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安國寺)
2015. 12. 12

안국사(安國寺)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광해군 6년(1614년)에는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려고 이 절을 눌려 지었고, 사고를 지키는 수직승의 기도처로 삼았다. 그 위 영조 47년(1771년)에 법당을 다시 지었고, 나라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찰이라 하여 절 이름을 안국사(安國寺)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1910년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 역할을 하였다. 1989년에 적상산 양수발전소 위쪽 댐 건설로 절이 수몰 지역에 포함되자 원행 스님은 호국사지였던 현재 자리로 안국사를 옮겨 세웠다. 청하루를 지나 앞마당에 들어서면 적상산을 배경으로 단아한 모습의 극락정이 왼쪽에는 천불전과 성보박물관이, 오른쪽에는 지장전과 범종각 등이 자리 잡고 있고, 아래로는 선방과 호국당, 그리고 호국사 비가 있다. 특히, 천불전은 “선원록”을 봉안했던 적상산 사고 건축물로 현존하는 유일한 사고 모습이다. 극락전은 “인욕바라밀” 학이 단청을 하였다는 유명한 학단청 설화를 알 수 있듯 오른쪽 창방 쪽에는 단 하루 분량의 단청할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한 성보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의 불상과 탱화, 불교 유물과 도자기 등 500여 점 이상을 전시하고 있다


안국사 극락전(安國寺 極樂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1050
극락전은 적상산성 내의 유일한 고찰인 안국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으며,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다포계의 건물이면서도 맛배 지붕으로 조성한 특이한 형태이며,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으로 되어 있다. 학(鶴)이 단청을 하다가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月印) 대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초기 무학(無學)대사가 중창하였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중수하였다. 조선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사고(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가 적상산성 안에 설치되어 관군과 승병이 주둔하는 호국의 성지가 되었는데, 사찰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고 전한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木造阿彌陀三尊佛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
이 불상은 극락전 내의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세음조살, 우측에는 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불상은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작품의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 삼존상은 모두 얼굴이 각이 지고 넓적하며, 턱은 좁고 목은 짧으며, 어깨는 움츠리고 허리는 약간 구부리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 주름과 손 등이 하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록 삼존상은 조설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존상의 형태로 볼 때,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좀더 평면화된 얼굴과 가슴. 경직성이 보다 진행된 점 등은 17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67호
전라북도 무주군 정상면 산성로 1050
이 괘불탱화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천신스님과 의견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7.50m, 세로 10.75m이다. 가운데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 보현 관음, 대세지등 네 보살과 다보여래, 아미타여대 등 여섯 분을 협기보살로 모신 석가칠존도(釋迦七尊圖)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보살들의 둥그런 얼굴과 밝은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며, 석가모니 뒤의 광채를 금색으로 채색하고 여백에 구름무늬를 넣은 점이 매우 이채롭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 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 등에 따라 맞는 것을 봉안한다. 이 그림은 조선 영주 4년(1728), 안국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조성한 것이다.



범종(梵鐘)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8호
이 범종은 1788년(조선 정조 12년)에 조성된 곳으로써, 범종각에 안치되어 있다. 종신의 형태는 입구가 약간 벌어진 형태이며, 천판(天板) 위에 용뉴(龍紐)가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조선시대 범종의 정통을 계승하면서 외래 양식을 가미한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부 종신(鐘身)에 주성기(鑄成記)가 방형곽을 이루면서 양각되어 있어, 범종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또한 주성기에 보이는 주조장(鑄造匠)인 이만중(李萬重)과 권동삼(權東三)은 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이는 주조장의 계보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상산성 호국사비(赤裳山城 護國寺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
호국사비는 적상산에 지은 호국사의 창건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로 있던 윤명은(尹鳴殷)이 창건비용을 부담하여 지은 절이나, 1949년 여수사건 때 불 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적상산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쌓인 전혜의 요새로, 고려 말에 최영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산에 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부분적으로 성을 쌓았다. 그후 성 안에 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사고를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사고 보존이 어렵게 되자, 다시 승군(僧軍)을 모집하기 위해 이 호국사를 짓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