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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의 진화 심리학
인공 지능 연구의 성과 – 어려운 것은 쉽고 쉬운 것은 어렵다.. 3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지능을 정의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지능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이미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 글에서는 IQ(지능 지수, intelligence quotient)를 주된 테마로 다룰 생각이다. 한편에는 IQ 옹호자(?)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IQ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다. IQ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IQ를 비판한다.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환경 결정론자도 IQ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진화 심리학자들도 IQ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주로 IQ 옹호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문제는 과연 IQ가 지능을 측정하는가 여부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손쉬운 방법이 있다. 지능을 “IQ가 측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된다. 물론 이런 식의 해결책에는 IQ 옹호자들도 별로 동의할 것 같지 않다. IQ 옹호자들은 지능을 과학 탐구 능력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정의한다면 지능과 IQ가 측정하는 것은 상당히 일치한다.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는 지능을 “뇌의 정보 처리 능력”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이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뇌에서만 정보가 처리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시각과 관련된 정보는 홍채에서 빛의 양이 조절되고, 수정체에서 빛의 굴절이 조절될 때부터 처리되기 시작한다. “뇌의 정보 처리 능력”보다는 “유기체의 정보 처리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쨌든 정보 처리 즉 매우 넓은 의미의 계산(computation)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지능을 정의하는 방식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IQ 옹호자들은 하나의 지능인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 g)이 있다고 믿는 반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수많은 지능들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종의 뇌에는 수많은 모듈들이 있어서 서로 다른 기능들을 행한다. 그렇다면 그 모듈들만큼이나 수많은 지능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시각 지능, 후각 지능, 걷기와 달리기 지능, 분노 지능, 얼굴 인식 지능, 언어 지능, 논리 지능, 공간 인식 지능, 기억 지능 등 말고도 수많은 지능들이 있다.
종마다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르다. 따라서 각 종들에는 서로 다른 지능들이 있다. 박쥐에게는 인간에게는 없는 초음파 처리 지능이 있으며, 어떤 철새에게는 인간에게는 없는 별자리 인식 지능(그 새는 별자리를 이용해서 어느 쪽이 북쪽이고 어느 쪽이 남쪽인지를 안다)이 있고, 사막에 사는 어떤 개미에게는 추측 항법(dead reckoning) 지능이 있다.
일반 지능 옹호자들의 생각은 행동주의와 전통적 인지심리학의 기본적인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감각 모듈들(시각, 청각 등), 충동 모듈들(식욕, 성욕 등) 등을 제외하면 하나의 학습 모듈 또는 하나의 사고 모듈만 있다. 이런 생각을 빈 서판(black slate)주의자 또는 극단적인 환경 결정론자들도 공유한다. IQ는 이 학습 모듈 또는 사고 모듈의 성능을 측정하려는 시도이다.
인공 지능 연구 초창기에는 헛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컴퓨터는 단순한 사칙연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했다. 이것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컴퓨터는 이런 단순해 보이는 것들만 잘 한 것이 아니다. 컴퓨터는 어려운 미적분 문제로 술술 풀었다. 더 나아가 컴퓨터는 수학 증명까지 했다. 컴퓨터가 기존의 증명보다 더 우아한 증명을 발견해서 수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초창기의 일은 아니지만 1980년대에는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기기도 했다. 미적분, 수학 증명, 체스는 사람들이 매우 어려워하는 것들이다.
상식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의 인공 지능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들도 컴퓨터가 척척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하는 것들은 당연히 컴퓨터가 더더욱 잘 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달릴 줄 안다. 사람들은 특별히 가르치지도 않는 데 말을 한다. 이것은 힘들게 배워도 미적분을 잘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보는 법을 전혀 배우지 않아도 잘 본다. 당시의 연구자들은 이런 것들도 당연히 컴퓨터가 조만간 잘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달리기, 말하기, 번역하기, 보기 등을 하는 컴퓨터를 만들려고 하자마자 그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가 드러났다. 여전히 인간처럼 달리고, 말하고, 볼 수 있는 컴퓨터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애물들이 있더라도 잘 자빠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뇌 속에서 엄청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당시의 상식과는 달리 매우 지적인 과업이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을 보통 “운동 신경이 발달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은 운동 신경(말초 신경)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뇌(중추 신경)가 좋기 때문에 운동을 잘 하는 것이다. 운동을 위한 계산은 말초 신경이 아니라 뇌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망각에는 2차원 상이 맺힌다. 인간은 그 상을 바탕으로 3차원 공간을 본다. 2차원 정보에서 3차원 정보를 추론해내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뇌 속에서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아는 사람 얼굴 알아보기 같이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쉽게 해내는 일 같은 경우에도 매우 복잡한 계산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쉽게 해낸다고 그 일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쉬운 일일 뿐이다. 말하기는 침팬지나 컴퓨터에게는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과업이다.
IQ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어렵다고 보는 지적인 능력만 측정한다. 인공 지능 연구는 IQ의 협소함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지적인 능력이라고 보지 않았던 능력들(달리기 등)이 지적인 능력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IQ는 학업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세기 산업국의 학교 교육에서 과학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의 IQ 검사는 과학 탐구 능력을 상당히 정확히 측정하는 것 같다.
만약 지능을 과학 탐구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IQ가 측정하는 것이 곧이 지능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개념은 정의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지능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겠다고 우긴다면 그것을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과학 탐구 능력에 있어서는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런 능력 때문에 지구 곳곳에 살게 되었고, 컴퓨터를 만들었고, 달 여행도 했고, 수 많은 종들을 멸종시켰다.
일반 지능이라는 개념에는 감각, 감정, 운동 등을 위해 이루어지는 정보 처리가 지능 개념에서 배제되었다. EQ(감성지수, emotional intelligence quotient) 측정은 이런 지능 개념에 대한 작은 도전이었다. 감정과 관련된 것들을 지능 개념에 포함시킨 것이다.
감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뇌에서 계산(정보 처리)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표정 등을 보고 남의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서도 상당히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따라서 정보 처리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감정과 관련된 능력도 지적인 능력이다.
보통은 충동이 지적인 능력과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보 처리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충동도 계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충동 역시 지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동물에게 IQ라는 용어를 적용시키는 것을 흔히 본다. 예컨대 원숭이의 IQ가 60 정도 된다는 식의 말이 있다. 일반 지능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표현이 별 문제가 안 된다. 인간에게 단 하나의 일반 지능이 있다면 동물에게도 단 하나의 일반 지능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동물을 IQ를 기준으로 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동물을 몸무게를 기준으로 줄을 세울 수 있듯이 말이다.
물론 IQ를 기준으로 줄을 세웠을 때 인간이 맨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거대한 사슬(great chain of being, scala naturae)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신이 맨 꼭대기에 있고, 그 다음에는 천사, 그 다음에는 인간, 그 다음에는 동물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생각은 진화론에도 침투했다. 어류보다는 양서류가 더 우월하고, 양서류보다는 파충류가 더 우월하고, 파충류보다는 포유류가 더 우월하고, 포유류 중에는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어류 -> 양서류 -> 파충류 -> 포유류로 이어지는 진화는 더 우월한 존재로의 진화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별로 상관 없는 생각이며 라마르크주의와 연관이 있다. 다윈이 생각한 진화는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종이 분기하는 과정이다. 각 종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며 그 환경에 맞는 능력을 진화시킨다.
지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 동물은 서로 다른 지능들을 진화시켰다. 따라서 어느 동물의 지능이 다른 동물의 지능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우리는 “상어와 치타 중에 누가 더 빠르냐?”라는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물에서는 상어가 빠를 것이고 땅에서는 치타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헤엄치기와 달리기에는 근육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근육을 언제 얼마나 수축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며 그것은 뇌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계산에 의존한다. 즉 지능에 의존한다. 상어는 헤엄-지능이 발달했으며 치타는 달리기-지능이 발달한 것이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IQ를 측정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학교에서 배우는 능력을 측정한다. 그런 식으로 측정하면 당연히 인간의 지능이 동물보다 더 높게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학교가 지능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의 얼굴 표정을 알아보는 데에는 인간이 침팬지보다 더 뛰어나지만 침팬지의 얼굴 표정을 알아보는 데에는 침팬지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 후각 지능은 개가 인간보다 높다. 초음파 지능(초음파를 이용해 주위의 공간에 대한 정보를 얻는 능력)은 박쥐에게는 있고 인간에게는 아예 없다.
인공 지능이 결코 인간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이 지능의 극한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간은 여러 우연적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수많은 동물에게 있는 지능이 인간에게는 없다.
과학 탐구 능력에 있어서도 인간보다 우월한 인공 지능은 가능하다. 물론 인간보다 우월한 생물이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 인간의 과학 탐구 능력은 신비로운 영혼(신의 형상을 모방하여 만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뇌 속의 계산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보다 더 용량이 크고, 더 빠르고, 더 교묘하게 설계된 뇌 또는 컴퓨터가 있다면 인간보다 더 똑똑할 것이다.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 근본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지능 개념은 IQ 측정과 함께 생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똑똑하다”, “멍청하다”, “천재”, “바보” 같은 단어가 있었다. 이런 개념들이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선천적이라고 믿을 진화론적 이유가 있다. 이것은 “예쁘다”, “못생겼다” 같은 개념들이 선천적이라고 믿을 이유와 비슷하다.
신생아도 잘생긴 사람을 더 오래 쳐다본다. 인간은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을 구분하도록, 그리고 잘생긴 사람과 젊은 사람을 선호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 그 이유는 건강하고 젊은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이 번식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똑똑한 사람을 멍청한 사람에 비해 선호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똑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번식 경쟁에서 유리하다. 즉 인간은 외모에 집착하도록 설계된 것과 마찬가지로 지능의 집착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지능에 대한 집착은 곧 지능의 차이에 대한 집착이다. 인간은 인간과 결혼한다. 따라서 인간들 사이의 공통점은 별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보다 더 똑똑한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IQ의 열풍은 이런 인간의 지능에 대한 선천적인 집착 때문인 것 같다. 미디어가 외모에 집착하기 때문에 인간이 외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외모에 집착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미디어가 외모에 집착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얼굴에서 많은 정보를 얻어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만 보고 성별을 거의 정확하게 맞힐 수 있으며 나이도 대강 알 수 있다. 또한 얼굴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알아낼 수 있으며 안색을 보고 건강 상태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얼굴을 보고 이런 정보들을 얻어내는 능력들은 적응(adaptation)임에 분명하다.
중증 정신 지체자들의 얼굴은 표시가 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멍청하게 생겼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과연 중증 정신 지체자 또는 정신 지체자 전체를 제외하면 어떨까? 과연 이 때에도 사람들의 직관은 정확할까?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똑똑하게 생겼는지를 점수 매겨 보라고 한 후 IQ 검사 결과와 대조해 보면 된다. 이때 정신 지체자를 제외시킨다. 또는 IQ가 평균 이상인 사람의 얼굴들만 대상으로 실험을 한다. 나는 아직 이런 연구가 실제로 행해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
만약 사람들이 매우 똑똑하게 생겼다고 지목한 사람들의 IQ가 매우 높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사람들이 얼굴을 보고 정신 지체자 뿐 아니라 지능이 매우 높은 사람도 상당히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며 “똑똑하게/멍청하게 생겼다”라는 직관이 적응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들은 얼굴을 보고 지적으로 생겼다느니, 멍청하게 생겼다느니 판단을 내리는 것 같다. 만약 한국인들만 이런 판단을 내린다면 그런 직관이 적응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다양한 문화권의 인간들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모든 문화권에서 표정에 대한 판단이 비슷하듯이 얼굴을 보고 지능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비슷하다면 적응 가설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골튼(Francis Galton)을 비롯한 골상학자들은 머리 크기가 클수록 지능이 높다고 보았으며, 생김새를 보고 성격이나 지능을 알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20세기에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조롱했다. 하지만 머리 크기와 IQ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20세기 후반에도 나왔다. MRI 같은 장비를 이용해서 뇌의 크기와 IQ 사이의 상관 관계를 알아보자 머리 크기와 IQ 사이의 상관 관계보다 더 상관 관계가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위 진보적 학자들은 이런 연구를 인종주의, 또는 성차별주의라고 비난하지만 과학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못 봤다.
머리가 작은 천재가 있다는 식의 반론은 과학적 반론이 아니다. 골튼은 머리 크기와 지능 사이의 상관 관계가 있다고 했지 상관 계수가 1 이라고 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보다 평균적으로 키가 크다. 그렇다고 남자보다 큰 여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얼굴이나 머리의 생김새와 지능 사이의 상관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오직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 가려야 한다. 골튼의 골상학을 조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과학적 증거를 대야 한다. 만약 정신 지체자를 제외하고는 생김새와 지능 사이에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도대체 왜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어리석게 생김새를 보고 지능과 성격을 추론해내는 것을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물론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을 전제한 이야기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IQ가 낮다. 그렇다고 흑인이 원래 머리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첫째, IQ가 측정하는 것은 지능의 일부일 뿐이다. 정말로 흑인과 백인의 지능을 비교하고 싶다면 수많은 정보 처리 능력을 비교해야 한다.
흑인이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흑인이 연예계와 스포츠계 쪽으로는 재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실제로 미국의 흑인들은 학계에는 별로 진출하지 못했지만 연예계와 스포츠계 스타는 많다. 진화 심리학적으로 보면 음악, 연기, 운동과 관련된 재능도 지능이다.
둘째, 원래(선천적으로) IQ가 낮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IQ를 측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미국인들 대다수가 영어를 쓴다고 해서 그들이 선천적으로 한국어가 아닌 영어 능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유전자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를 가려야 한다.
아시아인이 백인보다 뇌가 더 크다. 그리고 흑인보다 백인의 뇌가 더 크다. (물론 아시아인, 백인, 흑인이라는 개념으로는 인종의 복잡한 양상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매우 골치 아픈 수학적 모델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보다 더 크다. 대체로 여러 종을 비교해보았을 때 뇌가 클수록 머리가 좋다(적어도 과학 탐구 능력에 있어서는 그런 것 같다)는 점을 적용하여 일부 학자들은 마찬가지로 흑인보다는 백인이, 백인보다는 아시아인이 머리가 좋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자보다는 남자가 머리가 좋다고 주장한다. J. Philippe Rushton(http://en.wikipedia.org/wiki/J._Philippe_Rushton)이 이런 쪽에서는 유명하다.
보통 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인디언)의 IQ가 백인보다 훨씬 낮다는 점, 보통 백인으로 분류되는 유대인의 IQ가 아시아인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볼 때 환경적 요소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종들 사이에 IQ의 선천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엄밀한 검증을 위해서는 IQ를 측정하는 것 이상의 골치 아픈 증거들이 필요함을 뜻할 뿐이다.
이런 연구에 대해 정치적으로 사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학적 비판이 아니다. 나는 Rushton의 정치적 입장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가 지독한 나치라고 하더라도 그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근거를 대야 한다.
자연 선택은 정치에는 무관심하다. 자연 선택은 번식 경쟁이라는 무지막지한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과학 탐구 능력에 있어 흑인이 아시아인보다 떨어지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구상의 인간들 사이에는 계속 유전자 교환이 있었기 때문에 인종 즉 아종으로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도 과학적 반론이 아니다. 고리 종(ring species, http://en.wikipedia.org/wiki/Ring_species, 『악마의 사도(48쪽)』)이라는 것이 있다. 이 특이한 사례에서는 유전자 교환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종 분화가 일어났다. 서로 다른 종 사이에 유전자 교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도 통상적인 교미를 통해서 말이다. 유전자가 교환되면서 종 분화가 일어나는 것도 가능한데 아종 분화가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흑인이 정말 IQ(즉 과학 탐구 능력)에 있어서 선천적으로 아시아인이나 백인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입증되고 그것이 널리 알려진다면 인종주의자들이 무척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IQ 연구에 대한 비과학적 비판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항상 우리를 기쁘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진실이 어떻든 진실을 제대로 파헤친 후에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생학자들은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런 반박은 진화론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어떻게 해서 인간이 점점 똑똑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다. 더 똑똑한 우리의 조상들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이다. 지능에 유전적 기반이 없다면 지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의 인위 선택은 가능하다. IQ 검사를 해서 평균보다 낮은 사람들을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인간의 IQ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즉 인간의 과학 탐구 능력을 점점 커질 것이다. 물론 다른 지능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다.
나는 강제적 우생학을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생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 낳기가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위 선택을 통해 가축들의 특성을 개량(?)해왔다. 인간은 예외여서 인위 선택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고 보는 것이다. 즉 동물에게는 진화의 법칙이 작동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초월했다고 보는 것이다. 창조론자라면 환영할 입장이지만 과학자로서 취할 입장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