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시점視點을 톺아보다
Ⅰ 프롤로그
시점視點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話者의 눈길이다. 영어로 ‘View point’이다. 즉 화자가 이야기하기 위해 자리 잡은 시선의 각도, 서술의 발화점, 관점을 뜻한다. 글을 끌어가는 힘이요, 구심점이다. 통상적으로 작가와 독자 사이, 발화자發話者와 수화자受話者 사이의 관계에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플롯plot의 기본이 되며, 작품의 효과 및 독자에 대한 호소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시점의 문제는 일찍이 소설가들에게 큰 관심사로 존재해 왔는데, 19세기 이전의 여러 비평문에서 시점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 호메로스가 작품 속에 개입하는 일 없이 이야기를 진행한 것이 값지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이야기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2가지 개념이 이미 고대에도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보여주는 경우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설명 하기’telling이고, 후자는 ‘보여 주기’showing이다. 19세기 말에 헨리 제임스는 ‘극화劇化하는’ 것이 좋다는 규칙을 세웠는데, 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이어받은 것이다. 시점에 관한 이러한 단편적인 관심이 소설가들에게 본격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제임스의 〈소설의 기술The Art of the Novel〉과 P. 러벅의 〈소설의 기교The Craft of Fiction〉가 나온 이후의 일로 보고 있다.”
Ⅱ 화자의 시점 유형과 기능
“시점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사람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F. K. 스탄젤은 주석적註釋的 서술, 1인칭 서술, 인물 시각적 서술로 분류하고 있으며, 브룩스와 워렌은 1인칭 서술, 1인칭 관찰자 서술, 작가 관찰자 서술, 전지적 작가 서술로 나누었다. W. 케니는 전지적 시점과 제한적 시점을 먼저 구분하고 제한적 시점으로는 1인칭과 3인칭이 있으며, 이들을 각각 서술자 주인공, 관찰자 주인공, 관찰자 보조, 객관적 관찰자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방식들의 대부분이 전지적全知的 시각과 제한적 시각 또는 극화劇化와 순수한 이야기, 3인칭과 1인칭을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브룩스와 워렌이 〈소설의 이해Understanding Fiction〉에서 제시한 다음의 4가지 분류 방법이다.
1. 1인칭 주인공 시점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將校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인칭 시점 중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한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자신이 자기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그런데 주인공 외에 다른 사람의 심리묘사는 제한이 따른다. ‘나’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어서이다.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의 심리는 대화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제시된다.
2. 1인칭 관찰자 시점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 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고요. 우리 집 식구라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나, 이렇게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중략)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게 곱게 생긴 우리 어머니는, 금년 나이 스물 네 살인데 과부랍니다. 과부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두, 하여튼 동리 사람들이 나를 과부 딸이라고들 부르니까, 우리 어머니가 과부인 줄을 알지요.
1인칭 시점 중에서 ‘나’가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한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나’는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말과 행동을 통해 추측해 볼 뿐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상상의 폭이 넓다.
3. 3인칭 관찰자 시점」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작가 관찰자 시점이라고도 하는데, 서술자가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서술자가 일체의 해설이나 평가를 내리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로 외부적 사실만을 관찰하여 묘사하기 때문에, 극적이고 객관적인 특성을 지니며, 현대 사실주의 소설에 많이 쓰인다.
4.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앨리스는 언덕에서 하는 일도 없이 언니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두 번 슬쩍 들여다보았는데, 그건 그림도 대화도 전혀 없는 책이었다.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
그래서 속으로(날씨가 더운 탓에 너무 졸리고 몽롱해서 끙끙대며)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데이지꽃을 꺾어 목걸이를 만들면 재미있을까 없을까 하고. 그 때에 갑자기 눈이 빨간 흰토끼 한 마리가 앨리스 옆을 달려갔다. 이건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토끼가 "이런! 이런! 너무 늦겠는걸!"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그다지 비정상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술자가 전지적 위치(모든 것을 다 아는 상황)에서 작중 인물의 심리 상태, 행동 동기 등을 분석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전지적 작가 시점은 서술자가 작품에 폭넓게 관여하기 때문에, 작가는 서술에 있어서 논평할 수도 있는 무한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반면에 독자의 참여 기회가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Ⅲ 수필 창작 시점의 확장
소설의 서사 구성법에서 작가가 아닌 제3 자를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비해, 수필은 작가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과 수필은 많은 차이점이 있다. 어떤 연구자는, 수필은 보편화된 내용구조가 ‘경험+반응’으로서, 필자 스스로 겪은 일을 토로하는 것이 서술상 본질이어서 수필에서 운용하는 시점은 ‘나’가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뿐이다, 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진화하듯이 문학의 에세이도 진화하여 왔다. “몽테뉴의 ‘에세이’가 베이컨에 의해 ‘산문 수필’로, 다시 찰스 램에 의해서 ‘창작‧창작적인 수필’로 진화‧발전되어 우리나라의 경우 최남선(1890-1957)에 의해 작품 <가을>(1917)이라는 ‘창작‧창작적인 수필’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 후 현실적으로 많은 ‘창작‧창작적인 수필’이 발견되고, 『창작문예수필 이론서』에 의해 ‘수필 창작이론’이 학문적 체계를 서서히 갖추게 되면서부터 창작수필 화자의 시점도 따라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홀연히 눈을 뜨자, 나는 독신자의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서 잠들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언제나 그대로 충실한 브리제트가 있었다 --- 그러나 존 L은 영원히 가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위의 예문은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작품은 한 편의 콩트conte다. 소설적 허구다. 소설적 이야기에서 “나는 독신자의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서 잠들었음을 알았다.”라고 수필로 빠져나왔다. 이처럼 소설, 콩트, 희곡 형식의 이야기를 수필로 마무리할 때 화자의 시점은 3인칭으로 확장되었다가 1인칭으로 돌아오는 형식을 보여준다. 또 바깥 이야기가 그 속의 이야기를 액자처럼 포함하고 있는 수필의 액자구성에서 시점이 불투명하게 변하기도 하는데, 대개 외부 이야기는 1인칭 시점, 내부 이야기는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됨을 본다.
문학에서는 예술의 타 장르보다 이른 크로스오버Cross-over, 하이브리드Hybrid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장르 파괴 및 통섭과 융합으로의 진화이다. 산문을 취한 산문시, 시를 취한 산문의 시, 시적 감성을 취한 수필, 시적·수필적인 소설 문장, 수필의 플롯 차용 등의 현상이다. 아직도 수필의 픽션(허구) 논쟁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허구는 안 되고 상상은 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수필체의 근본은 ‘사실성’에 있고, 그것에 대한 상상적 ‘감정·정서’ 창조에 있다. 수필체는 ‘사실성’이라는 흙에 뿌리를 둔 나무의 ‘창조적 감정 정서’라는 꽃과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창작에세이(수필)의 어려움이 있다. 그 뿌리는 사실성에 두어야 하고 그 나무는 상상적 창조를 해야 되는 경계에 선 문학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 문학인 수필이 통섭과 융합이란 진화를 거듭할수록 수필 창작에 있어서 화자의 시점은 확장되어 갈 것이 자명하다.
Ⅳ 에필로그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행동과 체험을 언어로 재구성하고 재조직하여 미학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수행이라는 점에서 여타 장르보다 비교 우위에 선다.” 세상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석학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수필가나 문학가가 될 수 없다. 문제는 문학적 형상화 능력이 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들려주느냐보다 어떻게 들려주느냐의 문제가 숙명적인 문학인의 명제라는 사실이다.
윤오영은 “찰스 램의 작품이 나오자, 그 형태와 관념은 일변했습니다. 비로소 시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라며 에세이라는 산문문학에서 진화‧발전된 창작에세이(수필)는 시의 문학이자 창작문학이라고 하였다. 기존의 것을 토의하는 산문문학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작문학으로 자리매김한 창작수필 화자의 시점은 소설의 서사 수준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에 수필 텍스트text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켜 소통시키는 화자의 시점은 이제 그 문학적 소통의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 18개 주석이 올라오지 않아서 따로 파일로 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