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食神 心理學
이제야 비로소 서양의 심리학에 접목을 시킬만 한 글자가 등장을 했습니다. 식신이라고 하는 성분에는 뭔가 해당되는 항목이 있을법하군요. 그렇지만 우선 우리는 명리학도로써의 자존심을 걸고 오로지 식신의 성격에 대해서 먼저 연구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식신이라는 글자는 보기에도 좋습니다. 밥의 신이라... 밥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먹지않으면 곤란한데 바로 그 밥의 신이라니요... 그렇다면 식신은 먹고 사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밥이라는 것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성분이라고 할적에 식신도 그만큼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봐야 하겠군요. 과연 ‘밥의 신’ 이라고 할만 한 건덕지가 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식신은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봅니다. 표현하는 도구라고 했습니다만, 식신 말고도 다른 성분도 역시 나름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정확한 설명이 못될듯 합니다. 식신의 기본은 파고 들어가는 성분입니다. 깊이 파고 들어가는 성분이지요. 넓게가 아니라 ‘깊게’ 입니다. 식신의 영향을 받는 사주는 무엇이던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뿌리를 완전하게 파헤쳐 놓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이러한 성분이 식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식신의 마음을 헤어려 보건데, 다분히 이기적인 면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에도 목숨을 걸지요. 식신의 마음은 자신의 자존심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거든요.
토론을 하는 장면에서 보면 그사람의 마음에서 식신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기든 지든 별로 상관이 없는 논쟁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고집합니다. 이러한 성분은 학자간의 고집으로 존재하게 되는군요. 사실 이러한 식신의 자아완성에 대한 집착이 없고서는 심오한 학문의 이치가 나타나질 않습니다.
이러한 식신의 특징은 어느 한 곳에 몰두를 하면 밤이 되는지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파고 듭니다. 그래서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학문을 연구하는데에는 식신의 심리가 가장 우수합니다. 머릿속은 온통 식신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결국 무엇인가 한가지의 독창적인 결과를 얻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많겠군요. 몰두를 하기만 하면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서라고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심리구조는 자칫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겠군요.
지금 벗님께서 연구하시는 학문도 식신적인 면으로 개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낭월이의 이야기 스타일이 식신적이거든요. 그래서 바닥이 나올때까지 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식신은 내성적입니다. 그러한 구조로 인해서 조용히 먼산을 바라보면서 궁리를 하지요. 쉬임없이 떠드는 것은 식신에게서는 잘 볼수가 없는 장면입니다.
식신은 어느 한가지를 잡고서 잠시 연구를 해보다가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 정밀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고스톱이나, 포카를 하는데는 서투릅니다. 그러한 게임은 지능도 필요하지만 대개는 눈치와 뱃짱으로 버티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식에는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게임을 하면서도 뭔가 궁리를 하고 원리를 생각하는 게임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남들은 골치아프다고 하는 것도 식신은 흥미있게 궁리를 해 나갑니다. 그러한 게임중에서는 바둑이 대표적이라고 하겠군요. 바둑은 그 심오한 이치가 식신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거든요. ‘말보다 손으로’ 이것이 식신의 특기입니다. 식신은 남과의 대화에서 그렇게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원래가 달변가의 기질은 없습니다.
내성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말이 필요없는 게임인 바둑이 재미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장기와는 또 다릅니다. 장기를 둘적에는 주변이 떠들썩 합니다. 식신은 그러한 소란함이 맘에 거슬립니다. 조용하게 말없이 바둑돌을 집어다 놓으면 되는 게임이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서 고수가 되거나 하수가 되거나 하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게임이 맘에 든다는 정도로 인식을 하면 되겠습니다.
신선이 바둑을 둔다는데 식신은 신선의 기질이 있는 것일까요? 하긴 신선이 바둑을 두는데 갔다가 대추를 얻어먹었다고 하니까 밥신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인가요? 도끼자루가 썩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하하
이렇게 식신의 심리에 대해서 뭔가 실마리를 끌어내 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봅니다. 그리고 앞의 ‘식신의 원리’에서도 식신의 심리적인 면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했기 때문에 함께 참고하시면 더욱 이해를 하시기에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러고 보면 밥을 먹는다는 의미는 별로 없군요. 오히려 지혜를 먹는다고 보는게 타당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식신은 남들이 연구한 내용을 그냥 놓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다시 읽어보고 연구하고 정리하고 나면 어느사이에 자신의 이론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면에서 생각한다면 밥신은 정신적인 영양을 먹는 신이라는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다만 외골로 파고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성분의 작용으로 융통성이 결여되는 면이 있습니다. 식신은 생활능력이 그리 탁월하다고는 못하거든요. 연구를 하는 것이 밥으로 연결만 되면 더 바랄게 없는데 실은 연구한다고 해서 모두가 돈으로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쌀독에 쌀도 떨어지고 주머니에 돈도 떨어지고 참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을 보면 갓이야 다 떨어지거나 말거나 시를 한수 멋드러지게 지으면 금새 서당 훈장자리는 확보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렇게 식신의 부류들은 겉모습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내면적인 즐거움을 더욱 중시하는 까닭이지요. 이러한 고사를 접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낭만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분들이 식신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깊이 깊이 파들어 가다가 보니까 한가지 방면에서 대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명성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가난과 멸시 속에서 냉대를 받는 것은 기본이 됩니다. 낭월이가 이렇게 식신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사주에 식신이 둘이나 포진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성분은 결국 넓게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 깊게 하는 작용으로 결말이 날 모양입니다.
사실 동양의 역학도 그 종류를 논한다면 대단히 많습니다만, 이렇게 십여년의 결코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시간을 오로지 명리학이라고 하는 한가지만을 놓고서 파고드는 것은 식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명리학을 연구하면서도 또한 겾가지는 하나하나 제거해 나갑니다. 12운성의 불합리성을 보고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온갖 신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살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근원이 얼마나 엉성한 것이지를 알게 됩니다. 가령 12신살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만 나열을 해본다면, 지살 장성살 화개살 역마살 재살 월살 도화살 반안살 겁살 천살 망신살 육해살 로 이뤄져 있습니다. 일예로써 도화살은 일지에 삼합에서 첫자의 앞자라는 구조로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일지가 寅이라고 한다면 卯가 도화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寅卯가 원국에 함께 있다면 그래도 일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일지에 午火가 있거나, 戌土가 있거나 모두 똑같이 원국의 다른 지지에 卯木이 있다면 그 글자는 도화살에 해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삼합의 성립 자체에도 인오술 중에서 오화가 빠지면 논하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삼합 중에서 아무글자라도 일지에 있으면 삼합의 이치로써 신살을 대입시키는 것은 식신의 구조로써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식신의 성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물론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이 되면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참으로 단순하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는 식신은 아무래도 사회에서 남들과 겨뤄가는 생존경쟁에서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전에 말하기를 ‘식신이 많으면 상관과 같이 본다.’ 고 합니다. 그 이치에 대해서도 심리적으로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식신은 깊이 파고 들어가는 성분이다. 그러데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가는 성분이 많다면 많은 것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어가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연구에 몰두하는 성분이 깊어지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깊이 연구하기 보다는 넓게 궁리하는 상관의 형태와 닮을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궁리를 해볼적에 식신이 많으면 상관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알듯도 합니다.
인간의 한정된 틀 속에서 많은 것에 통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요. 그저 기껏해야 한두가지에 대해서만 통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성공적이라고 하겠고요. 이것저것 많은 곳에 손을 대고 있다면 아무래도 제대로 깊이가 짜여질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것에 촛점을 맞춰보고서 이 고전의 말뜻을 이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