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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서회와 함께하는 인문산행 ⑰
강북구의 재발견
-우이구곡/봉황각/4·19민주묘지/애국지사 묘역/송계별업/영봉 능선길 등
글 : 이수인(한국산서회)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임영수(산행참여자)
산과 인간과의 관계
산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담고, 자연의 멋과 품격을 즐기며, 의식 속에 그 느낌을 길이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기회를 만들어 자주 산에 오를 뿐만 아니라, 그 자연 속에 깃든 옛사람들의 자취들을 발굴하여 그 의미를 기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필자가 나름대로 파악하는 한국산서회 사람들의 특성 규정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가 꼭 한국산서회 사람들만의 독특한 특성이나 성향일 수 있을까? -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우리 모든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성향과도 겹쳐지는, 지극히 한국적인 적극적 자연관 내지 문화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거주 및 생활환경으로서의 강북구
대한민국의 수도 - 조선시대는 “한양” 또는 “한성부”라 불렸고, 그 이후 지금까지는 “서울특별시”로 불린다. - 안에서 강북구의 정체성은, 그중에서도 특히 우이동의 현재적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행정단위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즉, 조선시대 한성부의 경계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우이동은 도성에서 꽤 먼 거리에 있어서, 서울 성외지역의 한 마을로 되어 있었다.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따르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우이동계”가 있었고, 또 갑오개혁 당시 문서에는 동서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에 “우이리”가 있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전적으로 이 지역의 취약점으로 받아들여질 일은 아니다. 관암 홍경모(冠巖 洪敬謨, 1774~1851)가 한성부에서 우이동부로 나오던 그 당시의 풍경은 다음과 같이 환상적이었다.
우이동으로 나오면서 쓴 기문
出牛耳洞記
기유년 늦봄, 한양도성에서 흥인지문을 빠져나왔다. 수유리 북쪽을 통과하여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가는데, (역)점을 지나 수 궁을 더 나갔다. 산길이 처음에는 구불구불하더니, 경사진 비탈을 만나면서 나무들이 빽빽해졌다. 돌아서 십여 무쯤 더 가니 지세가 조금 넓어졌는데, 농사를 짓는 마을이 가로수 노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진달래 살구가 담장을 둘러 활짝 꽃을 피웠다. 사방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으니, 소 모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도봉산과 삼각산이 허공을 밀어 처마처럼 드리우고, 얼굴을 마주하며 솟구쳤다. 북한산성 하얀 담장이 산허리를 둘러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문이 반지처럼 걸려 있다. 이 동네부터 점차 깊고 그윽해져서, 맑은 시내와 하얀 돌이 그 사이에서 서로 어울린다. 소나무 어지럽고, 가로수 무성한 깊숙한 숲을 지나가자니 묏부리를 뚫고 지나기도 하고, 물굽이를 건너가기도 한다.
무릇 오리쯤 가서 우이동 동구에 다다랐는데,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으며 집은 그윽하고, 지세는 막혀있다. 이원(李愿)의 “반곡”과 아주 비슷하고, (도연명의) “무릉도원”과도 비슷하다. 그 땅은 돌이 많으면서 좁아서, 가운데에 있는 밭이라도 10에 7은 거친 그대로이고, 3 정도만 개간 된 정도다. 이런 땅을 관원들은 이른바 “황무지”라 부르는데, 거기 백성들은 바위 사이에 풀을 엮어 새나 짐승처럼 살면서, 꽃과 과실을 따고 땔감을 팔아서 식량을 삼는다. 이들이야말로 먼 옛날의 희위씨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골짜기 안에 몇 칸짜리 집이 몇 있으니 바로 내 묘막이다. 깊은 숲속에서 살고자 하는 취미 때문이요, 또 바위를 돌고, 굽은 모래톱, 괴이하게 생긴 돌, 아름다운 나무, 기이한 꽃 같은 것들을 좋아해서이다. 들어가면 사람의 정신이 놀라게 해 상쾌하게 만든다. 마을은 혼미하고 길도 어렴풋하나, 진실로 어진사람들이 은둔할 만한 장소라, 산 밖의 찌들고 속된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곳이다.
옛날 백낙천이 원진에게 준 글에서, “저는 여산의 구름과 물, 샘과 돌 같은 빼어난 경치에서 노닐고 있으며, 사랑하여 버릴 수 없기에 초당을 꾸몄습니다. 댕댕이 넝쿨로 담장을 삼고, 흰돌로 다리를 놓고, 물이 집을 돌며 흐르게 했으며, 샘물이 처마 사이로 날아가듯 떨어지니, 평생에 좋아하는 것이 그 속에 다 있습니다. 돌아가기를 잊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만한 곳입니다.” 했었다 하는데, 내게는 이 동네가 또한 그러하다.(필자 번역)
오늘날 강북구의 위상은 당당하지 못하다. 강남·서초·송파구 같은 강남권과의 비교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기간이 오래도록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강북구가 종로·중구 등의 정치 문화적 중심성을 지닌 지역과 경쟁할 형편도 아니다. 때문에 지금 이곳 강북구는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은 살리면서 특성을 확대해 나가려는, 발전의 방향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강북구에는 해결해야할 현재적 과제가 이렇게 많고, 분발해야할 난제도 아주 많다. 앞서 열거한 지리공간적 취약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역의 특성과 자원을 찾아야 하며,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갖는 고유한 자원을 발굴하여 특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들이 모아지고, 연구와 검토를 거쳐 정책으로 진행된 지는 조금 되었다. 예컨대 2015년부터 서울특별시가 각 구청별로 지역발전을 위한 “도시재생”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데, 이 사업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배려를 앞세워’ ‘전면 철거 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강북구는, 1, 창동·상계 지역 2. 미아 지역 3. 우이동 지역으로 3개의 권역을 나누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맞춤형 행정을 펼쳐가고 있다. 그래서 우이동 지역은 특히, 북한산 동쪽 자락과, 북한산 우이역, 솔밭공원역 및 4.19민주묘지역 사이를 직사각형으로 연결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이곳을 체류형 역사문화관광중심으로 권역화 하여 거기에 맞는 최적한 행정을 펼쳐가려 노력하는 중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역의 정체성을 주민들과 함께 정립해 나가려는 주무부처 4·19도시재생지원센터와 우리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이 조화롭게 만났다. 그리하여 협력하여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강북구의 재발견 - 우이구곡과 조계동
“강북구의 재발견-우이구곡과 조계동” 프로그램은 9. 21.과 10.11. 모두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아침 9시 반쯤, 우이동 BAC 센터(블랙야크 알파인 센터)에 참가자들이 집결해서 프레젠테이션으로 활동목적과 주요 활동 포인트 및 안전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현장답사에 나섰다.
1차 답사는 우이구곡 하단부와 봉황각, 그리고 4·19 민주묘지를 거쳐서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이 조계동 계곡에 경영했던 송계별업 유지를 답사하는 활동을 하였다.
2차답사는 우이구곡 전반을 답사하면서 영봉능선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영봉능선을 타면서 남북 방향 양쪽으로 깊은 계곡부에서 각각 경영되었던 우이구곡과 청담동 계곡의 규모를 조망해 보았다. 그러면서 그 능선 양쪽 깊은 공간에서 펼쳐졌던 인문적 별세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이해를 나누었다.
1차에 참여한 인원은 23명, 2차에 참여한 인원은 42명이었다. 이 추이를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어쩌면 3차 활동이 있었다면 참여자 규모는 100명이 넘는 성황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홍경모(洪敬謨, 1774~1851) 조손에 의해서 가꾸어졌던 우이구곡
우이구곡은 단연 우이동을 대표하는 인문환경이다. 서울지역에 조성되었던 거의 유일하다 싶은 9곡이기 때문이다. 구곡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자면, 1-만경폭(萬景瀑. 만경대에서 발원해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 2-적취병(積翠屛.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양), 3-찬운봉(攢雲峰. 구름을 잡고 있는 듯한 봉우리), 4-진의강(振衣崗. 옷깃을 털어 너는 자리같이 펼쳐진 언덕), 5-옥경대(玉鏡臺. 옥으로 된 거울 같은 물가의 반석), 6. 월영담(月影潭. 달이 그림자로 어리어 비치는 소(沼)), 7-탁영암(濯纓巖. 갓끈을 세탁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울가 바위), 8-명옥탄(鳴玉灘. 옥구슬이 울리는 것같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여울), 9-재간정(在澗亭. 홍양호, 홍경모 등 홍씨 집안 영지에서 골짜기를 조금 더 내려가 위치했던, 당시 3대가 연거푸 재상이 됨으로써 가문의 세를 뽐내던 달성 서씨 집안에서 경영했던 嘯皐別墅(소고별서) 중 물가 정자)으로, 그 이름에 담겨 울려오는 의미 그대로 모두 기막힌 절경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관암이 남긴 기문 중에는 이 주변에 산재되어 있던 천관봉(天冠峰-하늘로 모자를 쓴 것 같은 봉우리), 월영담(月影潭-달그림자 어리는 못), 화영지(花影池-꽃그림자 어리는 연못), 송음강(松陰矼, 소나무 그늘진 징검다리), 면운석(眠雲石-구름삼아 잠자는 돌), 성심종(惺心淙-마음을 깨우는 물소리), 관어대(觀魚臺-물고기를 바라보는 누대), 세묵와(洗墨渦-붓을 빠는 웅덩이), 후선등(候仙磴-신선을 기다리는 비탈길), 유승암(留僧巖-스님이 머물던 바위) 등에 대한 뛰어난 작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났었던 우이구곡의 상태는 지금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첫째는 1곡에서부터 9곡까지 어느 것 하나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훼손되었다는 사실인데, 그중 1곡인 만경폭은 정교유착임이 분명한 도선사의 특권 내지 독점의식에 의해서 폭포 상단에 저수댐을 쌓았다가 반세기를 넘긴 최근에야 철거된 형편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1곡에서 5곡까지가 몽땅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예 일반인들에게는 법 위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곤란한 금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6곡 이하도 마찬가지다. 홍경모가 작성한 기(記)라는 문학작품으로 9곡을 포함하는 그의 별서 주변은 영존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지금 그 하나하나는 너무나 가혹하게 변형되고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는 1차와 2차에 겹쳐서, 아주 심각하게 변형이 이루어진 우이9곡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1차에서는 봉황각(鳳凰閣)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 1922) 묘소를 거쳐 조계동 송계별업 쪽으로 진행하였고, 2차에서는 봉황각을 거쳐 우이구곡을 좀 더 거슬러 도선사로 올라갔다. 도선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1곡 만경폭포를 비스듬히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까지 가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아득히’ 조망이라, 도저히 ‘실감’에 미칠 수가 없었다. 무색한 상태로 아쉬운 발길을 영봉 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천도교 봉황각과 의암 손병희 묘소
봉황각은 천도교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 관련 유적이다. 천도교 종학대학원 건물과 봉황각 등으로 권역을 구성하고 있는데, 앞쪽에 붉은 벽돌로 벽을 이룬 천도교 종학대학원 건물이 있고, 그 뒤쪽에 한식 목조건물로 봉황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병희 선생은 이곳에서 3·1운동을 구상하였으며, 이곳을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아 많은 인원들에게 독립의 기운을 전파하였다. 마침 이번 우리 행사에 연이어 참여한 지역인사 중 한분이신 권오도(權五道) 전 서울역사박물관장께서 그곳의 안내를 자원하여 평소 출입이 어려운 의암 가족묘원까지 참여자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국립 4·19 민주묘지 및 애국선열 묘소
봉황각에서 국립 4·19 민주묘지를 거쳐 조계동 송계별업으로 이어가는 서울시 둘레길 길목에는 여러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준(李儁, 1859-1907), 이시영(李始榮, 1869-1953),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신익희(申翼熙, 1892-1956),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등 많은 애국선열들이 아늑한 이곳 산자락에 영면해 계시다. 이 지역에 길지 명당이 많음을 이로써 유추할 수 있겠는데, 이제 이 구역은 수유동 지역에 해당된다. 이런 특징 또한 강북구의 인문환경적 정체성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뇌리를 스쳐간다.
조계동 계곡
조계동 계곡은 북한산성 대동문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골짜기이며, 옛 아카데미 하우스 쪽에서 서향하여 대동문 방향으로 올라가는 계곡이다. 이 계곡 초입에는 사산금표로 추정되는 금표(禁標) 2기와 부석금표(浮石禁標) 2기 등이 산포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인평대군이 경영했던 송계별업이 위치했었는데, 지금은 지역민들의 배드민턴장으로 사용되는 등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대신 현재도 계속 물이 흐르는 계곡 안에 이백의 작품으로 유명한 여산폭포(廬山瀑布)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의 구천은폭이 “九天銀瀑” 암각자와 함께 남아있고, “松溪別業(송계별업)이란 인평대군 친필로 파악되는 암각자도 남아 있다. 그리고 측면 암벽면에는, 우리 산서회 인문산행팀의 발굴에 의해 서울시 문화재 등록을 마친 “사릉부석감역필기” 암각이 존재하고 있다.
하루재에서 영봉을 거쳐 육모정을 지나 우이령 입구로 떨어지는 능선길
영봉능선길은 도선사 주차장에서 하루재로 이어지는 고개 안부에서 시작해서 동북쪽으로 솟구쳐 뻗어가는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산길이다. 중간에 영봉이나 천관봉 같은 두세 개의 암봉을 만나지만, 전체로 어렵지 않게 이어지는 산길이다. 육모정 고개는 그 능선길 중간에 있는 안부인데, 과거 남쪽 우이동에서 북쪽 청담동으로 이어가는 샛길이 있었던 곳이다. 청담동에 세워졌던 매우 뛰어난 정자가 여섯 기둥에 여섯 모 지붕을 얹었었기에, 거기로 이어지는 고개라 해서 “육모정 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사람과 산>후원 11월 인문산행 안내
삼국의 무력 각축장, 아차산(제18차 인문산행)
주제 : 백제-고구려-산라가 모든 힘을 다해 싸웠던 아차산 일대
일시 : 2019년 11월 2일(토)
회비 : 1만원
답사경로 : 지하철 5호선 광나루 역-아차산 생태공원 내 홍련봉 보루-아차산성-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용마산 고구려 보루군
집결 : 09:30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준비물 : 간단하면서도 따뜻한 답사 복장, 중식 및 간식, 음료수. 날씨에 따라 우산이나 우의.
참가문의 : 다음 카페-한국산서회(http://cafe.daum.net/peakbook)의 <인문산행 공지> 란에 댓글로 신청하며, 문의는 010-5282-0701(류백현)
사진설명
1. 답사 시작에 앞서 블랙야크 알파인 센터 회의실에서 강사로부터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2. 이계 홍양호 가문이 우이동과 인연을 맺게되는 시발점은 바로 여기 무덤에 이계의 증조부인 홍만회가 묻힘으로 부터다. (임영수 사진)
3. 봉황각 앞에서의 단체사진
4. 봉황각 뒤로, 북한산의 또 다른 이름인 삼각산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만경봉-백운봉-인수봉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임영수 사진)
5. 평소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지도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6. 서울둘레길 상 조망처에서 내려다 본 4 19 민주묘지 내부
7. 조계동 계곡에 새겨진 부석금표. 돌을 캐는 일을 왕명으로 금한다는 표지다.
8. 인평대군이 송계별서를 경영했던 조계동 계곡에서 그의 낙산 저택을 그린 방전도를 펼치고 설명에 열중하고 있는 조장빈 강사.
9.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 조성을 위해서 채석하는 일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여 새긴 사릉부석감역필기 암각자
10. 인평대군이 송계별업을 조성했던 구천은폭의 측면 바위에 새겨진 송계별업 각자
11. 송계별업 공간에서 1회차 답사를 마치면서 소감을 나누고 있는 참가자들
12. 도선사 일주문 아래 휴식공간에서 청담동 풍경을 그린 그림을 펼쳐 청담동의 대강을 설명하고 있는 조장빈 강사(임영수 사진)
13. 영봉 정상에서의 단체사진. 뒤로 보이는 산은 도봉산이다.
14. 영봉능선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인수봉
15. 영봉능선에서 동남쪽 방향으로의 조망
16-1. 강북구와 조계동 행사 포스터 1
16-2. 강북구와 조계동 행사 포스터 2
첫댓글 후기 감사드립니다.
삼실에서 본 북한산은 단풍이 붉네요.
북한산이 깊어 파고 파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차산 산행 '아차'하고 빠지신 분 후회많이 할 거라 생각합니다...^^
아우~, 이, 재치 넘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