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전남 완도 답사 2019.12.25.
전남완도 답사자료
* 일 시 : 2019.12.25.(넷째 수요일) 07:00 ~ 19:00
* 해 설 : 고 명 천(회장) * 인솔 : 김 인 국(이사)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마산박물관 - (고금도고인돌공원) – 묘당도이충무공유적 –신지명사십리 -
- 완도읍 청 솔 가 든 -
- 완도타워 – 완도객사 – 장보고기념관-청해진장보고유적 - (정도리구계등)
- 마산박물관>>
== 전남 완도 ==
* * * 완도의 역사와 근황
- 삼국시대 ; 백제의 영지인 새금현에 속함
- 통일신라 ; 흥덕왕 3년(828년) 청해진 설치 / 851년 청해진 파진
- 고려시대 ; 원종12년(1271년)삼별초난때 송징장군 입도
공민왕 원년(1352년)주민 입주 허용
- 조선시대 ; 중종 17년(1522년) 가리포진 설치
고종33년(1896년) 대한제국 칙령 제13호에 의거 영암, 해남, 강진, 장흥에 속한 유인도75개 무인도135개를 통합 19면으로 완도군 설군
- 정부수립 이후 ; 1989년 4월 - 3읍 9면 2출장소
완도읍,금일읍,노화읍,군외면,신지면,고금면,약산면,청산면,소안면,금당면,보길면,생일면,모도출장소,넙도출장소
* * 완도군 고금도 지석묘군
- 전남지역 - 약 20,000여 기가 분포
- 완도지역의 지석묘는 금당도를 제외한 완도, 고금도, 신지도 등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지석묘는 총 19개군 210여기를 헤아린다.
- 고금도에만 6개군 92기가 밀집분포하고 있다.
- 완도 고금도 지석묘군은 도서지방의 최다 밀집지라는 특징이 있으며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 * 완도군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유적이다.
같은 해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이곳으로 유해를 88일간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아직도 이 터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수장은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신지명사십리(薪智鳴沙十里) ; 면 적 : 570,000㎡(길이 3,800m, 폭 150m)
남해안 최고의 하계 휴양지인 완도 명사십리해수욕장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친환경적인 해변에만 부여되는 파일럿 블루플래그 인증을 획득했다. 고운모래와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주변경관 등이 잘 어우러진 남해안 최고의 하계 휴양지로 2013년엔 전국 3대 우수해수욕장으로 선정됐고 2014년 소방방재청이 주관한 물놀이 안전명소로 전국 최고점수로 선정됐다.
* * 완도타워
완도타워의 외부에는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야간에 완도타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연출하였으며, 매일 환상적인 레이저 쇼를 볼 수 있다.
- 해발 : 132m - 전망층 높이 : 51.4m - 최고높이 76m
1층에는 특산품 전시장, 관리실, 휴게공간, 크로마키 포토존, 휴게음식점 겸 매점, 영상시설. 2층에는 이미지 벤치, 포토존, 완도의 인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망층에는 영상모니터와 전망쌍안경이 설치되어 있으며 다도해의 아름다운 전경과 영암의 월출산과 제주도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 * 완도객사(완도 군내리)
완도객사(청해관)는 이중처마를 가진 전형적인 한국의 단층 건물로 완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조선 경종 2년(1722) 가리포진 124대 첨사 이형이 창건하여 궐패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 완도읍 주도(珠島)
면적은 0.06㎢이다. 추섬이라고도 하며 완도 부두에서 150m 해상에 있는 무인도이다. 섬의 모습이 구슬과 같다 하여 주도라는 지명을 얻었으며, 원래는 완도에서 300m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간척공사로 육지가 넓혀짐에 따라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섬은 식물생태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섬 일대가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벌목이 금지되었고 섬 중앙에 서낭당이 있어 나무들이 잘 보존되어 왔다.
== 완도음식문화거리 == 완도해변공원
* * * 장보고 [張保臯 ? ~ 846]
신라의 무장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전해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張)이라는 성과 보고(保臯)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長寶高’ 혹은 ‘張寳高’로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徐州)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 집권력이 느슨해져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였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들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그러던 그가 중국에서 크게 입신하지 못하자 마침내 828년(흥덕왕 3)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진골귀족간의 대립이 심한 데다, 귀족 연립정권적인 성격을 띤 중앙정부는 거기에까지 적극적인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이에 그는 왕의 승인을 받고 지방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건설될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도 신라의 관직 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시켰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염장을 비롯한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었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 * 장보고 동상
위 치 : 완도읍 죽청리
사업량(규모) : 지하1층, 지상 3층, 동상 규모 15.5m, 좌대 높이 15.2m
부지면적 : 부대시설 : 부조, 조경, 조망시설 등
재 질 : 6.611㎡(15,670평) | 동상=청동, 좌대=화강암+청동
* * 장보고기념관
청해진의 옛 터에 장보고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 문화의식을 함양하는 전 국민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해양관광 명소를 개발하기 위함
* * 청해진 장보고유적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 성역화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청해진 발굴 = 발굴전 청해진 인근지역 주민들의 밭으로 이용되던 장도 청해진 유적지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59년 9월 17일 시라호 태풍이었다. 사라호 태풍이 1200년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청해진 유적의 흔적인 목책을 일부나마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이후 1982년에는 국립문화재 연구소 학술조사단이 장도유적과 법화사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이 한국방송공사 신춘원단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어 청해진에 대한 학계와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이키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 결과 1984년 장도유적은 사적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1년 청해진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 목책 : 장도의 남쪽과 북서쪽 해안에 약 1,000여개의 직경 40∼80cm의 목책이 남아있다.
= 맷돌 : 섬 중앙에 직경 1m, 두께 30cm의 맷돌이 하나 남아 있다. 그 모양이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하다.
= 법화사지 : 장좌리 뒤쪽 상황봉 기슭에 다섯 계단으로 여러 채의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 장좌리 당제 및 당굿
-1995년 12월 26일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기능보유자는 김병도 (당굿 농악)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 일출 무렵에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장도(將島)의 송대장군당 (宋大將軍堂)에서 지내는 동제이다.
-송대장군은 장보고의 별호로 추정되나 삼별초 항쟁 때 완도에 머물면서 항쟁운동을 벌이며 마을 사람을 보살폈던 송징(宋徵)이라는 설도 있다.
-당제의 순서는 음력 보름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 장보고의 청자
장보고가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가 청자 제작기술 보급이다.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일대에는 초기청자 가마터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렇게 대량의 도자기 생산단지를 조성할 수 있는 세력은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청해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제주도 법화사지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지정현황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13호(1971년 지정)
발굴내용 : 제주 법화사(法華寺)는 9세기 초 청해진 시기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이 사찰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긴 여정의 바닷길 항해에서 안전과 무역상인들의 정신적 휴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1990년에 제주 법화사앞 대포항(옛 당포)에서 완도 법화사와 동일한 주초석이 발견되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법화사지는 1982년 명지대학교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한 후, 1990~199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7천여 평의 유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절터와 기와편, 상감청자, 백자, 분청사기, 청동등잔, 석제 불상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 대웅전 터는 108평 규모였으며, 기단의 지대석은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인 경주 불굴사와 같은 2단 구조를하고 있었다.
- 중국 적산법화원
소 재 지 :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장보고기념관 : 장보고기념관(張保皐紀念館)은 적산법화원 내에 있으며, 2005년 개관하였다. 기념관에는 장보고대사 관련 유물과 장보고대사 기념비 동상이 있다.
- 일본 연력사
소재지 : 일본 시가현 대진시
- 일본 적산선원
소재지 : 일본 교토
- 일본 대제부 정청 터
소재지 : 일본 후쿠오카 다자이후 시
* * 정도리구계등 (명승 제3호 1972.07.24 지정)
-파도에 씻겨서 아홉 계단 모양으로 쌓인 다양한 크기의 돌들로 유명하다.
-해변의 길이는 800m, 폭 200m이며, 뒤쪽에는 40여 종의 상록수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넓은 숲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3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3년에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을 때 주민들로부터 구계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궁중에서 이 지대를 녹원지로 봉한 바 있다.
= 완도수목원
전남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으로 난대림 문화와 전통 창호 문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림박물관과 나무지방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열대 온실이 있다.
완도수목원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2011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공존상’을 수상했다.
= 해양생태전시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해양치유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관심속에 2018.8.8.일 해양생태전시관이 개관 하게 되었다. 기존 장보고기념관, 장도 등 청해진 유적지의 기존 문화·관광 시설과 연계하여 방문하는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볼거리, 체험거리 제공 및 해양생태에 대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해양치유 산업의 중요성을 제공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1
= 완도어촌민속전시관
1996년 완도장보고축제가 처음 열릴 때 부대행사의 하나로 건물을 임대하여 세계바다동식물전시관을 연 것이 시초가 되었다.
= 청해포구 드라마 세트장
통일신라시대 해로 요충지였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을 소탕함으로써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 남중국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해상 질서를 주도하며 왕성한 해상무역활동을 펼쳤던‘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일대기를 담은 특별기획드라마가 청해진의 옛 터 완도군 일원에서 제작되었다.
= 완도향교(莞島鄕校)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7호 (1984.02.29.)
소재지 ; 완도군 죽청길 94-73 (완도읍, 완도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인터넷자료 편집 >>
2019-11 전남완도 답사 일정표
* * HOME 000.0 km 000분 00:00 +00 07;00 >>
* 보성녹차휴게소 167.4 km 115분 09;00 +10 09;10 >>
=== ((고인돌 공원 - 고금면고금로936번길 47-1)) ===
* 묘당도이충무공유적 78.2 km 76분 10;30 +30 11;00 >>
* 신지명사십리 17.0 km 25분 11;30 +30 12;00 >>
=== 점심 - 청 솔 가 든 === 12;20 +40 13;00 >>
* 완도타워 1.2 km 5분 13;05 +45 13;50 >>
* 완도객사 2.1 km 6분 14;00 +30 14;30 >>
* 장보고기념관 6.6 km 12분 14;45 +20 15;05 >>
* 청해진장보고유적 1.0 km 15분 15;20 +40 16;00 >>
=== ((장도리구계등 11.6 km 18분)) ===
**마산박물관 275.6 km 185분 19;30 ===== 송년회식 >>
MEMO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