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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온것 같군요."
재석은 막상 들어올려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명선은 그가 올줄은 미쳐 생각지 못한때문인
지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회장아들이 일개부서의 팀장집들이에 온다는건 생각조차 할수없었
기에 명선의 당혹스러움은 더했다.
"언니, 누구예요?"
안방에서 나온 민정은 재석을 빤히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오빠의 직장 동료임을
짐작했는지 생글생글 웃었다.재석은 민정에게 누구시냐며 물었고 민정은 김현수씨 동생이라
고 대답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너무 일찍 온것 같아서 괜히 부담을 드리는것 같군요."
"아..아녜요. 괜찮아요. 좀 앉아서 기다리실래요? 커피한잔 내올께요."
"그...그래요."
민정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재석은 두손을 모은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명선에게 고개를 돌렸
다.명선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지체높으신 회장의 아들이었다.
"명선씨.내가 부담스러우면 그냥 갈께요."
"녜?" 아...아녜요."
명선은 지나치게 재석을 의식하고 긴장하는 자신이 저자세로 비쳐질까봐 걱정이 되었고 한심
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대하고 말하면 될것을....일개 부서의 팀장집들이
에 오는거 보면 그도 결국은 평범한 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가....또한 어떻게 보면 엄연한
직장상사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냥 직장상사로 생각하면 행동하고 말하기가 훨씬 편할텐데
무엇때문에 긴장하고 조심스러워한단 말인가....
"용인갔다가 회사들어가는길에 들렀어요. 이따 올려구 했는데 명선씨 아파트가 생각나더군
요. 그래서 잠시 들러본겁니다. 김실장님 동생분이 커피주신다고 했으니 그거 마시고 나갈께
요."
"시간이 얼마...안남았는데 그냥 사람들 올때까지 기다리세요."
"어차피 회사에 가봐야 해요. 갔다가 이따 올께요."
"어쨋든 일단 좀 들어오세요."
명선의 말에 재석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거실
을 둘러보았다. 낯선집에 들어오면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 그도 여늬사람들과 별
반 다를게 없었다. 명선은 그와 마주 앉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갑자기 찾아온 회장아들과
마주앉아서 무슨얘기를 주고 받는단 말인가. 그동안 서로 대화라도 자주하고, 그래서 조금
은 친숙해졌었더라면 지금처럼 불편해 하지도 않을것이고 어려워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사
실 회사에서 재석이와 대화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는 바쁜지 안보일때가 더 많았다.
"명선씨, 그렇게 서있지 말고 좀 앉아요."
그는 역시 침착하고 여유가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명선을 배려한 측면도 있어보였고 무거
운 아파트 공기에 짓눌려 침묵을 지킬만큼 마음이 여리거나 소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 다웠다.
명선은 입안에 고인 침을 한번 삼키고는 재석이 맞은편에 앉았다.
"아까 물었던 말에 대답을 안하신것 같은데..."
재석은 명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장난끼어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는 아까처럼 어색
해하고 당황해하는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시도때도 없이 드나드는 집인냥 소파에 등
을 깊숙히 누이고 두팔을 소파에 걸친채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김실장님과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거 말입니다. 얼마전에 분당디자인센터에 갔다가 아파트
까지 명선씨 태워줄때나 그 다음날 아침에 같이 출근하러 태우러 올때나 말할기회가 있었잖
아요."
"그...그건.."
명선은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냥 모른채 넘어가도 될일인데 굳이 물
어보는 재석의 마음도 헤아릴수 없었다.
"그냥...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출근길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의식조차 않고 있었어요.
저..그쪽이.."
"아, 그냥 재석씨라고 불러요. 편하잖아요. 하지만 회사에서는 부사장이라고 불러야되겠죠?
아무렇게나 불러도 관계없지만..."
"녜...재석씨가 알고 있을거란 생각도 했을것 같고...어쨋든, 무슨 이유에서건 제가 말씀못
드린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런...내가 마치 명선씨를 죄인취급하는것만 같아서 민망하군요. 갑자기 생각나고해서 물
어본거니까 너무 언짢아 하지 마세요. 두분이 같은 아파트에 살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던요."
"녜..."
명선은 재석의 말대로 정말 취조를 당하는 느낌이 드는것 같았지만 사과에 가까운 말을 하
니 무어라 대꾸할수도 없었다. 대꾸한다해도 무슨말을 어떻게 한단말인가...그런건 왜 물어
보냐고 말할것인가 아니면 그런거 꼭 말해야할 의무라도 있나요라고 말할것인가..
"근데..요즘 회사에서 잘안보이시네요?"
"본사일이 좀 바빠요. 중요한 바이어들도 직접 만난다고 돌아다니다보니 성남공장에 발길이
좀 뜸했어요."
"녜..."
명선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싶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탓도 있지
만 자신을 바라보는 재석의 눈빛이 워낙 강렬했기때문에 마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참! 명선씨, 영어회화 좀해요? 입사당시 면접시험볼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을때 유창하
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던 명선씨를 기억하고 있는데..."
"...녜, 조금 해요. 세진에 들어오기전에 미국유학갔었는데 많은 도움이 됐던것 같아요. 근
데 그건.. 왜요?"
"아니..그냥 물어본겁니다."
주방에서 민정이 커피세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명선이 옆에 앉으며 커피잔을 돌렸
다.
"이런 김실장님한테 이렇게 어여쁜 동생이 있다는걸 몰랐네요."
재석의 말에 민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수줍어했다.
"너무 일찍와서 민폐를 끼친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만 일어날께요."
재석은 커피잔을 들기가 바쁘게 마시는가 싶더니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보고는 일어났다.
그는 정말 바쁜것 같았다.
"아니..벌써 가시게요?"
민정은 오자마자 가려는 재석을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쳐다보았다.
지나가다 들렸어요. 이따 다시 올께요. 회사에 가봐야 하거던요.이따 저녁에 뵙도록해요."
"녜...저녁에 꼭 오세요."
"아무렴 꼭 와야죠."
민정의 말에 재석은 흔쾌히 대답을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명선과 민정은 재석을 태운 승강
기문이 닫힐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이 닫히자 아파트로 들어왔다.
"언니, 그사람 누구예요? 상사예요?"
민정은 소파에 앉자마자 다 식은 커피잔을 두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응...그래..."
"우리오빠보다 직급이 높아요?"
"응...높아."
"직책이 뭔데요?"
민정의 말에 명선은 난감해했다.뭐라고 대답해줘야 한단 말인가....회장아들? 인사위원회위
원장?...아니 그렇게 말할수는 없을것 같았다.
"그..그냥 오빠보다 조금 직책이 높아."
"알았어요 언니."
민정은 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꼬치꼬치 캐물을 이유도 없었다. 명선은 비로소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감사때 그를 승강기안에서 봤을때 그
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전에 면접본 신입사원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건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작심
하지 않고서는....갑자기 들이닥친것도 혹시 자신이 여기에 있을줄 알고 왔다는 식으로 말하
지 않았는가...
"언니, 아까 그사람 언니 좋아하는거 아녜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것일까. 민정의 느닷없는 질문에 명선의 표정은 당황해하는 기색
이 역력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주방에서 다 듣고 다 봤어요. 그사람 언니 좋아하는게 분명해요. 그사람이 오빠와 언
니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것에 조금은 충격을 받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그럴리가 있니...그사람은 그냥 팀장님과 내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걸 궁금해 할뿐이
야."
"어쨋든 제 느낌은 그래요. 그사람이 언니를 좋아한다는거..."
"...."
명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는것 만큼의 생각을 민정은 하고 있었다.
"언니도 그사람 좋아해요? 그리고 그사람 정말 부사장님이예요?"
명선은 민정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민정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아냐...난 그런생각해본적이 없어."
"그...그래요?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그게 무슨..소리니?"
"아..아녜요. 그냥 해본소리예요."
명선은 민정의 말이 무슨뜻인지 자세히는 알수없었지만 자신한테 노래를 들려주라는등 현수
가 민정에게 자신에 대해서 어느정도 말했을테고 그래서 민정은 오빠와 자신이 서로에 대
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언니, 우리정식으로 친해져 볼래요?"
"어떻게 하면 정식으로 친해지는거니? 그냥 얼굴익히고 말문트면 되는거 아니니?"
"제가 정식으로 친해지자는 말을 한순간 언니와 저는 이제 친해진거예요. 알았죠?"
"그..그래 알았어."
민정은 명선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었고 자신의 핸드폰에 명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명선은 민정이 참으로 붙임성이 대단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언젠가 제가 먼저 전화할께요. 언니는 그때 제전화번호를 저장해요. 알았죠?"
"응..그래 알았어."
민정은 탁자위의 커피잔들을 주방에 갖다놓고 명선에게 마트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민정아, 가지않아도 돼, 전화만 하면 갖다줄거야."
"다른거 살것도 좀 있어서 나가봐야해요."
"그럼 나도 갈께."
"아녜요. 언니는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갖다올께요."
민정이 방으로 들어가서 커피색외투하나를 걸치로 밖으로 나간후 얼마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
렸고 명선은 어쩌면 민정이를 따라가지 않은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명선은 떨리는 손으로 비디
오폰 수화기를 들었고 화면에 등장한 사람은 역시나 현수였다. 명선은 침착하자는 다짐을 마
음속으로 여러번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건 어쩔수 없었다.
명선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현수는 예상을 하고 있어서인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왔어요?"
"녜."
"생각보단 별로 할일이 없죠?"
"녜, 그러네요. 동생분이 다 해놓았더군요."
"동생이 음식은 잘하는편입니다. 근데 민정이는 어디갔어요?"
현수는 거실과 주방을 두리번거렸다. 어쩌면 그가 민정이와 마주쳤을법도 한데 서로 엇갈린
것 같았다.
"조..조금전에 마트에 간다고 나갔어요."
"그래요? 나 옷좀 갈아입고 나올께요."
"녜."
현수는 방으로 들어가서 정장을 벗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거실로 나왔고 명선은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는 현수에게 갖고 갔다.
"고마워요."
"...."
"동생이 노래는 잘부르던가요?"
"녜? 아...녜, 잘불러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명선은 말을 더듬었고 현수를 마주쳐다볼수없는 자신의 눈길을 어디에
다 둬야할지 몰라 고개를 약간 숙인채 가만히 있었다. 민정이가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면, 그
래서 현수의 마음을 몰랐다면 이렇도록 가슴이 뛰고 심장이 뛰고 온몸이 떨리지는 않았을것
이다. 현수도 명선의 마음을 아는지 한동안 찻잔을 홀짝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
로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버린 댓가는 납덩이 같이 무거운 침묵과 어색함을 가져왔다.
"무정한 마음이란 곡은 명선씨가 아는사람이 좋아하는 곡이라고 하셨는데 명선씨가 좋아하
는 곡은 어떤겁니까?"
도도한 침묵을 깨기란 어렵기도 하고 이처럼 의외로 쉽기도 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전 관현악곡인 정야를 좋아해요."
명선은 혹 이남자가 정야란 곡을 모르면 얼마나 무안해하고 민망해할까를 생각했지만 그것
은 기우에 불과했다.
"현악6중주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말씀하시는거죠?"
"....!"
믿을수없을정도로 너무나 잘알고 있다는듯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현수, 명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전 그가 차안에서 무정한 마음이란 가곡에 얽힌 사연을 얘기할때에도 고
전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또한 쇤베르
크의 정야는 지금은 구하기조차 힘들정도로 희귀음반이었다.
"그 음반 갖고 있어요?"
"예, 있어요. 전 2004년 미국있을때 샀어요. 명선씨도 갖고 있겠네요?"
"녜, 저도 갖고 있어요. 저도 2004년에 구입했어요. 음반회사는 소니뮤직이었던걸로 기억해
요. 팀장님은 이곡에 대한 유례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정화된 밤은 데멜이라는 시인이 쓴 '여자와 세계'라는 시에 작곡을 한것으로
교향시형태의 음악이죠. 이곡은 전체가 5개의 단계로 나뉘어져 있어요. 1'3'5부는 서정시풍
으로 싸늘한 밤이슬을 맞으며 숲길을 걸어가는 두남녀의 어두운 기분을 표현하고 있고 2부
는 여인의 후회와 정열적인 사랑고백을 표현하고 있으며 4부는 이해심이 많은 남자의 이야기
와 달빛과 같은 깨끗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요."
명선은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그는 고전음악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전문가 수준의 지
식을 갖고 있었다. 얼굴없는 남자와 비교하자면 현수가 한수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없
는 남자는 자료를 구해서 카페에다 퍼나르는 수준이라면 현수는 아무런 자료없이 강의 하듯
이 줄줄꽤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곡인데도 자신보다 현수가 더 잘알고 있는것만 같아서
조금은 챙피한 생각도 들었다.
민정은 마치 자리를 비켜준것처럼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엎어지면 코닿을곳에 있는 아
파트정문앞에 있는 마트, 소주든 맥주든 박스채로 주문만 하고 오면 되는것이고 부수적으로
살것이 있다고 해도 30분이상 걸릴수는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저...팀장님..."
명선의 부르는소리에 베라다에 가있던 현수는 뒤돌아서며 한동안 명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
다. 명선은 그의 표정은 뭔가 할말이 있는듯해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만 나갈께요. 이따 5시 좀 넘어서 올께요."
"...."
명선은 대답없이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는 현수를 뒤로한채 아파트를 나왔다.
민정에게서 전화가 온건 다섯시 삼십분이 가까워올때쯤이었다. 명선은 직원들이 중구난방식
으로 각개전투를 하듯 시간개념없이 올것만 같아서 타이밍을 어떻게 맞춰가야할지 난감해 하
고 있었기에 민정의 전화는 반갑기 그지 없었다.
"언니, 지금 좀 와 줄래요? 직원들이 몇명왔는데 음식데피고 할려면 언니가 좀 도와줘야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어."
명선은 아파트를 나오며 인숙이가 어떤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다. 명선의 집을 알고 있
는 동료는 인숙이가 유일했다.지금 와있다면 아마 현수가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이사온것을
알고 온갖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명선이 현수의 아파트에 들어가자 민정이
가 앞치마를 두른채 문을 열어주었고 사람들은 안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명선은 민정에
게 몇명이나 왔는지 물었고 민정은 여자한명과 남자 세명이 왔다고 대답했다. 명선은 누가
왔는지 궁금해서 노크를 하고 살며시 안방문을 열었다. 명선의 눈에 맨먼저 들어온사람은 오
현정대리였다. 그리고 영업부 평사원 세명이 오현정대리와 나란히 앉아있었고 현수는 상을
가운데두고 맞은편에 홀로 앉아있었다.
"오대리님 오셨어요."
명선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를 했고 오대리는 상사가 먼저와서 기다려도 되느냐며 빈정
거리듯 말했으나 그래도 현수앞이라서 그런지 목소리 톤이 가벼워보였다.
명선은 현수가 앉으라고 말했으나 동생분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말하고는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안되지 않아 다시 초인종이 울렸고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박차장과 인숙, 석현, 그리고 디자인과 선희와 미영이었다. 모두들 같이 오자고 약속을 한것
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숙은 명선을 보자마자 가재미눈을 하고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어서들 오세요."
"민정아, 오랜만이다."
"오빠, 오랜만이네요."
박차장은 반가운듯 환하게 웃으며 민정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명선은 두사람이 알
고 있을거라고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지만 두사람의 모습은 친남매처럼 정겨워보였다.
"그래 몸은 좀 괜찮아?"
"녜,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민정을 바라보는 박차장의 눈빛에는 연민이 서려있었다. 명선은 비로소 창백한듯 새하얀 민
정의 얼굴이 어쩌면 박차장이 민정의 건강을 걱정하는것과 관련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어서 들어가요."
민정은 사람들을 안방으로 안내했고 박차장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후에 다시 나와서 주방
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명선에게 다가왔다.
"명선씨."
"녜?"
"혹시 명선씨가 현수한테 집들이 도와 준다고 말했어? 약속했잖아, 비밀로 하자고..."
명선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무슨말씀 하시냐며 박차장을 쳐다보았다.
"박차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전 차장님이 말씀하신걸로 알고 있는데..팀장님이 제
가 일찍 올거란 것을 알고 계셔서 저도 놀랐어요."
"무슨소리야, 나도 절대 말하지 않았어."
박차장은 마치 결백하다는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대체 누가...알고 있는 사람은 박차장님과 나뿐인데..."
명선은 두눈을 깜박거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명선씨가 말하지 않았어?"
"정말 말하지 않았어요."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군...그건 그렇고 현수가 언짢게 생각지 않던?"
"아뇨. 화내실 이유가 없잖아요."
박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후, 이번에는 인숙이가 나왔다.
"명선아, 너 내숭떨어도 너무떠는거 아니니?"
인숙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명선에게 다가왔다.
"내숭은 무슨 내숭이니, 같은 아파트에 살수도 있는거지."
명선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으나 인숙은 의구심가득한 눈길로 명선
을 쳐다보았다.
"그게 아니고 내 말은 왜 여태껏 말하지 않았냐는거지."
"이젠 알았잖아. 그럼 된거 아니니? 곧 음식 들어갈거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명선은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동안 미운정 고운정 다들어서
그녀의 투정을 그냥 받아주었지만 오늘은 웬지 이러는 인숙이가 못마땅해보였다.
인숙은 명선의 불꽤해 하는 표정을 느꼈는지 아무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민정은 부지런히
음식을 데우고 요리를 하느라 혼자서 정신없는것 같았다. 음식과 렌지불의 열기탓인지 민정
의 빨간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명선은 민정이 혼자서 다하는것만 같
아서 자신이 도울일은 음식나르는 일밖에 없어보였다.
"언니, 이거좀 방에 갖고 가실래요?"
"내가 민정이를 도울일은 음식 나르는것밖에 없는것 같아서 조금은 미안하구나. 어쩌면 좋
니."
"언니도 참, 별말씀을 다하세요. 그래도 혼자하는것과 둘이하는것은 천지차이예요."
음식이 방으로 다 들어가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재석은 오지 않았다.
명선은 그가 반드시 올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정말 안온다면 현
수한테 전화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알수없었다.
박스떼기로 사다놓은 소주와 맥주는 흐르는 시간과 무르익는 방안 분위기와 함께 빠르게 비
워져 가고 있었고 취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보였다.하지만 딱한사람 명선은 오현정대리의 상
당한 주량을 동료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술을 입에 대지 않는것
같았고 음료수만 홀짝이고 있는것이 신기해 보였다. 현수도 취할정도로 많이 마신것 같지는
않았고 박차장은 좀 마신것 같았다. 세사람은 무슨얘긴가 열심히 주고 받고 있었고 영업부
남자들과 인숙과석현 그리고 디자인과 직원들은 그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비워가
고 있었다. 명선은 술을 못먹는다는 민정이가 소외감을 느낄까봐 상 끄트머리에 마주앉아 음
료수와 음식만 먹어댔고 간혹 서빙을 하며 주방과 방을 왔다갔다 했다.
"명선씨,가만보니 오늘 고생이 많네?"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파장무렵,취한듯 비틀거리며 명선에게 다가온 석현이, 가랑비에 옷젖
듯이 서서히 마셔대는, 주법이 특이한 석현은 혀가 꼬부라진듯 말도 비틀리고 있었고 눈동자
도 이미 풀려있었다. 그는 명선옆에 풀썩 주저 앉았다.
"명선씨 좋아하는 사람 오늘...안오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난 커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이미 필름이 끊
겨버린 그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재석이 형이...아니 부사장님이 명선씨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아니, 석현씨..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많이 취했나봐요."
명선은 석현의 느닷없는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했다.
"취하긴 취했지만...내 말은 사실이란 말이야...부사장님이 누구냐 하면...우리친형 친구
야..."
명선은 빨개진 얼굴로 어쩔줄 몰라했다. 석현의 입이라도 막고 싶었지만 석현은 봇물이 터지
듯이 말을 쏟아냈다. 현수와 박차장, 오현정대리, 그리고 모든 직원들의 동작은 일시에 멈추
고 시선은 모두 명선과 석현에게 쏠리고 있었다.
"난 말이야...세진에 입사하자 마자 명선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재석이 형한테 보고해왔
었어. 내가...입사한 목적이 그거라면 참으로 나란놈이 우습지 않아?"
석현은 앉아있었지만 몸을 못가누고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방안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아버렸고 모두들 어색하고 민망한 표정을 지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박차장이 일어나 석현이쪽으로 다가와 두손
으로 석현의 겨드랑이를 잡았다. 하지만 술먹은 사람은 안먹은 사람보다 무거운법,
"보고만 있지말고 이녀석 밖으로 좀 끌어내!"
박차장의 화난 말에 영업부직원들은 그제서야 술이 확깨는지 동식이와 정우가 다가와 석현이
를 부축해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명선은 생애 이렇게 불편한 자리는 첨 겪어보는것 같은 느
낌에 어쩔줄 몰라했다.
"언니, 그만 나가요."
민정은 불편해 하는 명선을 더 두고 볼수없었던지 명선의 손을 잡고 일으키고는 작은방으로
명선을 데리고 갔다.
현수의 집들이는 석현의 폭탄발언으로 끝이났다.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있던 사
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현수는 일어날 생각도 않
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거실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서먹서먹한 표정들을 지으며 하나둘씩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석현이 누가 좀 데려다줘."
"제가 데려다 줄께요."
박차장의 말에 동식이가 나섰다. 석현은 비디오폰 아래에 앉은채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
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박차장도 민정에게 수고하라는 말
한마디 하고는 아파트를 나갔다. 민정은 한동안 텅빈 거실에 가만히 서있다가 작은방으로 들
어갔다. 명선은 입술을 꼭 깨문체 생각에 잠긴듯 침대에 앉아있었다.
"언니, 제말 맞죠? 그사람이 언니 좋아한다는거 말이예요. 그런데 사람까지 심어놓고 언니
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받았다니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
"언니?"
"사람들 다 갔어?"
"녜."
"그럼 어서 상을 치우자."
"언니는 그만 가세요. 제가 치울께요."
"괜찮아. 집이 요앞인데 뭐."
"...."
명선이 안방으로 들어가자 현수는 여전히 꼼짝않고 앉아있었다.
"팀장님, 상..치워야해요."
명선의 말에 현수는 그제서야 꿈에서 깬듯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치우려고 그릇을
만지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거실에 나가있어요. 민정이와 둘이서 치울께요."
"아니, 괜찮아요.우리집인데 내가 치워야죠."
"어서 나가계세요. 민정이와 제가 금방 치울께요."
"그래. 오빠. 그만 들어가 있어. 언니하고 내가 치울께."
언제 들어왔는지 민정이가 거들었다. 상을 다치우고 설거지 까지 하고 나니 밤이 꽤나 깊어
져 있었다.
"명선씨, 오늘 정말 수고많이 했어요. 나가요.내가 바래다 드릴께요."
"괘..괜찮아요. 그냥 혼자 갈께요. 집이 요앞인데요 뭘..."
"언니, 그냥 모른척해요. 오빠성의를 봐서라도요."
민정의 말에 명선은 얼굴을 붉혔다. 현수는 장농에서 외투하나를꺼내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명선의 어깨에 걸쳤다. 현수는 민정에게 갖다오겠다는 말을 하고 명선과 아파트를 나섰
다.
"언니, 오늘 정말 수고했어요."
"수고는..내가 한게 뭘있니.."
민정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오며 명선을 배웅했고 전화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아파트를 내려온 현수와 명선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명선의 아파트로 향했다. 밤이 꽤나 깊었
는지 아파트는 불이 꺼진 집이 많았고 가로등만이 주차장의 많을 차들을 비추고 있었다. 명
선은 자신의 아파트가 현수의 아파트와 거리가 너무나 가까운것이 오늘따라 아쉽게 느껴졌
다. 늦은 밤이지만 그와 좀더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었다.
"명선씨, 우리얘기좀..할래요?"
A동 아파트 승강기앞에 앞에 도착했을때 현수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바지 호주머니에 두손을
찔러넣은채 명선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이제 서로에 대해서 조금더 솔직해 지는게 어떨까요?"
"...."
"날 똑바로 쳐다봐요."
명선은 현수의 눈길을 피해보려했지만 그의 말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현수의 눈동자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나...명선씨 좋아할 자격없지만 명선씨 진심으로 좋아해요."
어두운밤, 승강기앞에서의 고백......명선은 갑자기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오는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열병에 걸린사람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명선은 현수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는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다음부터는 꿈
속을 걷듯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고 몸이 하늘로 붕붕뜨는것만 같았다. 현수가 자신을 살
포시 끌어 안았던 것이다. 명선이 눈을 떴을때는 현수의 얼굴이 코앞에 와있었다.
명선은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현수가 자신을 안았을때부터 말을 할수없을정도로 거
친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현수의 가슴에서 시작된 체온은 명선의 발끝으로 정수
리로 온몸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명선은 자신의 체온이 급격하게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현
수를 올려다봤을때는 이미 현수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명선은 현수를 밀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덮었을때는 오히려 좀더 편하도록 입술을 열기까지했다. 아무렇게나 들
어온 것같은 현수의 혀는 명선의 몸을 뜨거운 용광로처럼 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명선의 입술을 탐닉하던 현수는 승강기가 내려올때쯤에야 서서히 입을 떼었다.
“나...아까도 얘기했지만 명선씨 좋아할 자격없어요. 하지만 명선씨를 향한 내마음은 멈출
수가 없을것 같아요."
“.......”
명선은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말도 못하고 현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체 미동도 하지 않았
다. 명선은 자신못지않게 현수의 가슴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것 같았다. 현수의 심장박동
소리는 명선의 귀속에 선명하게 울림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명선씨.."
“아무말....하지...마...세요.”
명선의 목소리는 흔들리는 유리잔속의 물처럼 파르르 떨려 나오고 있었다. 명선은 차량접촉사고
로 인한 우연한 만남이 여기까지온건 현수와 의 피할수없는 운명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
려운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내려왔어요. 어서... 올라가요.”
현수는 명선을 떼어놓으며 바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현수를 마주보지 못하고 얼
굴을 돌린 명선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손수건을 받아쥔 명선은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훔쳐냈다. 명선은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알수 없었다. 현수가 자신을
껴안았을때 가슴한구석에 아리한 통증이 밀려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있음을 느
꼈다. 지난번 이사짐도와줄때 그의 집에서 그가 엉겹결에 자신을 안았을때만해도 이런 느낌
은 없었었다.
“어서... 가세요.”
“먼저... 올라가요.”
승강기 문이 열리자 명선은 다리가 후들거리는것을 느끼며 승강기에 올랐다. 닫히는 문사이로
현수의 두다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명선은 온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
한 피로를 느끼며 쓰러지듯 침대 에 엎어졌다. 그리고 마취에 취한듯 그대로 잠속으로 빠져 들었
다.
명선은 꿈을 꾸었다. 한번도 꾸지 않은 꿈이었다. 영혼이 비워져 버리는 듯한 고통의 꿈인
가 하면 뚜렷하게 나타났다 가까이가자 한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실체없는 유혹의 꿈이
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무지개가 살아숨쉬듯 온몸을 휘감는 황홀한 꿈이기도 했다.
명선은 귀전을 때리는 듯한 탁상시계의 벨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는 여전히 꿈속을 헤메
듯 멍했다. 어렴풋이 천장이 보이고 오색찬연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길고
긴 기지개를 한번켜고 일어난 명선은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서야 그냥 잠들었다는것을 알았
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커튼을 열어젖힌 명선은 눈부신 가을햇살에 잠시 눈을 감았다.
‘꿈을 꾼걸거야....’
명선은 어젯밤의 일들이 꿈속처럼 느껴졌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현수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는것만 같았다. 현수가 자신의 입술을 덮었을때는 뭔가에 홀린듯 무아지
경이었고 그가 하는데로 내버려두는것도 모자라 자신도 적극적으로 응했다고 생각하니 도저
히 믿기지가 않아서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명선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듯한 간밤의 혼란과 긴장감이 몰려오는것만 같아서 크게 심
호홉을 한번하고 방을 나가려고 문을 열때였다. 침대위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에서 음악소리
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명선은 모친의 전화이겠거니 생각했다. 모친은 늦잠자는 버릇이
있는 딸이 걱정되어 아침에 가끔씩 전화를 하곤했다. 휴대폰을 집어든 명선은 화면에 찍힌
발신번호가 낯설음에 의아해했다. 국번이 있는걸로 봐서는 가정집전화였다.
“여보...세요?”
"언니, 민정이예요? 잘잤어요?"
"응, 잘..잤어. 너도 잘잤어?"
"녜, 언니, 언니...오늘 일요일인데 교외로 놀러나가요. 어때요?"
명선은 민정의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봄날 해빙무렵 투명한 얼음
밑으로 흐는는 개울가의 물소리처럼 깨끗했고 또랑또랑했다.
(9)**********************
하지만 명선은 민정의 물음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간밤에 있었던 농도짙은 신체적접
촉으로 이어진 현수의 고백이 석현의 충격적인 발언등과 겹치면서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명선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민정에게 이따 다시 전화한다고 말
하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갑자기 가빠진 숨을 한번 고르고는 천천히 침대로 걸어
가 침대모서리에 힘없이 엉덩이를 걸쳤다. 그녀는 비로소 석현의 폭탄발언이 충격으로 와닿
고 있는걸 느꼈고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재석이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사람까지 붙여서 자신의 행동하나하나를 보고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심장이 터질
듯한 충격에 다름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입사당시,아니 입사면접시험본후부터 시쳇말로 찍어
놓고 있었던것이고 성남공장에 배치받자마자 비슷한 시기에 석현을 구매과에 입사시켰다. 감
사기간에 승강기안에서 이름까지 기억하며 아는체를 했을때도 그렇고 코리아 디자인센터에 같
이 다녀오던날 저녁식사로 자신이 좋아하는 꽃게탕을 주문했을때도 그냥 우연일거라고 생각했
었지만 지금생각해보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건 우연이 아니었고 석현을 통해서 자신
의 식성까지 알고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것이다. 그밖에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또 무엇이 있을까. 석현은 곤드레 만드레 상태에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재석에게 말했
다고 했었지만 그가 말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자신의 성격이라던지 취향정도에 불과했다. 명선
은 겨우 그런걸 알려고 사람을 붙여놓았다고 생각하니 그는 참으로 할리없는 한심하고 한가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붙여 자신을 관찰해온건--그의 입장에서는 관심차원이겠지만--범죄행위나 다름없었
다. 마음만 먹으면 수많은 여자들을 손에 넣을수도 있는 대기업회장아들이 대체 무엇때문에
신입사원인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일이었다.
명선은 1년동안 한남자의 눈길이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고 생각하니 모멸감과 수치심
이 가슴밑바닥에서 일렁거리는것만 같았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회사를 그만둬야할지도 모른다. 회장아들이 자신을 좋아한
다는 사실이 사내에 퍼진다면,--소문퍼지는건 당연하다-- 그래서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회장
귀에까지 들어가면 사실상 세진에서의 생활은 힘들어진다. 백척간두에선 디자인부에 몸담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것도 모자라 이제는 엉뚱한 곳에서 대형사고가 터진꼴이었다.
어떻게 해서 들어온 회사인데....150대1의 경쟁율을 뚫고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데 사내연애라
는 금지된 사랑으로 인한 불명예퇴사란꼬리표를 달고 쫓겨나듯이 퇴사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명선은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이런 처참한 기분으로, 에메렐다색을띤 청록색의 짙푸른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웃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힘들었다. 명선은 휴대폰 통화버튼을 두번 눌렀고 전화받
은 사람은 민정이었다.
"민정아..."
"언니, 미안해요. 언니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생각지도 못하고 한가한 얘기를 해서 정말 미안
해요. 오빠한테 야단맞았어요. 하지만 이럴때 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해요."
"그래, 고맙다. 지금 내 기분이 좀 그렇거던."
"언니, 정말 미안해요. 저 지금 대전내려가요. 제가 또 전화할께요."
"지금 내려간다구?"
"녜,이틀 반이면 오래있었어요. 집에 엄마 혼자 계시거던요. 고모가 고생좀 하고 계실거예
요. 그래서 빨리 내려가봐야해요."
"그래, 잘가, 다음에 또보자."
"녜, 언니...."
민정의 언니란 목소리는 서서히 꺼지는 불꽃처럼 아쉬움을 잔뜩 묻힌채 아스라히 사라지고 있
었다. 명선은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가서 입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고는 욕실로 들어갔
다. 기분전환하기에는 뜨거운물로 샤워하는것 이상의 좋은것은 없었다.
차임벨이 울린건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때였다. 친한 친구몇명외에는 올사람이 없
었기에 명선은 누굴까 생각했지만 일단 확인부터 해야했기에 대충 겉옷만 걸치고 현관으로 가
서 비디오폰 방문자확인 버튼을 눌렀다.
현수였다.
명선은 잠시 당황했으나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괜찮아요?"
"...녜.."
"걱정되어서 왔어요."
"..좀 들어오세요."
명선은 그렇게 차분하게 말하고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서 거실소파에 앉아있
는 현수에게 갖고갔다. 현수는 베이지색의 간편한 케주얼 차림이었고 노란 카라가 두드러져
보였다.
"민정이 갔어요?"
"갔어요. 터미널에 데려다주고 오늘길입니다. 명선씨, 오늘 약속같은거 있어요?"
"아뇨. 없어요. 서울은 다음주에 갈려구 해요."
"그래요?...그럼 밖으로 나갑시다. 명선씨 기분도 꿀꿀할텐데..."
현수의 말에 명선은 눈을 흘기며 피식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동생을 내려보냈나요? 저하구 같이 있으려구..봄도 아닌데 싱숭생숭해져요?"
명선은 자신의 말에 현수가 무안한 표정을 지을줄 알았지만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민정이는 하루라도 집을 비우지 못해요.3일도 안됐지만 너무 오래 있었어요. 그래서 내려간
겁니다."
"...어머니때문에 그래요?"
"그래요. 몸이 많이 불편한 어머니가 혼자 있어서 그래요."
"민정이가 꼭 붙어있어야 할정도면 많이 아프신가 보죠?"
"좀..그래요. 어서 나갑시다."
현수는 더이상 자신의 집안사정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않은지 아니면 명선이 부담을 느낄수
있다는 생각을한건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잘랐다.
현수는 어젯밤 자신의 아파트에서 있었던 석현의 폭탄발언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명선은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그사고는 참으로 민감한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선은 현수와 아파트를 나왔다. 현수는 딱히 어디로 갈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로든
무작정 가고 싶은것 같았다.
"아침 먹어야죠? 지금 먹으면 점심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차에 타자 그가 물었다.
"...."
"꽃게탕 먹을까요?"
현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파트주변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식당은 그와 같이 갔던 꽃게탕전문집이 유일했다.
"저...제가 팀장님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렇게 밖에서도 직함을 부른다는게 조금은 어색
해요."
명선의 말에 현수는 소리없이 웃었다. 사실 별거아니라면 별거아니지만 명선의 입장에서는 중
요한 일이기도 했다. 회사가 아닌 밖에서 그를 팀장이라고 부를때마다 다가갈수없는 듯한 거
리감이 느껴졌고 말을 건네기조차 거북했다.
"내가 그생각을 왜 미처 못했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밖에서 따로 만날일이 없으니 무신경했
던것 같아요. 이왕 말나온거니까 앞으로 현수씨라고 불러요. 그게 가장 편한 호칭이겠죠? 달
리 마땅한 호칭도 없지만..."
"그럼, 지금부터 그렇게 부를께요."
"그렇게 해요."
"녜."
차는 아파트를 나와 대로로 나왔다. 청록색의 새파란 하늘은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부풀어 있
었고 파란물이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릴것만 같았다.
"어머니 건강이 안좋아 지신게 오래돼었나보죠?"
명선이 말을 꺼낸건 성남시내를 거처 확트인 들녁과 울긋불긋 꽃단장을 한 산들이 나타날때쯤
이었다.
"오래됐어요.민정이가 휴학을 할정도면 대충짐작이 갈겁니다. 처음에는 돈만 있으면 무슨 병
이든 고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죽고 사는건 순전히 신의 영역
이지만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아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차있었다. 명선은 아침에
민정이가 어머니때문에 고모가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을때 집안이 평탄지 않아보인다는 생각
을 했었다. 모르긴해도 그의 어머니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게 분명해보였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명선의 물음에 현수는 망설이는지 한동안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무말이 없었다.
"혈육요? 어머니와 민정이둘밖에 없어요.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교통사고로 돌아가
셨어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의 고생은 대단했죠. 그때 민정이의 나이 겨
우 4살이었어요. 어머니는 온갓 허드렛일을 하시며 민정이와 나를 키웠죠. 사람 팔자는 타고
나나봐요...우리어머니보면 그런생각이 들어요.젊어서는 고생, 늙어셔서는 병망에 시달
려..."
"...."
"동생이 어머니 병수발든지 3년돼었어요. 그래도 싫은 내색 한번안하는걸 보면 내동생이지만
오빠로서 너무나 대견하고 미안하기도 해요. 대부분의, 아는사람들은 다 인정해요. 어머니가
얼마못사실거라는것을....그런데 민정이는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 믿음이 여태껏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런데 난 그녀석에게 아무런 도움이 돼어주지 못했어
요. 대학다닌다고 집을 떠나있었고 유학가느라 집을 떠나 있었고..."
현수는 말을 다 이어가지 못했다. 자신의 넋두리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고 명선의 산뜻할
것같은 기분을 오히려 망칠것 같은 느낌때문이었다.
현수는 어젯밤에 있었던 석현의 발언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명선은 그가
이한마디를 말하려고 참으로 먼길을 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문제에 대해서
할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보였다.
"오늘 아침일찍 부사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현수가 재석이 얘기를 꺼낸건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의 한 식당에서였다. 재석은 참석못해서
미안하다고만 말했다고 했다. 명선은 반드시 오겠다고 말하던 그가 무엇때문에 참석을 못한것
인지 궁금해 했지만 그의 속을 모르고는 알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오직 재석이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명선은 재석이 못온건 자신과 관련됐을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괜
히 확대해석해서 마음고생할 필요가 없을것만 같아서 현수의 말을 그냥 흘러들었다.
두사람은 점심을 먹고 용인 에버랜드에 가서 사파리 월드, 독수리요새, 아마존익스프레스등
주요시설을 풀코스로 돌고 돌아왔다.
현수는 아파트로 돌아와 헤어질때 명선에게 다시한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의 목소
리에는 믿음을 가져보라는 강한 메세지가 담겨있는것만 같았다.
"나중에 후회안할 자신있죠?"
"....."
"정야님, 우리 그만 만날까요."
얼굴없는 사내의 말에 명선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명선은 어제밤, 그리고 오늘 있었었
던 일을 모두 얼굴없는 사내에게 말했다. 현수와의 깊고 깊은 입맛춤, 그리고 오늘 현수와의
나들이, 모두 얼굴없는 사내에게 죄인같은 심정으로 털어놓았다.
죄인...그에게 죄의식을 느낄이유는 없었지만 명선은 사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
다. 결혼도 안한, 혼기 찬듯한 남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런데...현수와 관련된 얘기때문인지는 몰랐지만 명선은 남자의 작별인사에 웬지모를 고별인
사를 듣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젠 정야님에게 누군가가 생겼는데 다른남자와 채팅을 할수는 없잖아요. 제말 무슨뜻인지
아시죠?"
"우린... 그냥 친구잖아요."
"친구요? 그렇지 않아요. 만약 내일이라도 그남자와 정야님이 약혼이라도 하시면 우린 불륜관
계가 되는 겁니다. 육체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요즘은 채팅자체가 불륜으로 인식되는것이 현실
입니다."
"...."
명선은 너무나 앞서나가는듯한 남자의 말이 조금은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님은 제가 갖고 있는 꿈등,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갑자
기...제가 그런얘기를 했다고 해서 너무 앞서나가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는것만 같아서 당황
스럽군요. 외람되오나 님은...아니라고 하셨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면서도 기분나빠서 그
러시는거죠?"
"....."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과 적막감...얼굴없는 사내는 말이 없었다. 분위기기 이렇게 어색하
고 침전된적이 없었기에 명선은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었다. 그와 있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
까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럽고 챙피한 생각만
들었다. 사내는 남자다. 애초에 다른남자얘기를 꺼낸것이 잘못이었다.
"정야님, 제가 정야님과 계속 알고 지내면 언젠가는 정야님이 크나큰 충격을 받을날이 올겁
니다. 어쩌면 돌이킬수 없을지도..."
"녜?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은 여기에서 끝내요. 다음에 또봐요."
"....."
명선은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태연한척 하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한테 쏠리는것
만 같았고 출근직후부터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석현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러웠고 집들이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는듯해보였다. 명선은 석현이 참으로 세상
한번 편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문은 삽시간이다. 회장아들과 평사원
의 스켄들아닌 스켄들은 사내에세 빅뉴스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며칠이 흘렀지만 명선의 조바심나는 추측과는 달리 회사에서는 자신과 관련
된 그어떤 얘기도 나돌지 않았다. 인숙이와 선희등 그날 집들이에 참석했던 모든 직원들은 마
치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들처럼 석현의 폭탄발언에 대한 어떤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명선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폭풍전야의 고요함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재석이 성남공장에 나타난건 얼마전에 개발한 혼합음료의 홍보
전략 구상에 몰입중일때였다. 현수의 집들이이후 정확하게 5일째 되던 날이었다. 현수는 개인
적인 일로 조퇴를 한상태여서 재석은 박차장을 통해서 명선을 부사장실로 불렀다.명선은 박차
장에게 무슨일이냐고 물었지만 박차장은 고개만 갸우뚱했다. 명선이 부사장실로 가자 방에는
재석이 두명의 외국인 남자와 같이 있었다.
"명선씨, 통역좀 해줄래요?"
"녜?"
명선은 재석의 말에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그가 현수집에서
영어회화좀 하느냐고 물은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명선은 재석이 눈치를 못챌정도 가늘은 한숨
을 한번 내쉬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전문용어가 튀어나올거지만 순발력과 재치로 대처해 나가
리라 마음먹었다. 명선은 재석이 이러는 이유에 대해서 고의성이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외국바이어들을 직접만난다고 자신한테 말한건 현수집들이 하던 날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영어를 못한다고 자신을 불렀을리가 없었다. 자신을 시험하려는것이 분명해보였다.
"명선씨, 이사람들은 호주 바이어들입니다. 가만보니 이사람들 본토발음과 좀 차이가 나는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명선씨를 불렀어요."
"별차이는 없어요. 단지 억양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그...그래요? 그럼 지금부터 통역좀 해줘요."
"녜. 힘닫는데까지 할께요."
"오빠!"
현수가 넓은 찻집에 들어서자 대전 역전광장쪽 창문옆에 앉아있던 민정이가 손을 들며 현수
를 불렀다.
현수는 소파에 앉자 마자 한숨을 한번내쉬고는 목이 마른지 물컵을 들이켰다.
"오빠, 어떡할거야?"
"수진이 언제왔어?"
"어제 밤늦게 왔었어. 아예 짐을 사들고 왔어. 이혼한 마당에 대체 어쩌자는건지..."
민정은 손으로 턱을 괴고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단 들어가자."
"오빠도 수진이 언니 만났지?"
"...귀국하고 한번 찾아왔었어. 갈라설때를 생각하면 찾아온다는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기에
조금은 놀랐지. 어서 들어가자."
"어머니..."
현수가 마당에 들어서자 현수모친은 큰방 창문화단앞에서 반짝이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휘체어에 앉아있었다.
"어머니가 좀 좋아지신것 같네?"
"안그래 오빠, 저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으시곤 해."
"현수야...대체 어찌된거니? 수진이가 왔어."
현수모친은 가늘은 목소리로,꺼져가는 목소리로 현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현수는 모친의 손을 잡았다. 앙상한 뼈만 남은 손은 마른장작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수는 민정에게 밖에 있으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수진은 앞치마를 두른채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가 현수를 보자 현관문앞으로 쪼르르 달려
왔다.
"너 답지 않게 대체 왜이러는 거니?"
"나.. 말했잖아. 반성많이 했다구..."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오렌지가 하루아침에 앞치마를 두른다고 근본이 달라지니? 니가 이런
다고 뭐가 달라지니? 대체 뭘어쩌겠다는 거야!"
현수의 고함소리는 분노가 엉어리진채 뭉텅뭉텅 목구멍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수
진은 이미 단단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수의 말에 놀라는 기색없이 대꾸도
없이 고개를 숙인채 가만히 있었다.
"...니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어머니 병수발 들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그건 나보다도
너 자신이 더잘알거야."
"그건 해봐야 하는거고...어서 아가씨 복학하라고해."
"뭐라고? 해봐야 하는거라고? 그러다가 지치면 그만두겠다는거 아냐. 너 정말 못되고 영악하
기 이를데 없구나. 당장 집에서 나가!"
"난..절대 안나가. 현수씨가 내마음 알아줄때까지 여기 있을거야."
그년은 입술을 꼭깨문채 현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오빠, 어떻게 됐어?"
"그냥 내버려둬. 저고집 누가 꺾니. 제풀에 지쳐 그만 둘거야."
"그럼...그때까지 수진이 언니와 같이 살란 말이야?"
"어떡하니, 그렇다고 따귀를 올려부칠수도 없고...조금만 참아. 수진이는 절대 우리집에서 살
수 없는 여자야."
"....."
첫댓글 다음편은 언제쯤 올라올까???????
데스님! 어디인지는 모르나 데스님의 글이 인기 짱인가 봅니다그려! 좋은 일이네요. 그래도 비가 오는 날이면 훌쩍 들러서 미 연재 대본 올려 놓고 가심이 어더할런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