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진영은 선거전에서 현대적 홍보 기능을 도입하였다. 김 후보의 로고송을 만든 것도 한 사례이다. 이 로고송은 김 후보의 연설회 때는 빠지지 않고 방송되었다.
“대중 대중 김대중 / 어디를 가느냐 / 많은 사람 모아서 / 어디를 가느냐/ 대중대중 김대중/ 어디를 가느냐 / 대중대중 김대중 / 투표하러 갑니다/.”
동요 <산토끼>에서 차사한 내용이어서 어린이들까지 쉽게 따라 부르게 되고 널리 유행되었다.
신민당은 전국에서 13만6천5백여 편의 응모작품 중에서 대통령선거 구호를 <10년세도 썩은 정치 못참겠다 갈아보자> 라는 주 구호와 <용감하게 大中뽑아 행복하게 大衆살자>, <논도갈고 밭도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 로 정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나섰다.
정부의 관권 탄압과 여당의 부정선거 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면서 김대중의 힘든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당내 주류세력의 지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주류가 미는 후보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앙금같은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영남 지역의 일부 국회의원과 지구당위원장은 “대통령은 우리 지역 박정희를 밀어주고 국회의원은 자신을 밀어달라” 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3월 24일 집권공약 발표대회를 갖고 ‘151개 집권공약’을 발표했다. “희망에 찬 국민 대중의 시대를 구현한다”는 제목 아래 발표된 주요 내용은 대통령 3선금지, 부통령제 신설 개헌, 향토예비군ㆍ중앙정보부 폐지, 지방자치제 연내 실시, 사법부 개혁, 긴장완화와 남북교류, 특권경제에서 대중경제 체제 등 국정 전반에 걸친 획기적인 정책 방안이었다.
양당의 유세전이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공화당은 후보반과 김종필ㆍ백남억으로 짜여진 특별유세반이, 신민당은 후보반과 유진산 당수 등 중진반이 전국을 누비며 각축전을 벌였다.
유세의 대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진 두 후보의 유세전이었다. 박 후보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김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단언하여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71년 대선 때 장춘단 공원의 100만 인파 앞에서
김대중의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다.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이었다. 이날 정부 여당은 김대중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예비군 소집ㆍ창경원 등 고궁과 공원 무료개방, 일부 극장 무료개방 등 온갖 편의와 선심을 남발했지만, 구름처럼 모여든 청중 앞에서는 달리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김대중은 연설에서 “이번에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이 나라에는 선거가 사라지고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거듭하였다. 박정희가 대만에 사람을 보내어 총통제 연구를 해온 정보를 알고 이를 폭로한 것이다.
선거를 불과 9일 앞둔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차를 운전해 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1Km 쯤 되는 길을 가는데 만도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공원에는 정말이지 놀랄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려 1백만 명의 군중이라고 했다. 일본 신문은 70만 명, 미국의 신문에서는 90만 명이라고 보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박 정권은 이 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국하고 공무원이나 공공단체 직원들을 그 가족과 함께 모두 야유회에 동원했다. 그리고 불참자는 결근처리를 했다.
서울지역 향토예비군 비상소집도 이날에 맞춰서 이루어졌으며 서울 시내의 일부 극장에서는 이날 무료로 영화상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1백만 명의 시민들이 유세장에 나타났던 것이다. (주석 20)
서울의 유세에만 인파가 몰린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전국 주요 도시의 연설회에는 수만 수십만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부산ㆍ대구 등 영남 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의 출신지로 그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한 대구 연설회에도 19만 명의 청중이 모이고, 부산에는 50만 명이 모였다. 가히 ‘김대중 열풍’이었다. 김대중이 연설하는 지역마다 정부 여당은 향토예비군을 소집하거나 여관업, 음식점, 이발소 등 조합원들의 야유회를 열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유세장의 청중은 늘어만 갔다.
투표 이틀 전에 박정희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집회를 가졌다. 공무원ㆍ기업체 직원 통반장 등이 시내버스나 트럭, 관광버스로 동원되었다. 이때부터 여당 후보의 연설은 차를 타고 가고 야당 후보의 연설회는 걸어간다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그렇게 동원을 했는데도 김대중 연설 때의 3분의 1 정도의 청중만 모였다.
박정희는 이날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중대선언’을 함으로써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는 ‘4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아닌 ‘언어의 유희’를 택하였다. 1년 반 뒤 10월 유신으로 체육관선거를 택하여, 다시는 국민에게 “표 찍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선거전은 종반에 이르면서 용공조작과 지방색 조장, 김대중의 성씨가 김씨가 아닌 윤씨라는 등 온갖 유언비어와 모략중상이 난무했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서자 출신이라는 때 아닌 ‘적서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공화당측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실이다.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은 “신라 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촉발시켰다.
야당탄압도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신민당은 정부여당의 탄압과 매수로 상당수 지역에서 투개표 참관인을 선정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종교계ㆍ재야단체에서 투개표 참관인단을 모집하여 이들을 연고지별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참관인 지원자 6,319명으로 학생 참관인단을 구성하여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참관인단은 대부분 현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지역 투개표 단위에서 배제되어 실제로 투개표 참관인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첫댓글박정희는 이날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중대선언’을 함으로써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는 ‘4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아닌 ‘언어의 유희’를 택하였다. 1년 반 뒤 10월 유신으로 체육관선거를 택하여, 다시는 국민에게 “표 찍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첫댓글 박정희는 이날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중대선언’을 함으로써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는 ‘4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아닌 ‘언어의 유희’를 택하였다. 1년 반 뒤 10월 유신으로 체육관선거를 택하여, 다시는 국민에게 “표 찍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언어의 유희' 딱 맞는 말입니다. 약속을 지키긴 지켰군요. 이런 역사를 알면서도 하여튼 고약한 군상들.....
그 때 김대중 님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에 진입하고 남았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집권함으로서 우리나라 경제 정치 사회 교육이 다 병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 IMF 도 왔고 사회악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백프로 공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