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컴퓨터 통신 속에 묻힌 분 공병우박사
며칠 전 3월 7일은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안과 의사였으나 돈 잘 버는 안과 병원 일은 제쳐 두고 한글 기계화 연구와 눈먼 장님을 위한 일에 반평생을 바친 공병우 박사가 돌아가신 지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분은 살아 게실 때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란 자서전에 “내가 죽으면 죽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장사도 지내지 말 것이며, 내 시신 중 쓸 만한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의대 학생들 실습용으로 쓰게 하라”고 유언장을 썼고 후손들이 그대로 실천했다. 그래서 이 땅에 그 분의 무덤은 없다. 그러나 땅 속엔 무덤이 없지만 그 분을 받들고 따르는 사람들 가슴과 컴퓨터 통신의 한글 속에 무덤이 있다.
공 박사는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인 안과 병원을 개업해서 전국에 이름이 났던 ‘공안과 병원’ 의사였다. 해방 뒤 어느 해인가는 서울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낼 정도로 병원이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만들어 의대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당신이 일본어로 썼던 ‘안과학’이란 책을 한글로 번역하다가 한글의 훌륭함과 중요성, 한글 타자기와 기계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돈 잘 버는 병원 일은 제쳐놓고 한글 속도 타자기 발명에 나서게 된다.
본업인 병원 일은 제쳐두고 골방에 틀어 박혀서 타자기 쇠붙이만 늘어놓고 있는데다가 타자기 만들기 위해 미국에 다녀오더니 눈 먼 장님을 위한 봉사 활동과 화장실을 집안에 만들고 결혼식은 일과 후 저녁에 하자는 따위, 생활 개선(그 때론 엉뚱한 일)에 앞장서니 “공병우가 돌았다”는 소문까지 났었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한 결과 드디어 안과 의사가 실용성 있는 한글 속도 타자기를 발명했고 미국 군정청 도움으로 미국에서 새 제품 ‘공병우 타자기’를 처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세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그 가치를 몰라 천대받다가 6.25 전쟁 때 미군이 들어오면서 영문 타자기와 함께 공병우 타자기가 전쟁 수행 중 큰 공을 세운 뒤 널리 쓰이게 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것도 잠시, 나라에서 타자지 표준을 정하면서 한글 창제 원리와 편리성을 강조한 세벌식 공병우 타자기는 표준에서 빠지고 그 반대인 네벌식으로 했다가 말썽이 나니 두벌식으로 바꾸는 바람에 공 박사는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와 맛 서다가 남산 중앙정부에 끌려가는 망신까지 당하고 미국으로 떠낫다가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귀국해 한글문화원을 만들고 컴퓨터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그 한글문화원에 한글운동을 하는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리대로)와 셈틀 연구를 하는 젊은이(이찬진, 정래권)들을 모이게 하고 이들을 도와주어 ‘한글과 컴퓨터’란 우리식 문서편집기를 만들어 우리나라 컴퓨터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부산에서 국어선생을 하던 박흥호 군도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와서 공박사의 가르침을 받고 누리집(홈페이지) 제작 기술자가 되어 세계 날리는 ‘나모’란 회사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번다.
시간을 돈이나 금 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고 아낀 분, 그래서 넥타이를 매는 것과 딱딱한 구두를 신는 것까지 꺼리신 분, 돈을 값있게 쓰신 분, 그래서 눈먼 장님과 장애인을 도와주시고 허례허식을 실어하고, 좋은 일하는 사람과 단체를 도우신 분,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졸업장 없이 박사 학위까지 따신 분이고 권세와 금력, 학벌보다 사람 됨됨이와 능력을 더 알아주신 분, 무슨 일을 하면 푹 빠지는 천재로서 의사나 박사보다 과학자란 말을 가장 듣기 좋아하신 분, 몸은 80대 할아버지이지만 마음과 움직임은 20대 청년이나 어린애처럼 젊고 깨끗하게 사신 분, 성직자 못지않게 거룩하게 사시고 깨끗하게 돌아가신 공병우 박사였다.
1990년 대 초, 보통 할아버지들은 노인정에서 장기나 두거나 공원을 거닐며 놀지만 이 분은 20대 젊은이들과 날마다 하이텔과 천리안 들 컴퓨터 통신에서 토론하고 한글 사랑, 겨레 사랑 글을 올리셨다. 그래서 아직도 컴퓨터 통신상에는 여기저기 그 분의 흔적이 있고 공 박사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누리꾼들이 많다. 그 분을 모시고 한글 사랑, 겨레사랑 운동을 하면서 많은 가르침과 감동을 받은 나는 지난 3월 7일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누리집(홈페이지)에 그 분의 글을 무덤으로 삼고 우리가 쓴 추모 글을 제사음식으로 삼아 그 분을 기린 있다. 나는 아래와 같은 추모 글을 썼다.
하늘나라에 계신 공병우 박사님
세월이 흘러 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3월 7일, 임이 돌아가신 날을 맞이하니 임의 한글사랑 겨레사랑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들은 임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참배할 임의 무덤도 없고, 떠들썩한 추모식도 원하지 않은 임의 뜻을 아는 우리는 올해엔 임이 좋아하던 인터넷 통신상에서 임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몸을 위한 음식 제사상과 술 대신 마음을 위한 글을 차려놓고 임에게 바칩니다.
우리의 사랑과 고마움이 담긴 마음의 술잔인 우리글을 하늘에서 굽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가 임의 한글사랑, 겨레사랑 정신을 잘 이어가고 있으니 더욱 잘 하도록 우리에게 큰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하늘나라에선 이 땅의 한글기계화, 국어정보화는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마음속에 향과 촛불을 밝히고 큰 절 두 번 올립니다.
2002년 3월 7일 돌아가신 7돌날 마지막 제자 이 대로
권세와 돈이 많은 사람, 이름난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할 때마다 이 나라엔 존경하고 따를 만한 사람이 없고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공병우식 삶이 한국병 치료약이고 우리 희망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붓과 연필로 글을 쓸 때 글씨를 기계로 써야 한다고 하시고, 화장실을 집안에 만들자고 하시며 무덤을 만들지 말고, 결혼식은 일과 후 저녁에 하자고 하셨을 때 공 박사가 돌았다고 했지만 수 십 년 앞을 내다본 선각자였음을 실감하면서 그 분의 삶이 너무 멋있고 거룩해서 본받을 점이 있다고 보여서 또 무덤을 쓰지 않고 제사를 잘 지내지 않는 앞날엔 인터넷 속에 무덤을 만들고 추모하는 글로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분께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