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
우리나라의 초등 교육은 1895년(고종 32) 「소학교령」 공포로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06년(고종 43)의 「보통학교령」 공포로 소학교가 보통학교가 되었고, 1911년에는 「조선 교육령」에 의하여 수업 연한 4년의 수준 낮은 초등 교육 제도가 되어 버렸다. 보통학교는 아동에게 국민 교육의 기초가 되는 보통 교육을 하는 곳으로서 신체의 발달에 유의하고 일본어를 가르치며, 덕육을 베풀어 국민된 성격을 양성하고, 생활에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가르친다는 목적 아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되, 지방 사정에 따라 1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8세 이상인 자가 입학하도록 하였다[수업 연한이 4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6세 입학보다는 8세 입학이 효과적이라는 이유에서 8세 입학으로 규정].
보통학교의 교과목은 수신(修身),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算術), 이과(理科), 창가(唱歌), 농업 초보, 상업 초보와 남자에게만 과해진 수공(手工), 여자에게만 과해진 재봉 및 수예의 12과목이었다. 수신,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등 4과목은 필수였고, 나머지는 지역 사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어 및 한문 과목이 있었으나 한문의 비중을 더 두게 하였는데, 이는 보통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으면 학교에 학생을 보내는 학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교묘하게 한국어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보통학교의 교원은 훈도와 부훈도라 하였는데, 뒤에 촉탁 교원, 대용 교원도 있었다. 훈도와 부훈도는 판임과 대우로 통감부 시대까지는 학교장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는데, 일본인의 교감이 파고들어 와 「조선 교육령」 실시 후에는 한국인 교장을 몰아내고 일본인이 독점하는 동시에 교감 제도도 폐지하였다. 일본인은 일본 본토에서 채용하여 1~3개월의 강습 후 임지에 배치하였고, 한국인은 관립의 고등 보통학교와 여자 고등 보통학교의 사범과 출신, 그리고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임시 교원 양성소 출신 및 교원 시험 합격자를 채용하였다.
보통학교의 설립 유지는 1911년 10월에 제정한 공립 보통학교 비용령에 의하여, ‘임시 은사금이자 향교 재산 수입, 수업료, 기부금, 국고 보조금 및 지방비 보조금으로 지변한다’고 하면서 ‘전 항 외에 공립 보통학교의 설립 유지에 필요한 학교 설립 구역 내의 한국인의 부담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일정 지역 내 거주의 한국인으로부터 비용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세 체납 처분의 예에 따라 징수할 수 있다’는 강제 규정으로, 한국 민족에게서 한국 민족의 혼은 빼앗는 식민지 교육 비용을 한국인의 영세한 생활비에서 빼앗아 사용하였다. 이는 1920년에 「조선 학교령」이 제정되면서 필요할 때는 부역 또는 현품으로 부과할 수 있다는 규정까지 발전되어 철저한 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였다.
1910년대 부산의 보통학교
국권 피탈 당시 부산 지방의 공립 보통학교는 공립동래보통학교와 공립부산보통학교 등 두 학교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1895년에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근대적인 초등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1906년까지 서울에 관립 소학교를 9개 학교 설립하고, 「보통 교육령」을 공포하여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하고 관찰부 소재지 13개 도시에 공립 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 지방 도시에 28개의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된 것이 공립동래보통학교로,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이다.
공립동래보통학교는 처음에는 남자만 수용하다가 1912년에 따로 여자 교육을 위한 여자부를 설치하였고, 이후 1925년에 독립시켜 동래제2공립보통학교라고 하였다. 공립동래보통학교는 1911년 「조선 교육령」의 실시와 함께 동래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1925년에는 동래제1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1938년에 모든 보통학교가 일본인 학교와 같이 심상소학교로 불리었다가, 1941년에 복정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광복 후에 현재의 내성국민학교가 되었다. 동래제2공립보통학교는 1941년에 유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광복 후에도 계속 유지되다가 1971년에 폐교되었다. 유락국민학교 자리에 유락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81년에 원예학교 부지 내로 신축 이전하자 다시 낙민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공립부산보통학교는 1909년(순종 3) 4월에 설립되어 공립부산실업학교와 같은 교지에서 운영되어 오다가 6월에 단독 운영으로 바뀌었고, 1911년 1월에 영주동에 있는 구 동래부(東萊府) 청사를 이양받아 분교장으로 하고 1학년을 옮겨 수용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조선 교육령」 실시와 함께 부산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2년 1월에는 전교생을 분교장으로 옮겨 본교사로 하여 1941년에 봉래국민학교가 되었다.
당시에 사립 학교는 여러 곳에 설립되어 있었으나 사립부산진육영보통학교만이 보통학교라는 이름을 썼고, 나머지 학교들은 사립 학교로 호칭되었다. 사립부산진육영보통학교는 1909년 4월에 인가되어 그해 9월에 부산진의 부인회가 설립한 양정숙을 여자부 분교장으로 하였으며, 사립좌천학교를 흡수 통합하여 1911년 4월에 공립으로 이관되었다. 그해 11월에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 좌천동에서 개교하여 1913년에 부지 191.734㎡[58평]를 확장하였고, 이어 912.4㎡[276평]를 매수하여 여자부를 이전 통합하였으나 교지가 협소하여 1922년 11월에 현 부산진초등학교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렇듯 부산진육영보통학교가 공립으로 이관되는 것은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 정책이 교육 전체의 중심 부분을 공립 보통학교에 두고, 사립 학교를 흡수하여 한국인의 자주적인 학교를 없애고 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진사립일신여학교는 1909년에 고등과 병설의 인가를 났을 때 초등 과정을 초등부라 하였는데, 초기에는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여학생만을 교육하였다. 일신여학교의 고등과는 1925년 6월에 동래로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가 되었고, 초등부는 남아서 부산진일신여학교라고 하였다. 그 뒤 초등부는 차츰 학생 수가 늘어나 1934년에 262명이 되었으나, 신사 참배 문제로 동래일신여학교가 폐교될 무렵인 1939년을 전후하여 폐교된 것 같다.
이외에 1910년(순종 4) 국권 피탈 당시 부산 지역에 있던 사립 학교는 다대포사립실용학교와 사립명정학교, 사립양정학교, 사립동명학교, 사립구명학교, 사립옥성학교, 사립좌천학교, 사립초량학교 등이다. 이 가운데 사립구명학교는 1907년(순종 1)에 설립된 1년제의 학교로, 1918년 4월에 사립화명학교, 사립정명의숙과 함께 통합되어 구포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사립양정학교는 1908년(순종 2)에 하단에서 설립되어 이유진이 교장으로 있었고, 11년간 졸업생 37명을 배출하고 1919년 3월에 하단공립보통학교로 이관되었다. 이것이 1919년 10월에 사하공립보통학교로, 그해 11월에는 괴정동으로 이전하여 오늘날의 사하초등학교가 된 것이다.
사립명정학교는 1908년에 인가를 받아 범어사(梵魚寺) 내의 금어암에서 개교하였는데, 1926년에 사립명정보통학교로 인가되었고 1931년에 청룡공립보통학교로 이관되어 오늘의 청룡초등학교가 되었다. 명지에서 설립된 사립동명학교는 1923년에 명지공립보통학교가 되어 오늘의 명지초등학교가 되었다. 사립옥성학교는 영도 유지들이 1908년에 설립하여 박치오(朴致五) 교장이 운영하였다. 1911년에 옥성여학교도 설립하였으나 뒤에 통합 병합되었고, 1920년에 영도 거주민으로부터 갹출된 기부금 1,270원을 토대로 목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영도초등학교이다.
사립좌천학교는 부산진보통학교에 흡수되었고, 사립초량학교는 초량의 유지들에 의하여 설립되어 박영길(朴泳吉) 교장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처음에는 남자만 교육하였으나, 초량부인회의 후원으로 여자부도 설치하였다. 남자부는 1912년에 폐쇄되어 학생들은 입학시험을 거쳐 부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사립초량학교의 부지는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여자부 분교장으로 인계되었다.
국권 피탈 초기에는 입학 지원자가 얼마 되지 않아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경우 1910년에 재교생이 203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차츰 입학 희망자가 늘어나 1914년 3월 25일에 입학시험을 실시하여 지원자 120명 중 1학년 64명, 2학년 5명, 3학년 7명을 합격시키고 나머지 44명은 탈락시켰다. 이듬해에는 지원자 85명 중 1학년 65명, 2학년 편입 3명 외에는 입학을 불허하였다. 이때에는 낙제 제도가 있어 3월 말이면 성적을 발표하여 유급자를 결정 공표하였는데, 한 학년에 9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무렵 하단의 사립양정학교 학생 4명이 부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지망하였으나 불허한 일도 있었다.
교과 운영에 있어서 수신,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등 필수 과목 외의 선택 과목을 교수하고자 할 때는 인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부산보통학교에서는 1911년에 창가과 가설 인가를 받았고, 1913년에는 농업 초보의 가설이 인가되었으며, 1914년에는 수공과의 가설이 인가되었다. 수공과 가설로 인해 수업 시간이 증가하여 매주 교수 시간을 2시간 더 연장시키는 것까지 인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또 여자부는 아래 표와 같이 교과목을 변경 편성하겠다고 신청하여 인가를 받아 시행한 일도 있었다.
교육 내용이나 방법 면에서도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의 횡포도 심하였는데, 일본 천황이 죽었을 때에는 검은 깃을 달고 요배식(遙拜式)을 올리게 하였으며, 부산의 경우는 총독이 일본에서 귀임할 때면 전교생이 부두에 나가 영접을 하였고, 일박하고 다음 날 상경할 때에도 또 역에 나가서 전송하는 등 법석을 떨어야 하였다.
일본은 총독부에 학무국을 두어 교육 행정 일체를 장악하였고, 경상남도에는 학무과를 두었으며, 부산에서는 1910년 동래부가 부산부(釜山府)로 개칭되었을 때 학무계를 두어 학교를 감독하였다. 부산의 부제가 공포된 것은 1913년 10월 30일이었고, 이때도 학무계가 있었다. 이들 교육 행정 기관이 매우 강력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1912년 5월 10일에 경상남도 학무과의 서기가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전교생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관공립 학교 교원들은 문관 임용령의 적용과 문관 분한령, 관리 복무 규율 및 교원 심득의 엄격한 적용을 받았는데, 1913년 4월 10일에 공립 학교 전 직원이 부산부청에 출두하여 관리 복률에 서명한 기록으로 보아 매우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교원들은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칼을 차고 수업을 하였으니, 무단 정치 아래 한국인에 대한 교육이 매우 엄격하고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민족의 저항을 탄압하고 일제의 동화 정책을 강제 집행하기 위한 무력 장치의 상징인 것이다.
이 무렵 보통학교의 교직원 중 교장은 일본인이 계속 임명되었고, 교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되었으나 한국인은 주로 부훈도, 촉탁 교원, 대용 교원들이었다. 당시 일본인 교장의 봉급은 80원 내외였는데 비하여 한국인 훈도는 20원 안팎으로 심한 격차가 있었다. 심지어 소사 채용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한국인을 채용하였으나 뒤에 가서는 줄곧 일본인을 채용하였고, 봉급도 한국인은 일급 25전이었는데 반해 일본인은 35전으로 여기에도 차별을 두었다. 당시 상여금은 연 1회 지급되었는데, 일본인 교장이 87원인 데 비하여 한국인 훈도는 18원으로 격차가 심하였고, 일본인 소사의 8원과 대조적이었다. 이때 졸업 학생에게 도장관이 주는 모범 학생 상금이 2원이었다. 교원의 임명 사령장도 일본인과 한국인은 구분되어 있었다.
1910년 일본인이 쓴 『조선 사정(朝鮮事情)』이라는 책에 의하면 당시 경기 지방의 논 가운데 상답 1단보 값이 45원이었고, 경상남도 지방은 80원이었다. 이때 한 꾸의 벼 77만 석이 일본에 수출되어 627만 원을 받았는데, 쌀 1되 값이 15전 정도였다. 1923년의 소학교 국어 독본 1권 값은 16전이었다. 1913년에 보통학교에 수도와 전화가 들어왔고 조금 뒤에 실업 학교에 환등기가 들어왔는데, 당시로서는 신기하였기 때문에 보통학교 학생이 실업 학교에 가서 교육 환등회를 본 일이 있는 등 매우 낙후된 형편에 있었다.
저축을 장려하기 위하여, 습자지를 공동으로 염가로 구매하고 시중 시세로 학생들에게 팔아 차액을 해당 학생의 저금으로 충당하였으며, 범어사에 소풍 갈 때 부산보통학교 학생들은 영주동에서 동래까지 기차로 갔는데 기차 삯은 학교비로 지불하는 등 특이한 면이 많았다. 매년 2월 말에는 학생 모집 광고를 내어 3월 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해마다 불합격자가 많이 생겼다.
1914년부터 수업료를 정하였는데, 1인당 10전 안팎이었고, 부청(府廳)의 서기가 출장하여 징수하였으며, 수업료는 전액 당해 학교 세입 재원으로 학교 예산에 편성 집행하였다. 그때는 여자 교육에 관심이 적은 때였으므로 여자 학생 유인책으로 수업료를 받지 않다가 1916년부터 받기로 하였으나, 다시 2년간 징수를 보류하여 1918년에 징수하게 되었다. 이때 15원씩 징수하였으며, 2인 이상일 때에는 1인 초과자에게 반액만 받았다.
학무 위원은 학생 정원과 학급 증설 등의 협의를 하였으며, 학교 운영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기에는 5명씩 학교마다 위촉하였다가 1913년에 7명으로 늘렸으며, 2년 임기로 경상남도가 위촉하였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도 부산공립보통학교 학무 위원으로 위촉된 일이 있었다. 한편 교의(校醫)는 부산 부윤이 위촉하였는데, 연간 수당이 15원이었다.
이 시기[1910~1919년]에 동래군이 분리되어 나간 부산 지방에는 공립 보통학교가 2개 학교뿐이었고, 학생 수도 별로 증가하지 못하였다. 1910년에 부산공립보통학교만이 있어 학생 수가 203명이었고, 1911년에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가 공립이 되어 학생 수가 438명으로 늘어났으나, 1919년에는 14학급에 642명 정도밖에 증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공립 소학교가 1919년에 6개 학교로 증가되었고, 학생 수는 4,059명이나 되었으며, 학급 수도 78학급이었다. 이때의 인구 비율은 한국인이 4만 3424명, 일본인이 3만 499명으로 한국인의 취학자 수가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부산의 보통학교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 지방의 학생들과 교사들도 이에 호응하여 적극 가담하였다. 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참가하여 민족의 기개를 높이 떨치고 부산의 독립운동을 고조시켰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교사들과 함께 태극기를 배부하면서 독립 만세를 불렀고, 영도의 사립옥성학교에서도 재학생들이 졸업생을 규합하여 교사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사립명정학교 학생들도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3·1 운동으로 인해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통치 체제가 바뀌어져 한일 동일 대우를 표방하고, 소위 일시동인(一視同仁)이란 허울 좋은 정책을 내걸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어의 민간 신문을 발행하는 것을 허용하고, 한국인의 관습을 존중하는 동시에 한국인의 교육을 일본인 교육 제도에 준거하도록 하는 등의 개혁을 내세워 교사들의 대검을 폐지하고, 한국인의 교장 임명과 보통학교 확장을 위한 3면 1교 계획의 4개년 단축 등의 응급조치를 강구하는 동시에 「조선 교육령」의 개정을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21년에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 교육령」 개정안을 심의하도록 하였고, 1922년 2월 4일에 제2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제2차 「조선 교육령」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종래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육을 구별하여 「조선 교육령」으로 한국인 교육만을 규정한 것을 개정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교육을 동일하게 하도록 하였다. 둘째, 종래 초등 보통 교육과 고등 보통 교육을 일본인보다 낮은 수준에 둔 것을 원칙적으로 같은 수준이 되게 하였다. 셋째, 정식의 교원 양성 기관으로서 독립의 사범 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형식상 균등화가 도모된 제2차 「조선 교육령」은 보통학교 수학 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고 총 교육 연한은 16~17년이 되게 하여 일본인과 같게 하였으나, 여전히 교육의 중심 부분은 공립 보통학교에 두었고 이의 평균 분포적 증설과 보통학교로서 완성 교육을 한다는 정책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리하여 1919년에 3면 1교를 두도록 하는 한국인 보통학교 확충 계획을 4개년 단축하여 1922년에 달성하도록 수정하였고, 1930년부터 1936년까지는 1면 1교의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3·1 운동 뒤 부산 지역에서 민족적 자각이 크게 일어나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녀들을 취학시키는 데 전에 없는 열성이 나타났다. 이때 수업료가 30전으로 올랐으나 입학 지원자는 계속 늘어나 각지에서 학교 설립의 요구가 높아졌다. 당시는 주민들이 학교 설립비를 기부금으로 내어야만 학교를 설립해 주었기 때문에 영도 주민들은 1,270원을 모아 부산부청에 납부하였고, 부민동 일대의 주민들은 319명이 5,062원을 기부하였다. 교사 신축을 위하여 부산공립보통학교 구내 주민들은 2,800원을,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구내 주민들은 800원의 기부금을 냈다.
일본인들은 학교 조합을 만들어 학교 설립과 운영 비용을 부담하였고, 한국인은 1910년의 학교 비용령에 의해 부과세로 학교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1920년에는 학교비령이 제정되어 한국인 학교는 한국인이 비용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학교의 설립은 학교 평의원회와 의논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어 이의 의논 결과에 따라 1920년에 영도 주민들의 기부금에 의하여 사립옥성학교 신축 교사가 마련되었으며, 공립 학교로 전환하면서 목도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4학급에 170명으로 개교하였다[여자는 18명 정도]. 1921년에는 부민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이 인가되었는데, 역시 기부금에 의하여 신축 교사가 마련되어 1922년에 6학급에 406명으로 개교하였다[여학생 수는 81명].
한편, 구내 주민들의 기부금에 의지하여 부산진공립보통학교가 1921년에 부지를 매수하고, 1922년에 교사를 신축하여 부산진구 범천동 현 부산진초등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 부산공립보통학교는 벽돌 건물인 신축 교사를 1922년에 준공하였으며, 1924년에 6개 교실을 신축하여 초량에 떨어져 있던 여자부를 옮겨 와서 합쳤다. 이 여자부는 1915년에 인가를 얻어 사립초량학교 자리에 개설하였다가 1920년에는 교실 증축 관계로 1~2학년이 교대로 2부제 수업을 한 일이 있었다.
공립 학교가 2개 학교로 늘어나도 지망자를 모두 입학시킬 수가 없어, 1923년부터 공립 보통학교에 속수 학교(速修學校)를 병설하였다가 1926년에 폐지하는 등의 응급조치를 취하였다. 속수 학교는 수업 연한 2년으로 4학기 정도의 과정을 수료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부산공립학교 부설이 남자 55명, 여자 80명이었으며, 목도공립보통학교 부설이 남자 40명, 부민공립보통학교 부설이 남자 50명이었다. 1924년에 4개 공립 보통학교의 학생 수는 3,305명이었고, 속수 학교의 학생 수는 225명이어서 상당히 높은 비율이었다. 공립 보통학교의 여학생은 24%인데 비하여 속수 학교 여학생은 36%로, 당시는 여자 교육에 대하여 관심이 낮고 매우 소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를 전후로 부산의 보통학교 체제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1918년에 사립명진학교가 설립되어 1920년에 공립 학교로 전환되어 사상공립보통학교가 되었고, 1922년에는 대저공립보통학교가 대저면에서 설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수영에 수영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남천동에 사립남천학술강습소가 1917년에 개설되어 남천간이학교, 수영공립보통학교 분교를 거쳐 광복 후 남천국민학교가 되었다. 1923년에는 사립동명학교가 명지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였으며, 1924년에 동래군 서면에 서면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193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서지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이로써 1926년 기준으로 부산 지역에는 부산공립보통학교, 부산진공립보통학교, 목도공립보통학교, 부민공립보통학교, 동래제1공립보통학교, 동래제2공립보통학교, 구포공립보통학교, 사상공립보통학교, 수영공립보통학교, 대저공립보통학교, 명지 서면공립보통학교 등 13개의 공립 보통학교가 있었다. 사립 학교는 부산진일신여학교와 사립다대포학교가 있을 정도로 거의 공립 학교로 전환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한국인의 민족 사상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자주적 교육 기관인 사립 학교를 공립 보통학교에 흡수 통합하려는 정책의 결과라고 하겠다. 1926년에 부산부 거주 한국인은 6만 4928명이었고 일본인은 4만 803명이었는데, 한국인 보통학교에서는 4개 공립 학교와 사립 1개 학교에 3,686명이 수학하고 있었다.
1930년대 부산의 보통학교
1930년대의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으로 일본의 공업이 황폐화되고 그 여파는 한국의 농업 경제에 이어졌다. 이때 일본은 토지 조사 명목으로 토지를 수탈한 데에다 대륙 침공을 위한 군수 산업에 치중하여 한국의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당시의 총독은 이와 같은 한국인의 낙후된 생활을 구제하는 동시에 고조되어 가는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방책으로 자력갱생으로 농촌을 진흥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심전 개발(心田開發) 운동을 전개하여 황민화 운동으로 연결시켜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교육 즉 생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근로 교육을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정신 교육의 강화란 미명으로 황민화 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부산 지역에서는 농토를 통한 근로 교육이 어려웠으므로 보통학교에 직업과의 시설을 갖추어 직업 교육과 근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매점, 이발부, 수선부 등을 두어 상급 학생이 실습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수선부는 주로 학생들의 옷을 수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932년에는 보통학교에 직업과를 특설하였다. 이때 생활고로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중도 퇴학하는 학생이 전국에 3만 명이 넘는 형편이었는데, 일본은 학교 내에 자활을 위한 근로 교육을 실시해 초급 근로자 양성에만 급급하였다. 교원들의 봉급 수준은 1920년대에 일본인 교장이 140원, 일본인 교사가 평균 70원, 한국인 교사가 평균 50원 정도였다. 소사도 일급이 1원 20전으로 올랐으며, 이때에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봉급 차는 여전히 컸다.
1930년부터 소위 1면 1교의 공립 보통학교 확충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부산 지역에서는 학교 설립이 늦어져 학생 수용이 난관에 부딪혔다.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경우 입학 희망자가 565명이었으나 입학 허가자는 남자 140명, 여자 70명의 210명으로 355명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에 2부제 수업을 당국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고 76명을 추가 입학시켜 2부제 수업을 실시하다가, 학부형의 건의로 교무실을 비워 교실로 충당하여 1개월 뒤에 1부제로 되돌아간 일도 있었다. 사하공립보통학교에서는 1928년에 6년제 강습과를 설치하여 1934년에 70명 입학자 중 35명을 졸업시켰고, 제2기는 1940년에 53명을 졸업시켰다. 이와 같은 심각한 입학난 때문에 1932년에 남부민공립보통학교를 신설하였고, 1935년에는 수정공립보통학교를 신설하였다.
1936년에 부산부의 인구는 증가하여 20만 2,068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이 14만 3,605명이었고, 일본인은 5만 8,463명이었다. 이때 7개 보통학교[부산·부산진·목도·부민·남부민·수정·성지]에 7,000명이 수학하고 있었다. 1937년에 초량 일대 취학 희망지의 취학이 가장 어려워, 유지들이 1만 2000원의 기부금을 부산부에 납부하고 학교 설립을 간청하여 초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어서 대신동에 구덕·영명·산월 등의 사립 학교를 통합하여 구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 만주 사변, 중일 전쟁으로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 침공에 나섰다. 이에 전쟁 수행을 위하여 당시의 총독이 주동이 되어 대륙 침략의 교두보이자 병참 기지로 한국에 3대 교육 방침을 주축으로 전시 교육 체제를 확립하였다. 3대 교육 방침은 국체 명징, 내선일체, 인고 단련이며, 그 내용은 일본의 국체를 드높여 의식화하며 내지와 조선은 한 몸과 같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제고하여 전시하에 참고 견디며 몸을 단련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인의 인간적 이성과 민족적 양심, 그리고 문화적 성장을 파멸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인에게 신사 참배, 궁성 요배,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한국어 사용과 교수를 금지하였으며, 교원과 학생을 불온 분자라는 명목으로 수시로 검거하고 감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여 소위 황국 신민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려고 강인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1938년에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한국인 학교 이름을 일본인 학교 이름과 같게 하였는데, 보통학교를 일본인 학교명과 같이 심상소학교로 개칭하게 하였으며, 심상소학교는 수업 연한이 6년이었다. 이로써 보통학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심상소학교는 1941년에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