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향약(禮安鄕約)>은 1556년(명종 11) 퇴계선생이 경북 안동 예안지방에서 시행하기 위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 만든 향약(鄕約),즉 고을의 공동규칙이다. 대체로 향약은 주자학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확립하고 현재의 경제구도를 유지하며 지주(地主)로써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방사족(士族)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것 이었다. 다음은 퇴계선생이 지은 <鄕立約條序(향입약조서)>이다.
향당에서 약조를 세운 것에 대한 서문 (鄕立約條序) - 퇴계선생문집 제42권
옛날 향대부(鄕大夫)의 직책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로써 규탄한다. 선비 된 자는 또한 반드시 집에서 닦아 고을에서 드러난 후라야 나라에 등용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인도(人道)의 큰 근본이요, 집과 향당(鄕黨)은 실로 그것을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왕(先王)의 가르침은 이것(효제충신)을 중(重)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법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법제(法制)는 비록 폐하였으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진실로 그대로 있으니, 어찌 고금(古今)의 마땅함을 참작해서 권하고 징계하지 아니하겠는가. 지금의 유향소(留鄕所)는 바로 옛날 경대부가 끼친 제도이다. 알맞은 사람을 얻으면 한 고을이 화평해지고,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온 고을이 해체(解體)가 된다. 더욱이 시골은 왕의 교화[王靈]가 멀어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공격하고, 강하고 약한 자들이 서로 알력을 벌이고 있으니 혹시라도 효제충신의 도[孝悌忠臣之道]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면 예의(禮義)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점점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걱정인데, 그 규탄하고 바로잡는 책임이 이제는 유향소로 돌아오니, 아아, 그 또한 중하다.
우리 고을은 비록 땅은 작으나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이름이 났고 유현(儒賢)이 많이 나서, 왕조(王朝)에 빛나는 자가 대대로 자취를 잇대었으므로 보고 느끼고 배우고 본떠서 고을의 풍속이 매우 아름답더니, 근년에는 운수가 좋지 못하여서 덕이 높아 존경받는 여러 공(公)들이 서로 잇달아 돌아갔다. 그러나 오히려 오래된 집 안에 남아 전하는 법도가 있어 문의(文義)가 높고 성하니, 이를 서로 따라서 착한 나라가 되는 것이 어찌 불가(不可)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이 고르지 않고 습속이 점점 그릇되어 맑은 향기는 드물게 풍기고, 나쁜 얼이 사이에서 돋아나니, 지금 막지 않으면 그 끝이 장차 이르지 않을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이러함을 근심하여 일찍이 약조를 세워서 풍속이 정중하게 되도록 노력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 지사(知事)의 여러 아들이 방금 경내(境內)에서 거상(居喪)하고 나 역시 병으로 전원(田園)에 돌아와 있는데, 고을 어른들이 다 우리 몇 사람으로 하여금 속히 선생의 뜻을 이룩하라고 책임 지우는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이에 서로 함께 의논하여, 그 대강만 들어서 이같이 하고, 다시 고을 사람에게 두루 보여 가부(可否)를 살핀 뒤에 정하였으니, 영원(永遠)토록 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먼저 가르침을 세우지 않고 다만 형벌을 사용하는 것은 의심된다.” 하니, 그 말이 진실로 그럴듯하다. 그러나 효제와 충신은 사람이 타고난 성품에 근본 하였고, 더구나 나라에서 상(庠)과 서(序)를 베풀어 가르침을 권하고 가르치는 방법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우리가 지금 특별한 조목을 세우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도가 가까운 데 있는데 먼 데서 구하고, 일이 쉬운 데 있는데 어려운 데서 구하도다. 사람마다 부모를 사랑하고 그 어른을 존대하면 천하가 편안해진다.” 하였으니, 이것은 공자의 이른바 지덕(至德)이며 요도(要道)요, 선왕이 인심을 착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고을의 모든 선비들이 성명(性命)의 이(理)를 근본하고 국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집에 있어서나 고을에 있어서나 각기 사람의 도리를 다하면, 곧 이것은 나라의 좋은 선비[吉士]가 되어서 혹은 궁하거나 달하거나 서로 힘입을 것이니, 오직 반드시 특별한 조목을 세워서 권할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역시 형벌로 쓸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이같이 함을 알지 못하고 예의(禮義)를 침범하여 우리 고을의 풍속을 허물면, 이는 바로 하늘이 버린 백성이니 아무리 형벌을 살지 않고자 하나 그렇게 되겠는가. 이 점이 오늘날 약조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병진년(1556) 12월에 고을 사람 이황은 서한다.
● 부모에게 불순한 자
●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
● 일일이 관부(官府)에 간섭되고 향풍(鄕風)에 관계되는 자
● 망녕되이 위세를 부려 관을 흔들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
●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 수절(守節)하는 상부(孀婦)를 유인하여 더럽히는 자. 이상은 극벌(極罰)에 해당한다.
●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 본처[正妻]를 박대하는 자
● 이웃과 화합하지 않는 자
● 동무들과 서로 치고 싸우는 자
● 염치를 돌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허물고 더럽히는 자
● 강(强)함을 믿고 약한 이를 능멸하고 침탈(侵奪)하여 다투는 자
● 무뢰배와 당을 만들어 횡포한 일을 많이 행하는 자
● 공사(公私)의 모임에서 관정(官政)을 시비하는 자
● 말을 만들고 거짓으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게 하는 자
● 환란(患亂)을 보고 힘이 미치는 데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 자
● 관가의 임명을 받고 공무를 빙자하여 폐해를 만드는 자
● 혼인(婚姻)과 상제(喪祭)에 아무 이유 없이 시기를 넘기는 자
● 집강(執綱 좌수(座首))을 업신여기며 유향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
● 유향소의 의논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품는 자
● 집강(執綱)이 사사로이 향안(鄕案)에 들인 자
● 구관(舊官)을 전송하는데 연고 없이 참석하지 않는 자. 이상은 중벌(中罰)에 해당한다.
● 공회(公會)에 늦게 이른 자
● 문란하게 앉아 예의를 잃은 자
● 좌중에서 떠들썩하게 다투는 자
● 자리를 비워 놓고 물러가 편리한 대로 하는 자
● 연고 없이 먼저 나가는 자. 이상은 하벌(下罰)에 해당한다.
● 원악 향리(元惡鄕吏 지위를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지방관서의 향리)
● 아전으로서 민가(民家)에 폐를 끼치는 자
● 공물(貢物) 값을 범람하게 징수하는 자
● 서인(庶人)이 문벌 있는 자손을 능멸하는 자
鄕立約條序 附約條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古者鄕大夫之職。導之以德行道藝。而糾之以不率之刑。爲士者。亦必修於家著於鄕而後。得以賓興於國。若是者何哉。孝悌忠信。人道之大本。而家與鄕黨。實其所行之地也。先王之敎。以是爲重。故其立法如是。至於後世。法制雖廢。而彝倫之則。固自若也。惡可不酌古今之宜。而爲之勸懲也哉。今之留鄕。卽古鄕大夫之遺意也。得人則一鄕肅然。匪人則一鄕解體。而況鄕俗之間。遠於王靈。好惡相攻。强弱相軋。使孝悌忠信之道。或尼而不行。則棄禮義捐廉恥日甚。流而爲夷狄禽獸之歸。此實王政之大患也。而其糾正之責。乃歸之鄕所。嗚呼。其亦重矣。吾鄕雖壤地褊小。素號文獻之邦。儒先輩出。羽儀王朝者。前後接踵。觀感薰陶。鄕風最美。頃年以來。運値不淑。達尊諸公。相繼逝沒。然猶有故家遺範。文義蔚然。以是相率而爲善國。豈不可也。柰何人心無恆。習俗漸訛。淸芬罕聞而櫱芽間作。玆不防遏。厥終將無所不至矣。故崇政知事聾巖先生。患是然也。嘗欲爲之立約條。以厲風俗。鄭重而未及焉。于今知事諸胤。方居喪境內。滉亦守病田間。鄕丈皆欲令我輩數人。遂成先生之志。委責甚至。辭不獲已。乃相與商議。而擧其挭槩如此。復以徧示鄕人而審可否。然後乃定。庶幾期行於久遠而無弊也。或者以不先立敎。而徒用罰爲疑。是固然矣。然而孝悌忠信。原於降衷秉彝之性。加之以國家設庠序以敎之。無非勸導之方。奚待於我輩別立條耶。孟子曰。道在邇而求諸遠。事在易而求諸難。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此孔子所謂至德要道。而先王之所以淑人心也。自今以往。凡我鄕士。本性命之理。遵國家之敎。在家在鄕。各盡夫彝倫之則。則斯爲王國之吉士。或窮或達。無不胥賴。非唯不必別立條以勸之。亦無所用罰矣。苟不知出此而犯義侵禮。以壞我鄕俗者。是乃天之弊民也。雖欲無罰。得乎。此今日約條之所以不得不立也。嘉靖丙辰臘。鄕人李滉。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