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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폭군 진시황제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폭군은 결코 '위대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과 나라를 망친 군주를 보통 폭군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대다수 위대한 인물 근처에도 가지 못한 개망나니였다. '위대함'과 '폭군'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동·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 '위대함'과 '폭군'을 공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불과 13세 때, 진나라 제31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후 10년 동안 그는 허울뿐인 왕이었고, 실제 권력은 재상 여불위가 전횡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여불위를 중보(仲父)라고 부르며 섬기다가(?) -자신이 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판단했을 때- 가차 없이 여불위를 내쫓아버린 것을 보면, 그 10년 동안 자신의 야심과 권력에 대한 타오르는 욕구를 숨기느라 애썼을 진시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여불위를 쫓아낸 후 23세의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적 능력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진나라의 전통적인 국가전략, 즉 법치를 통한 상무정신과 국적을 불문한 인재 등용을 철저하게 좇았다. 이 국가전략이야말로 진나라가 군사력과 국력에서 전국시대 여섯 강대국(한·위·조·초·제·연)을 압도하고, 또 통일 전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진시황이 통일 전쟁에서 보여준 또 다른 능력은 외교술에 있었다. 이 외교술 역시 진시황은 선대(先代)의 외교 전략, 즉 소왕 시대의 재상 범저의 '원교근공책'을 철저하게 좇았다. 원교근공책은 문자 그대로, 거리가 멀거나 비교적 먼 나라인 초나라·제나라·연나라와는 친하게 지내고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삼진(三晋)인 한나라·위나라·조나라는 무력으로 제압한다는 외교 전략이었다. 이 외교 전략은 진나라가 이전에 고수해온 혜왕 시대 재상 장의의 연횡책을 대체한 것이다.
장의의 연횡책이 진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한 여섯 제후국의 합종책에 맞서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면, 범저의 원교근공책은 여섯 제후국을 고립에 빠뜨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여겨 공격하게 만들어 각개격파하겠다는 외교 전략이었다. 연횡책의 원교근공책으로의 변화는 진나라의 군사력과 국력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재상 범저가 원교근공책을 쓸 당시, 진나라는 이미 군사력과 국력에서 여섯 강대국을 압도하는 초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진시황이 추진한 통일 과정의 전개 과정을 보아도, 그가 이 '원교근공 전략'을 얼마나 철저하게 좇았는지를 알 수 있다. 진시황은 통일 전쟁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다음으로 조나라→위나라→초나라→연나라→제나라를 순서대로 멸망시켰다. 진시황이 보여준 또 다른 외교적 능력은 매수와 기만술 그리고 속임수였다. 이 외교술을 통해 진시황은 적국의 충신과 우수한 장군들을 제거하거나, 간신과 모리배들을 매수해 사전에 적국의 전쟁 능력이나 의지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진시황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국가 창업의 전략가가 갖추어야 할 요소, 즉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잔혹성'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통일 전쟁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국가 전략과 외교 전략은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정치적 능력일 뿐, 중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은 다름 아닌, 끝없는 분열과 혼란 그리고 전쟁의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를 끝장내버리고 중국사에 새로운 통일 왕조(제국)의 시대를 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550여 년간 쉼 없이 계속되어 온 전쟁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물론 평화의 시대는 진 제국이 아닌 한 제국 때 비로소 자리를 잡았지만, 어찌되었건 그 초석을 닦은 건 진시황의 진 제국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방의 한 제국은 진시황의 진 제국이 세운 국가 모델을 철저하게 모방함으로써 통일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고 또 전쟁의 시대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셈이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실려 있는, 통일 직후 진시황의 조정에서 일어난 '분봉제와 군현제 논쟁'을 보면, 춘추전국시대와 새로운 통일 왕조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진시황의 '위대한 인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통일 이후 새로운 통일 제국의 국가 체제를 둘러싸고 승상 왕관과 정위 이사 간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승상 왕관은 "제후국들을 모두 멸망시켰으나, 연나라·제나라·초나라의 땅은 진나라와 거리가 멀어 제후 왕을 봉하지 않으면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1)이라면서 진시황의 아들들을 제후 왕으로 봉하는 분봉제후제의 시행을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 모든 중신들이 찬성했는데, 오직 정위 이사만이 반대 의견을 냈다.
그는 분봉제후제의 폐단을 지적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 왕실 자제들에게 제후국을 분봉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천자와 제후국 또 제후국 상호간의 관계가 멀어져 마치 원수처럼 서로를 공격하고 토벌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천자는 이를 막지 못했다"2)고 했다. 분봉제후제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은 새로운 분열과 전쟁의 씨앗을 심는 것이므로, 전국에 군현을 설치해 황제가 임명하는 관료를 보내고 황자(皇子)와 공신들에게는 국가의 부세, 즉 후한 봉급을 주어 다스리면 천하를 직접 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기록을 보면, 이 논쟁에서 분봉제후제를 주장하는 세력은 승상을 중심으로 한 다수파였고, 군현제를 주장하는 세력은 정위를 중심으로 한 극소수파였던 듯하다. 승상은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이고, 정위는 법무부장관에 불과한 벼슬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극소수파인 정위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임에 따라, 통일 제국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때 진시황은 "천하가 끊임없이 전쟁의 고통에 시달려온 것은 바로 제후왕들이 있었기 때문"3)이라면서 "다시 제후국을 세우는 것은 전쟁의 불씨를 만드는 것"4)이라고 말했다. 그가 현실에 대해 얼마나 정확한 통찰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시황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그가 중국 역사상 '최초'를 가장 많이 창조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고, 최초로 전국적인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 최초로 화폐를 통일했고, 최초로 도량형을 통일시켰으며, 최초로 문자를 통일했다. 이 모든 '최초'는 진 제국을 하나의 단일한 국가체제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은 전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조직하는 것이었으며, 문자의 통일은 전국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특히 문자의 혼란은 통일 제국의 사회-정치적 통합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었다. 전국시대의 청동기나 도자기 그리고 화폐 혹은 제후왕들이 사용한 기물 등에 새겨진 문자를 보면, 각 제후국이 각자 나름대로 고유의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은 이 혼란을 정리하고, 서체와 문자를 진나라의 소전(小篆)체로 통일했다. 진시황의 수많은 '최초'의 창조로, '중국'이라는 관념과 상징은 비로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즉 제후국 연합체에서 명실상부한 하나의 통일 국가로 그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분명 '위대한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폭군'이었다. 진시황은 오늘날에도 '공포 정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지만, 당시 중국인들에게도 그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증오'의 대명사였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잔혹성과 야만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통일 이후 보여준 탐욕과 전횡은 온 중국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의는 진시황이 "탐욕스럽고, 신하들을 믿지 않고 백성들을 멀리했으며, 황제의 권위만을 내세워 비판 세력과 학문을 탄압했고, 속임수와 권력만을 앞세우고 포악함으로 천하를 다스렸다"5)고 했다.
진시황의 탐욕은 전쟁의 고통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의 고혈을 짠 아방궁과 진시황릉, 도로·운하·만리장성 등의 대역사 그리고 불로장생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하들을 믿지 않았는데, 자신의 말을 누설했다 하여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방과 소재를 알 수 없도록 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그가 백성을 멀리한 사건들이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오로지 폭력과 형벌만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진시황은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유일한 비판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유가 사상가들을 대학살하는 분서갱유까지 자행했다. 그의 삶은 온통 전쟁, 정복, 살인, 폭력, 의심, 속임수, 기만 등 '잔혹과 포악의 이미지'로 얼룩져 있다.
진시황은 통일 제국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고, 진 제국 이후 펼쳐질 중국의 미래 설계도를 제시한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의 통치는 '폭력과 공포' 그리고 '민중들의 피와 눈물'로 뒤범벅된 참혹의 역사였다. 중국의 역사는 진시황 사후 그만큼 '위대함'과 '폭군', '창조'와 '파괴'의 상반된 이미지를 완전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인물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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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역사글도 있네요...공부가 되네요
고맙습ㄴ;디!
긍정의 하루되시길 기원합니다~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 여불위가 계략으로 임신한 애첩을 자초에게 넘겨서 후일 왕으로 만듬. 여불위는 우리민족의 핏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