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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 ( 立體派 : Cubism )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이다.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모더니즘의 가장 意義있는 발전 가운데 하나인 이 회화방식은 1907년과 1914년사이에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創始되었다. 이들의 엄격한 목표는 平面의 캔버스 위에다 견고함과 볼륨감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캔버스란 그 2차원성 또는 그 '그림의 성격'을 상실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주제'를 여러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동시에 이를 캔버스 위에서 再구성함으로써 平面들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했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도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 미술가들은 캔버스나 패널의 평면 위에 어떻게 삼차원적 세계를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해 왔다.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앞에 있는 것일수록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원근 화법을 사용하여 왔는데, 이 기법은 이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의 일루전적 깊이를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프랑스 화가 세잔느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집이나 나무, 산들을 기하학적 형태와 일치 시켰으나, 그것들을 반드시 한 시점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이 것은 어느 누구의 눈도 한곳에 정지시켜놓지 않음으로써 일상적인 시야처럼 사실과 같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이 형태들을 분리하여 식별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마음 속에서 함께 결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마다 읽어나는 과정이지만, 회화를 구성하는데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곧 전통적인 원근화법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1904년 파리에서는 세잔느의 대규모 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젊은 화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다. 동시에 빈센트 반 고호와 폴 고갱의 작품도 전시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단순성과 역동성은 미술가들의 관심을 미술의 원천으로 돌리게 하였다. 고기에는 아프리카 미술과 초기 동굴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원시적인'물건들이 오랫동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예술로서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미술가들은 원시시대의 의식(儀式) 용구의 힘과 단순성을 찬탄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재생과 영감을 구했다. 최초로 입체파 회화를 그렸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선사시대로 관심을 돌렸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기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 계속적으로 의존하여 왔었다. 그러나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원시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연 이상의 것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렇게 느꼈음이 틀림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당대의 시점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미개성과 생경함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다. 피카소는 전통 화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데상에 대한 정상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전통적인 데상을 방 기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제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손의 수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의 실험적 회화는 청색시대, 장미시대, 큐비즘 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색시대'의 그는 거칢과 가난을 표현하는 색채를 사용하였다. [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 '장미시대'에는, 어릿광대 등의 주제들이 여전히 우울한 감각을 창조해내고 있기는 하지만, 형태들은 보다 입체적이고 조각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런 다음 1907년에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그림을 그렸다. 바로 그 의 유명한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인데, 이 작품은 매춘부들을 그린 것으로 입체파 회화의 원형이 되었다. 그림 속의 인물은 여러 형상의 여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각도에서 본 것을 종합해 놓은 것으로서, 첫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다기 보다는 거기에 있는 것, 곧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다. 왜곡시킨 형태들은 거의 전적으로 평면화 되어 있어서 앞과 뒤에 공간이라고는 거의 없기 때문에 앞으로 불쑥 나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하며, 우리 와 작품의 인물들 사이에 여유 있는 거리를 남겨두지 않고 있다. 우리는 피카소가 그림 오른 쪽에 푸른색 배경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모든 것을 그림 표면에 드러내 놓고자 하는 결의에 차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색깔들은 보통 그렇듯이, 그림의 뒤로 물러나 있지만, 피카소는 그것을 흰색으로 윤곽지움으로써 날카롭게 앞으로 나온 감을 갖게 한다. 왼쪽의 인물은 고대 이집트 회화에 나타난 인물들의 특징적 자세를 취하고 있고, 가운데 두 여인의 모습은 초기 이베리아 미술의 특징을 연상시킨다. 그리 고 오른쪽의 두 여인은 아프리카 가면의 무서운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피카소는 이국풍의 미술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주제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기 쉬운 전례 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형태들을 분해하고, 충격을 주는 야성적인 효과를 달성하 기 위해 잔인할 정도로 얼굴의 일부를 재정리한다. 그림을 배열하는 방법이나 구성은 세잔느가 그림을 꾸며나가는 방식을 거의 모방한 것이다. 브라크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놀랐다. 브라크는 자신의 실험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레스타크의 집들>에 보이는 나무의 대각선 조차도 세잔느가 사용했던 고안(考案)이었다. 그러므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무엇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전통적인 원근화법과 삼차원적 환영(幻影)을 버리고 이를 훨씬 더 얕은 회화적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화면 위의 인물이나 대상들을 마치 캔버스 표면 위로 불쑥 밀어 올린 듯 앞으로 튀 어나오도록 하였다. 또한 단단한 형태들의 집합이 배열되어 새로운 구성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피카소는 직선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조차 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브라크 는 보다 예민한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평가들은 이들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실험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1907년부터 1909년에 이르는 큐비즘의 제 1 단계 동안에 보여준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아직도 세잔느의 많은 영향 아래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보다 뚜렷이 그들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핏보기에 정물화 같 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이를 주는 모든 일루전을 제거한 채, 경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앞으로 당겨서 마치 상자 안에 물건들을 마구 쌓아 놓은 것처럼 그림의 전후관계를 어지럽혀 놓았 다. 이것이 과도기적 단계의 큐비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곧 실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주체들을 거의 사라지게 해 버린 예술가들의 기법에 매혹될 것이다. 지금은 분석적 큐비즘으로 알려진, 1909년에서 1911년까지의 큐비즘의 제 2 단계에 이르면,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주제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과 같이 주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밀폐된 공간 안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그들의 접근방법을 더욱 잘 정의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한 듯 하다. 그들 중의 누구도 색채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검은색, 회색, 황토색 같은 기본적 색채들만을 그림에 사용하였다. 주제 를 택한 다음에 다양한 각도에서 주제를 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그리고 이 모든 면을 한 시각으로 동시에 정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은 이론상 가능한 한 많은 주제를 보여주려는 것이나, 실제로 그 정물들의 모습을 식별해내기란 매우 어렵다. 브라크의 <청어가 있는 정물>에서 청어와 병들은 주어진 시각적 단서에 따라 재구성한 것 이다. 제목을 보고 우리는 일단의 사물들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사물 자체에 대한 이 해보다는 그 사물들의 분할된 방법과 그들이 점유한 공간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하게 되며, 그것이 채우고 있는 밀실공포증적인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물체들이 그림을 거 의 다 채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우리는 몇 개의 가 재도구들에 집중된 작가의 관심을 분별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집중성이 주변의 빈 공간에 까지 사물들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주제를 얼마나 많이 해체시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은 분명히 적절한 판단에 따를 문제이다. 이상적인 방법은 주제를 모두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주제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다. 그들은 실제로 주제를 포기해 버릴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나 기타, 포도주 잔, 심지어 사람까지도 따로 떼어내서 그것들을 다시 뜯어 맞출 때에는 전체적 시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주제에서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제 식별된 사물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들이 알아볼 만한 단순 한 사물들이나 주제로 복귀하는 것을 진정한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합적 큐비즘 또는 꼴라쥬 큐비즘이라고 불리는 큐비즘의 제 3단계(1911-1916)에서, 우리는 그림 안에서 문자와 단어들 그리고 숫자들을 발견하게 되며, 때로는 그림에 실물을 도입시키 는 경우도 보게 된다. 전직(前職)이 집 도장공이었던 브라크가 생각해낸 또 하나의 아이디어는 모조 나뭇결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이 실재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독창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에서처럼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림으로써 나무의 환상을 갖게 하는 대신에, 전통적인 집 도장공의 나뭇결, 곧 '진짜모조'나무를 회화에 도입시 킨 것이다. 어떤 주제를 그렸다는 것을 잊게 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해학적인 고안품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는 실제 톱밥, 절단된 종이, 심지어 담배까지도 그림의 표면에 바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왜 입체파 화가들은 환상으로서의 그림이라는 생각에 이토록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 고 있는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가지 이유를 상정해 본다면, 예술가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작가 자신이 고작 그림의 주제와 관람자 사이를 연결하는 단순한 통로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예술가는 정직한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단순한 통로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실재에 대한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후자를 믿으려고 하 는 것 같다. 즉 입체파 그림들은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사물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그리고자 한다. 그것은 아직도 이차원적이고 많은 부분이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 입체파 그림들이 사물의 다양한 면을 보여줄지 모르나,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우리 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리들의 눈이 증명하는 바로는 입체파 그림이 종래의 그림보다는 사물에 대해 훨씬 더 적은 양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가령 유 리잔이나 기타를 본적이 없는 사람이 입체파 그림에서 무엇이 유리잔을 닮았고, 무엇이 기 타를 닮았는지 하고, 헤아려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문제는 '보다 더 적은'정보가 '보다 더 많은 것' 일 수도 있는지 어떤지인 것이다. 외형을 덜 나타내는 것이 더 많은 진실을 의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배후에 무엇인가 더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오래 전부터 철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있어 왔다. 몽드리앙의 주장이 그러한 견해에 속한다. 그러나 회화는 시각적 매체이다. 따라서 화가가 우리가 보는 이면의 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우리 에게 시각적으로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그가 어떤 특정한 그림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 또한 스스로 그것을 볼 수 없는 한 어떤 철학도 우리를 확신시키지 못한다. 수수께끼의 재미와는 별도로, 우리는 여전히 이 외형의 파괴에서 무엇을 얻었는지의 여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국 '적은 것은 적고', '더 많은 실재'라는 것도 단 지 더 적은 실재로 판명되고 말았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묘사를 포기하 는 것은 결국 주제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입체파 화가 들이 원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밖에 있는 실재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가 자신의 현존을 주장하는 데 더 관심이 잇기 때문이다. 다른 화가들과 조각가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피카소와 브라크의 사상을 이용했고, 그와 같은 방법들을 자신들의 운동에 도입하였다. 한편 스페인 화가 후앙 그리는 1906년 피카소 서클과 접촉을 가졌다. 그는 피카소나 브라크보다도 더 지적이고 엄밀하게 입체주의 를 이용했는데, 그는 그림 안의 사물들, 예컨대 만돌린이나 과일같은 것을 식별해낼 수 있도 록 하기 전에 먼저 그림의 구성부터 조직했다.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는 소위 분할주의 라는 기법을 써서 순색의 작은 점으로 풍경과 사물을 그렸다. 그는 주제의 '분석'보다는 색 과 빛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짐으로써, 피카소와 브라크가 했던 것보다도 더 회화의 주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신비적 입체주의라 불렸던 그의 양식은 1910년부터 1914년까지 계속된 운동이었다. 또 다른 화가 페르낭 레제는 그의 형상들을 세잔느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단순화시켰으나, 깊이를 가진 배경을 거슬러 이들을 재배열하면서 그 깊이를 암시하기 위해 밝은 색을 쓰고 있다. 후에 그는 노동자와 기계, 기계에 종속된 인간들을 그렸다. 레제의 그림은 입체주의와 사실주의의 조화이다. 그래서 입체주의라 불리는 새로 운 양식은 주제를 특별히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즉 주제를 파괴하고 분석해서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상이한 방법으로 연결짓고, 그것을 보다 더 집중적으로 그 주변에 있는 공간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를 단순화시키는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주제를 착시적으로 그리는 그림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의 정확한 목적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업이 남긴 역사적인 결과는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짧은 햇수 동안에 그들은 서양미술의 모든 터부와 전통을 거의 파괴해 버리고, 미술가들에게 규칙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유와 불확실성을 준 것이다. 【분석적 입체파】 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非構成)’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 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顯在)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 그 자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 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 존재로서 정착시킨 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 【종합적 입체파】 1912년 입체파는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 ‘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지를 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다. 입체파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 팡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파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입체파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靑騎士)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파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파에서 종합적 입체파로의 전환에 미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사실 J.그리스의 경우 후년의 피카소, 브라크에 비하여 입체파에 몸바친 경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독일의 입체주의자로는 보통 슐레머, 바우마이스터를 들고 있다. 운동으로서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