 상징으로 가져온 것만으로도 그 의미맥락은 엄청나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근대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에 가깝다. 보들레르 이전의 시는 여전히 도덕과 고결함, 자연과 이상을 노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보들레르는 악과 타락, 권태와 혐오, 육체와 죽음을 시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묻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악의 꽃일 수는 없는가? 보들레르는 근대 도시 파리의 부패, 죽음, 그리고 인간 내면의 추악한 욕망이라는 '금기'를 정면으로 다뤘다.
금단의 비밀정원에서 훔쳐온
밀봉의 연서 같은
디카시 「보들레르의 꽃」은 보들레르의 금기와 위반의 문화적 상징을 끌어온 것이다. 고향집 작은 연못에 피어 있는 꽃은 보들레르의 꽃으로 은유됐다. 그것은 다시 금단의 비밀정원에서 훔쳐온 것 밀봉의 연서 같은 것이라고 직유까지 덧붙여 이중 비유 구조로 확장된다.
직유는 존재와 존재를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발견해 잇는 것으로 “~같은 -같이, -마냥, -하듯, -인양처럼 매개어를 사용한다. 흔히 직유는 시의 수사에서 가장 초보적인 비유로 인식된다. 그러나 시를 쓰려면 이 직유부터 구사하는 법을 습득해야 한다. 졸저 『시창작입문』에서 안도현 시인이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라는 시를 읽고 자기 식대로 직유법을 연습해 보지 않는 문학도가 있다면 그런 사람이 시인이 되기는 영 글렀다고 한 것(안도현, 『안도현의 내가 사랑하는 시』)을 인용한 바 있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한 잎의 女子」
이 시는 직유로도 얼마든지 멋진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직유는 매개어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시키면 비유가 성립하니 모두들 직유를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직유도 심미적 의미론적인 새로운 인식과 발견이 전제돼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각기 고유한 실체를 가진다. 직유는 이 개별적인 두 사물을 억지로 하나로 합치지 않고 "A는 B와 같다"고 함으로써 A와 B 사이의 거리를 유지한다. 개체 간의 '거리'는 타자를 흡수하지 않고, 타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디카시 「보들레르의 꽃」에서 직유의 원관념은 보들레르의 꽃이다. 이 디카시에서 날시를 포착할 때 보들레르의 꽃, 즉 악의 꽃이라고 제목으로 먼저 호명했다. 그저 평범한 꽃을 악의 꽃으로 호명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리비도의 분출에 의한 것이다. 이 디카시에서는 날시를 은유적으로 포착했지만, 그것은 확정성을 드러내며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의 문화적 상징으로까지 뻗어나간다. 이를 문자기호로 직유화됨으로써 다시 한 번 의미는 더 팽창한다.
평범한 고향집의 작은 연못가에 자란 털머위 꽃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금기와 위반의 원죄의식까지 표상하는 것으로 읽혔다. 금단의 비밀 정원에서 훔쳐온 밀봉의 연서는 바로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은 서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이 다루는 금기의 에로티시즘도 환기한다. 고향집이라는 근원적이고 순결한 공간에서 '훔쳐온 연서'와 같은 비밀스러운 욕망을 발견한 것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위반의 본능인 리비도적 표출에 기인한다.
보들레르
■ 천재 예술가의 요절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그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만들었지만, 당대는 천재 시인의 작품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처럼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결과 보들레르는 더욱 궁핍 속으로 빠져 들었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는 환멸 속에서 병들고 지쳐 46세에 요절했다. 천재 예술가들은 왜 요절하는가. 천재 예술가는 세계를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하고 과도하게, 깊게 감각하며 받아들인다. 이 감각의 과잉이 작품을 빚어내지만 동시에 삶을 빠르게 소모시킨다. 천재 예술가들은 삶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린다. 보들레르의 퇴폐와 향락, 반 고흐의 광기, 실비아 플라스의 우울은 모두 예술을 낳은 힘이자, 삶을 무너뜨린 파라독스였다.
괴테, 피카소 같이 천수를 누리는 천재 예술가들은 요절하지 않음으로써 ‘비극적 신화’를 만들지 않는다. 천재 예술가의 요절은 비극적 서사를 만들고, 그것은 신화를 강화한다. 어떤 천재 예술가는 채 성숙도 하기 전에 자기 예술을 이미 끝까지 밀어붙여 버린다. 그 이후의 삶은 반복처럼 느껴지고, 더 나아갈 창작 지평을 열지 못한 채 공허에 빠져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도 한다. 예술은 삶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삶을 전복시킬 수도 있어서 예술의 천재성도 양날의 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