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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에 안양 대리구 철야에 가서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와 청년복음화" 주제로 1시간 정도 강의를 하였는데, 참여신자들의 반응이 좋았고,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원고로 보기를 원하는 분도 있었고, 또 준비된 원고의 내용을 다 이야기 하지 못한 면도 있어, 대략적인 강의자료 원고를 올려놓습니다.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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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준비한 목차)
주제 : 한국 천주교 창립선조들의 영성과 청년 복음화의 필요성.
I, 한국 천주교 창립 기원에 관한 고찰
1) 예수회 이론
2) 조선 학자들 자체 연구 이론.
3) 천진암 강학회 이론
4) 북경 이승훈 영세 이후 명례방 집회 이론
5) 조선교구 독립적 설립 이론.
II. 한국 천주교회를 시작한 이들에 대한 고찰.
이벽(1754년생. 1779년 강학회 당시 26세)
이승훈(24세)
정약종(20세)과 그 형제들, 약용(19세), 약전 등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분들.
* 청년 나이에 강학회 참여하고, 이미 천주학에서 천주님에 대한 신앙심이 생긴 ‘천주교로 발전함’
III, 한국 천주교 창립선조 광암 이벽을 통해본 창립선조들의 신앙 영성.
1) 선구자적 정신
2) 진리탐구 정신
3) 애민애족 정신/ 정의와 사랑의 정신
4) 겸손과 무화의 정신
5) 순교정신
IV. 오늘날 젊은이 복음화의 중요성과 대책,
오늘날 현상과 실패 원인, 그리고 향후 전망과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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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와 청년복음화
- 안양 대리구 성령 철야 기도회 강의 (2011. 6. 24 밤 10시 30분-11시 40분, 중앙성당)
I. 전 사(前史)1) - 한국 천주교 기원에 관한 여러 학설 검토.2)
1. 실질적인 천주교 학문에 대한 접촉은 1592년 임진왜란 전후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수광 등 학자들이 <천주실의> 등 천주교에 관한 책들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고 소개되기 시작했다.
2. 임진왜란과 일본 종군 신부의 입국 : 임진왜란과 함께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입국한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가 경상남도 해안 지방에 상륙하여 일본군 진영 안에서 미사를 드리고 세례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적어도 한국 땅에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예식이 거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가)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기록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일본군과 그 종군사제가 와서 한국 땅에 와서 성사를 집전하고, 버려진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해서 한국인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군신부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일본군활동 내에서 이루어진것이고 한국 사회에는 거의 영향을 끼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1610년경 교산 허균이 북경을 다녀오면서 12 단 기도서를 가지고 와서 천주교 신앙을 표현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이것도 역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다만, 허균은 <홍길동전> 등을 통하여 양반상인의 사회계급 타파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을 미리 보급시켰다고 할 수 있다.
4. 병자호란으로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5년 8년 만에 북경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와 이경상공(이벽성조의 직계 6대조)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로 활약하던 아담 샬 신부를 찾아가서 교제한 후 우정을 맺고 천주교 서적을 선물로 받고 또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7,8명이나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한국 내에서 천주교 신앙 성인(成人) 단체가 형성될 뻔 했으나, 조정내의 암투로 소현세자가 독살당하고 함께 왔던 중국 천주교 신자들이 모두 추방됨으로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5. 성호 이익의 천주학 논평
안산 지역에서 학문활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성호 이익도 천주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천주실의 발문>과 <칠극(七克)>에서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서학(西學: 천주학)에서 인생의 진리를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은 처음으로 천주교의 계명을 삶 안에서 실천하고 은둔하여 수도자 비슷한 삶을 살기도 하였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천진암 주어사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자 하였고 이어 기도와 재계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3)
II. 천진암 강학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4)
- 청년 중심의 새로운 정신 운동 시작함.
1779년(기해년) 조선왕조 정조 3년 겨울, 당대 저명한 학자들이던 권철신(당시 44세), 이벽(당시 26세), 권일신(38세), 정약전, 정약종(20세), 정약용(19세), 이승훈(24세),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주로 남인계 학자들이 학문연구를 위하여 모이게 된 천진암(天眞菴) 강학(講學)을 계기로 하여, 당시 학문의 한 분야로만 알고 취급해 오던 천학(天學) 즉, 서양 지식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 ‘천주교’라는 한 종교의 신앙실천 수준으로까지 도달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이는 지식에서 신앙으로, 학문에서 종교로 나아간 가장 정상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천진암 강학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드시 유교 사상에 관한 것만도 아니었고, 사회제도 개혁이나 중국문학도 없지 않았었다. 다만 천진암에서 개회되고 있던 강학의 주제목은 유불선(儒佛仙)을 위시한 당시 한국의 종교사상과, <天主實義 천주실의>, <職方外紀 직방외기>. <七克 칠극> 등 한국 지성인들 사이에 소개되어 있던 서양지식,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天學初函 천학초함>에 실려있는 천학지식을 비교하고 연구, 검토하는 것이었는데, 천학을 단순히 학문의 대상으로만 다루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천학의 내용이 종교적 교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학자들의 모임, 즉 그 강학회는 종교적 신앙의 출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광암(曠菴) 이벽(李檗) 선생은 천진암 강학 이전에 이미 천주교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까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북경에 보낸 이승훈 선생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천진암 강학회의 배경)
이 천진암 강학이 개최되던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처음에 강학을 주선한 사람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등 젊은 학자들이었으나 이들이 대선배 학자이며 사부격인 권철신(權哲身) 학자를 주제 발표자, 혹은 강학 지도자로 모시고 개최하게 됨으로써 이 강학에서는 주로 유교 사상에 대한 연구, 검토, 비판을 하게 되었으며, 광암 이벽 선생이 이 강학회에 도중 참여하면서부터 강학의 내용과 성격과 방향이 대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강학을 계기로 천주교를 알게 된 학자들은 이를 즉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니, <성교요지>,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등을 지어 부르고,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기 시작하였다. 주일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요일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또 양력도 모르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초이렛날, 열나흗날, 스무하룻 날, 스무여드레 날을 주일로 정하여 엄수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이 깨닫게 된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양반. 상인 사회계급 타파운동과 남녀평등 운동, 근로자 정기적인 휴무일 제정운동 등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비종교적인 대사회 개혁운동이 부수적으로 성과를 거두며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크게 민중들 속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가 무서운 박해를 받게 되는 이유 역시 천주교 교리 자체 때문에 보다는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신앙생활 실천이 당시 사회제도개혁을 위한 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 신앙의 기원을 이룬 천진암 강학회의 년도와 정확한 장소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크게 1777년 (정유년)과 1779년 (기해년)으로 보는 두 학설이 유력하고, 장소는 천진암을 위주로 보는 천진암 성지쪽 학설과 주어사를 중심으로보는 일반 학계학설이 유력하다. 수원교구는 주로 변기영신부의 학설을 따라 1779년 천진암 설에 근거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III. 천진암 강학회 이후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시작.
* 이승훈의 세례와 최초의 신앙공동체 형성.
한국 천주교회는 마침내 1784년 이벽의 권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1784년 기원설)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가는 길에 중국 북경에 들어가 1784년 봄에 파리 외방 선교회의 그라몽 신부에세 북당 천주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공식적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되었고, 이승훈은 귀국후 곧 바로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권철신 등 여러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고 곧 신앙인의 공동체 모임을 주관하고 지속시켜나갔다. 아울러 계급을 타파하면서 중인 계급에도 전교하여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지황 등을 입교시켰고 양반과 중인 상민을 아우르는 보기드문 자발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세례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공동체가 형성이 된 것을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1784년 수표동에서 양반 서민층에의 전도활동.
이승훈 선생께서 영세하고 돌아온 후, 한국 천주교회는 천진암 계곡에서 5년여의 연구 실천 시기를 끝내고 이벽 성조의 집이 있는 서울 수표동으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그동안 남자 양반 학자들 중심의 한문기도문 사용위주의 교회가 여기 와서는 서민층에로도 발전하였으니, 당신 언문(諺文)이라고 부르던 국문을 주로 사용하고, 한문을 모르던 일반 서민들 특히 중인, 상인들의 세계까지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니,k 이렇게 되기까지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부인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즉, 이벽의 부인인 유한당 권씨(병조판서 권암의 딸), 이승훈의 부인 나주 정씨(정약용의 누이), 직암 권일신 사우 거사의 부인 광주 안씨(순암 안정복의 딸) 등.
* 1785 년 명례방 집회와 을사박해 및 창립 성조의 순교.
서울 수표동에 있던 이벽성조의 양반집에서는 상민 신자들의 출입과 집회가 부자유스러워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으로 집회장소를 옮기게 되었으니, 이벽 성조의 제자이고 중인계급의 한의원이며 통역관이었던 김범우 선생의 병원에서는 남녀유별, 장유유서, 양반상인 계급차별 등의 제약을 덜 받게 되었다. 즉, 천진암에서 출발한 양반 남자들만의 천주교회가 수표동에 와서 남녀 양반, 서민신자들의 증가로 어려움을 겪으며 구분되었다가 명례방에서 통합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렇게 힘차게 시작된 천주교회의 활동은 곧 관청의 박해를 받게 되었으니, 최초로 박해가 이루어진 사건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1785년) 즉 지금의 명동 대성당 터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에서 신앙의 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판서가 보낸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집주인인 중인 계급의 김범우 선생은 구속되어 심한 형벌을 받고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단장리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2년후 세상을 떠났으며, 이승훈, 권일신 이벽, 정약용, 정약종 등은 양반들이므로 당시 풍속에 따라 관청에서 처벌하지 않고, 각각 그 양반 문중에서 처벌하게 되었으며, 특히 직암 권일신은 양반 체면을 무릅쓰고 추조판서에게 나아가서 자신들도 같은 벌로 처벌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의 문중의 박해로 많은 양반들과 유력한 신자들이 부득이하게 마지못해 형식적인 배교 또는 신앙생활의 중단을 표현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주역인 이벽 선조 또한 희생양이 되고 만다.
즉 1785년 한국 최초의 박해, 즉 을사박해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했던 세자 요한 광암 이벽은 그 당시 나라느이 권력과 사회풍습에서 오는 강력한 탄압과 한층 더 가중된 문중 박해로 인하여 집안에 감금되고, 아버지가 목을 매달기까지 하면서 자살로 위협하는 가장 무섭고 처절한 박해 중에 식음을 전폐하고 의복을 갈아 입지 아니하며 철야 기도와 묵상으로 신앙을 증거하다가 14일만에 온 몸이 탈진하여 만 31세의 나이로 장렬하고 거룩하게 순교하였다.(음력 1785년 6월 14일 밤) 이벽 선조의 죽음를 놓고, 순교에 가까운 죽음이냐, 아니면 배교자의 고통에서 오는 죽음이냐, 아니면 집안의 갈등에서 오는 피살이냐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신앙의 이유 때문에 감금되었고,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집안 어른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직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죽음을 감수한 점 등을 이해할 때, 그리고 당시 정황으로 이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길도 참된 신앙인으로서 걸어야 할 방도가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분의 죽음을 ‘순교자적 죽음’으로 보는데 많은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고, (이성배, 김옥희, 변기영 등) 한국천주교회의 첫 번째 희생제물로 본다.
* 1787년 김범우 선조의 순교.
김범우 토마스 선조는 오늘의 서울 명동 주교좌 대성당이 자리잡은 명례방 임시 성당의 집주인으로 위의 최초 박해로 인하여 관헌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매를 맞고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리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맞은 매의 장독으로 인하여 귀양지에서 1787년 음력 7월 16일에 순교하였으니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희생제물이 되었다.
* 1788년 임시 준 성직자단 활동과 중지.
교회 창립의 주역인 이벽 선조를 먼저 떠나 보낸 후에도 초기 창립 선조들은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 전파와 성사은총 전달을 위한 열성에 불탄 나머지 교회의 법규를 충분히 모르고, 자발적으로 임시 준성직자단(準聖職者團)을 구성하여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주면서 여러 가지 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연구를 하면서 성직자의 직분과 선발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면서 즉시 1788년말경 북경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문의하였고, 북경주교의 가르침을 듣고는 즉시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성무집행을 중지하며 겸손되이 순명하였다. 이후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약 반세기 만에 마침내 김대건 최양업 사제를 배출할 수 있었다.
* 1791년 신해박해
부모 제사에 관한 교회의 금령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양반들에게는 목숨과 바꿀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북경천주교회의 주교의 명령으로 이 가르침을 기꺼이 따랐고, 1791년에 부모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으로 고발된 윤지충, 권상연은 칼아래 순교를 하게 괴었고, 국내 각 지방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여 전국 포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학자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직암 권일신도 감옥에서 매를 너무 맞아 귀양길 첫날 주막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세 번째 희생제물이었다.
* 1795년 을묘박해.
당시 성직자 없는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최대의 소원으로 여기고 북경 천주교회에 수차 애원하여, 마침내 중국인 야고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였다. 북경까지 3천리를 걸어서 왕래함은 빈번히 목숨을 내걸고, 기도와 신뢰 속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타국인 사제의 입국이 알려져 불가피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많은 교우들과 사제의 생명을 구하고자 1795년 위대한 순교자 마티아 최인길은 자신을 사제의 모습으로 꾸며 체포되었으나, 끝내 탄로가 나서, 함께 사제영입운동을 하던 윤유일 아오로, 사바 지황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 숨을 거두기까지 사제의 숨은 곳을 발설하지 않고, 천주를 부르며 함께 순교함으로써 이후 5년간이나 더 주문모 사제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며 극비리에 전교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5)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 당시 4,000명 신자이었던 것이 1800년경에는 거의 1만명에 달하는 신자의 규모가 되었다.
* 1801년 신유박해.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주역들이 한결같이 목숨을 바치고 봉헌된 대박해였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진리 탐구 강학회를 개최하였던 원로 대학자 암브로시오 녹암 권철신, 평신도 사도직회를 조직하여 서울 시내에 포교활동을 펼치며 , 호교론책 <주교요지>를 저술한 아우구스티노 선암 정약종, 북경천주교회에 구원요청 편지 -백서(帛書)를 쓰고 나서 잡히어 신앙을 위하여 죽은 후에도 온 몸이 여섯으로 찢기어 죽은 알렉산델 황사영 등은 모두 칼에 잘리거나 감옥에서 매를 맞고 장열히 순교하였고, 초대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이 박해도 모두 전멸(全滅)하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다산 정약용은 순교를 면하고 18년 강진 귀양을 떠나서 이 당시에 이루어진 모든 사건들은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IV. 정하상 유진길의 교회 재건운동과 1831년 조선교구의 설립
1. 한국 교회 제 2 세대의 교회 재건 운동 개요
박해를 피해 뿔뿔히 흩어졌던 신잗르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들 중에는 정하상, 신태보 등이 있었고, 그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 조신철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고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에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의 파견과 그 보장을 애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하여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조선교회는 1792년 이래 북경주교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교우들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 외방 선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따. 때마침 파리 외방 전교회원인 브뤼기에르 소 신부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조선 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 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 조선을 압록강 너머에 바라다 보면서 중국 땅 팔가자에서 병사하였다. 1836년에는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가 입국하였고, 모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조선의 신학생 후보자를 물색하여 세명의 소년을 찾아서 선발하고 이에 대한 교육과 유학준비를 당시 조선교회의 총회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정하상과 함께 하였다. 따라서 정하상은 예비신학생이었던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등에게는 큰 은인이며 스승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하상은 이들은 의주까지 동해아여 중국 유학길을 전송하였다. 이후 조선교구 제 2 대 교구장 앵베르 범주교가 입국하였고, 한국 교회는 명실공히, 주교, 사제 평신도로 구성된 완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데에는 아버지 정약종 순교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불철주야 교회재건에 앞장선 정하상과 그 가족의 노력을 잊을 수 없을 것이고, 함께 동반자의 길을 걸었던 중인이며 통역관이었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상민이었던 조신철 가를로와 그 외 동요 신자들이 노력과 희생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2. 정하상의 생애 약전
정하상(1795∼1839). 성인. 축일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柳∼)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峴,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부락]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으로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趙曾伊) 집에 의지하며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어려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지며 종횡으로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 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 후“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
(Umpierres)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Capellari)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 성직자이던 브르기에르(Brugiere) 주교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1931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 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Maubant)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교회로의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 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속성 신학교 교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한 앵베를 주교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 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 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가톨릭 대사전, 정하상” 참조)
V. 조선 천주교회 순교사 보고서 (김대건 신부 씀)
-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6)
조선은 처음부터 잡다한 여러 가지 미신과 우스꽝스런 토속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조상의 신령. 중국 철학인 유교, 석가의 불교, 또 성주(가족을 지키는 신), 터주(집터를 지키는 신), 삼신(아기를 점지한다는 삼신령), 제석(帝釋:집안의 안녕을 맡아보는 신), 구눙(무당의 열두 거리 굿에서 아홉째로 부르는 귀신), 만명(萬明:무당이 김유신의 어머니를 신격화하여 위하는 신), 성황당(城隍堂:마을의 수호신), 영등(靈登:영등날 세상에 내려와서 농촌의 실정을 조사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할머니), 태백(太白:선인과 악인을 상벌하는 가신, 즉 가정의 신), 관우(關羽: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전쟁의 신,) 직성(直城:사람의 행년을 따라 그의 운명을 맡은 별), 미륵(彌勒:돌부처의 범칭)등을 주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요한 종파로는 불교의 여러 종파, 무당, 하늘의 구지학, 태우긴, 소우긴 등입니다. 처음부터 이처럼 가소로운 오류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양심이 올바른 몇 사람이 자연적이고 이성적 빛으로 참 하느님을 인식하고 종교를 통하여 하느님을 섬겼습니다.7)
이즈음에 북경에서는 예수회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고 학자의 칭호를 얻은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북경을 드나들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조선에 천주교 사상이 전파되었고 천주교 서적이 전해졌습니다. 같은 시기에 홍유한(洪儒漢)이라는 철학자는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적 사물의 이치로 스스로 깨닫고 가톨릭 교회의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였으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주교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었고 교회의 법규도 몰라서 단지 매달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옛 전통을 따라 일곱째 날을 다른 날보다는 공경할 만한 날이라고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성덕을 찬양받으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결국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李蘗)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종교, 즉 천주교가 성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 5명의 동지사 사절단이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제3인자인 서장관(書狀官)의 아들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이벽을 찾아가서 자기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벽은 좋은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도착하거든 예수회원이라는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서 천주교라는 종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자 북경의 주교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북경을 떠나올 때 가톨릭 교회의 서적과 성물을 조선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1784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관인들이 가톨릭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오류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이존창(李存昌), 이단원(李端源), 최창현(崔昌賢), 유항검(柳恒儉)등이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사제를 선출하고 세례 ․ 견진 ․ 고해 등 온갖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모여 거창하게 미사를 드렸습니다.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주교와 사제들은 조선 전체를 천주교로 전향시키려 진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게 되자 즉시 미사거행과 성사집전을 중지하고 북경 주교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들의 포교 방법과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을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북경 주교님은 앞으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행하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고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모두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종교 활동은 별로 오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된 지 7년 후, 즉 1791년에 조선왕국의 조정 대신 중 벽파가 시파를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벽파(僻派)의 반대파를 시파(時派)라 불렀는데 시파에 의하여 천주교가 조선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시파에 대한 원한을 천주교인에게 쏟았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라는 이름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왕의 허가를 얻어 박해하였습니다. 왕은 마지못해 억지로 허가하였습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신해박해였습니다.8) 이 박해에서 탁원한 학자인 윤지충(尹持忠)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용맹히 투쟁하다가 가톨릭교의 신앙을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이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1795년에 이르러(을묘)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그해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신자들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동안 신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던 왕(정조)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의 최고 권력이 김 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노론이라고도 불리던 벽파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남인의 세력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제 남인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벽파 사람들은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있었고 남인들은 대개가 시파로서 천주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습니다. 남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이제 나라의 실권이 남인에서 노론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리하여 노론의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는 벽파 노론 대신들의 권고대로 주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여 조선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말살하려고 광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형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8년만에 즉 1801년에 일어난 세 번째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로 수많은 고관과 양반, 또 왕의 제수 등 왕족의 신자 부인들까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도 김여삼(金汝三)이라는 마귀 같은 신자의 배반으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박해자 김 대왕대비가 죽자 몇 년 동안 신자들에게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816년 신자들에 대한 대박해가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 네 번째 박해에서 조선 신자들 사이에 유명한 김군미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의 신앙 때문에 자진하여 잡혔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46일 동안 옥중에서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9) 왕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黃嗣永)알렉산델이라는 고명한 철학자가 이 땅의 천주교가 너무나도 억압당하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보다 못해, 교묘하게 써서 종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얻기 위하여 군함을 보내주도록 교황청에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의주(義州)에서 포졸들에게 들켜 압수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뜯어보니 흰 종이 외에는 아무 글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가 교묘하게 씌어진 것임을 알아차린 자들이 읽는 방법을 알아내어 모든 내용을 판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전하려던 사람도 잡혀 수도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알렉산델 황사영은 단지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작성한 이 편지로 인하여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찢기었습니다.
그 후 1819년, 1828년, 1833년, 1836년에도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신앙을 위하여 극복될 수 없는 항구심으로 피를 흘렸습니다. 특히 조선의 두 번째 관할 지역인 충청도에서는 여러 차례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촌이 파멸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신자들은 33년 동안 목자 없이 지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의 보호로 신자수는 줄지 않고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마침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조선에 목자를 하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1831년 중국인 유 파치피코(劉方劑)신부가 입국하였다가 1835년 중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윽고 1834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님이 조선에 들어오고 1835년에는 샤스탕 신부님이 그리고 1836년에는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이 입국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외교인들의 전향이 쉬울 것같이 보였습니다. 신자수고 많이 늘어나고 신앙의 열성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가 도입된 지 55년째인 1839년에 김여삼 요한이라는 새 신자가 돈에 눈이 어두워 먼저 일반 신자들 그리고 다음에는 신부님들까지 밀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 다섯 번째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대왕대비는 이러한 박해를 말리려 하였으나 당시 세력을 뻗기 시작한 벽파 대신들, 특히 영의정 조만영(趙萬永)의 뜻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해(1939년 기해박해)에서 조선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과 2백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조선 교회의 순교자 수는 8백 명 또는 그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839년 이후 오늘까지 5년 동안은 신자들이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이 울고 탄식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VI. 세례자 요한을 통해 본 한국의 선지자 광암 이벽의 영성. 10)
1. 법대로 살면서, 기도하는 정신, 항구하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아나뷤(anawim) 정신.
세례자 요한의 부모이신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자녀가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며, 주님의 율법을 봉행하는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이다. 의롭고 착하게 살아온 이 부부에게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마지막에 커다란 축복을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한 때 일이 잘 안 풀린다거나,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 때 포기하거나 쉽게 불평하지 말고, 항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하겠다.
구약의 가난한 사제였던 즈가리야는 대표적인 구약의 가난한 백성 ‘아나뷤’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나뷤’은 세속적으로 부와 권력이 없고 달리 힘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갔던 많은 구약의 백성들을 말한다. 이를 일컬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벽 성조와의 연관성)
조선 후기 사회는 많은 기록에서 나타나고 역사 사회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백성들이 매우 궁핍한 형편이었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사회였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당파싸움과 가문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의식있는 사람들의 등용을 막고 꺼렸다. 이벽은 자신의 형이 당쟁의 과정에서 장살(丈殺)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보거나 관료로 출세할 마음을 접었다. 오로지 바른 도리로서 희망이 없는 당시 사회에 빛을 비출것만을 희구하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접한 서학(西學) 즉 천주학(天主學)의 도리는 그에게는 참으로 큰 빛이었고, 자신의 모든 삶을 걸만한 진리의 학문이었다. 이벽은 이 학문을 공부하면서 참으로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벽에게는 하느님(天主님)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당시 도탄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종교이며 진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적(先驅者的) 정신
- 마르꼬 1장,1-8절. 마태 3장,1-12절. 루가 3장,1-20절.
요한은 온전히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주님이 오실 것을 백성들에게 예고하고 준비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백성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려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끌어주었다.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점은 단지 귀중한 몫을 예수님께 양보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회개시키고 준비시키고, 각성시킴으로써 얼마 후에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데 있다. 이것이 ‘주의 길을 넓히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그의 사명(使命) 또는 소명(召命)에 충실히 응답한 내용인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의 권력자인 왕(王)에게까지 그 비리를 정확하고 엄정하게 고발함으로써 사회전체에 대한 도덕적 각성을 외치고,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각성(覺醒)하고 회개(悔改)하여야 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벽성조와의 연관성)
이벽 선생이 천주학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우리 전통안에 내려오던 유학(儒學)으로 수양이 되어 있었고 기본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전통 안에 내려온 유학 특히 성리학(性理學)은 가장 올바른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도록 선비들을 이끌었다. 그러한 진리 탐구와 한번 체득한 진리를 끝까지 옹호하고 지키려는 정신이 이른바 ‘선비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리학을 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고 수호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올바른 학문을 한 사람들은 이 진리 탐구 정신과 진리 수호정신이 충만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이벽은 유학 특히 성리학의 올바르고 좋은 점들을 잘 공부하여 익히었지만,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와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구원과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문제는 성리학만을 가지고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나아가 백성 전체와 사회전체의 구원 차원에서는 기존의 학문으로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가 온전히 구원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성리학의 진리에서 나아가 명백하고 확실한 천주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신분차별을 없애며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하느님 앞에 서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생각이고 사고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커다란 혁명(革命)과도 같은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처음 부르짖고,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간 이벽선조와 그의 동료들은 당연히 기존 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자신들의 진리를 증거해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벽선조와 같은 선각자적인 혜안(慧眼)과 안목을 가지고,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 선각자가 있기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발전해올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도 그러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의 덕분으로 우리가 좀 더 편안한 신앙생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벽 선조와 동료학자들의 선각자적인 수행은 그리스도의 길을 먼저 닦고 그 길을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의 삶과 정신을 우리 민족과 교회 안에서 가장 훌륭하게 보여 준 삶이라 하겠다.
3. 온전히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겸손과 무화(無化)의 정신.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점은 그가 인기 절정의 자리에 가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권위와 힘을 느끼고 구세주로 모시려할 때, 자신의 비천함과 무가치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오실 구세주 그리스도와 자신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간혹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깨닫고 우리의 봉사와 희생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만한 자격이 없다.”. .마르 1, 7; 마태 3,11.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 . .요한 3, 22-30.
제자들을 기꺼이 그분에게 양도하고 인도함. . . 요한 1, 35-42.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는 그의 <영적 담화>에서 참된 겸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참된 겸손은 다음의 다섯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나 자신의 비천함과 무지함 무가치함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비천함과 무지함을 아는 것에서 나아가 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무가치함과 비천함을 알아보았을 때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비난과 멸시를 인정할 뿐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무엇을 꾸미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겸손의 최후 단계는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이를 인정하고, 다른 이로부터 멸시당하는 것을 인정하고 즐거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통하여 그것을 원하고 받으려고 찾아 나서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것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11)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영적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가장 깊은 겸손의 단계에 도달해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비우고 오직 하느님의 것을 채우고 그분의 뜻을 실행한 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비난과 멸시 그리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 그리고 그분이 이루시려고 하는 의지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벽 성조와의 연관성)
이벽 성조는 천주학을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오직 한 방향으로 한 가지의 삶을 살았으니, 그것은 진리를 찾고 진리를 위해 온전히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 진리가 처음에는 유학 안 있는 것으로 알았으나, 천주학을 알고부터는 천주에 관한 가르침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있고 거룩한 성교회(聖敎會) 안에 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어떤 흔들림 없이 이 가르침을 신봉하고 이를 봉행(奉行)하며 이웃에 선교(宣敎)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 함이었고, 나의 사욕(邪慾)과 개인적인 욕심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天主)의 뜻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 안에서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욕심(선교를 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까지도) 포기하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벽선조는 생명까지 포기하면서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한 거의 완벽한 겸손의 길을 가신 분이라고 할 것이다.
4.주님이 원하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것을 말하며 올바른 뜻을 펴는 정의와 사랑의 정신
세례자 요한이 하신 일을 보면, 결코 사람들에게 잘보이거나 호감을 살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 마태 3,7-10, 루가 3,7-14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에 대한 설교), 루가 3,18-19. 마르꼬 6,17-18.( 헤로데의 비리에 대한 고발 ) 세례의 은혜를 보고 몰려드는 군중에게 그는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여 ‘독사의 족속들’이라는 가장 심한 말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의 위선과 부정의 골이 깊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마침내 회개하지 않았고,(루가 7,30) 세례자 요한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루가 7, 30-33), 마침내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았고(루가 7,34)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지식 나아가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은 그 시대 상황에서 주님께서 외치기를 바라는, 그리고 선포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음성을 ‘사자의 포효’(獅子吼)처럼 용감히 외쳤던 것이다.
(이벽 성조와의 연관성)
이벽성조는 천주교의 깨달음을 얻은 후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한 겨울에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의식이 있는 많은 학자들을 공감을 얻어냈으며, 차후에는 조선의 대학자라고 추앙받는 이가환과의 대토론도 승리로 이끌어 대학자의 감복(感服)을 받아내었다. 이벽은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이 논리적으로 설파를 해나갔으며, 문중의 반대에도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마침내 아버지 이부만 공의 반대에 부딪혀 아버지가 목을 매어 죽으려 하는 상황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더 이상의 포교활동을 삼가게 되었다. 그러나 ‘배교한다’는 문장을 쓰도록 요구하는 아버지와 문중의요구에는 ‘한분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는 제 1 계명을 결코 져버리지 않고 끝까지 배교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이었다. 올바른 진리를 깨닫고 이를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밝히 설파한 이벽의 정신과 그 삶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여 구세주 맞이할 것을 준비시킨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국의 세례자 요한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 순교정신 . . 마침내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침.
세례자 요한의 특징은 이러한 모든 것을 ‘말’(word)로써만 선포하고 떠든 것이 아니고, 실제의 모든 삶(life)으로 행하였다는데 있다.(마태 3, 4 ; 마르 3,6 ) 그의 삶은 하루 하루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이루어진 순교자적 삶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순교자적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1) 녹색 순교. . .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자신의 뜻과 의지를 포기해가는 삶. 일상의 생활 안에서 보이지 않게 순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백색순교. . . 하느님과의 허원을 지키며 정결의 삶을 살아가는 것. 특별히 수도자와 성직자의 정결서원을 행하고 이를 순교자적 희생으로 봉헌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3) 적색순교. . . 실제 주님의 복음의 뜻을 행하면서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되고 박해를 받게 되며 마침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희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이러한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의 생명까지 봉헌하는 것을 적색순교라 한다.
(이벽과의 연관성)
전해내려 오는 전승에 의하면 이벽 선조는 기골이 장대하며 아주 건장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뷜리의 보고서」와 천진암 성지에서 발행한 「이벽성조의 약전」을 보면 ‘이벽성조는 키가 8 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었고,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이벽의 집안이 무관의 전통이 있는 집안이었고 그 형제들이 무관으로 벼슬을 한 것을 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건장한 이벽 선조가 왜 33살의 나이로 죽어야만 했을까. 저절로 홀로 병들어 죽었던가. 아니면 가난으로 굶어죽었는가. 우리는 위의 약전에서 그것은 집안과 문중의 박해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신앙의 행위가 부모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부친의 뜻에 따라 감금된 상태를 당하였으며, 아버지가 엄하게 집안사람들에게 명하여 아들이 염병에 걸렸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집 밖에 새끼줄로 금줄(禁線)을 만들어 외부인과 일체의 접촉을 못하게 하자, 이벽선조는 자신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생각하고 깊은 고뇌와 명상에 들어갔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와중에서 실제로 큰 병을 얻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여 기진하여 쓰러졌을 수도 있고, 혹 이벽으로 인하여 집안이 패가(敗家)되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문중 사람에 의하여 독살되었을 수도 있으나 어떤 원인이든 이벽선조는 집안과 문중의 박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벽 선조가 신앙의 이유로서, 신앙을 보존하면서, 반대자들의 극심한 박해에 부딪혀 순교(殉敎)의 죽음을 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12)
소 결
이상의 글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보다 한 걸음 앞서 와서 구약의 사상을 종합하며 당시대의 백성들에게 올바른 회심(悔心)을 촉구하며 구세주를 준비시켰던 세례자요한의 중요한 삶과 영성을 살펴보았다. 한편 우리는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을 알렸던 이벽 선조의 삶을 함께 조명해보면서, 2000년 전 구세주를 준비시켰던 세례자 요한이 조선 천주교회 안에서는 아니 이 대한민국 5000년 역사 안에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광암 이벽 선조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새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VII.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의 뿌리에서 살펴본 오늘날 신자들의 사명과 기도 지향.
1. 민족의 복음화와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 애국 애족 정신.
천진암에서 시작된 조선의 선각자들의 궁극목표는 바로 이 나라를 구원하고 이 민족 이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 땅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지향에 일치하여 반드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나가야 하겠다.
2. 진리 탐구 정신. . . 천진암 강학회(1779년 년간)에서부터 올바른 진리를 찾아 나서는 선각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은 항상 가장 숭고하고 바른 진리를 찾아 나서, 기어코 그 진리의 정수를 밝히는 모습을 보여왔다. 불교의 원효와 의상, 유교의 퇴계와 율곡의 학문과 구도의 정신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던 것이 이제 천주교의 진리를 찾아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 것이고, 한번 찾은 진리를 더욱 궁구(窮究)해나가며 이를 전파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복음 전파와 선교정신. . . 천주교의 진리가 올바른 진리인 것은 1784년 이승훈 영세이후 서울 명례방 집회 이후 학자들이 본격적이 모임을 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은 단지 학자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중인들, 평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갔고, 1787년 가성직제도의 시행이후에는 급속도로 사회의 여러 계층에게 퍼져나갔다. 양반상민의 구별이 엄격히 시행되던 사회에서 하느님 앞에 동등한 자녀임을 가르치고, 여자와 남자의 신분상 구별을 하지않으며 과부와 여러 소외계층을 귀하게 여기는 천주교의 문화는 조선사회의 대혁명과도 같은 변화을 예고하였으며,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4. 교회 공동체 정신. . .우리 선조들은 복음을 알기시작 한 초기부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항상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생활화하고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천진암 강학회는 학문 연구 공동체 였다면, 명례방 공동체는 신앙을 수련하는 공동체였고, 주문모 신부 입국 후에 정약종을 회장으로 이루어진 명도회는 자체적인 교리 강습 연구 공동체 였다. 그 외에 동정녀들의 모임이 윤점혜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박해를 받으면서 수많은 교우촌 공동체가 산간벽지에 형성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며,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교우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을 지키고 전해온 조상의 인내와 노고를 우리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겠다.
5. 순교정신. . .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비록 글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한번 가르침을 받으면 이를 잊지 않고 신앙을 수호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2011. 6. 24. 안양 대리구 철야 성령기도회 강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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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뿌리를 찾아야 함의 중요성을 일께워 주시고 명 강의를 해주신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 ~~~