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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국립박물관 대학에서 엊그제 강의한 강의안입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의 국가의식을 강조한 최초의 역사서이고 고전입니다. 비록 현재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보이더라도 우리의 고전을 다듬고 키우는 일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주삼국사기 개정증보판 5책을 간행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고전 三國史記
1. 머리말
{삼국사기}는 한국 고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 고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문화전통을 살리는 주축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인식은 상당히 곡해된 것이다. 즉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의 태두인 단재 신채호가 사대주의 사서로 규정한 것이 지금까지 전혀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단재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의 주권이 상실된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 그가 산 시대는 조선왕조가 힘없이 일본제국에 병합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주권을 찾기 위해서는 즉 배타적, 투쟁적 민족의식을 강조했다. 이를 비유한다면 민족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삼국사기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부식을 자주적인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상 1천년의 자주정신을 망각한 사대적 역사서로 규정하고 이후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의 기초가 되었다고 갈파했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강소국을 건설하고 있다. 따라서 상황이 단재의 상황과는 엄청나게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국을 선진문화국가로 만드는 것이 이시대의 제1과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삼국사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에는 학문적 깊은 연구에 의존하여야 하지 선동적인 이념을 통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삼국사기의 편찬과정과 편찬목적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국가의 관찬사서이다. 고려 인종 19년(1141)에 수상직에서 물러난 김부식을 삼국사기편찬이란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그에게 8명의 젊은 관료를 조교(參考職)로 참여하게 하고 그 임시관청의 책임자는 정습명이었다. 물론 이런 관청을 설치하게 된 데에는 편수책임자인 김부식의 제안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때 김부식의 나이는 68세였다. 1145년에 김부식은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국왕에게 바쳤다. 이 책을 바치면서 그는 편찬목적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나라마다 자기의 역사를 가져야 하는 데 우리 역사는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당시 우리나라의 학사대부들은 중국의 역사와 경전에 대하여는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시정할 목적으로 편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시대의 역사는 고구려에서 국초부터 써온 영양왕때까지 留記 100권이 있었으며 이를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 5권이 있었으며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이 편찬한 書記가 있었으며 신라에서는 진흥왕대에 거칠부가 편찬한 國史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조에 들어와 광종 년간에 설치된 史館에서 {구삼국사}를 편찬했다. 삼국사기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직접 하고 있지 않지만 이는 삼국사기를 쓴 기본 대본이었다. 이를 통털어 '古記'라고 칭하면서 이는 내용이 소략하고 문장이 거칠어서 역사에 교훈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그가 역사에 교훈을 주여야 함은 군주와 신하의 기록, 백성생활의 안정 여부, 국가의 흥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대 '구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당나라군에 의하여 최후의 수도인 평양과 부여가 함락되었을 때 그 전 주민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이후 중국 측 자료 즉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을 통해서 최후의 멸망과정을 보충해 넣었음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이 입증된다.
3. 김부식의 생애와 삼국사기 편찬의 시대적 배경
김부식은 경주에서 살았던 향리 신분에서 아버지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의 형제 중 4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료로 진출한 것은 자신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형 부의와 부식 동생 부철은 문관 중 최고의 명예직인 한원의 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활동한 숙종 대에는 북방으로부터 여진족과의 쟁투가 있었다. 여진정벌에 패배한 숙종은 아들 예종에게 이를 칠 것을 유명으로 남겼다. 이에 예종은 오랜 준비 끝에 윤관으로 하여금 그들의 소굴인 지역을 급습하여 이 곳에 9성을 쌓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지역이 그 범위였다. 그러나 이 지역을 지키기에는 대단한 희생이 따랐다. 그리고 여진족은 곧 이어 금나라를 건국하여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나타났다. 이에 송나라에서는 거란의 요나라에 당한 수치를 보복하기 위하여 여진족과의 통교를 희망했다. 숙종으로부터 예종, 인종은 송나라 학문을 수용하여 학문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왕에게 경연을 열어 왕과 신하들이 학문을 토론하는 제도가 마련되었고, 궁궐 내에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런 경연의 임무는 한림원의 학사들이 주로 담당하였고, 김부식 형제들도 이에 참여했다. 그리고 금나라의 건국은 야만인, 종속인으로 보았던 금나라의 흥기는 고려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고려 내에서는 과거를 통해 진출하는 신진관료와 문벌귀족간의 쟁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숙종조에 새로 진출한 신진관료의 대표자인 한안인이 문벌귀족인 이자겸 세력에 축출되었고, 이후 이자겸의 세력은 왕실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인종의 외할아버지 겸 장인으로서 왕위를 넘겨보다가 그 도당인 척준경에 의해 체포되자 이 난 때에 개성의 궁궐이 불에 탔다.
그 결과 이자겸 일파가 대거 축출되자 김부식 3형제가 재상직에 오르게 되었고, 척준경을 배척한 정지상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풍수도참설에 의해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나 서경파의 조작설이 탄로나자 서경천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묘청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는 책임을 김부식이 맡았다. 묘청은 부하에게 목이 베여져 진압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반란은 의미를 상실했다. 그가 금국정벌론과 칭제건원은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다. 이후 김부식은 정치를 주도하는 수상의 직에 오르게 된다. 김부식은 당시 유학의 대가였고, 문장가로도 유명했다.
이처럼 김부식의 시대는 고려 문벌귀족의 반란,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기도 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그는 역사를 통해 왕조의 안정을 기하려는 논설을 폈다.
4. 삼국사기의 편찬체재와 내용
삼국사기는 당시 중국에서 달성한 기전체라는 방식으로 삼국이 역사를 썼다. 이는 본기와 연표, 지, 열전으로 역사자료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 모범은 신당서였다. 본기는 신라본기 12권,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이고 연표 3권 직 9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읽히는 역사로서 제왕의 정치에 도움을 주기 위해 편찬된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수용하여 그 내용을 비교 검토하였으며, 찬자의 31편의 사론을 실었다.
본기는 자연변이, 각 국왕의 행동과 명령의 반포, 전쟁의 양상 등이 수록되었고, 지는 문화와 통치제도의 내용을 분류하여 실은 것이며 열전은 대표적인 신하들의 전기자료라고 할 수 있다.
5. 삼국사기에서 강조한 점
삼국사기 에서는 삼국의 흥망을 다루었으니 삼국이 개국하여서부터 발전하는 모습과 멸망하는 과정을 본기에서 다루었다. 이는 국가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국가라고 인식한 것은 정사와 백성, 토지를 국가의 삼보라고 칭한 점에서 그 개념을 확인할 수 있고, 그의 국가의식에는 당시 왕조 국가를 칭했다.
5.1 국가의식
삼국의 국가의식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외적의 침입을 당하여 생명을 바친 신라의 화랑과 김유신 태종 무열왕 문무왕의 행동을 볼 수 있다. 김춘추의 생명을 건 외교활동을 민족이라는 후대의 개념을 통해 비난함은 옳지 않다. 당시 나라의 존립을 위해서 사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은 통일후 당군을 몰아내는 전투를 했다고 해서 설인귀로부터 불효, 불충한 행동이라고 맹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그는 유명한 문장가 강수를 시켜 설인귀에 대한 답서를 썼다. 여기서는 조목조목 설인귀가 제기한 대목을 설파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문무왕을 그 아우 김인문으로 교체하려는 조처를 취해 배를 당나라에서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외교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왕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과 백제의 유민을 국민으로 껴 앉는 조처를 취했고, 통일전쟁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응분의 포상을 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는 죽어서도 국가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동해의 해중릉을 만들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는 역할을 다짐했다.
김유신은 일생을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였고, 왕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의 열전은 10권의 열전 중 3권을 차지하고 열전의 첫머리에 실었으며 그의 공로는 신하가 흥무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을 정도로 인식되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화랑세기로부터 기록된 사다함, 관창, 열기, 등의 수많은 화랑의 기록과 더불어 수나라 대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전.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을 당하여 죽음을 바쳐 항전한, 계백전, 밀유, 유우전 등 생명과 지혜를 바쳐 싸운 많은 애국명장의 이야기로 거의 채워져 있다.
또한 그는 고구려의 멸망원인을 논한 사론에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인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썼다. 고구려는 기자조선의 좋은 풍속을 이어 받았으며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 위험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7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역사를 가져 왔으나 중국에서 삼국 간에 싸우지 말라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침략을 당하였다. 권세가가 정권을 잡아 백성을 착취하여 민심이 이반하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유지한다는 것은 독한 술을 먹고 취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위에 있는 지배층이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은 학정을 고구려 멸망의 주원인으로 파악했다. 또한 반역자의 사전 처벌을 강조하고 있었다.
5.2 신라중심의 역사
삼국사기에서 자료적 측면에서나 사론적인 측면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강조하고 신라를 고려와 연결되는 나라로 파악한 점에서 신라사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국초에 편찬된 구삼국사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구삼국사는 현전하지 않고 있어 직접적 비교는 어렵다.
구삼국사에서는 광종 대에 편찬된 것임으로 고려왕조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점이 강조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고려 태조가 궁예의 정권에서 왕으로 추대된 후 장수왕 연간 이후에 개칭된 국호인 ‘高麗’로 개칭한 점이라든지 개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평양을 찾아가 이곳을 인위적으로 개척하고 서경분사(西京 分司)를 설치하고 개경에는 11층 석탑을 서경에는 13층 석탑을 세운 점 등에서 고려의 고구려계승 의식을 명확히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삼국통일을 이룩흐면서 삼한을 통일했다고 강조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정책적으로 내건 명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점유한 것은 신라의 강역과 인민을 지배할 뿐이어서 실제로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문화적으로도 신라문화를 계승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250년 만에 고구려의 계승을 선언했다고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초기의 고구려계승의식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하기 시작하였고, 신라의 불교 즉 원효와 의상이 국사로 추존되고, 신라의 유학자 설총과 최치원이 추증되어 국학의 문묘에 봉안됨으로써 신라문화 계승의식은 표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에 경주출신의 김부식 세력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는 의식이 표출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견훤과 궁예의 정권을 신라의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태조 왕건이 신라의 귀부를 받음으로써 신라와 고려의 계승관계가 설명될 수 있었으며 고려태조의 후비 중 낙랑공주와의 결혼 그리고 그 후손인 현종이 고려 왕실을 장악함으로써 고려 왕실에 신라왕실의 접합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었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에 전하던 자료를 지에 대거 사용함으로써 신라 후기의 문화와 제도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할 수 있었다.
3. 예를 강조한 유교적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31편의 김부식이 쓴 사론이 있다. 이에서는 유교적 예의 준용을 강조했고, 삼국의 멸망원인에서는 천시(천운), 지리보다 인화가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이는 상하의 군주, 통치자와 백성간의 화목을 강조했다. 세금의 부과, 역의 부과, 민생의 보장 등이 있어야 상하가 화목할 수 있다고 했다. 국가의 세가지 보내는 정치와 토지(영토), 인화라고 한 맹자의 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신라의 천사옥대. 만파식적, 황룡사9층탑이 3보라는 신라의 신비주의를 비난했다.
6. 맺음말
삼국사기는 한국의 역사를 삼국시대사를 정리한 기전체의 역사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나라 역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통해서 지금 판도안에 있었던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겨대고 있지만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일 수 없고 우리나라 역사였음을 삼국사기 한책이 가 웅변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중국의 기존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외국열전에 실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만주지역의 광활한 영역에 대한 설명을 제데로 하고 있지 못함은 고려 당시에 그 지역이 거란과 금나라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중국의 연호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주장한 점이라든지 중국의 황제의 명을 따라야한다고 한 점등에서 사대적 요소가 보이고 있음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조공책봉체제라는 국제적 관행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관행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독립국가로서 존립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이런 외교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공존하기 위한 외교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은 중국의 선진문화의 수용을 주장한 점에서 이후 조선조의 문화와 역사의 기조에 일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통치이념에 따라 백성생활을 통치자들이 보살펴 주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함으로써 왕조의 역사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국제적 관행은 지금의 국제적 관행과는 달리 국가 간에 평등하다는 사상이 없었고, 차등의 예가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중세의 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한국 최초의 고전인 삼국사기를 통해서 한국 고대의역사의 실상을 밝힘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이를 배격하지 말고 이를 가꾸어 감에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설씨녀전과 온달전은 일반사람의 생활모습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문체라는 명문장으로 써진 문학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료 1. 삼국사기를 바치는 글
2. 문무왕이 유조
3. 설씨녀전
4. 온달전
2. 문무왕의 유조
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싸움의 때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무리를 치고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케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수를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두루 주었고, 벼슬을 터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장수(長壽)하는 땅으로 이끌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주니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산언덕처럼 쌓여 있고 감옥은 풀이 무성하게 되니, 신과 인간 모두에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있는 이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이 묻힌 서릉(西陵)의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전할 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서책(書冊)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끝이 없을 것이나,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하라. 상복을 입는 등급은 정해진 규정이 있거니와 장례 치르는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힘쓰라. 변경의 성․진(城鎭)을 지키는 일과 주․현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도록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시행하도록 하라.
3. 설씨녀(薛氏女)는 [경주] 율리(栗里)의 평민 집의 여자였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잘 닦아졌다. 보는 사람들이 그 고움을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正谷)으로 국방을 지키는 수자리 당번을 가야 하였는데 그 딸은 아버지가 병으로 쇠약하여졌으므로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또 자신은 여자의 몸이라서 아버지 대신 갈 수도 없었으므로 한갓 근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집이 대단히 가난하였으나 뜻을 키움이 곧은 남자였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에 나가야 함을 설씨가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설씨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뜻과 기개를 자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시오!”
설씨가 대단히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니 아버지가 그를 불러 보고 말하였다.
“듣건대 이 늙은이가 가야 할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 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자식을 주어 그대의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소.”
가실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었어도 이는 저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가 혼인 날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혼인은 인간의 큰 일인데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이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잡아 예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거울을 둘로 쪼개어 각각 한 쪽씩 갖고 “이는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합쳐 봅시다!” 하였다.
가실이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씨에게 말하였다.
“이는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떠나면 이를 기를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이를 두고 쓰시오!”
드디어 작별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다른 사람으로 교대를 시키지 못하여 어언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이미 그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 하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지난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리기 위해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이 이를 믿고 군대에 나가 몇 년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이 심할 것이고, 더구나 적지에 가까이 근무함에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여 마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리요? 끝내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늙어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을 짓지 못하였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였다. 결혼 날이 되자 그 사람을 끌어들이니 설씨가 굳게 거절하여 몰래 도망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쳐다보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가실이 교대되어 왔다. 모습이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앞에 나아가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지니 설씨가 이를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후일 서로 함께 결혼을 언약하여 해로하였다.
4. 온달전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온달로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보통 사람[匹夫]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따라 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상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로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말고 꼭 국가의 말을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은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흐르는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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